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팝 아트의 승리, 추상표현주의의 종말
스테이블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린 예술가로 알려졌는데 이제 스타들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워홀의 개인전은 적절한 시기에 열렸던 것이었다.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성대하게 열린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The New Realists’전(1962. 10. 31~12. 1)에 워홀도 참여했다.
이 전시는 미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로 기록되었다.
유럽과 미국 예술가 29명의 작품 50점이 소개된 이 전시에 워홀은 200개의 수프 통조림을 그린 그림을 출품했고 올덴버그는 비닐에 색칠한 조각을 출품했다.
그 밖에도 영국의 유명한 팝 아트 예술가 피터 블레이크가 참여했으며, 프랑스 작가는 일곱 명이 참여했는데 아르망, 크리스토(불가리아계), 레이몽 하인, 이브 클랭, 마샬 라이세, 다니엘 스포에리, 장 팅글리였다. 미국사람은 열두 명이 참여했는데 워홀과 올덴버그 외에도 짐 다인, 인디애나,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조지 시걸, 탐 베셀만이 포함되었다.
시드니 재니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윌렘 드 쿠닝, 아돌프 가트립, 필립 구스턴,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드코를 후원했던 익히 알려진 중개상이었다.
재니스는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을 도시의 대중적인 예술가들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실과 아이디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재니스는 맨해튼 57번가 이스트 15번지 5층에 있는 자신의 화랑 공간이 넉넉하지 못해 웨스트 19번지의 상점을 잠시 빌려 같이 전시장으로 사용했다.
전람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사람들은 화랑과 상점을 오가며 작품들을 관람했다.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카탈로그에서 예술이란 근래의 자연이라고 하면서 근래의 예술에는 기계적이고 산업적이며 광고와 같은 내용들이 넘친다고 기술했다.
사실 재니스 화랑에서 대규모 전람회가 열릴 때만 해도 팝 아트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진 않았다.
평론가들은 전람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에게 제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더러는 그들을 네오다다이스트라고 불렀고, 신사실주의자라고 불렀던 평론가들도 있었으며 공공주의자(Commonists), 속물주의자(Vulgarists), 간판쟁이(Sign Painters), 미국을 꿈꾸는 자들(New American Dreamers), 대중적 사실주의자(Popular Realists), 사실존중주의자(Factualists)라고도 불렀는데 한결 같이 그들을 유물론자쯤으로 취급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팝 아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복수유물론자(Polymaterialists)라고 불렀고 프랑스 사람들은 신사실주의자(Nouveaux R럂listes)라고 불렀다.
다만 영국사람들만이 로렌스 알로웨이를 따라 팝 아트 예술가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니까 팝 아트는 알로웨이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알로웨이는 이미 1950년대에 이 말을 사용해 대중적인 영화, 공상과학, 광고, 게임기구, 언론에서 취급하는 배우, 가수, 정치가 등의 영웅들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를 팝 아트라고 분류했다.
재니스 화랑에서 열린 이 전람회는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다.
재니스뿐 아니라 레오 카스텔리, 리처드 벨라미, 앨런 스톤, 그리고 일레노 와드도 더 이상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를 열지 않았다.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잡지 《뉴요커》에서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은 뉴욕 미술계를 강타한 지진이다”라고 기술했다.
《아트 뉴스》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을 향해 새로운 것이 도착했으니 낡은 것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했다.
“팝아트 예술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던 로드코의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평이었다.
1962년 12월 13일 모마가 일반인들을 위해 ‘팝 아트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연사로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시걸, 그리고 워홀을 초대했다.
이때부터 팝 아트는 미국 미술의 주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