18세기 서양화



영국의 화가, 판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는 초상화로 유명한데, 사회적 악습을 풍자하기 위해 무대를 재현한 듯한 일련의 일화적인 그림을 고안하여 유향시켰다.
그는 멜로드라마처럼 장면을 과장하여 악덕을 비난했다.
각 시리즈는 판화로 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고 이렇게 제작된 판화는 널리 판매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해적판이 상당수 제작되자 1735년에는 저작권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호가스는 작품을 통해 설교가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그는 부도덕만큼이나 공론과 가식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양식화된 경향에 반대했으며 영국인 고유의 감각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프랑스 로코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호가스는 1753년에 발표한 논문 『미의 분석 The Analysis of Beauty』에서 실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관점이 미술품 감정가와 애호가의 이론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카데미즘과 18세기 예술가의 심미안을 비판했고 회화적 아름다움을 얻는 구체적인 열쇠로서 ‘뱁처럼 정확한 곡선’을 주장했다.
그의 작업은 삼차원 형태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 미학의 경향을 미리 조여주는 것이었다.


호가스와 한 쌍으로 언급되는 화가는 영국 왕립미술원 초대 회장을 지낸 조수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1723~92)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였고 영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그랜드 매너Grand Manner에 의한 초상화 전통을 확립했으며, 영국의 18세기 미적 전망을 모든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말하고 누구보다도 영국 예술가의 지위를 위엄있는 새로운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랜드 매너는 그가 왕립미술원에서 세번째(1770)와 네번째(1771) 강연에서 주장한 장엄하고 화려한 역사화 양식으로 대양식으로 번역된다.
레이놀즈는 이 강연에서 이탈리아어의 구스토 그란데gusto grande, 프랑스어의 보 이데알beau ideal, 영어의 위대한 양식great style, 천부적인 재능genius, 취향taste이라는 말은 단지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양식의 탁월함은 로마 미술, 피렌체파, 볼로냐화파에서 볼 수 있다고 했으며, 푸생과 브룅과 같은 프랑스 대가를 이 양식의 대표자로 간주했다.
레이놀즈는 이 양식의 특성이 베네치아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는 역사화에서도 명백히 구분되는 두 양식, 즉 장엄하고 화려하거나 또는 장식적인 양식 때문이었다.


그의 이론은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느낌, 감정, 정서를 강조하는 초기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이상에 대한 교리를 나타낸 것이었다.
정통 신고전주의 전통에서 레이놀즈는 심미안을 감수성과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서 ‘옳고 그름을 판변하는 힘’으로 인식했으며, 올바른 심미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성과 철학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심미안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그랜드 매너 이론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예술의 전체적인 미와 숭고함은 개개의 형태, 지방의 관습, 특이성 또는 다양한 세부묘사 등의 우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의 한 축은 고전적 신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리적 개선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고상하고 숭고한 주제를 열망해야 하며 너절하고 비열한 것은 피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는 네덜란드파를 경시했는데, 그들의 사실주의가 세부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저속하고 진부한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이상에 대한 태도를 선호했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적인 태도에 대하여 레이놀즈는 거장이 확립한 예술 규범에 순종할 것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윌리엄 블레이크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영국의 화가, 철학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는 고딕 미술을 가까이 접한 후 선적 구성과 형식이 갖추어진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1778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교장이던 레이놀즈를 몹시 싫어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를 혐오하여 채색 판화, 삽화, 템페라화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다.
그는 가시적인 감각 세계는 가공의 피상에 지나지 않고 그 배후에 정신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술가가 정신적 활동에 종사해야 하고 예술가의 본질은 진실을 정확히 그리는 데 있으며 그것은 환상적인 상상력이 되어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 정신적인 활동은 시각적 체험 또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정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평범한 시각적 체험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시각적 상징주의를 창조한다는 불가능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그는 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딱딱한 느낌의 직선을 특징으로 하는 선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영국의 아르 누보의 전조로 간주되었다.


