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미라와 모티프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주요 인물로 꼽히는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독일 표현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화가 중 하나이다.
1885년 파리를 처음 방문한 후 그의 작품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나타났고, 1908년 이후에는 1888년 상징주의 운동 내부에서 주로 폴 고갱의 영향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이 결성한 나비 그룹과 후기 인상주의, 특히 반 고흐와 고갱, 툴루즈-로트레크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뭉크가 다룬 주제에는 억제되지 않고 거의 발작에 가까운 감정이 담겨 있어 이후 등장한 표현주의 운동을 예견했다.


뭉크는 1893년에 <폭풍의 밤>을 그리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여인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런 모습은 그해 그린 <절규>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1974년 뉴욕 모마에 소장된 <폭풍의 밤>(뭉크 252)은 뭉크가 커다란 집의 창문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노란색으로 불빛을 강조한 후 왼편에 각기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색을 쓱쓱 문질러 묘사하고 앞서 걸어오는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두드러지게 한 작품이다.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앞서 걸어오는 여인도 양손을 귀에 대고 윙윙거리는 폭풍의 거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절규>(뭉크 5, 255)에 대한 변형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뭉크가 이 모티프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로버트 로젠블럼은 파리의 홈메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인의 미라(뭉크 254)가 뭉크에게 죽음에 사로잡힌 얼굴을 그리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페루인의 미라가 <절규>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과 매우 흡사해서 그의 주장이 타당해 보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이 죽음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절규>는 뭉크의 작품 중 가장 표현적이다.
그는 역동적인 색으로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을 표현했으며 그것이 곧 자신의 내면세계임을 강조했다.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일기는 <절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다.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으며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난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뭉크는 1895년작 채색석판화(뭉크 253)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그날의 체험을 잊지 못했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했으며, 표현 그 자체가 회화임을 입증하려는 듯이 보인다.
<절규>의 화면 중앙에 몸을 비틀면서 양손을 얼굴에 대고 눈과 입을 크게 뜬 것은 뭉크 자신의 모습이다.
원경을 다이내믹한 곡선으로 리드미컬하게 했는데 직선과 대조를 이룬다.
이 모티프는 유화보다는 석판화에서 더욱 효과가 크다.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했으며 <절규>는 오늘날에도 인형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열린미술관 210)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은 뭉크의 심상을 나타내기에 충분해 보인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 뮤지엄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장서 가운데 ‘니체 전집’과 열네 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어 두 철학자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그가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감성적 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뭉크의 불안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절규> 외에도 <칼 요한 거리의 봄날 저녁>과 <절망>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관련 있어 보인다.


고갱도 페루인의 미라를 여러 차례 드로잉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이런 불안을 쉽게 발견한다.
그는 미라를 양손을 얼굴에 괴고 고뇌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브르통 이브>(고흐 460, 461)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고흐 26, 26-1)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1888년 11월 4~11일에 유채로 그린 이것의 원래 제목은 <포도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는데 나중에 <아를의 포도수확 (인간의 고뇌)>로 바꿨다.
결이 고운 캔버스는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여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으로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거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아를의 여인들이 아니라 브르통 여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삼각형의 붉은 빛이 감도는 보라색 포도밭에 두 여인이 허리를 굽히고 수확에 여념 없고 왼편에 서 있는 여인은 브르통 나막신을 신고 브르통 의상을 하고 있다.
양손으로 턱을 괸 여인의 모습은 그가 퐁타방에서 그린 그림에서 이미 사용한 것으로 샤를 라발에게 준 <과일이 있는 정물>(고흐 27)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고갱은 자신이 본 아를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들을 염두에 두고 상상의 합성 이미지를 고안해낸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데 비해 여기서는 색을 얼룩처럼 사용했는데 색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다.
그는 붓질만 한 게 아니라 문지르고 긁어 거친 색조를 만들었으며 표면이 거친 캔버스를 팔레트 나이프로 색을 바르기도 했다.
슈페네케에게 말했듯이 그의 목적은 특정한 메시지를 서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소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형상, 색, 상징을 통해 암시의 새로운 양식을 창안해내는 데 역점을 두었다.
“불쌍하고 의기소침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붉은 오렌지색 머리를 한 여인이 오른팔을 무릎에 대고 왼팔은 무릎에서 떨어진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미래의 일에 관해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옆에 검정색 겉옷을 입은 여인을 서 있게 해서 애도를 상징했다.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고흐464)를 수채화로 그렸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고흐 463)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독자적 전시장에서 소개되었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 고갱의 <검은 바위에서>(고흐 462)가 장식되었다.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고갱이 1889년에 참피나무에 부조와 채색으로 제작한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고흐 475)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났다.
이 작품을 그는 1898년에 화선지를 이중으로 붙인 후 채색목판화(고흐 849)로 떴는데 여기에서도 불안한 여인의 모습이 있다.
그는 화선지에 검정색과 황토색으로 프린트한 채색목판화를 1902년에 <모던 정신과 가톨릭주의>의 안쪽 표지(고흐 884)로 사용하기도 했다.
고갱은 동일한 이미지를 1889년에 아연 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한 <인간의 고뇌>(고흐 850, 851)에서도 거듭 사용했다.


