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 풍상 70년 - 월전 회고록
장우성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장우성의『화단 풍상 70년』


장우성은 저서 『화단 풍상 70년』(미술문화)에 그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6·25동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 하루는 이른 식전에 그가 장우성의 집을 찾았다.
밀집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든 채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서서는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오랜만이어서 장우성이 행적을 물으니 어름어름 대답을 피하면서 가방을 열고 화첩을 꺼낸 후 거기에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고 청했다.
이른 시간이라서 아침상을 차려내고 화첩을 두고 가면 곧 그림을 그려놓을 테니 나중에 가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고 졸랐다.
즉석에서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는 휭하니 사라졌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6·25동란이 발발하여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던 중 장우성이 들은 소식은 인민군이 덕수궁미술관에 있는 미술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상자에 짐을 구리는 현장에 이석호가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청계 정종여(1914~84)는 경상남도 거창 태생으로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34년경 서울로 와서 향토적 수묵화가로 명성이 높은 이상범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935년 제14회 협전에 처음 입선했다.
협전은 1935년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렸다.
동양화부 입선자는 정종여 외에 김진우, 조동욱, 오일영, 김기창, 장우성, 심인섭, 이석호, 진세빈, 이용우, 장운봉, 조용승, 박승무, 고희동, 최우석, 김중현, 노수현, 백윤문, 이상범, 지성채, 정운면 등이었다.
서양화부 입선자는 도상봉, 박광진, 이제창, 김중현, 공진형, 장석표, 이승만, 장발, 윤희순, 김용준, 이동우 등이었다.
김중현은 동·서양화부 모두 입선했다.

정종여는 1936년부터 선전에 출품하면서 입선과 특선으로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40년을 전후하여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미술학교와 사설 미술연구소에서 일본화를 배웠으며 일본화 경향의 화조화와 인물화를 세밀한 채색화로 그리면서 이석호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선전에 출품했다.
해방 후 그는 좌익 성향의 조선조형예술동맹 간부위원, 조선미술동맹 간부가 되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전후 여운형이 암살된 후 박헌영이 이끈 좌익계 민족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이 와해되자 전향을 나타냈고, 1949년 4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한 그는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고 ‘인민예술가’의 명예칭호를 받았다.
현존하는 월북 이전의 작품으로 <지리산 풍경>(금성 북한 36)(1930년대, <금강산 전망> 등이 있다.

<지리산 풍경>은 소품이지만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만큼 훌륭하다.
그는 작품에 청계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20대 초 한때 기산이란 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청계란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1936년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경에 산촌의 초가와 기와집이 보이고 토담 옆의 감나무는 속도감 있는 단붓질로 사생하듯 묘사했고,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감나무에 달린 감은 석채로 처리하여 수묵 효과와는 달리 마티에르와 색채를 강조하여 생동감을 높였다.
수묵과 청색을 적절히 조화시켜 산세와 원근감을 잘 나타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방송 작가 이윤수 두손모음
----------------------------------------------------
<<김광우 선생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를 읽다>>

한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마치 한쌍처럼 기억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네와 모네가 그렇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또 고흐와 고갱이 그렇습니다.

때때로 인물화를 주로 그린 마네와
풍경화를 주로 그린 모네의 그림 속에선
누구의 그림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요.
깊은 우정이 전해준 영향탓일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해 과학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 했구요.
반면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았던 미켈란젤로는 항상 물질적
풍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과거의 지혜를 경외했죠.
이처럼 한시대속엔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크게 다른 거장들이 나란히 존재하는가 봅니다.

그런 점은 고흐와 고갱도 마찬가질 텐데요.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살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권총 자살한 고흐보다 13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아를의 노란집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습니다.

빚지고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고갱을
고흐가 불러들이지요.
하지만 둘은 김광우 선생의 표현대로
물과 불을 닮은 성격차이가 심각했습니다.
그림에 관한 논쟁이 붙기만 하면, 배터리가 다 소모된 듯
그렇게 진을 빼듯 싸웠다죠.
한동안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서로 얼굴도 바라보지 않았다죠.

냉소적이고 거만하고 보스기질을 지닌 고갱,
그런 그가 어떻게 원시 문명에 끌려하고,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동경했는지,
전 그게 내내 의문스럽습니다...