정물화와 풍속화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1699~1779)은 18세기에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에 맞서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대표한다.
그는 작은 캔버스에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사물을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네덜란드의 실내화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세기의 이름없는 네더란드 화가들처럼 그는 반사광선의 처리를 연구했으며, 따뜻하고 밝은색의 바탕칠과 인물의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적 방법을 베르메르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물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연속해서 칠하고 그 위에 불투명한 색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미묘한 색조를 나타나게 하는 스컴블scumble 효과를 주는 등 매우 깊이 있는 색조를 만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취가 부족한 네덜란드 회화의 사실주의에 표면적 사실주의 또는 세부적인 유사함과는 구별되는 프랑스적 특징인 간결함과 직접성을 더했다.
그의 풍속화는 감수성이나 허식 없이 눈에 비치는 모습대로의 솔직한 시각을 보여준다.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한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멩스의 미학에 공감했는데,
독일인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ffael Mengs(1728~79)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기 희생, 의무에 대한 헌신, 정직,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곧 신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비평가, 미술품감정가, 대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다비드는 왕립 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사회적·예술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는 나폴레옹의 공적을 칭송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초기에 사용한 차가운 색채와 엄격한 구도를 버리고 낭만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웅장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계속 반감을 품고 있었다.


스페인 화가, 동판화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1746~1828)는 초기에 다소 경직된 멩스의 양식을 따랐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부터 점차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이염으로 1794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예술 활동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면서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더욱 몰두했으며, 기분 나쁜 환성적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1793~98년에 제작한 에칭과 워시드로잉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판화 애쿼틴트aquatint를 병용한 80점(후에 3점을 추가)을 묶어 1999년에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라는 동판화집을 발행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법에서는 렘브란트의 영향이 보이지만 작품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묵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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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화



영국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는 밝은 색채와 대기 표현에 대한 관심 외에도 극적인 주제와 움직임에 대한 낭만주의 경향이 있었다.
터너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했는데, 그의 접근 태도는 레이놀즈처럼 분석이지 않고 직관적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그들의 가치와 목표로 한 것들을 습득했다.
그는 전유럽 회화를 통합한 동시에 자신의 시각적·내면적 체험을 통합하여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공간의 대기 표현과 색채의 영롱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는데 모네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위대한 독창성은 단순히 인상주의를 예견하여 고무시켰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빛에 의한 현상의 추상적 구성에서 인상파보다 앞서 나갔으며 그가 추상적 힘으로 파악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어떤 낭만주의 화가들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영국 최고의 낭만주의자이자 색채화가였다.
1830년대에는 좀더 추상적인 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러스킨은 1843년에 출간한 『근대 화가론 Modern Painters』에서 터너를 옹호했다.


터너와 더불어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은
초기 몇 년 동안은 생생하지만 풍부한 색채 또는 극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강한 인상을 주는 픽처레스크icturesque의 전통과 즐거움을 위해 그린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1727~88)의 기법으로 작업하다가
그 후 풍경을 좀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시도로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켰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법에 의해 목초지, 나무,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움직임을 묘사함으로써 시골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연유한 그 자신의 감동적인 기쁨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컨스터블은 말했다.

“물방앗간에서 아련히 들리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된 썩은 널빤지, 흙투성이의 나무기둥, 벽돌로 쌓아 만든 벽, 이런 것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러한 풍경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

눈이 ‘정직하다’는 가르침이 100년 후에는 속임수와 한상으로 간주되어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컨스터블은 게인즈버러와 픽처레스크 화파의 매너리즘 해석을 버림으로써 이 원칙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림에 있어서 자연의 직감적 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빛의 어른거림과 기후의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 전통적인 마무리 방법을 포기하는 대신 태양을 순수한 흰색과 노란색의 점으로 표현하고 폭풍조차도 재빠른 붓놀림으로 한 번에 그려내었다.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는 초상화가로 유명한데,
그의 초상화를 둘로 나누면 하나는 자신이나 친구들의 초상화로 낭만주의적 정신으로 표현된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복한 사람들의 주문 초상화로 선명하게 그려진 선과 에나멜 같은 광택이 특징이다.
초기 초상화는 정교한 선의 아름다움과 표현력 있는 윤곽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기능을 넘어서 그것 자체로서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앵그르의 생애 전반에서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양식이 되었다.
앵그르는 1834년 말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원장직을 맡아 7년 동안 머물렀다.