뭉크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불안의 개념에 집착했는데 <브르통 이브>의 모습은 그해 그가 그린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고흐 440)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 한의 모습을 수도승처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배경에 브르통 이브를 삽입했다.
이브의 유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드 한의 모습은 단호하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년에 야심을 갖고 그린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고흐 821, 820, 821-5)에서도 이 이미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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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의 시원


18세기까지만 해도 막부와 봉건귀족의 에도코로繪所는 카노파狩野派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노 탄유狩野探幽와 그의 형제들의 직계 계승자들인 4왕조(분파)의 화가들이 쇼군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는 오쿠에시라는 화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각 살고 있던 에도 지역의 명칭에 따라 카지바시, 코비키쵸, 나카바시, 그리고 하마쵸라고 불렀다.
이 밖에도 카노파의 자손들과 제자들은 대대로 오모테에시表繪師라는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채용되었으며 또 다른 무리의 카노 화가들은 무사계급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지방 번주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화실을 주도하기 원한 것도 카노파 화가들이었다.
이런 현상을 카노파의 독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체제 하의 화가들은 획일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화 양식을 바꾼다거나 기법을 개량할 수 없었고, 3세기 동안 쇼군의 거처를 장식하거나 다른 어용장식화 제작을 위해 조상들, 특히 탄유에 의해 성립된 본보기를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은 옛 미술품의 감정을 의뢰받기도 했다.
그들의 유일한 장점은 19세기 화가들에게 전통 회화 기법을 충실히 전승시키는 것이었다.
산라쿠山樂의 손자이며 일본의 바사리Vasari로 불리는 카노 에이노狩野永納(1631~97)를 비롯한 이 화파의 몇몇 문인화가들은 귀중한 역사 기록과 화가들의 전기 외에도 지금은 사라진 옛 그림들의 모사본을 남겼다.


현존하는 것들 대부분은 무명화가들이 그린 발랄하고 매력적인 여러 유형의 여인들을 최신 유행의 의상을 한 모습이다.
기녀, 무희, 유나湯女라고 불리는 정조 관념이 해이한 대중목욕탕 종업원들이 이런 회화에서 주요 모델이 되었으며,
이중 가장 독창적인 예가 아타미熱海 미술관 소재 <유나>로 여섯 명의 유나들이 코소데라고 하는 가느다란 띠와 화려한 짧은 팔 키모노로 한껏 차려입고 뽐내듯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다.
이 무명화가가 사용한 기법은 이전의 어느 기법에도 전혀 의존하지 않은 것이다.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쾌락을 표현하는 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고 이는 17세기 중반에 완숙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런 작품들은 우키요에浮世繪의 시원이 된다.
이 용어는 1681년 이전에는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우키요浮世라는 말은 중국 육조시대 문학에서 처음으로 인간, 인세人世의 뜻으로 사용되었고 송대의 문학에 이르러서는 세상 일이 허무하고 뜬구름처럼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도 1681년경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의 『우키요 조시 浮世草子』라는 대중소설이 출간되어 역시 문학에서 먼저 이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근심 많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우키요에 외에도 우키요 가사(우산), 우키요 보시(모자) 등 에도 시대에 유행한 물건들에도 적용되었다.


