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추킨과 모로조프의 콜렉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두 사람의 모스크바 태생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과 이반 아브라모비치 모로조프Ivan Abramovich Morozov(1871~1921)의 소장품이 있다.
다양한 사업을 한 모스크바 대상 가문 출신의 시추킨은 자신의 취향대로 미술품을 수집했으며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수집했다.
고갱과 마티스의 작품은 그의 소장품 중 귀중한 품목이다.
그의 소장품이 1918년에 국유화되었고, 후에 모로조프의 소장품과 합쳐졌으며, 두 사람의 소장품은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 분할 소장되었다.
시추킨은 1903년부터 보나르, 드니, 마티스, 모네를 비롯해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1917년에 대가들의 작품만 250점에 달했다.
그는 러시아의 모더니즘, 특히 푸른 장미Golubaya Roza 그룹과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작품들도 수집했다.

푸른 장미 그룹은 1910년대에 활발히 활동한 러시아 화가들의 모임으로 그룹 명칭은 190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비롯했다.
하늘, 정신과 관련이 있는 푸른색은 상징주의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색이며 장미에는 많은 상징적 연상이 담겨 있다.
푸른 장미 그룹 예술가들은 야수주의와 원시주의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상징주의 양식을 고수했다.
신원시주의도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발생한 회화 운동으로 이 운동을 전개한 화가들은 농촌 미술, 밝게 채색된 민속 판화인 루보크lubok, 러시아의 예술적 유산으로부터 유래한 특징과 서구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조야하게 결합시켰다.
루보크에는 보통 민속 우화와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신원시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는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와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 부부이며 시기적으로 신원시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와 일치하고 1906~07년에 태동하여 1910년과 191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장 오래된 작품들

 
가장 오래된 예술품?으로 독일의 지역 Neanderthal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묘비가 있는데 약 3만 5천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동굴 속에 그려진 벽화들 중에는 무려 2만 7천 년 전에 제작된 것들도 있고,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동굴벽화는 적어도 2만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앞으로 구석기시대에 제작한 벽화들이 세계 도처에서 더 발굴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새로운 형태의 벽화와 좀더 오래된 것들이 우리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줄 것이다.

우리의 궁금증을 다소 풀어주는 대부분의 오래된 예술품들은 프랑스 남서쪽과 스페인 북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그것들은 작은 형상의 돌, 뼈다귀, 야성을 상징한 흙으로 빚은 조각, 장식적 물체들로 연장, 무기, 그리고 벽과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인데 주로 동물들을 주제로 한 것들이다.
미술책에 나오는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는 1940년 소년들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아직까지는 유럽인 최초의 사실주의 그림이다.
벽에 그려진 소와 사냥장면은 원시인이 기억을 더듬어 상황을 재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벽화를 보면 사냥꾼이 뻗어있는데 아마 사냥하던 중에 거대한 들소의 날카로운 뿔에 받혀 죽은 것으로 보인다. 땅바닥에는 그가 사용하던 창이 놓여져 있고 다른 창 하나는 그가 들소의 배를 찔렀으므로 배에 꽂힌 채 땅에 넘어져 있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의 죽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죽은 사냥꾼의 동료에 의해서 그려졌을 텐데 동료는 이 그림을 기억을 되살려 그리면서 들소를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들소를 그리면서 두려움을 떨쳐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원시인들에게 동굴은 가장 안전한 장소였을 것이다.
동굴은 그들에게 성소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들소를 벽에 그린 데서 사냥에 필승하려는 저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거대한 들소는 실재보다 작게 그린 데서 과학적 관찰을 알 수 있는데 큰 것을 작게 그리고 작은 것을 보고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과학이 아니겠는가!
동굴은 원시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지성소나 다름 없었으므로 종교와 과학이 동굴에서 동시에 출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궁금한 점은 그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색으로 칠했으며 그 색이 여태까지 보존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동물의 기름에 색이 있는 돌을 빻아 섞어서 그것을 벽에 짖이겨 발랐다. 동굴은 통풍이 잘 되어 있어 채색이 보존될 수 있었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이런 그림을 그릴 때 프랑스 인구가 약 2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인구는 약 1억이었을 것으로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판화

 
판화는 판의 형태에 따라 볼록판, 오목판, 평판, 공판 등으로 나뉘고 판의 재료에 따라 목판, 동판, 석판 등으로 구별된다.
나무는 구하기 쉽고 조각하기 쉬워 목판이 널리 사용되는데 고갱이 타히티 섬에서 제작한 일련의 목판화와 뭉크의 목판화 또한 유명하다.

