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리얼리즘


1960년대 후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한 회화양식으로 사물을 세부까지 섬세하고 비개성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수퍼리얼리즘Superrealism에는 조각까지 포함된다.
극사실주의, 또는 포토리얼리즘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양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 중에는 실제로 사진을 재료로 사용하고 때때로 캔버스에 컬러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작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도적으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유사한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세부까지 정확하게 묘사하며 그 규모는 종종 크게 확장된다.

수퍼리얼리즘의 직접적인 선조는 팝아트이다. 두 사조 모두 소비사회의 진부한 이미지들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수퍼리얼리즘이란 명칭을 만들어낸 맬컴 몰리, 그리고 멜 레이모스 같은 예술가들은 두 분야 모두에 걸쳐 있다.
그러나 수퍼리얼리즘에서는 팝아트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유머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차갑고 비개성적인 경향을 띤다.
작품의 소재도 다수의 반사광을 갖는 사물처럼 단지 기술적으로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팝아트와 마찬가지로 수퍼리얼리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수퍼리얼리즘>(1979)에서 적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퍼리얼리즘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눈부신 성공을 거둔 유일한 혁신적 양식이었다.
뉴욕의 미술계에 처음 선보이자마자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평론가와 미술 관련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좀더 나중의 일이었다.”

미국의 선도적인 수퍼리얼리즘 화가는 척 클로스Chuck Close(1940~)이다.
예일 대학을 1964년에 졸업한 척 클로스는 초기에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렸지만 곧 수퍼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거대한 여권사진처럼 얼굴 정면을 그린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센터에 소장되어 있는 거의 3m 높이의 <자화상>(1968)이 그런 예이다.
본래 검정색과 흰색만 사용하여 그렸지만 1970년경에 색채를 도입했다.
클로스는 사진을 격자무늬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다시 캔버스에 옮겨 작업했다.
후기의 몇몇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격자무늬를 강조하여 마치 서리로 덮인 창문을 통해 얼굴을 바라보거나 컴퓨터 스캔 화면을 보는 듯한 ‘낮은 선명도’의 이미지를 그렸다.
클로스의 초상화 대부분은 친구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미지를 “진부한 인본주의적 관념”을 위한 매체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정보의 근원”으로 보았다.
1988년 척추 혈관의 손상으로 인해 몸이 거의 마비되었지만 붓을 테이프로 팔에 고정하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1965~69년 하와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69~70년 산타 바버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한 돈 에디Don Eddy(1944~)는 1972년부터 뉴욕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동차나 자동차의 광택나는 세부를 집중적으로 그렸지만 1971년 이후에는 주로 상점의 유리창을 묘사했는데, 이런 작품에서 유리창에 반사된 거리의 모습은 판매되는 상품만큼 매우 자세히 묘사되었다.

수퍼리얼리즘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 리처드 에스티스Richard Estes(1936~)는 1952~56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공부하고 1959년 뉴욕에 정착했다.
몇 년 동안 판화를 제작하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전업 화가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1968년 뉴욕의 앨런 스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0년대 말에는 수퍼리얼리즘 분야에서 선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에스티스는 작품에서 도시의 풍경만을 다뤘다.
초기의 작업에서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1967년경부터는 건물이 주제가 되었다.
특별한 특징이 없는 전형적인 거리풍경의 단편을 묘사했는데, 유일하게 잘 알려진 건물을 그린 작품으로는 주문을 받아 제작한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을 그린 것이 있다.
에스티스는 한 장면에 대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느낌이 맞을 때까지 사진의 조각들을 여러 번 결합하는 장식으로 작업했다.
많은 수퍼리얼리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에어브러시보다는 전통적인 붓으로 작업했다.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며 명확한 초점을 그려내기 위해 마무리 단계에서는 유화물감을 사용했다.
그는 도시를 볼거리로 제시하면서 밝은 빛 가운데 그려내어 그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쓰레기조차도 광택이 난다.
에스티스는 매우 공들인 정교한 스크린프린팅screenprinting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제작했다.
스크린프린팅은 스텐실에 기초한 판화 기법으로 원래는 상업 디자인에 사용되었던 것인데 1960년대 이후 화가들이 독창적인 판화 작업을 위해 애용했다.
이 기법의 기본 원리는 나무틀에 가는 망으로 된 스크린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씌우고, 이것을 종이 위에 올려놓고 스퀴지라고 불리는 고무롤러를 사용하여 물감이 망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보통 이 스크린이 실크로 되어 있어 실크스크린 판화라는 명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명칭이며, 스크린이 면이나 나일론 또는 금속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게 때문에 보다 포괄적인 명칭이 필요하다.