17세기부터 목판화가 현저하게 증가한 출판물의 삽화로 많이 이용되었다.
풍속화의 발전과 목판화 기법의 개량이 표현을 위한 양식 발전에 계기가 된 것이다.
에도의 출판업자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1618~94)에 의해 그때가지 본문에 종속되던 삽화는 예술적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모로노부는 자신이 1677년 이후에 출판한 1303종의 그림책繪本에서 그림이 글씨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도록 만들었고, 이전 삽화가들이 지켜온 전통적인 무기명에 반기를 들어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들 그림책들 중 많은 부분이 요사와라吉原 지역의 유흥가에서 일어난 남녀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일본화 216)
이런 이유로 당대 사람들은 이런 회화를 둥둥 떠 있는 세상의 그림이란 의미로 우키요에라고 불렀다.
모로노부가 성공한 이유는 그의 양식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판화 제작의 최신 기술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육필화肉筆畵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판화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과 기법은 일본 판화 초창기 전성기부터 1765년까지 급속도로 발달했다.


쿄호亨保 연간(1716~36)에 이르러 화가 겸 출판업자 오쿠무라 마사노부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더욱 진보된 새로운 기법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는데, 빨간색, 노란색, 녹색, 보라색 등 여러 가지 색이 판화에 사용되었으나 늘 붓으로 직접 채색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붉은색을 대치한 보다 아름다운 장미빛 홍색(베니)의 이름을 따라 베니에紅繪라 불리었다.
출판업자와 화가들은 목판화를 사용하여 채색을 가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중국 다색 판화의 기법,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서예용 색지 제조법을 참작하여 몇 가지 색 홍, 청 등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각 색채는 각각 다른 목판으로 가해졌으며 이들 목판들은 표식見當에 의해서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했다.
이 기법은 약 20년 동안 유행했고 여기에 보라색과 노란색을 첨가함으로써 차차 다색 판화 기법의 완성 단계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
약 1세기 동안의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 일본 판화는 니시키에錦繪라고 불리는 다색 판화에서 기법적 그리고 미적 완성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에도는 조용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으며 시민은 수준 높은 생활에 걸맞는 우아함과 세련미의 이상을 한껏 추구할 수 있었다.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긴 건 1720년 막부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기독교 이외의 양서洋書에 대해 내렸던 금지 조치를 완화시키고부터였다.
요시무네 시대吉宗時代(1716~36)에 지금의 동경인 에도는 상업적으로 발전했고 전국의 산물을 에도로 보내기 위한 총집결지의 역할을 한 소위 ‘천하의 부엌’으로 불린 오사카에는 유통과 제조업이 성행했다.
막부 재정의 재건에 앞장을 선 요시무네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을 폈는데 예를 들면 1720년 그는 “약물의 가격이 비싸므로 빈민은 이를 구할 방도가 없어서 한심하게 질병으로 넘어지는 일이 많음을 개탄하여 이들 빈민을 구제한다”는 취지로 막부로 하여금 일본 국내에 자생하는 약초 채취를 행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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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하다


서양화와 관련해서 요시무네는 1722년 나가사키 행정관을 통해 일본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양이었던 네덜란드에 서양화를 주문했으며 유화 다섯 점이 1726년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들 중 두 점 공작 그림과 정물화는 1728년 에도의 나한사羅漢寺에 소장되었으므로 일반인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문화를 연구하는 학문 난학蘭學이 활성화되면서 서양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일본인은 서양화가들이 과학적인 관망으로 대상을 음영과 원근법을 구사하여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의 캔버스에 부피와 공간으로 입체적으로 나타내려는 데 몰두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양화가들과는 달리 서양화가들은 실상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재현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타 지방에서 유행한 서양화 추전난화秋田蘭畵의 대표적인 화가 사타게 쇼잔佐竹曙山(1748~85)은 1778년에 쓴 『화법강령畵法綱領』에서 “그림이란 모름지기 대상을 닮아야 한다”고 적었고,
에도 서민 출신으로 일본에서 처음 에칭을 제작한 시바 고칸司馬江漢(1747~1818)은 1799년에 쓴 『서양화담』에 적었다.