1842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 그린 초상화에서는 모델의 화려한 의상이 많이 강조되었다.
이런 작품은 막대한 부에 기초를 두고 안정과 풍요로움을 누리던 19세기 프랑스 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 한정된 주제에 사로잡혀 우랜 기간에 걸쳐 동일한 주제를 반복했다.
그 자신이 부르주아로서 부르주아적 정신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초상화들은 감상적이고 공허하며 주제를 담은 그림들은 활기가 없다.
그의 작품을 일관하는 것은 여성 나체의 관능적 특성에 대한 강한 감각으로 이 특징은 비평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그는 선과 뚜렷한 윤곽, 미묘한 농담의 선명한 색채, 주의 깊게 균형 잡힌 구도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당대에 앵그르와 쌍벽을 이룬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Victor-Eugene Delacroix(1798~1863)는 루브르 뮤지엄에서 옛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기초를 닦았는데,
특히 루벤스, 베로네세, 그리고 베네치아파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대 프랑스 화가 중에서는 다비드 등 신고전주의 화파보다는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1791~1824)와 그로Antoine-Jean Gros(1771~1835)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그의 양식과 기법은 1830년대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칠해진 물감 위에 덧칠하는 투명한 물감층의 글레이즈glaze와 색조의 강한 대비 대신유사 색조를 이용한 기법과 분할주의에 의한 색채 효과를 독자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화파의 전통 기법에서 거의 탈피하여 화면에 붓의 거친 흔적을 남기거나 색채를 화면의 구성 요소로 끌어들이는 등 새로운 기법들을 시도했다.
색채를 다루는 그의 새로운 기법은 르누아르와 쇠라 같은 완전히 다른 성향의 화가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상징적이거나 극적으로 표현된 색채감은 반 고흐에게 영감을 주었다.


들라크루아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낭만주의의 지도자로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너무 광범위하여 어느 한 화파의 범주에 한정시킬 수 없다.
회화적 특성을 보면 낭만주의 그 이상에 도달했는데, 장식적인 면에 치중하는 바로크적인 재능을 나타내면서도 그의 회화는 단순함과 장엄함을 높게 평가하는 고전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정통적인 종교화가는 아니었지만 종교화를 많이 그렸으며, 보들레르는 믿음이 부재하는 시대에 종교화를 올바로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라고 그에 관해 말했다.
반 고흐는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만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농부 화가’로 알려진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는 1849년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테오도르 루소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농부들의 생활만을 그리는 데 전념했으며 그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달리 밀레의 그림은 대지에 대한 낭만적 심정을 표현하는 강한 감정에 그 특징이 있다.
또한 브뢰헬이나 네덜란드파 화가들과 달리 그는 마을의 축제나 놀이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같은 농촌의 밝은 측면만을 담아내지는 않았다.
그는 땅을 가꾸는 노동과 이러한 노역의 슬프기까지 한 엄숙함의 감동을 담아 그림으로써 농촌생활의 진지하고 애수 어린 측면을 강조했다. 색채 화가로서 밀레는 평범했고, 색조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데다 색채의 질에 대해서도 그다지 민감하지 못했다.
그의 위대함은 데생에 있다. 불필요한 부분은 대담하게 삭제해 버린 그의 데생은 쇠라의 데생과 비교된다.
그의 그림의 조소적인 단순성은 일상적인 것에 기념비적인 무게와 위엄을 부여하고 있다.
밀레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로 요세프 이스라엘스와 막스 리베르만, 카미유 피사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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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


단토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그는 팝아트가 1960년대 초에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부지불식간이라고 한 것은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 흘리기와 물감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를 그는 1964년으로 꼽는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던 그가 파리의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의 <브릴로 상자 Brillo Box>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고 미국 미술계를 규정하고 있던 논쟁의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반목이 매우 심화되어 있었다.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화가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d’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대해 심히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데 대해 경악해했다.
단토는 사실주의와 추상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 화형감이 될 정도로 반목이 심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이단으로 보일 정도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미술계에는 그린버그의 영향이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가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 혹은 진보 또는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논문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린버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논문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회화가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회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문제 삼았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데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 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 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양식의 문제이고,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쁘고의 차이가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단토는 모든 양식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양식은 작품의 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토가 제7장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는 호퍼를 비롯한 미국의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자리를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놓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미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술과 회화를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의 미술계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철학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는 <미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미술을 다룬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미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왔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엎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 Field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를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미술사에 있어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데카당스의 시기로 간주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지적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미술사의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으며 제6장에서 언급한 대로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분리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보면 시베리아나 아프리카의 미술은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진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이 동등하게 인정받는 다원주의가 도래하자 경계는 자연히 붕괴되었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겔은 한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소수가 자유를 누리며,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될 터인데 그때는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단토의 역사의 종말 혹은 탈역사는 역사 이후를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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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transfigiration


단토로 하여금 예술의 종말을 감지하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시각예술에서의 변용의 미학이다.
평범한 것을 변용을 통해 아이콘으로 만들고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데 있다.
일차적으로는 변용을 통해 평범한 사물을 고급 미술의 미학적 사물로 격상시키고 결과적으로는 대중적인 미술과 고급 미술의 경계가 사라지게 했음에 주목했다.
변용은 기독교의 개념으로 소위 말하는 ‘변화산 정상의 사건’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7:1~3에 적혀 있는 사건이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변용은 대상 자체인 예수의 모습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는 사건이다.