종교적 상징이나 허영심과 죽음의 이미지를 그린 정물화에서 감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노린 오드리 플랙Audrey Flack(1931~)이 있고,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사용하거나 형상을 잘라낸 다음 배경에 붙이는 작업을 한 하워드 카노비츠Howard Kanovitz(1929~)가 있다.
수퍼리얼리즘 화가로 불리지만 작품에 상상적 요소를 첨가하는 화가들 중에 잭 빌, 앨프리드 레슬리, 필립 펄스타인 등이 있다.

윌리엄 메리 칼리지와 버지니아 주의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 및 시카고 아트 이스티튜트에서 공부한 잭 빌Jack Beal(1931~)은 인디애나 대학과 퍼듀 대학, 위스콘신 대학 및 쿠퍼 유니언에서 잠시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빌은 1960년대 말 치밀한 구성의 자연주의 화풍으로 돌아간 화가들 중 하나였다.
빌이 그린 매혹적인 누드화는 밝은 색채의 현란한 세부와 알록달록한 가구 부속물에 통합되어 인간적 속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앨프리드 레슬리Alfred Leslie(1927~)는 1956~57년 토니 스미스, 윌리엄 배지오티스 및 뉴욕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 대학에서 공부했다.
레슬리는 1950년대 중반부터 드 쿠닝을 모범으로 삼은 제2세대 추상표현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에 포함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뉴 리얼리즘의 범주에 속하는 양식으로 전환하여 크기로 관람자를 압도하는 대형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현재 휘트니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앨프리드 레슬리>(1966~67)가 그 예인데 가로 세로 2.7m 1.8m에 달한다.

피츠버그 태생으로 뉴욕에 정착한 필립 펄스타인Philip Pearlstein(1924~)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 형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뉴 리얼리즘에 속한다.
뉴 리얼리즘New Realism은 196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으로 대중 매체들에서 평범하고 사실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대량생산된 일상의 소비상품을 비롯한 실제 사물을 아상블라주로 만들거나 회화 면에 부착시켰던 경향을 말한다.
영어권 지역에서는 누보 레알리슴의 번역어로서 뉴 리얼리즘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펄스타인의 작품처럼 추상표현주의와 타시즘에 대한 반발로 새로이 부활한 자연주의적 구상과 객관성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결합된 경우나, 수퍼리얼리즘으로 더 잘 설명되는 양식도 포함한다.
또한 팝아트의 동의어로 혼동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어서 1964~65년 영국 팝아트 전시회는 ‘뉴 리얼리즘’이란 명칭으로 헤이그, 빈, 베를린을 순회했다.
그러나 1976년 함부르크, 뮌헨, 요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는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영국의 팝아트’라고 했다.

배리 슈워츠는 <새로운 인본주의 The New Humanism>(1974)에서 펄스타인에 관해 적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수퍼리얼리즘)는 자연 그대로의 장면을 취할 것을 주장한다.
예술가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냉정하고 무심하며 중립적이다.
필립 펄스타인 같은 사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예술은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시각 이외의 어떠한 인간적인 것과도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펄스타인은 암시적인 의미를 모두 배제하고자 인간 주제, 혹은 인간 존재를 세밀한 시지각을 통해 해부학적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자신에게는 모델이나 모델이 앉아 있는 의자나 전혀 차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1975년 런던의 김펠 피스 화랑에서 있었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 펄스타인은 적었다.
“나는 20세기 회화의 인본주의에 공헌했다.
나는 표현주의 예술가들, 입체주의적 해부자들, 인간을 왜곡시키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던 인간의 형상을 구조해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나는 성적 암시를 위해 인간 형상을 손쉽게 이용하는 포르노그래피 제작자들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보호했다.
나는 자연의 여러 형태 중 하나로서 존엄성을 부여받은 인간 형상 그 자체를 표현하여 왔다.”

펄스타인은 발이나 이마처럼 신체의 끝부분을 절단하는 방법 이외에는 아무런 기교 없이 그렸다.
따라서 그의 인물화는 캔버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듯한 기념비적인 느낌을 준다.

