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 아트
옵 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인 말로 1965년 뉴욕 모마에서 열린 ‘반응하는 눈’ 전시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각적 모호함과 최소한의 시각적 장치를 이용하여 시각에 충격과 혼란을 줌으로써 작품이 진동하거나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환각적인 움직임을 창출하는 기하학적 추상의 한 갈래를 가리킨다.
시각적 변칙에 관한 예술적 탐구와 지각 심리학에 관한 과학적 탐구 사이의 경계는 매우 미미하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옵 아트의 목적은 망막에 매우 강력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시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각적 모호함을 유발하거나 양립 불가능한 지각적 환영을 동시에 제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 시각 체계는 피로는 느끼고 일관된 영상을 유지하기 위해 눈동자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이런 의도에서 주위를 분산시키는 재현적 주제들을 제거하고 최대한의 기하학적 명료성을 추구하며, 미리 정해진 시각적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 마치 기계와 같이 정밀하게 화면과 모서리를 통제한다.
옵 아트 예술가들의 많은 작품들은 지각 심리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 잘 알려진 시각적 착각 현상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그들은 화면이 진동하거나 뒤틀리는 듯한 착각 현상을 유발하기 위해 크기, 형태, 방향, 명암, 많은 연속 단위 등을 체계적으로 변형시키기도 하고, 화면의 팽창과 확대 등과 같은 착각 현상을 야기시키기 위해 주기적인 패턴 체계 속에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대 또는 축소시키기도 했다.
이런 것들과 그 밖의 또 다른 매우 미묘하고 복잡하게 조작된 패턴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각 현상을 일으켜 모호하고 대립적인 착시를 유발시키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들이다.
무늬가 전면에 걸쳐 그려진 화면에서 형태들은 흔들리거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무한히 후퇴하는 듯한 착각 현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종종 가상의 비현실적인 공간을 창출하기도 한다.
옵 아트 개척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헝가리계 프랑스 화가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1908~97)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포돌리니-볼크만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며, 1929년에는 ‘부다페스트의 바우하우스’로 불린 알렉산데르 보르트니크의 뮈헤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모홀리-나기를 비롯한 여러 교수들의 지도를 받았고, 말레비치, 몬드리안 같은 구성주의 화가들과 칸딘스키, 그로피우스의 작품을 알게 되었다. 바자렐리는 1930년 파리에 정착하여 판화에 전념하다가 1943년 다시 회화 작업을 시작했다.
1947년경 자신의 대표적인 양식인 기하적 추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44년 드니즈 르네 화랑과 관련된 예술가들의 그룹이 창립된 이후부터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시각 예술 연구회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초기에는 스스로도 인장하듯 오귀스트 에르뱅Auguste Herbin(1882~1960)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경부터 완전 추상을 추구한 에르뱅은 1931년에 추상-창조 협회의 창립에 가담했으며, 1949년에는 <비구상과 비대상 미술 L'Art non-figuratif et non-objectif>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괴테의 색채 이론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후기 작업에 관해 설명했다.
에르뱅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여 기하적 추상에 몰두한 몇 안 되는 프랑스 화가 중 하나였으며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바자렐리는 옵 아트로 발전하게 될 시각적 모호함을 점차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일반적으로 옵 아트의 주요 창시자이자 가장 완벽한 실행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1955년경부터 여러 개의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이 선언문들은 광학적인 현상을 미술에 이용하는 것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분야에서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품과 더불어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시네티즘 cinetisme’(혹은 아르 시네티크art cinetique)이란 용어를 적용한 작품들을 통해 시각적 모호함을 통해 움직이는 듯한 환영적 인상을 창출해내는 방법과 수단을 탐구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 나오고 들어가는 형태들을 서로 교차시키면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가 나타나도록 했다.
이런 작품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이나 미학적 경험이 아니라 지각의 불안을 통해 야기된 시각적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바자렐리는 예술가란 자유롭게 복수 제작할 수 있도록 원형을 만드는 기술자라고 믿었고, 움직이는 개념에 매료되었으며, 옵 아트 뿐만 아니라 키네틱 아트로도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또한 건축가들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70년 고르데스에 자신의 미술관을 열었으며, 1976년 엑상프로방스의 자드부퐁에 길이 87미터의 6각형 건물 여섯 동으로 이루어진 재단 건물을 디자인했다.
이 건물에서 높이 8미터의 7개 커다란 방은 다색의 기하적 형태로 뒤덮였고, 외부와 내부의 “풍경”이 결합되어 “색채로 가득 찬 기쁨의 도시”가 이루어졌다.
