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 아트


옵 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인 말로 1965년 뉴욕 모마에서 열린 ‘반응하는 눈’ 전시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하여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인 움직임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시각적 변칙에 관한 예술적 탐구와 지각 심리학에 관한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 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시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각적 모호함을 유발하거나 양립 불가능한 지각적 환영을 동시에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시각 체계는 피로는 느끼고 일관된 영상을 유지하기 위해 눈동자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이런 의도에서 주위를 분산시키는 재현적 주제들을 제거하고 최대한의 기하학적 명료성을 추구하며, 미리 정해진 시각적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 마치 기계와 같이 정밀하게 화면과 모서리를 통제한다.

옵 아트 예술가들의 많은 작품들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잘 알려진 시각적 착각 현상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그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각 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각 현상을 야기시키기 위해 주기적인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또는 축소시키기도 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각 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시키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무늬가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옵 아트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헝가리계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1908~97)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포돌리니-볼크만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며, 1929년에는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알렉산데르 보르트니크의 뮈헤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모홀리-나기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고, 말레비치, 몬드리안 같은 구성주의 화가들과 칸딘스키, 그로피우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바자렐리는 1930년 파리에 정착하여 판화에 전념하다가 1943년 다시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1947년경 자신의 대표적인 양식인 기하적 추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44년 드니즈 르네 화랑과 관련된 예술가들의 그룹이 창립된 이후부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시각 예술 연구회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초기에는 스스로도 인장하듯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경부터 완전 추상을 추구한 에르뱅은 1931년에 추상-창조 협회의 창립에 가담했으며, 1949년에는 <비구상과 비대상 미술 L'Art non-figuratif et non-objectif>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괴테의 색채 이론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후기 작업에 관해 설명했다.
에르뱅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여 기하적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였으며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자렐리는 옵 아트로 발전하게 될 시각적 모호함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일반적으로 옵 아트의 주요 창시자이자 가장 완벽한 실행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1955년경부터 여러 개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이 선언문들은 광학적인 현상을 미술에 이용하는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분야에서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품과 더불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시네티즘 cinetisme’(혹은 아르 시네티크art cinetique)이란 용어를 적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 모호함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환영적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들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도록 했다.
이런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이나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을 통해 야기된 시각적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바자렐리는 예술가란 자유롭게 복수 제작할 수 있도록 원형을 만드는 기술자라고 믿었고, 움직이는 개념에 매료되었으며, 옵 아트 뿐만 아니라 키네틱 아트로도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또한 건축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고르데스에 자신의 미술관을 열었으며, 1976년 엑상프로방스의 자드부퐁에 길이 87미터의 6각형 건물 여섯 동으로 이루어진 재단 건물을 디자인했다.
이 건물에서 높이 8미터의 7개 커다란 방은 다색의 기하적 형태로 뒤덮였고, 외부와 내부의 “풍경”이 결합되어 “색채로 가득 찬 기쁨의 도시”가 이루어졌다.

바자렐리 외에 옵 아트 선구자들로 ‘변형 가능한 부조’를 제작한 이스라엘의 야코프 아감, 진동하는 스크린을 제작한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라파엘 소토, 영국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 바자렐리의 아들 이바랄과 역시 프랑스 태생인 프랑수아 모를레 등이 있다.

야코프 아감Yaacov Agam(야코프 기프슈타인Jacob Gipstein, 1928~)은 1946년부터 예루살렘의 베자렐 미술 학교에서 모르데카이 아르돈Mordecai Ardon(막스 브론슈타인Max Bronstein, 1896~1992)의 지도를 받았다.
이스라엘 화가 아르돈은 1920~25년 바우하우스에서 클레, 이텐, 칸딘스키 등에게서 회화를 배웠고 1926년에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는 베를린에 있던 이텐 미술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3년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베자렐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1940년에 교장이 되었으며, 1952년에 이스라엘 교육부의 미술 고문이 되었다.
1950년대에 유럽에서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초현실주의풍의 강렬한 상상력을 지닌 뛰어난 색채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아감은 아르돈의 권유로 1949년 취리히로 가서 당시 그곳의 공예 학교에 재직하던 이텐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지크프리트 기디온의 강의를 들었으며 막스 빌도 만났다.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감은 실험적 구성주의 경향을 확고하게 따르면서 타시즘과 앵포르멜의 충동적 주관주의를 거부했다.
1951년 무일푼으로 파리로 간 그는 레제와 에르뱅을 알게 되었고, 1953년 파리의 크라방 화랑에서 변화 가능한 회화 작품과 변형시킬 수 있는 부조 작품 45점을 소개했다.
1955년 뷔리, 소토, 탱글리, 콜더 등과 함께 드니즈 르네 화랑에서 열린 ‘움직임’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이 전시회는 키네틱 아트 운동의 획기적인 전시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부터 아감은 움직임과 관람자의 참여를 강조하는 비구상 미술 분야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시각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대위법적 회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에 관해 그는 말했다.
“여기에서는 구조와 색채가 각기 다른 몇 가지 시각적 주제들이 대위법적 구성으로 스며들어 통합된다.
이런 그림의 표면은 연속적인 물결처럼 수직적으로 나란히 끼워진 각기둥 부조로 되어 있다.
그 위에는 서로 다른 주제들이 그려져 있어 리드미컬한 운율 체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덟 개나 되는 분명히 다른 주제들을 한 작품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너는 그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그 주제들이 서로 통합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네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움직일 때 그것들이 어떻게 천천히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와 시각의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완전히 변하는 벽화와 천장화에 뛰어났다.
1966년 이후에 제작된 아감의 ‘변형 가능한 조각품’에는 유희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즉 관람자들이 ‘무수히 많은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도록 작품의 구성 요소를 직접 재배치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또한 빛을 이용한 환경을 창조했으며 빛의 효과를 이용한 실험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67년 파리에서 열린 ‘광선과 움직임’ 전시회에 그의 ‘대위법적 회화’ 가운데 하나를 전시했는데 그것은 <피아트 럭스>로 회전하면서 섬광 촬영장치의 빛을 받았고 말소리와 억양 그리고 크기에 반응했다.
아감은 1974년 예술과 문학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텔아비브 대학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1923~)는 1942~47년 카라카스 조형 예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1947~50년 마라카이보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파리로 가 살면서 베네수엘라와 파리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했다.
소토는 처음에는 후기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리다가 입체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파리로 가기 전에는 말레비치의 그림을 도판으로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몬드리안과 구성주의자들의 작품을 본 후에는 시각적인 현상과 옵 아트를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초 수열, 반복, 연속과 같은 연작을 통해 시리얼 아트를 실험하기도 했다.
<투명한 사각형의 대체>(1953~54)에서는 평편한 표면 위에 공간의 효과를 창조해냈는데, 이후 이것을 직사각형과 곡선의 형태로 디자인하여 채색한 두세 개의 투명한 유리판들을 겹쳐놓음으로써 3차원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작품은 관람자가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관람자의 참여가 요구되었다.