수퍼리얼리즘 조각가로 두에인 핸슨과 존 디 앤드리아가 있다. 미시간 주의 크랜브룩 미술아카데미를 1951년에 졸업한 두에인 핸슨Duane Hanson(1925~96)은 1953~60년 독일에 거주하면서 여러 미술학교에서 강의했고 1965년 마이애미로 이주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유리섬유로 실제 사람의 형상을 떠서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옷을 입혀 버팀목으로 받친 인물상을 만들고 이것을 극적으로 배열한 거대한 작업으로 관심을 끌었다.
핸슨은 대부분 감정적이거나 격렬한 주제를 택했는데, 주로 베트남 전쟁이나 인종 폭동과 같은 정치적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1970년에 그 자신이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한 이런 작업을 그만두고 평범한 인물을 주재로 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쇠약한 사람, 쇼핑에 지친 사람, 그리고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관광객>(1970)처럼 살찌고, 늙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을 한 관광객 부부를 표현한 작품을 통해 미국의 일상적인 삶이 지니는 울적하고 무미건조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핸슨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미국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그들 존재가 지닌 체념, 공허함, 외로움은 이 계층 사람들의 삶의 진정한 현실을 포착해낸 것이다.
따라서 사실주의자인 나는 인간의 형상에는 관심이 없고 ...
대신 마치 비바람에 상한 풍경처럼 시간이 부식시킨 고통을 겪는 얼굴이나 신체에 더욱 관심이 있다.
삶의 이런 면을 묘사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말하는 일종의 강력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싶다.”

콜로라도 주 덴버 태생으로 줄곧 덴버에서 활동한 존 디 앤드리아John De Andrea(1941~)는 1961~65년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고, 1970년 뉴욕의 O. K. 해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수퍼리얼리즘 조각에서 두에인 핸슨 다음가는 2인자로서 명성을 굳혔다.
핸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디 앤드리아의 인물 조각은 실물로부터 주조되고 세부까지 완벽한 사실적인 것이지만 그가 주로 다룬 모티프는 헨슨의 모티프와는 다르다.
그는 누드의 인물을 집중적으로 다뤘는데, 그의 모델들은 <휴식을 취하는 모델>(1981)에서와 같이 활기는 없으나 젊고 매력적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늘 어떤 미의 관념을 향해 작업한다.
이런 작업의 결과 아무 소득을 거두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아름다운 인물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는 무척 평화로운 세계이다.
적어도 내 조각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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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885~1910년경에 성행한 문학과 미술 운동으로 결속력은 크지 않았으나 직접적이면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 목표에 대한 폭넓은 반동이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는데, 시인 장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르 피가로> 지에 기고한 ‘상징주의 선언’에서 밝혔듯이 “관념에 감각적인 형태의 옷을 입히려고 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이 자신들이 사용한 단어의 발음, 운율과 그 의미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상징주의 화가들도 색채와 선 자체만으로도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상징주의 평론가들은 예술 간의 유사성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는데, 예를 들면 오딜롱 르동의 회화는 샤를 보들레르 혹은 에드거 앨런 포의 시,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 비유되었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은 고향 보르도에서 지내다가 1870년부터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50대가 될 때까지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거의 흑백으로만 석판화와 목탄화 작업을 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글에서 영향을 받아 기이한 아메바 같은 생물, 곤충, 그리고 인간의 머리를 한 식물 같은 독특한 주제를 발전시켰다.
1884년 J. K. 위스망스는 유명한 소설 <거꾸로 A Rebours>가 출판되기 전에는 사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데카당스 문학의 고전인 이 소설에서 내면의 기형적인 즐거움의 세계에서 깨어난 소설의 주인공은 르동의 소묘를 수집한다.
이 때문에 르동은 데카당스 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90년대에 회화로 방향을 바꾸어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색채주의자로서의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유화와 파스텔화 양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1900년 이후에는 수많은 장식작업을 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르동을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았다.