바자렐리 외에 옵 아트 선구자들로 ‘변형 가능한 부조’를 제작한 이스라엘의 야코프 아감, 진동하는 스크린을 제작한 베네수엘라의 헤수스 라파엘 소토, 영국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 바자렐리의 아들 이바랄과 역시 프랑스 태생인 프랑수아 모를레 등이 있다.
야코프 아감Yaacov Agam(야코프 기프슈타인Jacob Gipstein, 1928~)은 1946년부터 예루살렘의 베자렐 미술 학교에서 모르데카이 아르돈Mordecai Ardon(막스 브론슈타인Max Bronstein, 1896~1992)의 지도를 받았다.
이스라엘 화가 아르돈은 1920~25년 바우하우스에서 클레, 이텐, 칸딘스키 등에게서 회화를 배웠고 1926년에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는 베를린에 있던 이텐 미술 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3년 이스라엘로 이주했으며, 베자렐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고, 1940년에 교장이 되었으며, 1952년에 이스라엘 교육부의 미술 고문이 되었다.
1950년대에 유럽에서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고 초현실주의풍의 강렬한 상상력을 지닌 뛰어난 색채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아감은 아르돈의 권유로 1949년 취리히로 가서 당시 그곳의 공예 학교에 재직하던 이텐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지크프리트 기디온의 강의를 들었으며 막스 빌도 만났다.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감은 실험적 구성주의 경향을 확고하게 따르면서 타시즘과 앵포르멜의 충동적 주관주의를 거부했다.
1951년 무일푼으로 파리로 간 그는 레제와 에르뱅을 알게 되었고, 1953년 파리의 크라방 화랑에서 변화 가능한 회화 작품과 변형시킬 수 있는 부조 작품 45점을 소개했다.
1955년 뷔리, 소토, 탱글리, 콜더 등과 함께 드니즈 르네 화랑에서 열린 ‘움직임’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이 전시회는 키네틱 아트 운동의 획기적인 전시회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부터 아감은 움직임과 관람자의 참여를 강조하는 비구상 미술 분야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시각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수많은 구성 요소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대위법적 회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이런 작품에 관해 그는 말했다.
“여기에서는 구조와 색채가 각기 다른 몇 가지 시각적 주제들이 대위법적 구성으로 스며들어 통합된다.
이런 그림의 표면은 연속적인 물결처럼 수직적으로 나란히 끼워진 각기둥 부조로 되어 있다.
그 위에는 서로 다른 주제들이 그려져 있어 리드미컬한 운율 체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덟 개나 되는 분명히 다른 주제들을 한 작품에 통합시키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너는 그림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그 주제들이 서로 통합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네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움직일 때 그것들이 어떻게 천천히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감은 관람자의 위치와 시각의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완전히 변하는 벽화와 천장화에 뛰어났다.
1966년 이후에 제작된 아감의 ‘변형 가능한 조각품’에는 유희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즉 관람자들이 ‘무수히 많은 공간’을 창출해낼 수 있도록 작품의 구성 요소를 직접 재배치하도록 한 것이다.
그는 또한 빛을 이용한 환경을 창조했으며 빛의 효과를 이용한 실험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67년 파리에서 열린 ‘광선과 움직임’ 전시회에 그의 ‘대위법적 회화’ 가운데 하나를 전시했는데 그것은 <피아트 럭스>로 회전하면서 섬광 촬영장치의 빛을 받았고 말소리와 억양 그리고 크기에 반응했다.
아감은 1974년 예술과 문학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텔아비브 대학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헤수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1923~)는 1942~47년 카라카스 조형 예술 학교에서 공부하고 1947~50년 마라카이보 미술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파리로 가 살면서 베네수엘라와 파리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했다.
소토는 처음에는 후기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리다가 입체주의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파리로 가기 전에는 말레비치의 그림을 도판으로 접하고 영향을 받았으나 몬드리안과 구성주의자들의 작품을 본 후에는 시각적인 현상과 옵 아트를 실험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초 수열, 반복, 연속과 같은 연작을 통해 시리얼 아트를 실험하기도 했다.
<투명한 사각형의 대체>(1953~54)에서는 평편한 표면 위에 공간의 효과를 창조해냈는데, 이후 이것을 직사각형과 곡선의 형태로 디자인하여 채색한 두세 개의 투명한 유리판들을 겹쳐놓음으로써 3차원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런 작품은 관람자가 움직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에 관람자의 참여가 요구되었다.