팝아트는 관람자의 인식을 문제 삼은 미술이다.
동일한 사물을 다르게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한 미술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그토록 자극적일 수 있었던 원인으로 변용은 지적한다.
단토는 말한다.

“팝아트 자체는 미국 고유의 업적이며, 그것에 도처에서 그토록 전복적이었던 것은 기본 입장이 변용되기 때문이다.”


단토는 팝아트가 평범한 것들인 일상적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을 미술로 변용시킨다고 보았다.
추상 표현주의는 문화 경험의 대상과 아이콘에 숨겨진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전제에 기초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그는 추상 표현주의자들이 원초적인 힘과 접촉하는 무당 노릇을 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팝아트가 추상 표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운동이었으므로 그는 팝아트와 추상 표현주의의 상이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가지 상이한 점을 지적한다.

“추상 표현주의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었다면 팝아트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것들, 즉 콘틀레이크, 수프통조림, 비누, 인기 영화배우, 만화 따위를 찬양했다.
그리고 변용의 과정을 거쳐 팝아트는 이런 것들에게 거의 선험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분석철학자인 단토는 철학이 종말에 이르게 된 것으로 1930년대에 성행한 분석철학을 꼽았다.
분석철학이 유지되어온 형이상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음을 지적한 후 분석철학이 철학을 종말에 이르게 한 것처럼 팝아트가 예술의 종말을 재촉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둘 다 인식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해방적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이 파리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파리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 말한 적이 있음을 예로 들어 분석철학과 팝아트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형화된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미술은 이러저러하다든가 미술작품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던가 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것이 팝아티스트들의 성과임을 말한다.
그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우리를 억압한 과거의 인식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 과거의 철학과 미술을 총괄적으로 조망했음을 지적한다.
분석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하이데거에 이르는 철학 전체와 대립했으며 팝아트는 실제적 삶을 위해 미술 전체에 대립했다.


단토는 미래의 미술을 철학의 문제로 본다.
분석철학과 팝아트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오래된 고정관념의 인식 체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며 둘 모두 인류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동반자라는 것이다.
그는 미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통해 원래 예술과 철학은 동반자의 관계였는데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해버렸으므로 철학과 거리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현재 철학과 예술의 관계가 회복 내지는 정상화되었다고 본 그는 말한다.

“1950년대 중반 철학과 예술 둘 다 당시의 인간의 심리 저 깊은 곳에 있던 어떤 것에 응답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그것들로 하여금 미국 장면 밖에서는 그토록 대단한 해방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팝아트에 대한 그의 희망적 청사진은 대단했는데, “팝아트가 의식 속으로 끌어올린 것은 우리 모두 세상에 홀로 남겨져 살아간다는 것으로서, 이는 누구라도 원할 수 있는 훌륭한 삶이었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팝아트가 심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예술 개념에 있어 심원한 철학적 변화를 성취한 대격변의 모멘트였다고 말한다.


변용을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뒤샹은 평범한 것을 찬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레디메이드를 팝아트와 구별했다.
하지만 뒤샹이 미적인 것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미술의 경계선을 실험한 공로는 인정하면서 미술사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뒤샹과 팝아트 사이에 외적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팝아트의 성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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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의 의무