많은 화가들이 상징주의 작가와 같은 종류의 이미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지만, 상징주의자들은 에로틱한 주제와 병적인 주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죽음, 질병, 죄는 그들이 즐겨 다룬 주제였다. 양식상으로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주제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 이국적인 세부 묘사를 보여주는 경우부터 원시적인 단순성을 강조하는 경우,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그리는 것에서부터 안개처럼 모호하게 묘사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후기 인상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여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상징주의는 주로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개되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퍼졌으며 호들러와 뭉크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이 넓은 의미에서 상징주의 화가로 간주된다.
베른 태생의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트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는 처음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풍경화를 그렸고, 1872년부터 제네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코로와 친구인 바르텔르미 망의 지도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홀바인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0년대에는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 종교적인 그림을 그렸고, 취리히 역사박물관의 벽화작품과 같이 과장된 역사화를 그렸다.
1904년 빈 분리파와 함께 개인전을 열었으며 제네바에 정착했다.

고대 북유럽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독일 표현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어린 시절 오슬로에서 수학한 후 1908년 심각한 정신병에 걸릴 때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두루 여행했으며 여생을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뭉크는 현대 노르웨이 예술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며, 특히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에게 뭉크와 반 고흐는 표현주의 회화에 주요한 근거를 제공한 두 명의 예술가였다.
뭉크의 영향은 양식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훨씬 포괄적인 것이었다.
작품에 표현된 현대 상황에 대한 환멸감과 인간의 소외감, 갈등과 신경증과 긴장을 강조하여 스스로 “현대의 영적인 삶”이라 지칭한 것의 도상을 그리려는 열망,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정신적인 고뇌를 강렬하게 상징하고 전달한 점, 이 모든 것은 더욱 고통 받았던 독일 표현주의 주창자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호들러의 종교화와 뭉크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분석적 주제들은 표현적이면서 동시에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에 근거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상징주의로도 분류된다.
상징주의 조각가로는 벨기에의 게오르흐 미네와 노르웨이의 구스타브 비겔란이 있다. 겐트 아카데미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회화와 조각으로 전공을 바꾼 게오르흐 미네Georg Minne(1866~1941)는 처음에는 아카데미적인 자연주의 양식으로 작업했으나 1880년대 후반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양식과 라파엘 전파의 중세주의 경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상징주의 시의 삽화를 그렸다.
미네는 점차 조각으로 관심을 돌려 조각에서 상징주의와 유사한 양식을 찾으려고 했다.
종교적 성향이 주를 이루면서 고딕적인 동시에 아르 누보의 특징을 보이던 이 시기의 미네의 조각은 독일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1881~1919)를 포함한 후배 조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미네는 관람자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동일한 인물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이는 같은 사상을 여러 시각으로 조명해보는 상징주의 방식과 유사했다.
이미 상징주의적인 세계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던 때인 1908년경 미네는 같은 나라 예술가 콩스탕탱 뫼니에Constantin Meunier(1831~1904)와 유사하고 이전보다 자연주의적이며 사회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는 사회-사실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작업한 조각가이며 화가 뫼니에는 낭만적인 아카데미 양식으로 작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젊은 예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오슬로와 코펜하겐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1892~95년 파리와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한 구스타브 비겔란Gustav Vigeland(1869~1943)은 로댕과 함께 몇 달 동안 작업하면서 영향을 받았고, 청동과 화강암, 두 재료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기념비적 리얼리즘을 실현했다.
노르웨이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겔란은 40여 년 이상 오슬로의 프롱네르 공원에 있는 분수의 군상 조각에 전념했다.
150개 이상의 인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부속건물 비겔란 미술관과 함께 시의 재정 후원을 받은 프로젝트였다.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상징주의로 표현된 이 은유적 인물들은 거대한 크기로 감각을 강요하고, 부적절한 리얼리즘이 주는 단조로운 무미건조함으로 감각을 압도한다.

조지 허드 해밀턴은 말했다.
“상징주의자들은 고갱이 말한 ‘개연성이라는 굴레’로부터 회화를 해방시켰으며, 더욱 20세기 회화다운 실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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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


비디오와 TV 장비 그리고 기술을 사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하는 비디오 아트를 프랭크 포퍼는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째,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을 위해 기술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
둘째, 퍼포먼스를 영구적인 형태로 만들기 위해 비디오를 사용하는 것,
셋째, 비디오를 사용해 지배체제에 의해 억압받기 쉬운 이미지와 정보들을 배포하는 것으로 이를 포퍼는 ‘게릴라 비디오’라 칭했다.
넷째, 비디오 카메라와 모니터를 조각적인 설치작업에 이용하는 것,
다섯째, 비디오를 현장 퍼포먼스에 즉흥적으로 사용하는 것,
마지막으로 비디오를 주로 컴퓨터와 함께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보적인 기술적 선언을 하는 것이다.