“서양 각국의 회화란 사진처럼 베껴내는 것이어서 우리와는 다른데 … 이에 대해 동양의 회화는 농담 표현으로 음양·요철·원근 등을 나타내면서 대상물의 정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고칸은 스즈키 하루노부로부터 우키요에를 배운 뒤 사생화로 전환하여 히라가 겐나이와 교류하며 네덜란드 서적 등에서 힌트를 얻어 독자적인 동판 화법을 창시했다.
일본인은 서양화는 곧 사실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정확하게 묘사된 그림이 대상물 대신 전달과 보존의 수단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박물도와 해부도의 경우 음영법과 원근법 기술을 익히지 못하면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7세기 전반 막부의 금교 정책이 있었지만 서양의 사실주의 양식은 일본인에 의해 산발적으로 답습되었고 추전난화의 성행으로까지 이어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는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전례를 따라 과학적 관망으로 원근, 비례, 명암으로 3차원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회화는 빛에 의해 연출되었고 원근법 속에서 혹은 명확한 비례 안에서 형태들이 결합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서는 카라바조의 웅대한 인물상과 인위적인 빛의 사용은 과장된 방법으로 화가의 개성으로 나타나 이후 2세기에 걸쳐 유행했지만 사실주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런 경향은 일찍이 16세기 초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통해 프랑스에 알려졌으며 19세기 중반까지 서양의 보편적인 양식으로 답습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알려진 초기의 서양화는 이런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풍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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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의 우키요에


