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서양화
영국의 화가, 판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는 초상화로 유명한데, 사회적 악습을 풍자하기 위해 무대를 재현한 듯한 일련의 일화적인 그림을 고안하여 유향시켰다.
그는 멜로드라마처럼 장면을 과장하여 악덕을 비난했다.
각 시리즈는 판화로 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려졌고 이렇게 제작된 판화는 널리 판매되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해적판이 상당수 제작되자 1735년에는 저작권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호가스는 작품을 통해 설교가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그는 부도덕만큼이나 공론과 가식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양식화된 경향에 반대했으며 영국인 고유의 감각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프랑스 로코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호가스는 1753년에 발표한 논문 『미의 분석 The Analysis of Beauty』에서 실제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관점이 미술품 감정가와 애호가의 이론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아카데미즘과 18세기 예술가의 심미안을 비판했고 회화적 아름다움을 얻는 구체적인 열쇠로서 ‘뱁처럼 정확한 곡선’을 주장했다.
그의 작업은 삼차원 형태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근대 미학의 경향을 미리 조여주는 것이었다.
호가스와 한 쌍으로 언급되는 화가는 영국 왕립미술원 초대 회장을 지낸 조수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1723~92)로 당대의 가장 유명한 화가였고 영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그랜드 매너Grand Manner에 의한 초상화 전통을 확립했으며, 영국의 18세기 미적 전망을 모든 영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말하고 누구보다도 영국 예술가의 지위를 위엄있는 새로운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랜드 매너는 그가 왕립미술원에서 세번째(1770)와 네번째(1771) 강연에서 주장한 장엄하고 화려한 역사화 양식으로 대양식으로 번역된다.
레이놀즈는 이 강연에서 이탈리아어의 구스토 그란데gusto grande, 프랑스어의 보 이데알beau ideal, 영어의 위대한 양식great style, 천부적인 재능genius, 취향taste이라는 말은 단지 동일한 것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 양식의 탁월함은 로마 미술, 피렌체파, 볼로냐화파에서 볼 수 있다고 했으며, 푸생과 브룅과 같은 프랑스 대가를 이 양식의 대표자로 간주했다.
레이놀즈는 이 양식의 특성이 베네치아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는 역사화에서도 명백히 구분되는 두 양식, 즉 장엄하고 화려하거나 또는 장식적인 양식 때문이었다.
그의 이론은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느낌, 감정, 정서를 강조하는 초기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성적인 이상에 대한 교리를 나타낸 것이었다.
정통 신고전주의 전통에서 레이놀즈는 심미안을 감수성과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에서 ‘옳고 그름을 판변하는 힘’으로 인식했으며, 올바른 심미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성과 철학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심미안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그랜드 매너 이론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예술의 전체적인 미와 숭고함은 개개의 형태, 지방의 관습, 특이성 또는 다양한 세부묘사 등의 우위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의 한 축은 고전적 신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리적 개선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고상하고 숭고한 주제를 열망해야 하며 너절하고 비열한 것은 피해야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는 네덜란드파를 경시했는데, 그들의 사실주의가 세부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저속하고 진부한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이상에 대한 태도를 선호했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적인 태도에 대하여 레이놀즈는 거장이 확립한 예술 규범에 순종할 것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윌리엄 블레이크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영국의 화가, 철학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는 고딕 미술을 가까이 접한 후 선적 구성과 형식이 갖추어진 디자인을 선호하게 되었다.
1778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교장이던 레이놀즈를 몹시 싫어하여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유화를 혐오하여 채색 판화, 삽화, 템페라화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했다.
그는 가시적인 감각 세계는 가공의 피상에 지나지 않고 그 배후에 정신적인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술가가 정신적 활동에 종사해야 하고 예술가의 본질은 진실을 정확히 그리는 데 있으며 그것은 환상적인 상상력이 되어 나타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 정신적인 활동은 시각적 체험 또는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정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평범한 시각적 체험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시각적 상징주의를 창조한다는 불가능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그는 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딱딱한 느낌의 직선을 특징으로 하는 선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는 영국의 아르 누보의 전조로 간주되었다.
정물화와 풍속화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1699~1779)은 18세기에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에 맞서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대표한다.
그는 작은 캔버스에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일상생활과 사물을 묘사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네덜란드의 실내화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세기의 이름없는 네더란드 화가들처럼 그는 반사광선의 처리를 연구했으며, 따뜻하고 밝은색의 바탕칠과 인물의 머리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기술적 방법을 베르메르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물감을 충분히 이용하여 연속해서 칠하고 그 위에 불투명한 색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미묘한 색조를 나타나게 하는 스컴블scumble 효과를 주는 등 매우 깊이 있는 색조를 만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정취가 부족한 네덜란드 회화의 사실주의에 표면적 사실주의 또는 세부적인 유사함과는 구별되는 프랑스적 특징인 간결함과 직접성을 더했다.
그의 풍속화는 감수성이나 허식 없이 눈에 비치는 모습대로의 솔직한 시각을 보여준다.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림한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고대 예술에 탐닉했고, 멩스의 미학에 공감했는데,
독일인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Anton Raffael Mengs(1728~79)는 완벽한 미를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구상 위에 라파엘로의 표현성과 코레조의 명암법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결합시켜야 한다는 절충주의를 주장했다.
다비드는 색채보다 선묘를 더 중시하는 당시의 조류와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기 희생, 의무에 대한 헌신, 정직,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미덕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곧 신고전주의의 지도자가 되었고 비평가, 미술품감정가, 대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다비드는 왕립 아카데미를 대신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하는 데 적극 참여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사회적·예술적으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는 나폴레옹의 공적을 칭송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는 초기에 사용한 차가운 색채와 엄격한 구도를 버리고 낭만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웅장하게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계속 반감을 품고 있었다.
스페인 화가, 동판화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1746~1828)는 초기에 다소 경직된 멩스의 양식을 따랐지만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부터 점차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이염으로 1794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예술 활동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정서적 변화의 징후는 뚜렷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공상과 상상력을 한껏 표현한 드로잉, 에칭, 유화를 제작하면서 해가 갈수록 특정한 풍속적 주제와 공상적인 장면에 더욱 몰두했으며, 기분 나쁜 환성적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1793~98년에 제작한 에칭과 워시드로잉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판화 애쿼틴트aquatint를 병용한 80점(후에 3점을 추가)을 묶어 1999년에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라는 동판화집을 발행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에는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기법에서는 렘브란트의 영향이 보이지만 작품 주제는 사회적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묵음의 무도 같은 요소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