1959년 볼프 포스텔이 작동 중인 TV 수상기로 아상블라주 작업을 한 바 있으나 하나의 장르로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킨 사람은 한국의 음악가이자 행위예술가 그리고 조각가인 백남준이다.
1950~53년 쾰른에서 사진 석판을 비롯한 판화 기법을 배운 후 1954~55년에 부퍼탈에서 회화와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한 독일 예술가 볼프 포스텔Wolf Vostell(1932~98)은 1955~56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1956~57년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포스텔은 찢긴 포스터 조각으로 콜라주를 구성하고 이를 콜라주의 반대어 데콜라주라고 칭했는데, 이들 작품이 이미 붙여진 포스터와 인쇄물을 찢어내어 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밑에 있는 재료들을 식별할 수 없도록 표면에 채색하고 선으로 낙서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울름, 부퍼탈, 베를린, 뉴욕에서 해프닝을 기획하여 유명해졌으며, 일상생활로부터 가져온 임의적이거나 파괴적인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적인 작품을 구성한다는 의미로 포스텔은 이를 ‘데콜라주-해프닝’이라고 불렀다.

백남준(1932~)은 1964년에 뉴욕에 정착했고, 이듬해 소니사의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가 뉴욕에서 판매되자마자 이를 구입했다.
이 새로운 장치인 녹화기를 구입한 바로 그 날 첫 녹화작업을 하여 그 날 저녁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카페 고고Cafe-a-Go-Go라는 예술가 클럽에서 선보였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조합 피아노>에서 영감을 받아 TV 스크린 위에 자석을 놓아서 방송되는 이미지를 일그러뜨리는 실험을 했다.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의 아들 존 케이지John Cage(1912~92)는 1935~37년 아르놀트 쇤베르크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고, 주로 작곡가로 유명해졌는데, <뉴 그로브 음악 음악가 사전>(1980)에는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다른 어떤 미국 작곡가보다도 세계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케이지는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친구들과 공동작업을 하고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말년에는 판화 제작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케이지는 1943년 뉴욕의 모마에서 자신의 작품 3곡을 포함한 연주회를 지휘했고, 이로써 더욱 확고한 명성을 쌓았다.
임의성과 우연의 효과를 탐닉하고, 피아노 줄 사이에 여러 가지 물체를 삽입하여 타악기고 변형시킨 발명품인 <조합 피아노>와 전자장치의 기이한 소리로 실험하면서 극히 비정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작업으로 전환한 후 종종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1940~94)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특히 무어먼은 두 개의 축소된 TV 스크린으로 된 브라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브라>(1969)로 유명하다.
무어먼은 백남준의 다른 퍼포먼스 작업에서 우발적인 노출이 문제가 되어 체포된 적도 있다.
백남준은 1972년에 말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자들과 1960년대의 극단주의자들의 차이는 전자가 심각하고 염세주의적인 데 비해 후자는 낙관적이며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누가 사회변혁에 더 기여했는가? 극단주의자들이다.
심각한 대륙 미학을 거부하는 존 케이지와 해프닝, 팝아트, 플럭서스 운동의 출현은 1960년대를 예견했다.
1970년대를 무엇이 예견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비디오이다.”

백남준은 1956년 동경 대학을 마치고 독일에 도착하여 1958년 다름슈타트의 하기강좌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케이지를 만났다.
케이지와의 만남은 전통 음악에 회의를 갖고 있던 백남준에게 새로운 돌팔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남준은 기상천외한 해프닝을 행위 했는데 케이지의 새로운 음악과 선불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다다적 돌출행동이었다.

백남준은 말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다. 나의 스승은 내가 원하는 음이 음표들 사이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

실험음악을 추구한 그에게 우연, 침묵, 비경정성 등의 새로운 음악 이론과 연극적 음악 혹은 음악적 연극이라는 새로운 복합매체 공연을 제시한 케이지는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스승이었다.
백남준은 1959년 11월 장 피에르 빌헬름의 뒤셀도르프 22번가 화랑에서 <케이지에게 바침: 테이프 레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다.