소토는 1961년에 질감과 효과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못이나 나무조각을 박아놓은 고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질감의 효과가 강조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1963년에는 <필적>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직으로 줄이 그어져 있는 평편한 평면 위에 얇고 구부러진 철사들을 매달아 미묘한 진동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진동> 연작이 시작된 것도 거의 같은 시기이다.
이런 작품들 중 일부는 <필적> 연작에서처럼 줄이 그어진 패널의 앞에 매달아놓은 막대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다른 것들은 뒤쪽 패널에 고정되어 균형 있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각형들에 의해 그 효과가 나기도 한다.
관람자의 참여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60년대 후반에 더욱 두드러졌다.

런던 태생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Bridget Louise Riley(1931~)는 1949~53년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샘 레이빈의 지도로 소묘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1952~55년에는 왕립 미술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라일리는 1959년 여름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 드 소스마레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미래주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라일리의 작품은 바자렐리의 기본 개념과 유사하지만 양식과 실제 작업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녀는 옵 아트 예술가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기법에 정통했는데, 특히 크기나 형태를 미묘하게 변화시키거나 연속적인 단위를 배치하여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능통했다.
또한 옵 아트의 특징인 망막 효과를 추구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움직임에 대한 환각적인 환영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망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정감과 질서감을 가진 비교적 작은 영역에 눈을 고정시킴으로써 유발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적인 피로감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서로 충돌하는 패턴과 2차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이 겹쳐져서 안정되고 판단 가능한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라일리는 흑백으로 된 그림으로 옵 아트 작업을 시작했는데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회색조를 거쳐 1965년경에는 유사한 효과를 목적으로 한 색채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작품은 과학적 도형과 같은 정확함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 과학적 도표와 같은 정확함과 정밀함을 요하는 세밀한 밑그림이나 지시 사항에 따라 조수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패턴이 관람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확함 때문이다.

바자렐리의 아들 장-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Jean-Pierre Vasarely Yvaral(1934~)은 파리 응용 미술 학교에서 공학했다. 신경향의 일원이었으며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신경향Nouvelle Tendance(New Tendency)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들과 일본,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표면화되고 있던 매우 다양한 구성주의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표현 양식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미술작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의 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움직임과 같은 직접적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신경향의 두 선구자는 1963년에 타계한 이탈리아 실험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1933~63)와 1962년에 타계한 니스 태생의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62)으로 알려져 있다.
시각 예술 연구회Groupe de Recherche d'Art Visuel(GRAV)는 1960년 파리에서 형성된 단체로 처음에는 11명의 예술가가 참여했으나 후에 6명으로 줄었다. 훌리오 레 파르크, 프랑수아 모를레, 프란시스코 소브리노, 조엘 스탱, 이바랄, 오라시오 가르시아-로시가 그 구성원들이었다.
신경향의 맥락에서 형성된 이 그룹의 주된 목적은 빛과 움직임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미술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하고, 현대적인 산업 재료를 예술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지를 조사했다.
동시대의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관람자의 적극적 동참이 요구되는 미술작품을 제작하려고 했으며, 개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익명의 공동 작품도 제작했다.

이바랄은 허상적인 움직임의 느낌이나 엄격하게 제한된 깊이 내에서 다가오고 물러나는 형태들의 모호한 패턴을 창출하기 위해 주로 무아레moire 패턴에서 흑백의 사용에 집중했다.
프랭크 포퍼는 이바랄이 구사한 무아레 효과에 대해 적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최대한 순수하게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주된 목표이다.
따라서 대상과 대상의 시각적 현존에 대한 우리의 지각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은 빛을 발산하는 실을 사용한 작품의 경우에서 특히 그러하며, 여기에서 개입의 효과는 현저한 비물질화 효과를 창출한다.
‘작품’은 소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 교차하는 선들의 변화는 즉각적으로 지각 가능하다.”