소토는 1961년에 질감과 효과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고 못이나 나무조각을 박아놓은 고무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질감의 효과가 강조된 일련의 작품을 제작했다.
1963년에는 <필적>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직으로 줄이 그어져 있는 평편한 평면 위에 얇고 구부러진 철사들을 매달아 미묘한 진동을 창출해내는 것이었다.
<진동> 연작이 시작된 것도 거의 같은 시기이다.
이런 작품들 중 일부는 <필적> 연작에서처럼 줄이 그어진 패널의 앞에 매달아놓은 막대기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다른 것들은 뒤쪽 패널에 고정되어 균형 있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각형들에 의해 그 효과가 나기도 한다.
관람자의 참여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60년대 후반에 더욱 두드러졌다.
런던 태생의 브리짓 루이즈 라일리Bridget Louise Riley(1931~)는 1949~53년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샘 레이빈의 지도로 소묘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1952~55년에는 왕립 미술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라일리는 1959년 여름에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렸고 이듬해 드 소스마레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미래주의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라일리의 작품은 바자렐리의 기본 개념과 유사하지만 양식과 실제 작업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그녀는 옵 아트 예술가들이 사용한 대부분의 기법에 정통했는데, 특히 크기나 형태를 미묘하게 변화시키거나 연속적인 단위를 배치하여 올오버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 능통했다.
또한 옵 아트의 특징인 망막 효과를 추구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움직임에 대한 환각적인 환영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망막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정감과 질서감을 가진 비교적 작은 영역에 눈을 고정시킴으로써 유발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각적인 피로감이 빠르게 일어나면서 서로 충돌하는 패턴과 2차적인 형태들이 나타나며, 이것들이 겹쳐져서 안정되고 판단 가능한 지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라일리는 흑백으로 된 그림으로 옵 아트 작업을 시작했는데 거의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회색조를 거쳐 1965년경에는 유사한 효과를 목적으로 한 색채 구성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작품은 과학적 도형과 같은 정확함과 필연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 과학적 도표와 같은 정확함과 정밀함을 요하는 세밀한 밑그림이나 지시 사항에 따라 조수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패턴이 관람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정확함 때문이다.
바자렐리의 아들 장-피에르 바자렐리 이바랄Jean-Pierre Vasarely Yvaral(1934~)은 파리 응용 미술 학교에서 공학했다. 신경향의 일원이었으며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했다.
신경향Nouvelle Tendance(New Tendency)은 1960년대 초반 대부분의 서유럽 나라들과 일본,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표면화되고 있던 매우 다양한 구성주의적 경향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표현 양식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미술작품의 비개성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과학의 기술의 차용, 그룹 활동과 익명성 예찬, 빛, 소리, 실제 움직임과 같은 직접적 자극 이용, 전통적인 미학적 기준에 대한 성상 파괴적 태도 등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앵포르멜, 타시즘,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표현적 추상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신경향의 두 선구자는 1963년에 타계한 이탈리아 실험 예술가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1933~63)와 1962년에 타계한 니스 태생의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Yves Klein(1928~62)으로 알려져 있다.
시각 예술 연구회Groupe de Recherche d'Art Visuel(GRAV)는 1960년 파리에서 형성된 단체로 처음에는 11명의 예술가가 참여했으나 후에 6명으로 줄었다. 훌리오 레 파르크, 프랑수아 모를레, 프란시스코 소브리노, 조엘 스탱, 이바랄, 오라시오 가르시아-로시가 그 구성원들이었다.
신경향의 맥락에서 형성된 이 그룹의 주된 목적은 빛과 움직임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그룹의 구성원들은 미술작품의 제작에 있어서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채택하고, 현대적인 산업 재료를 예술적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지를 조사했다.
동시대의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관람자의 적극적 동참이 요구되는 미술작품을 제작하려고 했으며, 개별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나 익명의 공동 작품도 제작했다.
이바랄은 허상적인 움직임의 느낌이나 엄격하게 제한된 깊이 내에서 다가오고 물러나는 형태들의 모호한 패턴을 창출하기 위해 주로 무아레moire 패턴에서 흑백의 사용에 집중했다.
프랭크 포퍼는 이바랄이 구사한 무아레 효과에 대해 적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최대한 순수하게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 주된 목표이다.
따라서 대상과 대상의 시각적 현존에 대한 우리의 지각 사이에는 아무것도 개입되지 않는다.