1963년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 전시회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자 비디오 아트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는 13대의 장치된 TV와 장치된 피아노를 선보였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반예술적 도전이면서 동시에 장치된 TV는 가해 대상인 TV가 지닌 다원성으로 인해 공격적 제스추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예술의 장르가 되는 미술사에 구두점을 찍는 전시회였다.
장치된 TV는 TV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방송 이미지를 왜곡시키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스크린에 추상적 선묘를 창출하는 기능을 지녔다.
백남준은 조작과정에서 예술적 의도나 기술을 배제하고 순전히 기계적 과정에만 의존하여 우연적이며 무작위적인 이미지를 얻어냈다.
무작위적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각적 비결정성과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13대의 TV 수상기들은 생방송 이미지를 왜곡시켜 일그러진 저명 인사의 얼굴을 만들거나 흑백 이미지의 명암을 도치시키거나 혹은 내부 회로를 변경시켜 화면에 추상적 주사선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황제’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또 한 명의 잘 알려진 비디오 아티스트는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1951~)로서 현학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좀더 진지한 성격을 띤다.
비올라의 대표작은 <멈추지 않고 기도하기>(1992)이며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설명했다.
“현대의 성무일과서이며 영원의 날까지 밤을 세워 비는 이미지로 도시를 위해 그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들은 12시간을 주기로 거리에 면해 있는 창문에 설치된 스크린에 계속 상영된다.
이 이미지들은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계속해서 영사되며, 창문의 안쪽, 위, 아래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윌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 중에서 발췌한 글을 읽는 목소리가 유리창 밖과 안으로 조용히 들려 온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비디오 재생기는 컴퓨터에 의해 하루의 시간과 일치되게 되어 있다. ...
작품을 구성하는 12개의 부분들, 즉 각 기도의 길이는 15분에서 2시간까지 다양하며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주기를 묘사한다.”

비올라의 작품은 많은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3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 도록에는 비올라를 ‘설치의 기술적인 거장’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같은 해 브라이언 슈얼은 비올라의 작품을 “아마추어적이며 무능력한” 것으로 비하하면서 “예술가로서 그의 주장은 변명의 여지없이 현학적이며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변호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
그의 불쾌한 비디오 작품은 화화나 조각의 기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했다.
비디오를 순수하게 시각적 매체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비올라는 백남준을 이어 차세대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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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팝 아트의 승리, 추상표현주의의 종말


스테이블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린 예술가로 알려졌는데 이제 스타들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하는 예술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워홀의 개인전은 적절한 시기에 열렸던 것이었다.

시드니 재니스 화랑에서 성대하게 열린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The New Realists’전(1962. 10. 31~12. 1)에 워홀도 참여했다.
이 전시는 미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로 기록되었다.
유럽과 미국 예술가 29명의 작품 50점이 소개된 이 전시에 워홀은 200개의 수프 통조림을 그린 그림을 출품했고 올덴버그는 비닐에 색칠한 조각을 출품했다.
그 밖에도 영국의 유명한 팝 아트 예술가 피터 블레이크가 참여했으며, 프랑스 작가는 일곱 명이 참여했는데 아르망, 크리스토(불가리아계), 레이몽 하인, 이브 클랭, 마샬 라이세, 다니엘 스포에리, 장 팅글리였다. 미국사람은 열두 명이 참여했는데 워홀과 올덴버그 외에도 짐 다인, 인디애나,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조지 시걸, 탐 베셀만이 포함되었다.

시드니 재니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윌렘 드 쿠닝, 아돌프 가트립, 필립 구스턴,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드코를 후원했던 익히 알려진 중개상이었다.
재니스는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을 도시의 대중적인 예술가들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사실과 아이디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재니스는 맨해튼 57번가 이스트 15번지 5층에 있는 자신의 화랑 공간이 넉넉하지 못해 웨스트 19번지의 상점을 잠시 빌려 같이 전시장으로 사용했다.
전람회는 아주 성공적이었으며 사람들은 화랑과 상점을 오가며 작품들을 관람했다.
프랑스의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카탈로그에서 예술이란 근래의 자연이라고 하면서 근래의 예술에는 기계적이고 산업적이며 광고와 같은 내용들이 넘친다고 기술했다.