프랑수아 모를레Francois Morellet(1926~)는 옵 아트 중 특정 분야의 선구자이다.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이 그룹은 물론 신경향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모를레는 <구형-씨실> 연작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은 작은 금속대나 금속관을 서로 직각으로 쌓아올려 만든 구형들로 이루어졌다.
이 연작 중 일부는 지름이 1.8m에 달하며 모빌처럼 매달려 있고 광선의 반사에 의한 신비로운 특성을 보여준다.
모를레는 금속 그물을 각기 다른 축으로 하나 하나씩 쌓아올린 <철망> 연작도 제작했다.
그리고 채색한 정사각형들을 임의로 배열하여 회화에서 우연적인 요소를 탐구했다.

미국에서는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1888~1976)가 1950년대에 자신이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의 모순’이라도 부른 바를 증명했다.
독일계 미국 화가이며 디자이너 알베르스는 1913~15년 베를린 왕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에센에 있는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표현주의 경향의 석판화와 목판화를 제작했다.
1919~20년 뮌헨 아카데미에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츠 슈투흐에게 회화를 배웠다.
1920년 바우하우스에 들어갔고 특히 유리 그림과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인에 몰두했다.
1925년 바우하우스 교사가 되었고 타이포그래피와 유리나 금속 실용 제품의 디자인 및 가구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1933년 폐교할 때까지 작업했다.
1933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새로 설립된 실험적인 학교인 블랙 마운틴 칼리지를 처음 방문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알베르스는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1949년까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전공 대학원 과정을 맡아 강의했다.
1950년 예일 대학의 건축 디자인 학부의 주임교수가 되어 1958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재직했으며 그 후 1960년까지 객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알베르스는 미술 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자신의 목적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형태 요소들과 구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했으며, 미술은 이성적으로 통제된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재현적 묘사를 피했으며 “미술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제된 형식을 꾀했고 회화의 수단과 효과 사이의 균형도 추구했다.
즉흥적 경향이나 개성적 표현을 기계와 같은 개성 없는 정밀함으로 대체시킨 그의 작품은 기하적 추상이나 구성주의로 분류된다.
그는 1950년에 시작하여 오랫동안 연작으로 그린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극히 비슷한 색채 범위 내에서 미묘하게 변화시킨 색조들로 채색한 정사각형의 닮은꼴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앞서 칸딘스키가 보여준 것처럼 그는 인접한 색채들이 서로 반응하여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또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경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기초 연구는 칸딘스키보다 더 체계적인 것으로서 그 결과가 <색채의 상호 작용 Interaction of Color>(1963)으로 출간되었다.
시각적인 불명료성을 교묘하게 이용한 그의 구성 작품들 중 일부는 옵 아트에 가깝다.
매우 유사한 색조의 색채들이 병치되었을 때 제3의 색채로 보이게 된다는 시각 현상을 활용한 그의 실험 혹은 옵 아트 예술가들이 창안하고 탐구한 것과 일부 흡사하다.

미국 옵 아트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치Richard Anuszkiewicz(1930~)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 태생의 아누슈키에비치는 1948~53년 클리블랜드 아트 인스티튜트, 1953~55년 예일 대학, 1955~56년 켄트 주립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옵 아트의 특징인 기묘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현란한 효과를 창출하는 기하적 추상화를 매우 꼼꼼한 솜씨로 그렸다.
그는 옵 아트의 원칙을 활용한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다.

옵티컬 아트라는 용어는 1960년대 이후 클레먼트 그린버그를 위시한 평론가들에 의해 비평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후기 회화적 추상에 속하면서 표현적인 성격 없이 완전히 시각적이고 비촉각적인 느낌을 가진 색채 공간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색면 회화와 옵 아트 모두 규모가 매우 중요하여 크기를 축소시킨 도판에서는 작품의 효과를 느끼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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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 포베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는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유행한 상황 미술과 개념 미술 및 일부 미니멀 아트와 유사한 미술 운동이다.
평론가 제르마노 첼란트가 1970년에 토리노 시립 뮤지엄에서 ‘아르테 포베라’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처음 이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이 운동에 대한 기초 책을 편집 간행했다. 아르테 포베라는 전통적인 미술 형식이나 도상의 사용을 거부하며 조직화되지 않은 해프닝을 이 미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 방식으로 보았다.

첼란트는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주로 미술 매체의 물질적인 속성 및 미술 재료의 변하기 쉬운 성질과 관련이 있는, 근본적으로 반상업적이고, 불안정하며, 평범하고, 반형식적인 미술을 표방한다.
이는 실제의 재료들과 전체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참여를 중시하며, 또 그런 현실을 비록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민감하고 지적이며 교묘하고도 사적인 강렬한 방식으로 해석해내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를 강조한다.”

레나토 바리리는 1971년 <오퍼스 인터내셔널 Opus International> 지에 기고한 글 ‘토리노 시립 뮤지엄전에 고나해’에서 적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도상을 거부하는 동시에 가장 관습적인 표현 방식이 되어온 물감을 칠한 캔버스도 거부한다.
대체로 아르테 포베라는 ‘산물’ 혹은 ‘작품’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제작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 대신 작품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제시한다.”