이것은 빛을 발산하는 실을 사용한 작품의 경우에서 특히 그러하며, 여기에서 개입의 효과는 현저한 비물질화 효과를 창출한다.
‘작품’은 소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호 교차하는 선들의 변화는 즉각적으로 지각 가능하다.”
프랑수아 모를레Francois Morellet(1926~)는 옵 아트 중 특정 분야의 선구자이다.
시각 예술 연구회의 창립 회원으로 이 그룹은 물론 신경향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모를레는 <구형-씨실> 연작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은 작은 금속대나 금속관을 서로 직각으로 쌓아올려 만든 구형들로 이루어졌다.
이 연작 중 일부는 지름이 1.8m에 달하며 모빌처럼 매달려 있고 광선의 반사에 의한 신비로운 특성을 보여준다.
모를레는 금속 그물을 각기 다른 축으로 하나 하나씩 쌓아올린 <철망> 연작도 제작했다.
그리고 채색한 정사각형들을 임의로 배열하여 회화에서 우연적인 요소를 탐구했다.
미국에서는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1888~1976)가 1950년대에 자신이 ‘물리적 사실과 심리적 효과 사이의 모순’이라도 부른 바를 증명했다.
독일계 미국 화가이며 디자이너 알베르스는 1913~15년 베를린 왕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뒤 에센에 있는 미술 공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표현주의 경향의 석판화와 목판화를 제작했다.
1919~20년 뮌헨 아카데미에서 칸딘스키와 클레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츠 슈투흐에게 회화를 배웠다.
1920년 바우하우스에 들어갔고 특히 유리 그림과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인에 몰두했다.
1925년 바우하우스 교사가 되었고 타이포그래피와 유리나 금속 실용 제품의 디자인 및 가구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남아 1933년 폐교할 때까지 작업했다.
1933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새로 설립된 실험적인 학교인 블랙 마운틴 칼리지를 처음 방문한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알베르스는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1949년까지 블랙 마운틴 칼리지에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전공 대학원 과정을 맡아 강의했다.
1950년 예일 대학의 건축 디자인 학부의 주임교수가 되어 1958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 재직했으며 그 후 1960년까지 객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알베르스는 미술 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자신의 목적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형태 요소들과 구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했으며, 미술은 이성적으로 통제된 직관에 기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초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재현적 묘사를 피했으며 “미술은 재현이 아니라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제된 형식을 꾀했고 회화의 수단과 효과 사이의 균형도 추구했다.
즉흥적 경향이나 개성적 표현을 기계와 같은 개성 없는 정밀함으로 대체시킨 그의 작품은 기하적 추상이나 구성주의로 분류된다.
그는 1950년에 시작하여 오랫동안 연작으로 그린 <정사각형에 대한 경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극히 비슷한 색채 범위 내에서 미묘하게 변화시킨 색조들로 채색한 정사각형의 닮은꼴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앞서 칸딘스키가 보여준 것처럼 그는 인접한 색채들이 서로 반응하여 팽창하거나 수축하고 또 후퇴하거나 전진하는 경향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기초 연구는 칸딘스키보다 더 체계적인 것으로서 그 결과가 <색채의 상호 작용 Interaction of Color>(1963)으로 출간되었다.
시각적인 불명료성을 교묘하게 이용한 그의 구성 작품들 중 일부는 옵 아트에 가깝다.
매우 유사한 색조의 색채들이 병치되었을 때 제3의 색채로 보이게 된다는 시각 현상을 활용한 그의 실험 혹은 옵 아트 예술가들이 창안하고 탐구한 것과 일부 흡사하다.
미국 옵 아트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리처드 아누슈키에비치Richard Anuszkiewicz(1930~)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 태생의 아누슈키에비치는 1948~53년 클리블랜드 아트 인스티튜트, 1953~55년 예일 대학, 1955~56년 켄트 주립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옵 아트의 특징인 기묘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며 현란한 효과를 창출하는 기하적 추상화를 매우 꼼꼼한 솜씨로 그렸다.
그는 옵 아트의 원칙을 활용한 미국 예술가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다.
옵티컬 아트라는 용어는 1960년대 이후 클레먼트 그린버그를 위시한 평론가들에 의해 비평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후기 회화적 추상에 속하면서 표현적인 성격 없이 완전히 시각적이고 비촉각적인 느낌을 가진 색채 공간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작품을 지칭했다.
색면 회화와 옵 아트 모두 규모가 매우 중요하여 크기를 축소시킨 도판에서는 작품의 효과를 느끼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