원근법perspective이란 용어는 라틴어 perspectiva에서 유래하며,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524)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번역할 때 기하학의 한 분야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광학’의 번역어로 채택한 것이다.
15세기에는 고정시킨 시점에서 투명한 평면 위에 나타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라틴어로 ‘구축적 원근법’ 또는 ‘회화 원근법’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전의 과학, 즉 광학을 가리키는 ‘보편적 원근법’ 또는 ‘시각 원근법’과 구별되었다.
중앙소실원근법에서 회화가 그려지는 면은 화가와 대상 사이에 수직으로 세워진 투명한 화면으로 보고 그 평면상에서 화가는 단일하게 고정된 시점에서 대상의 윤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적절하게 채색된 이상적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런 방법으로 그려진 회화는 정해진 위치에서 한쪽 눈으로 보았을 때, 실제의 광경을 창을 통해 바라보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서양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우키요에의 풍속화에 나타난 투시원근법이다.
서양 양식에 의한 일본 풍경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우키에의 판화에서 시작되었다.
에도 시대 중에서도 덴나天和 연간(1681~84)에 새로운 미술 용어로 정착하게 된 우키요란 말은 우세憂世, 즉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이다.
덴나 연간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에 의해 우키요 소시라는 새로운 소설 형식이 시작되었고 또한 우키요 그림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다다시小林忠은 『우키요에의 미』(1984)에서 우키요憂世란 말은 ‘잠시 동안만 머물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자’는 사고 방식이 생기면서 그 뜻이 ‘근심스러운 세상’이란 뜻에서 현재의 세태와 풍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현재 양식 혹은 호색적 당세풍이란 의미를 내포하는 우키요浮世라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우키요 화가들은 늘 시대를 앞서 가는 첨단의 풍속과 유행하는 화제에 관해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며 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키요에 연구가 요시다 에이지吉田映二는 『우키요의 담의 浮世繪談義』의 항목 ‘우키요에와 신문’에서 우키요에에서 다룬 소재를 신문의 지면 구성과 연관시켜 설명하는 가운데 그 시사성과 주제의 폭이 넓어 정치, 국제, 경제, 문예, 종교, 연예, 여성, 가정, 어린이, 오락, 스포츠, 사회 등에 관해 그림을 그렸다고 적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키요, 곧 세련된 욕망의 발산처는 유곽遊里과 가부키歌舞伎 등을 공연하던 극장 거리가 있는 유흥가였다.
에도 시대의 이런 유흥가 풍속을 바탕으로 미술, 문학, 예능 분야에서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졌다.
이 중에서 우키요에는 가장 큰 결실이다.
호색에 치우친 우키요의 가장 극단적인 그림이 남녀의 유희를 주제로 한 마쿠라에枕繪, 곧 춘화春畵이다.
우키요에는 당시 에도 그림으로 불리었는데, 에도 특산의 미술품으로 가격이 적당하여 여행자의 선물용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자칭 우키에 네모토라고 칭한 오쿠무라 마사노부奧村政信로 대표되는 우키에의 초기작은 대부분 극장의 무대를 그린 것과 넓은 대청을 그린 것들이다.
그에게는 회화의 모티프는 같지만 별도로 한 치수 작은 사이즈, 즉 이 그림의 염가판을 출판업자 오쿠무라야 겐로쿠를 통해 제작한 것을 <료고쿠바시 유스즈미 우키에곤겐 兩國橋夕見大浮繪根元>(유키요에 154)이란 제목을 붙여 우키에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라는 공을 스스로 과시했다.
이 작품은 마사노부의 우키에 작품 중 최고의 완성도를 보인 걸작이다.
료고쿠바시의 서쪽 기슭에 있는 한 요정의 2층에서 벌어진 피서 풍경이 다양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오른쪽 방에서는 샤미센과 피리소리에 맞춰 춤판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중 삿갓을 쓴 남자가 온몸에 달빛을 받으며 장지 위에 그림자를 남겼다.
화면 중앙에는 비스듬히 기대 누운 손님 옆에 기녀가 있고, 기녀가 따른 술잔을 받으려고 하며, 왼편에서는 젊은 남녀가 쌍륙을 즐기고 있다.
이들 뒤로 기둥에 기대어 망연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실내의 묘사에서는 어느 정도 원근법을 응용하는 데 성공한 마사노부였지만 의지할 만한 직선이 없는 요정 뒤로 펼쳐진 야외 풍경에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종래의 부감 구도로 파악하고 있어 료고쿠바시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위로 떠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내와 실외를 서양과 동양의 두 가지 화법을 혼용하여 사용한 결과로 생긴 위화감이 오히려 아 작품에 불가사의한 매력을 부여했다.
강에는 불꽃을 뿜는 지붕달린 소형 유람선 야가타부네屋形船가 떠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는 기원을 위해 목욕재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에도 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여름철 피서 풍물이 하나도 빠짐없이 묘사된 그림이다.
전반적으로 갈색과 황색 외에 연한 먹물로 채색되어 화면 전체에 차분한 안정감을 주며 부분적으로 연지와 보라 등으로 연하게 채색되어 부드럽게 정돈된 느낌을 준다. 보존 상태는 거의 완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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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서양화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1571~1610)에 의해서 르네상스 이후 서양화는 다시 한 번 혁명을 맞았는데, 그는 이탈리아 전통을 무시하고 철저한 준비의 데생을 하지 않고 실재 모델을 직접 유채를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다.
이는 초기의 실험이었고, 그는 공간을 좀더 확 트이게 하면서 광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짙은 색으로 강한 명암 대비를 바탕으로 사실적 인물을 묘사했다.
채색에 뛰어난 그는 성숙기에 접어들어서는 색을 최소화하여 물감을 엷게 칠하면서 감동적인 침묵과 관조로 대작의 종교화를 그렸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1593/4~1665)은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생애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냈는데,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면서 회화에서의 문학적·심리적 묘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그의 감정 표현은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푸생은 각각의 작품에서 정취의 합리적인 통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리스·로마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의 모드(음계) 이론에 대응하여 회화의 모드(양식) 이론을 전개했다.
이는 후에 미술 아카데미에서 채택되었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회화의 주제와 묘사된 감정적 상황은 각기 적합한 방법으로 다뤄져야 하며, 그 방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일관되게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고전주의의 중심적 교의를 확립했는데, 회화는 가장 고귀하고 진지한 인간의 상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성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전형적이며 질서 있는 기법으로 표현해야 만한다.
전형적이며 일반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보다 우선하며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매력을 갖는 것,
예를 들면 선명한 색채 등은 삼가야 한다.
회화는 정신에 호소되어야 하는 것이며 눈에 호소되는 것은 아니다.
17세기 후반 푸생의 이름은 색채의 중요성을 주장한 루벤스에 대해서, 회화에서 소묘의 중요성을 믿었던 푸생 추종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루벤스파가 우세했지만 푸생은 19세기 초까지 고전적 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었다.