아르테 포베라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마리오 체롤리, 마리오 메르츠 등으로 그들은 자연 그대로의 쓸모없는 재료로 미술작품을 제작했다.
비엘라 태생으로 토리노에서 공부한 후 1957년까지 미술품 복원가인 아버지의 조수로 일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1933~)는 아르테 포베라의 창시자 중 하나로 처음에는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고 1962년에 시작한 ‘거울 회화’로 유명하다.
피스톨레토는 대체로 정지 동작의 실물 크기 인물 사진을 얇은 반투명지에 베긴 다음 윤곽선을 따라 인물을 오려내어 광택을 낸 얇은 강철판에 붙인 뒤 어두운 색조로 그림을 마무리하고 형상 주변의 관람자의 모습이 비칠 수 있는 위치에 철판을 놓았다.
이는 사진 이미지에 움직이는 관람자의 이미지를 끌어들여 그림 속에 관람자를 포함시키는 시도였다.
그는 지각의 두 단계, 즉 금속 표면에 비친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림자와 그림 속의 정적인 인물을 다루는 체계를 만들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1949~55년 로마 미술원에서 공부한 조각가 마리오 체롤리Mario Ceroli(1938~)는 포장 사자에서 얻은 거칠고 두꺼운 판자로 도시나 사람들의 이미지를 만드는 ‘사물-조각’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아르테 포베라 경향을 좇아 거친 목재와 포장 상자로 전화기와 같은 공산품을 확대한 복제품을 조립했다.
또한 안과 겉을 모두 볼 수 있는 새장과 같은 구조물도 제작했다.

평론가 질로 도르플레스는 1970년 아르테 포베라에 관해 “서양 현대 미술사에서 플라스틱이나 금속 등 새로운 재료를 극도로 세련되게 사용한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최근의 경향”이라고 적었다.
그는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리스 예술가 블라시스 카니아리스Vlassis Caniaris(1928~)를 꼽았다.
아테네 태생으로 의학을 공부한 뒤 1955년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마친 카니아리스는 1956년 로마로 갔고, 1960년 파리에 정착했다.
1960년 낡고 찢어진 폴리에스테르 헝겊조각들로 이루어진 그의 전시회는 아르테 포베라를 예고했다.
1960년대 초 아테네 집들의 담벼락에 뉴 리얼리즘 양식으로 일련의 회화 시리즈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의 정치적 불안을 상징하는 정치성 짙은 선전문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1967년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강제수용소를 상징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선동적인 전시회로 인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1973년 외국 작가들과 관련된 연구 계획에 참가하기 위해 독일 학술 교환 서비스의 ‘배를린의 예술가들’ 프로그램에 초대되었으며, 1975년 ‘이주자들’이라고 명명된 ‘상황’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에 아르테 포베라를 추구한 일부 예술가들이 정치적인 참여 미술을 지향하는 설치 작업으로 전환했는데 그 결과는 난해하고 모호한 것이 되고 말았다.
1980년 베른에서 열린 ‘논쟁과 통합’ 전시회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에는 “이탈리아, 나아가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 대해 미술을 수단으로 한 예술가들의 반동이요 비판이며 응답인 이 전시회는 ‘강령’이자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뮤개(1936~)는 커다란 흰색 탁자보 위에 수많은 맑은 유리알들이 가득 들어 있는 거대한 유리잔을 전시했다.
이것은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작품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던 설치 작품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접시에 담아 내게 가져와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수많은 유리알은 소크라테스로부터 파솔리니에 이르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상징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마리오 메르츠Mario Merz(1925~)는 덩굴다발, 기둥, 얇은 알루미늄 조각으로 포장한 흙, 가는 가죽끈, 맥주병, 네온관으로 만든 아치 등 갖가지 재료로 ‘공간-오브제’를 제작했다.
또 다른 빈 방에는 그리스 예술가 야니스 쿠넬리스가 고대 인물을 본뜬 두상을 배치해놓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을 지펴 사방의 벽을 밝히고 있었고 그 불에서 그름 자국을 얻어내려고 천장 아래에 18개의 작은 금속판들을 설치했다.

피라이우스 태생으로 1956년 로마에 정착하여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는 그리스로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에는 글자, 숫자, 기호를 스텔실 기법으로 찍어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 중반에 회화를 그만두고 1967년에는 아르테 포베라 운동에 가담했다.
쿠넬리스의 특징적인 작품은 여러 가지 재료와, 때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한 설치 작업이었다.
‘20세기 이탈리아 미술’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쿠넬리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비구상 계열의 네오-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 가장 복합적이고 시적인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 꾸준히 서장하고 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제작한다. ...
쿠넬리스는 미술품, 심지어는 전시회에 대한 전통 개념에 도전함으로써 그 자신이 ‘무력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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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 누보


아르 누보Art Nouveau는 1880년부터 1910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 양식을 일컫는 명칭으로 19세기 후반의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이 양식 운동은 과거의 양식들을 모방하고 변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고 한 신중한 시도였다.
본래 장식미술 양식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가구, 판화작품, 삽화 등의 실용, 응용미술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회화와 조각 운동이 파리에서 시작된 것에 반해 아르 누보는 주로 런던에서 발생되어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독일에서는 1896년 창간된 잡지 <디 유겐트 Die Jugend>에서 유래한 명칭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zessionstil, 이탈리아에서는 아르 누보 디자인 보급에 크게 기여한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의 리버티 상회 이름을 딴 스틸레 리버티Stile Liberty,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타Modernista로 불렸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189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점을 반영하여 모던 스타일로 통했다.