고갱이 온다는 기별을 했을때부터 오던 날까지
기쁨에 들떠 있던 고흐, 그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참 정많은 인간이었습니다.
고갱이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참 안타깝습니다.
등돌리고 떠나는 고갱앞에서 면도칼을 들고
끝내 귓불을 자른 빈센트...
그의 정신병보다 오히려 고갱이 냉냉하게 떠나지 않았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13살 소녀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녀를 이브라 부르고 자신을 아담이라고 했다죠.
그런데 울부짖는 그녀와 아이를 둔채
그는 또다시 파리로 돌아오지요.
그리곤 다시 타히티를 찾았을 땐 그녀를 대신해
또다른 13살 소녀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의 엄청난 여성편력도 문제지만,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타히티의 가난한 여성들을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새삼 생각하는 계기도 됐습니다.

고갱은 자신을 그토록 따르던 고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애도만 표합니다.
고흐와 함께 그토록 진심으로 그림을 팔아주고 용돈을 대주던
테오가 죽었을때도 마찬가집니다.
젊은 작가 베르나르가 빈센트 유작전을 연다고 할때
말렸던 이가 고갱입니다.
고갱의 질투심탓일 거라고 김광우 선생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흐가 죽은 뒤 세상에 영웅이 되고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베껴그리면서 자신의 세계를 가꿔간 것 처럼
마티스, 피카소, 후앙미로를 비롯한 세계의 거장들이
그의 그림을 바탕삼아 작업한데 비해...
고흐 타계후 한동안 고갱은 욕을 먹었다고 하죠.
그 비정함때문에...

방대한 분량의 고갱 고흐의 작품들을 보는 일만으로도
흐믓한 책입니다.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흐 작품조차
내가 아는 게 고작 이정도 수준이었구나를 생각하게 한 책이지요.
그럴 정도로 습작 드로잉에서부터 고갱의 다양한 조각작품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 천여점이 다 담겨있습니다.
고갱박물관 고흐 박물관을 꼭 가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생전의 아뜰리에를 찾아 자취를 느끼는 일은 필요하지만,
정말로 작품때문에 네덜란드나 타히티 박물관을
가고 싶지 않을 만큼 화집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자화상은 양쪽 페이지에 일렬로 소개되고 있어서
두사람의 작품 변화와 색감까지 정리해 읽긴 그만입니다.

김광우 선생 책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작품과 연관지어서 비슷한 류의 작품을 대비시키거나,
그런 유형의 다른 작가 작품을 접하면서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꼼꼼함은
이 책의 미덕입니다.

또한 그림마다, 고갱이나 고흐가
사람들에게 보낸 그림과 관련한 편지 사연을 싣고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생생한 편지글로 대하는 것 또한
이 책의 미덕이지요.

또하나의 미덕은 해외의 무수한 평론가들이
쓴 미술 비평서가 아니라 이땅의 평론가가, 미학적 시각에서
고흐와 고갱에 대한 오랜 연구끝에 편안한 문체로
깊이있으면서도 친근하게 펴낸 방대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흐와 고갱을 더 많이 이해한 점도 있지만,
더 많이 생각하게 된 인물은 역시 테옵니다.
고흐의 동생, 자신의 자녀이름조차 빈센트로 지은
형의 작품을 알아보는 그 눈으로,
형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니고,
형에게 파리의 작가와의 만남을 알선해주고,
간질을 앓는 형을 위해 요양원을 챙겨주고 없는 형편에
꾸준히 용돈을 챙겨줬던 테오...
둘은 전생에 어떤 사이였을까요...
과거의 돈독한 형제애를 지금,
이생에선 어떤 모습으로 인연지으며 살고 있을까요...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두고두고 밑줄그을 대목이 쌓여있는
그림+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동아일보 2003-09-19 17:57]

 

 
       
  광고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 지음/527쪽 2만8000원 미술문화

프랑스 혁명의 광풍 속에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왕관을 쓰고 아내 조제핀에게 직접 관을 씌우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황제가 됐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 역사적 순간을 가로 9.9m, 세로 6.69m의 거대한 화폭에 담아냈다(180∼1807). 이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에는 꼭두각시로 앉아 있는 교황 앞에서 이미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씌울 또 하나의 관을 높이 들고 당당히 서 있는 극적인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평민 출신으로 26세에 치안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좌에 올라 프랑스 군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나폴레옹은 1797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원정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에서 다비드를 만났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와 당대 최고의 화가는 서로 만나고 싶어 했고 이때부터 다비드는 나폴레옹과 그의 영광을 화폭에 담았다. ‘생 베르나르 고갯길을 지나는 보나파르트’(1800∼61801), ‘서재에서의 나폴레옹’(1812), 그리고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 역사적 배경 속에서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재조명하는 연작을 내놓고 있는 저자는 나폴레옹의 시대 속에서 다비드의 의미와 가치를 재평가한다.
 