회화의 생명력이 소묘라고 본 푸생에 반해 색채를 회화의 생명으로 사용한 플랑드르인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는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화가이다.
로마에 체류할 때 고대를 연구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프레스코화를 비롯하여 티치아노, 틴토레토, 코레조 등의 회화를 모사했으며 그들의 영향이 작품에 나타났다.
소묘에 뛰어난 그는 펜과 유화 스케치는 물론 붓과 초크로 정확하고 완벽한 묘사력으로 큰 화면에서도 막힘없이 그렸다.
그의 천재성은 밝은 색채에서 잘 드러나는데,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영향이지만, 원색과 보색을 병치하는 루벤스의 방법은 19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보다 앞선다.
현란한 색채에서 생겨나는 루벤스 예술의 음악성은 그 스케치로 인해 한층 두드러졌다.
루벤스의 영향을 프랑스 화가들 바토, 프라고나르, 들라크루아가 주로 받았으며 인상주의는 들라크루아를 통해 색을 회화의 생명으로 본 데서 출발했다.


루벤스와 같은 나라 화가 안토니 반 데이크Sir Anthony van Dyck(1599~1641)는 루벤스의 작업장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그의 영향을 일부 받았지만 곧 자신의 세련되고 우안한 양식을 창조했다.
초상화를 주로 그린 그는 다소 거만하고 호리호리한 ‘귀족의 유형’으로 바로크풍 귀족 초상화 연작으로 명성을 얻었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azquez(1599~1660)가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부상했다.
그는 자연주의적인 종교화를 발전시켰는데, 여기에서 인물은 이상적인 유형이라기보다는 현실 인간의 초상에 가깝다.
한편 장면 전체에 정신적인 깊이감을 주는 것은 사실적으로 파악되면서 동시에 신비적인 광채를 발견하게 하는 빛이다.
이런 작품들은 베네치아 화파의 난색 계통의 바탕 위에 그려지고 또한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강한 명암에서 카라바조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유연하고 두터운 붓질은 벨라스케스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그는 모델들에게 좀더 자연스런 자세를 취하게 하고 장식구를 생략하여 인물에게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했다.
그는 티치아노의 초상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을 훨씬 뛰어넘어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향해 한 걸을 더 나아갔다.
그는 르네상스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루벤스 및 베르니니와는 반대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네덜란드 화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1/5~1666)는 초상화가였으므로 그의 풍속화도 초상화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풍속화 분야에서 독창성을 갖춘 대가라는 명성을 얻은 그의 뛰어난 회화기법에 견줄 만한 화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작품이 매우 적은 것은 그가 타계한 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그의 작품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거의 없어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카라바조 추종자들과는 달리 할스는 인공적인 빛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극적인 명암법 효과를 탐구했으며, 전통 기법으로 그린 후 점묘로 색 터치를 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창조했다.
1630년대에는 한층 간결한 그림을 그리면서 밝은 색채 대신 단색조의 효과를 높였으며 말년의 작품에는 좀더 어두운 색이 사용되었고 붓질이 간결해져 절제감이 느껴진다.


루벤스와 더불어서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69)이다.
약 100점의 자화상으로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는 얼굴 표정이 얼마나 서로 다른 종류의 정서를 나타내는가를 배우기 위해 관상학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그려넣었다.
회화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그는 명암법과 공간 처리에 숙달했으며 내적 감정과 성격을 전달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움직임을 이용했다.
1640년대에 그는 바로크 미술의 격정적이고 과도한 측면을 버리고 색채, 명암법, 대기의 효과로 부드러움과 자비를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했으며, 자연을 마주 대하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노력했다.
아카데믹한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거칠고 촌스러우며 고상함이 결여되었다고 여기면서도 빛의 처리 방식은 본보기가 된다고 일반적으로 인식했다.


17세기 대가 중에 빠드릴 수 없는 화가는 렘브란트와 같은 나라 사람 얀 베르메르Jan Vermeer(1632~75)이다.
아버지로부터 미술상과 술집을 이어받아 빚에 시달리면서 아내와 자식 11명을 부양하느라 노력했지만 그림을 팔았다는 증거는 없다.
현존하는 작품은 35점으로 1654년 델프트의 화약고 폭발로 인해 많은 초기 작품이 소실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적은 수이다.
그는 구도를 추상적일 정도로 단순하게 하면서 대개 인물(그의 아내가 모델) 한 사람만 있는 단순한 풍속화 또는 거리나 도시의 전경을 그렸다.
1879년 반 고흐는 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에 대해 열광적인 편지를 썼고 그에 대해 일반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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