영국 아르 누보 양식의 기원은 윌리엄 모리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로부터 윌리엄 블레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양식을 주도한 예술가들로는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 오브리 비어즐리, 찰스 리키츠, 월터 크레인을 비롯하여 글래고스 출신 건축가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및 프란시스 맥도널드와 마거리트 맥도널드 자매를 꼽을 수 있다.
수많은 자지들도 아르 누보 양식의 유행에 기여했는데, 그중 중요한 잡지로 맥머도의 <샌추리 길드 목마 The Century Guild Hobby Horse>(1884), 리키츠의 <더 다이얼 The Dial>(1889), 비어즐리의 <더 옐로우 북 The Yellow Book>(1894~95)과 <더 사보이 The Savoy>(1896~98) 등을 들 수 있다.
1893년에 창간된 <더 스튜디오 The Studio> 역시 아르 누보 양식을 선전하는 데 기여했고, 리버티 상회가 날염한 직물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양식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유럽에서는 브뤼셀에서 처음 아르 누보 양식이 분명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예술가는 빅토르 오르타와 앙리 반 데 벨데였다.
안트베르펜 태생의 벨기에 화가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는 신인상주의 양식으로 작업했고, 1901년부터 바이마르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2년부터는 가구 디자인과 실내장식에 전념했으며 1902~14년 바이마르에 응용미술연구실을 설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브뤼셀과 스위스에서 살다가 1926년 겐트 대학의 건축사 교수가 되었으며 겐트에 응용미술학교를 세웠다.

빅토르 오르타는 타셀 저택의 계단 설계에서 훗날 ‘벨기에식 선 장식’으로 불리게 될 양식을 창안했다.
벨기에 아르 누보 양식은 처음에는 영국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884년 이후 그루프 데 뱅이 기획한 일련의 전시회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맥머도의 친구들이 허버트 혼과 셀윈 이미지가 만든 응용미술 작품들과 책 삽화가 아방가르드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그루프 데 뱅의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인 유명한 화가 제임스 엔소르는 매우 개성적인 표현주의 화풍을 구사했지만 아르 누보 양식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루프 데 뱅Groupe des Vingt은 1883년 브뤼셀에서 결성되어 1893년 해체된 아방가르드 예술가 모임으로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의 전신이다.
라 리브르 에스테티크La Libre Esthetique는 그루프 데 뱅의 작품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1884년 브뤼셀에서 결성된 예술가 협회로 1914년까지 유지되었고 당시 벨기에 아방가르드 예술가 대부분 참여했다.
이들은 혁신적인 외국 미술의 전시회를 주최했으며 벨기에 예술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했다.
그루프 데 뱅은 벨기에와 외국의 혁신적인 미술을 장려하고 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엔소르를 비롯한 당시 벨기에 현대 미술을 선도하고 토대를 이룬 예술가들로 구성되었다.
1881년에 창간된 <현대 미술 L'Art Moderne> 지를 통해 주로 선전 활동했다.

아르 누보 양식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제임스 엔소르James Ensor(1860~1949)는 1877~79년 브뤼셀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플랑드르 출신의 어머니가 기념품 상점을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팔던 중국 자기, 카니발 가면, 조개껍질 등은 엔소르의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터너의 영향을 받아 1890년대에는 보다 밝은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엔소르는 아방가르드의 색채를 띤 그루프 데 뱅의 창립 회원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이 그룹의 전시회에서 계속 거부당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 대부분은 1900년 이전에 완성되었으나 이런 매우 독창적인 작품들은 20세기 미술 동향의 많은 부분을 예고했다.
그는 플랑드르 표현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를 선구자로 꼽았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대에 유행한 영국 선호 풍조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런 장식품들 이외의 영국 아르 누보 양식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양식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로는 르네 랄리크Rene Lalique(1860~1945)의 장신구와 유리제품, 에밀 갈레Emile Galle(1846~1904)가 만든 유리제품을 들 수 있다.
건축에서는 엑토르 그리마르Hector Grimard(1807~1942)의 파리 지하철 설계를 들 수 있다.

스페인의 아르 누보 양식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특히 그곳에서 활동한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야(1852~1926)는 훗날 아르 누보 운동 전반에 걸쳐 주목할 만한 천재로 통했다.
그 외에도 루이스 도네미크 이 몬타네르Luis Domenech y Montaner(1850~1923)가 지은 팔라우데 라 무시카 카탈라나는 중요한 아르 누보 양식 건축물로 꼽힌다.
이 건축물은 아르 누보 양식의 특성을 과거의 역사적 건축 양식들과 절묘하게 절충하고 있어 슈무츨러는 “역사주의를 가미하여 격을 떨어뜨린 혼성 아르 누보 양식을 유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이 건축은 그와 달리 가장 빼어나고도 주요한 예”라고 적었다.