동판화는 판화 가운데 기법의 다양함과 미적 가치에서 인정을 받는다.
동판화는 뷰린으로 얇은 금속판을 깎는 인그레이빙engraving 기법과 내산성의 막을 입힌 금속판을 긁은 후 산으로 부식시키는 에칭etching 기법 등 두 가지로 나눠진다.
뒤러는 뷰린의 명수로 알려졌는데 그의 아버지가 금은 세공사였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기술을 연마하게 했다.
동판화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에칭이다.
16세기 후반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전문 동판화가들이 그 기술공정에 들어갔는데, 많은 화가들이 선호한 이유는 인그레이빙에 비해 기술적으로 훨씬 용이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에칭으로만 그 독특한 소묘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드라이포인트를 병용하여 명암표현을 탁월하게 했다.
그의 시대에는 에칭이 정점에 달했다.
뭉크의 경우 동판화는 거의 에칭이다.

석판화의 경우 초기에는 석판에 조각한 작품도 있었지만 지금은 석판이라면 리도그래피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판이나 동판처럼 파는 작업이 전혀 없는 이 기법은 기본적으로 평평한 석판 (오늘날에는 아연판을 많이 사용한다) 위에 지방성의 리트 크레용이나 잉크로 그린 후 석판화를 적신다.
그 위에 지방성의 잉크를 묻힌 룰러를 굴리면 물과 기름의 반발작용으로 잉크는 그려진 곳에만 묻게 된다.
리도 그래피의 가장 큰 장점은 직접 석판면에 그려도 좋다는 것이다.
리도 그래피는 18세기에 발명되어 19세기 후반에는 채색석판화로 발전하여 화려한 꽃을 피웠다.
아르 누보는 리도 그래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계속 제작한 뭉크의 특성상 판화는 그에게 매우 유용했다.
뭉크의 주요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판화로도 제작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캐리커처

 
캐리커처Caricature는 이탈리아어 카리카레Caricare에서 연유한 말로 '무거운 짐을 지게 하다' '과장하다'라는 뜻이다.
얼굴의 각 부위와 사람의 육체적 특징을 과장하거나
어떤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신체를 왜곡하고
때로는 신체의 일부를 동식물로 변경시켜서 표현한다.

캐리커처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풍자의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초상적 요소가 강하며 대상이 되는 인물이 어느 정도 일반인에게 알려져 있음을 전제로 한다.
다른 하나는 동시대의 풍속, 습관 혹은 전통을 비판하는 것으로 풍자의 농도는 전자보다 떨어지지만 유머나 우스꽝스러움의 표현이 내재해 있다.
이 경우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이며 인간집단의 특징을 포착하여 주관적으로 과장하는 성격이 농후하다.
브뤼겔P. Brueghel(1525/30경-1569)의 판화가 좋은 예가 되는데 그는 기묘한 우화적 상황설정을 이용하여 풍자의 맛을 고조시켰다.
캐리커처는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고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미를 추구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르네상스적 미의 패러다임인 조화와 균형을 깨는 데 적절했다.

캐리커처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 화가로 도미에H. Daumier(1808-79)를 꼽을 수 있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졌던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캐리커처가 전성기를 맞았다.
18세기 말에 발명된 석판화는 캐리커처 발달에 일조했다.
도미에는 뛰어난 소묘 솜씨로 석판에 부드러운 초크로 교묘하게 대상을 나타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풍경화 Landscape

원래 이 말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에서 사용된 프라이만어인 Landskap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자연의 경관을 묘사한 그림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처음에는 이 말이 생겨난 지역, 즉 네덜란드 지방의 장르로서의 풍경화를 의미했다.
화가는 관람자의 즐거움을 증폭시키기 위해 인공적 자연을 만들기도 했다.
풍경화는 본래 무질서한 자연에 하나의 통합을 부여하면서 자연 자체보다 더 자연다운 외모를 그리는 것으로 화가가 의식적으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화가의 인위성에 의해서 자연성이 달성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풍경화는 자연의 인간화된 이미지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