사실 재니스 화랑에서 대규모 전람회가 열릴 때만 해도 팝 아트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진 않았다.
평론가들은 전람회에 참여한 예술가들에게 제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더러는 그들을 네오다다이스트라고 불렀고, 신사실주의자라고 불렀던 평론가들도 있었으며 공공주의자(Commonists), 속물주의자(Vulgarists), 간판쟁이(Sign Painters), 미국을 꿈꾸는 자들(New American Dreamers), 대중적 사실주의자(Popular Realists), 사실존중주의자(Factualists)라고도 불렀는데 한결 같이 그들을 유물론자쯤으로 취급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팝 아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을 복수유물론자(Polymaterialists)라고 불렀고 프랑스 사람들은 신사실주의자(Nouveaux R럂listes)라고 불렀다.
다만 영국사람들만이 로렌스 알로웨이를 따라 팝 아트 예술가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러니까 팝 아트는 알로웨이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알로웨이는 이미 1950년대에 이 말을 사용해 대중적인 영화, 공상과학, 광고, 게임기구, 언론에서 취급하는 배우, 가수, 정치가 등의 영웅들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를 팝 아트라고 분류했다.

재니스 화랑에서 열린 이 전람회는 추상표현주의의 몰락을 의미했다.
재니스뿐 아니라 레오 카스텔리, 리처드 벨라미, 앨런 스톤, 그리고 일레노 와드도 더 이상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전람회를 열지 않았다.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잡지 《뉴요커》에서 “‘신사실주의 예술가들’전은 뉴욕 미술계를 강타한 지진이다”라고 기술했다.
《아트 뉴스》의 편집자이자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을 향해 새로운 것이 도착했으니 낡은 것은 떠날 때가 되었다고 했다.
“팝아트 예술가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한다”고 했던 로드코의 말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평이었다.

1962년 12월 13일 모마가 일반인들을 위해 ‘팝 아트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연사로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시걸, 그리고 워홀을 초대했다.
이때부터 팝 아트는 미국 미술의 주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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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왜곡


왜곡은 다섯 가지 이유에서 행해진다.
첫째, 장식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1907~08)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는 딸 다나에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알게 되자 딸을 청동 성채에 가두었다.
다나에를 사랑한 제우스는 금빛 소나기의 형상으로 그녀를 찾아 갔으며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아 길렀다.
아크리시우스 이 사실을 안 것은 4년 후였다.
그는 딸과 손자를 상자에 가두어 바다에 던졌다. 다나에는 아들과 함께 바다를 표류하다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 딕티스에 의해 구조되었다.
딕티스의 형인 폴리덱테스는 이 섬의 통치자였다.
폴리덱테스는 다나에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폴리덱테스는 잔치를 열고 세리포의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말을 한 필씩 갖고 오게 했다.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머리가 뱀인 괴물 고르곤 세 자매의 머리를 베어 말을 사겠다고 공언했다.
폴리덱테스는 페르세우스가 농담한 것인 줄 알았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집행하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일에 로마 신화의 머큐리에 해당하는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와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지혜, 예술, 전술의 여신인 아테네가 도와주기로 했다.
헤르메스에게서 둥근 칼을 받은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고르곤 세 자매 가운데 메두사만은 불멸하지 않는 존재이지만 누구든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바라보지 않고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가 페르세우스의 손을 인도했다고 전해지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목을 베어 가죽부대에 담았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로 날아와 고르곤의 머리를 꺼내 보여주자 폴리덱테스와 섬의 귀족들이 돌로 변해버렸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네에게 바쳤다.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로 돌아왔다. 게임에 참가한 페르세우스가 원반을 던지게 되었는데 아크리시우스 왕이 그 원반에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신탁이 이루어졌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1897년 빈 분리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한 클림트는 아르 누보를 바탕으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양식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전혀 수용되지 않았으며 1900~03년에 제작한 빈 대학의 벽화들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거부되었고, 1902년 분리파 봄 전시회에 출품한 베토벤 프리즈 또한 거부당하자 클림트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클림트의 작품은 오늘 날 구식으로 보이며, 오스카르 코코슈카나 에곤 쉴레와 같은 오스트리아 젊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만 중요하게 평가되지만, 옅은 회화 공간이 특징인 그의 장식적 인물화와 1903년 이후에 제작한 모자이크 같은 풍경화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클림트의 작품을 통해서 예술가의 자유와 학문의 전당 대학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의 자유가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보다 존중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가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오늘 날에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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