독일의 유겐트슈틸 운동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조각가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1863~1927)의 태피스트리 전시회를 계기로 뮌헨에서 예기치 않게 시작되었으며, 그 후 두 갈래로 나누어져 발전했다.
꽃 장식 유겐트슈틸 양식은 영국의 꽃 장식 아르 누보 양식을 기초로 한 것으로 1900년 이전의 응용미술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독일에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오토 에크만Otto Eckmann(1865~1902)을 꼽을 수 있다.
정기간행물 <판 Pan>의 삽화로 그린 작품 대부분이 걸작으로 꼽힌다.
1900년 이후에는 1899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벨기에 건축가 반 데 벨데의 영향을 주로 받아 추상적인 유겐트슈틸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축가 페터 베렌스 역시 이런 양식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뒤늦게 빈을 중심으로 아르 누보 양식이 유행했는데 오스트리아 아르 누보 예술가들은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에서 벗어난 반면 매킨토시와 맥머도의 제자인 찰스 앤즐리 보이지의 영향을 받아 거의 기하적 양식을 추구했다.
1895년 이후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를 비롯하여 건축가이자 설계사인 요제프 호프만과 요제츠 올브리히, 설계사 콜로만 모저를 들 수 있다.
아르 누보 양식은 빈의 정기간행물 <베르 사크룸 Ver Sacrum>을 통해 보급되어으며, ‘제체시온슈틸’이라는 명칭은 빈 분리파 전시회들(1889~1899)을 위해 올브리히가 설계한 전시회장에서 따온 것이다.
1898~1903년에 발행된 빈 분리파의 기관지 <베르 사크룸>은 빈 아르 누보의 정기간행물 중 가장 뛰어났다.
다뱡면의 문학작품과 삽화, 그래픽 작품을 주로 실었으며 장식미술과 건축에 대한 기록은 별로 많이 다루지 않았다.
베르 사크룸은 라틴어로 봄의 향연이란 뜻이다.

이탈리아에서 아르 누보 양식은 대부분 영국과 빈의 건축 양식에서 따온 세부 장식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이 경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국가적으로 통일된 고유의 아르 누보 양식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했다.
주요 인물로는 꽃 모양 장식 양식을 창안해낸 주세페 솜마루가Giuseppe Sommaruga(1857~1932)를 들 수 있다.

미국에서는 개성이 전혀 다른 두 명의 예술가가 아르 누보 양식을 주도했다.
건축가인 루이스 설리번은 비록 자신이 설계한 건출물 자체에서는 아니더라도 장식을 통해 아르 누보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식이란 구조에 역점을 두어 건축과 더불어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작품에서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지는 않았다.
반면 루이스 컴펏 티파니는 1880~1890년에 제작한 유리제품 디자인을 통해 매우 개성적이며 우아한 아르 누보 형태를 개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 누보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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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표현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는 신야수주의 혹은 격렬하고 거친 회화에 붙인 명칭으로 프랑스에서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이탈리아에서는 트랜스아방가르드Transavantgarde로 불렸다.
이탈리아어로 ‘아방가르드를 넘어선’이란 뜻의 트란스아반구아르디아transavanguardia를 번역한 말이다.
신표현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며 더 넓은 의미로 진보적 경향을 보여주는 미술을 말한다.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20세기의 미국 미술’ 전시회(1993)의 카탈로그에 수록된 글에서 이 용어를 만들어낸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는 신표현주의의 줄리언 슈나벌 등을 “뜨거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네오-지오Neo-Geometric Conceptualism의 제프 쿤스 등을 “차가운 트랜스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분류했다.
네오-지오는 신기하적 개념주의를 줄인 말로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사용하여 신표현주의의 주정주의에 반발한 미국 예술가 그룹의 작품을 일컬은 명칭이다.

신표현주의는 1970년대 말에 나타난 회화 운동으로 재료를 처리하는 거친 방식이나 강렬한 감정적 주관성을 특징으로 하며, 작품의 크기가 크고 짧은 시간에 제작되고, 때로는 키퍼의 경우 지푸라기를 부착하고, 슈나벌의 경우 깨진 도자기를 캔버스에 직접 부착했다.
보통 구상적이며 폭력과 죽음을 모티프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지는 때때로 진동하는 표면 효과에 흡수된다.
신표현주의는 1980년대 초 많은 대규모 전시회를 통해 확고한 위치를 점했는데 1981년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정신’ 전시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운동은 1970년대의 ‘무엇이든 사용 가능하다 anything goes’는 태도로 좀더 전통적인 형태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런 경향은 화상이나 콜렉터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지만 평론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슈나벌을 선두로 몇몇 신표현주의 예술가들은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많은 평론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관습적인 기법을 모두 무시하고 일부러 형편없게 만들었다고 혹평했다.
실제로 ‘나쁜 회화 Bad Painting’란 제목으로 1978년 뉴욕의 신현대 뮤지엄에서 전시회가 열렸으며, ‘나쁜 회화’란 용어는 이런 맥락의 신표현주의 작품 일부에 적용되었다.
펑크 아트와 ‘어리석은 회화 Stupid Painting’란 용어들은 ‘나쁜 회화’를 대신할 만한 했다.