제9장에서 아서 단토는 양식으로 작품을 구별하는 미술사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는 비평가의 의무를 언급했는데 비평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작품을 예술가 스스로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에 의해서 비로소 최종적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미술이 이제 철학의 문제, 즉 비평가의 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이 예술철학자이면서 비평가인 단토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부각된 것처럼 비평가에 의해서 의미가 크게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93년 로버트 라이만의 회고전과 더불어 패널토론회가 열렸는데, 사회자 로버트 스토어가 패널토론회 제목으로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를 정했다. 스토어가 이 같은 제목을 정한 이유는 회화는 죽었으며 라이만의 전형적인 흰색 사각형과 같은 작품은 회화의 내적 고갈의 증거로 받아들여진 데 있었다.
이런 인식은 당시 만연했다. 모노크롬을 회화의 최후 단계로 보는 시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단토는 이를 부정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과거에도 있었고 1933년에도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단토는 모노크롬 회화를 운운하며 회화의 종말을 주장하는 적은 자신의 예술의 종말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모노크롬 회화는 말레비치에 의해 1910년대에 이미 소개되었다.
로버트 라우셴버그도 흰 캔버스를 작품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붕괴된 이후에 제작된 모노크롬 회화가 추상으로서 문제로 제기되었고 라이만의 흰색 사각형 그림이 논란의 대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린버그가 추상회화를 미술사의 발전적 당연한 귀결로 보았기 때문에 모노크롬 회화, 즉 ‘추상회화: 끝이냐 시작이냐?’ 하는 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단토는 먼저 모노크롬의 역사를 말한다. 데 스틸De Stil 운동의 주역들은 세 가지 색채 빨강, 노랑, 파랑과 세 가지 비색채 하양, 회색, 검정만을 사용했다.
이런 색들에는 형이상학적 공명이 있다.
즉 세 가지 원색이 사용되었고 세 가지 비색채는 색채원뿔의 중심을 관통하는 축의 끝점과 중간점을 나타낸다.
재즈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라이만은 흰색을 사용하기 전에 이차적 색상에 불과한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사용했다.
데 스틸의 화가들은 순수주의자들로서 원색과 비색채를 사용했으며 이는 관람자에게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차적 모노크롬이란 별 의미가 없다. 라이만이 무슨 이유로 흰색을 사용했는지 몰라도 그의 작품에는 형이상학적이며 우주론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가 흰색을 선택한 것은 오렌지색과 초록색을 선택한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외양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그림이더라도 그것을 그리는 사람의 사고가 우연에 기인했다면 그의 작품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렌지색이나 초록색을 선택하듯 흰색을 선택한 것이라면 원색이 지닌 신플라톤주의적인 함축과 원뿔의 축이 함축하고 있는 기하학적 의미를 부정한 것이므로 겉으로는 데 스틸 화가와 같이 순수 모노크롬으로 보이더라도 미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단토는 역설한다.


그의 이론을 변용의 문제에 확대 적용하면, 변용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의미를 따로 두지 않은 채 우연에 의해 변용적인 작품을 제작했다면 이는 변용이 주는 철학적 해설이 그 작품에 없음은 물론이고 그런 내용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말레비치는 흰색 위에 흰색 사각형을 그린 후 관람자가 순수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라이만의 흰색 모노크롬은 말레비치의 작품과는 매우 다른 정당성과 의미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단토는 화가의 생각과 동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화가가 우연히 흰색 사각형을 그렸다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단토는 자신이 고안한 양식모형style matrix을 통해 작품들 간의 친족성으로 양식적 특질quality을 고찰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그의 특질 부여는 <예술과 과학>의 저자 애드리안 스톡스로부터 유래한다.
모든 미적 특질은 명백하고 즉각적이지만 조건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특질이 분명히 좋은 것이라거나 훌륭하다는 뜻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단토는 뵐플린이 회화적malerisch(painterly)인 것과 선적인 것을 구별한 예를 들어 속성들에 긍정적 명칭을 부여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뵐플린은 회화를 주로 색을 칠하는 회화적인 것과 색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것으로 양분했지만, 어떤 작품의 경우는 회화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선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라이만의 작품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식으로 작품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없고 단지 구별을 짓는 것뿐이다.


단토가 뵐플린의 방법을 예로 든 것은 그가 미술사를 양식의 역사로 기술했기 때문으로 뵐플린의 체계가 지닌 내적 결함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뵐플린의 체계는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 마이어 샤피로로부터 도전을 받기도 했는데 뵐플린의 양식적 구별의 도식이 성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있는 매너리즘이라 불리는 중요한 양식에는 적용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단토는 다시금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상기시키면서 평범한 사물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지각만으로는 둘 사이를 진지하게 식별해낼 수 없는 사례를 들어 친족성이 없는 작품의 경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겉으로는 유사한 것들의 미학적 차이에 대한 관심이 단토로 하여금 미술비평의 길로 나서게 했다.
비평가로서의 단토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말한다.
비평가는 작품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작품들이 내놓는 진술에 의거해서 읽는 법을 배우고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작품들이 모방적인지 형이상학적인지 형식주의적인지 아니면 도덕적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To be a work of art 1) about something and 2) to embody its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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