뉴욕의 브루클린 태생으로 휴스턴 대학을 1972년에 졸업한 줄리언 슈나벌Julian Schnabel(1951~)은 1976년 휴스턴 현대 뮤지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9년 뉴욕의 메리 분 화랑에서 연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1980년대에는 화단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급부상했다.
1982년에 세계 주요 현대 뮤지엄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시립 뮤지엄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언론은 슈나벌을 화가라기보다는 대중적 스타로 다루는 일이 종종 있었다.
슈나벌의 작품은 규모가 크고 신표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카페트, 벨벳과 같은 특이한 재료 위에 그리기도 했으며 깨진 도자기로 표면을 덮거나 다른 삼차원적 물체와 통합시키기도 했다.
때때로 캔버스 틀 자체가 중앙으로 돌출되어 삼차원적 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슈나벌은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했다.
“나의 작품은 나 자신에 대한 것보다는 세상에 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나는 어떤 감정적 상태, 사람들이 실제로 몰입할 수 있는 상태를 목표로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반겼지만 1970년부터 <타임> 지의 평론가로 활약하는 로버트 휴스Robert Hughes(1938~)는 “슈나벌의 작품을 그림이라고 하는 것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기름기 흐르는 가슴 근육의 움직임을 연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혹평했다.
슈나벌의 엄청난 작품 가격은 내재적 가치보다는 언론의 과대 광고와 작품의 투자가치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90년의 한 경매에서 슈나벌의 작품에 대해 단 한건의 입찰도 시도되지 않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박수를 쳤다.
1983년에 조각을 시작했고, 낙서 화가 장 미셀 바스키아에 관한 영화 <바스키아>(1996)를 감독했다.
현재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미국 신표현주의자들로 로버트 쿠시너Robert Kushner(1949~), 데이비드 샐리David Salle(1952~) 등이 있다.
쿠시너는 신표현주의 외에도 신장식주의New Decorativeness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신장식주의는 추상, 구상 혹은 이 둘을 혼합한 복잡한 패턴을 밝게 채색한 회화를 지향한 운동으로 1970년대 중반 뉴욕에서 발생했다.
이런 패턴과 장식 운동은 미니멀 아트의 엄격한 비인격성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장식 미술은 미술에 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하므로 순수 미술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옹호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몇몇 남성이 가세했으며 쿠시너와 조각가 네드 스미스Ned Smith(1948~)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신표현주의는 미국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번성했고 독일의 신표현주의자들은 종종 ‘새롭고 거친 사람들 Neue Wilden’로 불렸다.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1938~)는 화가, 판화가, 소묘가, 조각가로 동베를린에서 공부했지만, 1956년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이때부터 본래의 성인 케른Kern 대신에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일부러 거칠고 조야한 그림을 그려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런 회화를 통해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만취>(1962~63)로 이를 <엉망이 되어 가는 밤>으로도 불린다.
이 작품은 커다란 성기를 가진 남성을 보여주는데, 에드워드 루시-스미스는 이 작품이 자화상으로 추측했다.
1963년 이 작품이 처음 베를린에서 소개되었을 때 경찰이 압수했다.
1969년부터 이미지의 위아래를 거꾸로 그리기 시작하여 더욱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너선 파인버그는 저서 <1940년 이후의 미술>(1995)에서 바젤리츠의 “위아래를 뒤바꾼 거꾸로 된 회화”를 “주제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켜 표현적인 표면으로 관심의 초점을 돌리려는 장치”라고 했다.
대니얼 휠러는 저서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1991)에서 바젤리츠의 색채에 대해 “보기 드물게 충만하고 원숙한 색채”라고 격찬했으며, 그의 작품이 “풍부하나 문제가 있는 과거를 창조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다시 하나로 통합된 문화를 제시하는 르네상스적 기품과 현존”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와는 반대로 로버트 휴스는 바젤리츠를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된 예술가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법학을 공부하고 간헐적으로 회화 교육을 받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는 화가이며 조각가 호르스트 안테스Horst Antes(1936~),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키퍼는 초기에 개념 미술 작업을 하면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자화상 사진 연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로 전향하면서 신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주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작품은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거대한 캔버스로 종종 밀짚과 같은 물질이 첨가되기도 했으며 페인트와 피가 함께 섞이기도 했다.
독일의 역사와 북유럽의 신화를 다루었고 독일의 최근 역사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1987년 로버트 휴스는 기퍼에 관해 “대서양 양편을 통털어 그의 세대에 가장 위대한 화가 ... 지난 10년 동안 상징적 시각의 명백한 위대함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시각예술가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내적인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적인 공허감”을 나타냈다고 혹평한 평론가도 있다.

바델리츠와 키퍼 외에도 독일 신표현주의자들로 라이너 페팅Rainer Fetting(1949~), 외르크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1945~), 베른트 코베를링Bernd Koberling(1938~), 마르쿠스 뤼페르츠Markus Lupertz(1941~), A. R. 펭크A. R. Penck(랄프 빙클러Ralf Winkler, 1939~) 등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산드로 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밈모 팔라디노Mimmo Paladino(1948~)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피렌체 태생으로 프렌체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산드로 키아Sandro Chia(1946~)는 1970년대 초에 개념 미술과 퍼포먼스를 시도했으나 1975년 회화로 복귀했으며, 1970년대 말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패러디하여 영웅적인 상황을 흉내낸 장면을 설정하고 팽팽한 근육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여 동시대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다.
<작업 중인 용감한 소년>(1981)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로버트 휴스는 키아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에 대해 “고전 조각에서 유래한 것 같은 자세로 바람을 가르면서 석탄을 운반하는 여성스러운 인부들”이라고 적었다.
키아는 또한 회화와 유사한 성격의 조각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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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


단토는 팝아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미술운동으로 본다.
그는 팝아트가 1960년대 초에 부지불식간에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부지불식간이라고 한 것은 추상 표현주의 회화에 나타난 물감 흘리기와 물감 떨어뜨리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면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가 이런 충동적 동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때를 그는 1964년으로 꼽는다.

단토는 미국 미술에 변화를 일으킨 팝아트를 좀더 철학적 방식으로 생각해야 함을 주장한다.
단토의 내러티브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에 근거하면, 팝아트는 미술의 철학적 진리를 자의식으로 가져옴으로 해서 서양 미술의 위대한 내러티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팝아트에 대한 이런 고견을 갖고 있던 그가 파리의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와 1964년 4월 스테이블 화랑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의 <브릴로 상자 Brillo Box>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 작품을 보고 미국 미술계를 규정하고 있던 논쟁의 구조가 적응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호퍼와 그 밖의 주류 사실주의, 추상이나 모더니즘 따위의 이론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된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반목이 매우 심화되어 있었다.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화가들은 추상을 ‘딱딱한 표현 gobbledegood’이라고 부르면서 모마MoMA가 추상을 선호하는 데 대해 심히 반발했다.
그들은 1959~60년 휘트니 연감에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데 대해 경악해했다.
단토는 사실주의와 추상 사이의 구분에 대해 양측이 얼마만큼의 도덕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은 거의 신학적 강도였으며 문명의 다른 단계였더라면 분명 화형감이 될 정도로 반목이 심했음을 지적한다.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이단으로 보일 정도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미술계에는 그린버그의 영향이 컸으며 사실주의에 대한 추상의 우월주의가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린버그는 1939년에 추상을 일종의 역사적 불가피성 혹은 진보 또는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논문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서 주장했듯이 그린버그에게 추상은 “역사로부터 나오는 명령”이었다.
1959년에 발표한 논문 <추상미술의 옹호>에서 그린버그는 재현이란 부적합하다며 “티치아노의 회화가 갖고 있는 추상적 형식적 통일성이 그 회화가 묘사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특질이다”라고 주장했다.
단토는 그린버그의 불공평한 특질 부여를 문제 삼았다.
단토는 그린버그가 호퍼를 비롯한 사실주의 회화를 역사적 진화의 낮은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데 분통을 터뜨린다.
그린버그의 독선은 그 수위를 넘었는데, 1961년에는 추상마저도 역사적 운명의 분위기를 상실했다고 추상 표현주의의 조각적 분위기를 비판했으며, 추상 표현주의는 1962년 거의 종결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상과 비구상 혹은 사실주의와 추상의 차이는 없다.
둘 다 양식의 문제이고, 그린버그가 말한 대로 좋고 나쁘고의 차이가 아니며, 역사적 진화와는 무관하다.
단토는 모든 양식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양식은 작품의 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단토가 제7장에서 말하는 ‘지나간 미래’는 호퍼를 비롯한 미국의 전통 미술이 그린버그에 의한 모더니즘론의 등장과 모마를 비롯한 뮤지엄들의 추상 전시회 선호로 인해 지나간 미래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 회화의 미래는 모마에 의해 정의된 모더니즘의 초기에 추상이 자리를 차지했던 자리에다 온갖 회화를 죄다 쑤셔놓은 그런 꼴의 미래였다.
추상을 수많은 미술적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역사적 진보의 개념으로 본 것은 그린버그의 큰 오류였다.
게다가 조각 및 그 밖의 장르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술과 회화를 동의어로 취급한 것은 변명하기 어려운 과오였다.

단토는 이런 미국의 미술계에서 변화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팝아트를 꼽는다.
마침 그때 단토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철학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는 <미술계 The Art World>란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미술을 다룬 최초의 철학적 노력이었다.
그의 논문은 미술계와 철학계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왔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단토는 팝아트가 고대의 가르침, 즉 플라톤의 가르침을 뒤집어엎는 방식이었음을 지적했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실재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좌천시킨 플라톤의 사상이 서양 미술의 근간을 이루어왔는데, 이것이 워홀을 비롯한 팝아티스트들에 의해 붕괴되었다는 것이 단토의 주장이었다.

그린버그는 컬러필드Color Field 이후부터 1992년 현재까지를 팝아트를 시작으로 30년 동안의 일련의 미술을 미술사에 있어 퇴행의 시기로 보고 “지난 3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데카당스의 시기로 간주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단토는 오히려 지난 30년이 미술사상 예술가들이 가장 자유를 구가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미술이 본연의 자리를 회복한 것으로 보고 매우 희망적임을 지적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미술사의 개념 자체가 붕괴되었으며 제6장에서 언급한 대로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가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술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주류와 비주류로 분리되어 있었다.
유럽에서 보면 시베리아나 아프리카의 미술은 ‘역사의 경계’ 또는 ‘역사의 울타리’ 밖에서 이루어진 비주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미술이 동등하게 인정받는 다원주의가 도래하자 경계는 자연히 붕괴되었다.
역사는 자유를 위해서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단토의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헤겔은 한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소수가 자유를 누리며,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게 될 터인데 그때는 역사의 울타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단토의 역사의 종말 혹은 탈역사는 역사 이후를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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