황제는 대관식이 끝난 후 다비드에게 ‘황제 최고의 화가’라는 영예를 수여했고, 다비드는 그의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을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비드는 1750∼61830년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고대 그리스인이 추구한 이상과 이미지들을 부활시켜 단순한 형태와 색채로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적 화풍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과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선전을 위해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저자 김광우는 “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인 단순성과 명료함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칭찬을 받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치 선전적이었고 관람자를 오도하는 것이었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김형찬기자 khc@donga.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린 미술관
헹크 판 오스 지음, 반성완 옮김 / 미술문화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열린 미술관
 

  <열린 미술관>은 추천할 만한 신간입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잘 알려진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저자 헹크 판 오스Henk van Os는 얼마 전까지 암스테르담 릭스 뮤지엄 관장으로 활동하였고 현재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미술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번역자는 반성완으로 서울 물리대학,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문학과 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양문예이론과 미학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를 발표했으며 현재 한양대학교 인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드문데 반 선생님은 번역에 뛰어난 분입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는 미술 분야 TV 시리즈의 대본으로 쓰여진 여러 글들 가운데서 뽑은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네덜란드는 우리와는 매우 친숙한 나라입니다.
네덜란드Netherland, The Netherlands는 '낮은 땅' 혹은 '저지대'라는 뜻을 지녔으며 실제로 전 국토의 27%가 바다보다 낮은 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덜란드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인 홀란드Holland는 본래 북부에 있는 주의 이름이지만 이 주와 이 주의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이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홀란드 혹은 화란으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식명칭은 어디까지나 네덜란드입니다.
그리고 더치Dutch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또 다른 영어식 표기입니다.

벨기에는 1830년 네덜란드에서 떨어져나와 독립했습니다.
옛날에 벨기에 지역은 남부 네덜란드로 불리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플랑드르, 브라반트, 안트베르펜 등은 모두 옛날 남부 네덜란드의 주나 도시들이었습니다.
루벤스가 주로 활동했던 남부 네덜란드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프랑스 문화와 가톨릭 교회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렘브란트의 무대였던 북부 네덜란드는 대체로 독일 문화와 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구분짓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책은 33가지 미술의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The Great Couples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중에서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1832~83)는 삶의 경험 자체가 변화하므로 예술이 변화해야 하며 화가는 현대생활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이런 점에서 모더니즘 회화의 선구자이다.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평편한 표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인 성질을 인식하기 시작한 마네의 회화 경향을 기술하기 위해 <모더니스트 회화>(1960)에서 모더니스트 회화란 말을 사용했다.
1863년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그리기 얼마 전 마네는 친구이며 훗날 프랑스 문교부장관이 된 프루스트와 함께 센 강가에서 일광욕하는 여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누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음, 내가 저들에게 누드를 보여주겠어!”라고 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스페인 의상을 한 두 중년 신사와 누드의 여인이 준비해온 점심식사를 풀밭 위에 펄쳐놓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주말이면 중산층이 센 강가로 피크닉 가서 오찬을 즐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작품처럼 여인이 누드로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피크닉 장소에 여인이 누드로 앉아 있다는 것은 아주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그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고전적인 누드가 아니라 벌거벗은 모습으로 평론가들은 고전적인 주제의 누드를 평범한 여인에게 적용한 데 놀랐다.
누드 여인은 마네가 아까던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마네는 화실에서 누드를 그린 후 피크닉 장소에 있는 것처럼 삽입했다.
두 남자는 마네의 동생과 여동생의 미래의 남편이었다.
황제가 이 작품을 “뻔뻔스러운 그림”이라고 비난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문제의 작품을 보려고 주말이면 전시장 밖에 줄을 섰다.
평론가 아메르통은 황제의 말에 동조하면서 적었다.
“철면피 같은 프랑스 작가 마네의 그림은 조르조네의 <샴페르트 컨서트>를 프랑스의 사실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비록 여인들이 벌거벗었지만 조르조네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용서받을 만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에는 사내들의 복장이 아주 해괴망칙하고, 다른 여인은 스미즈차림으로 냇가에서 나오고 있으며, 두 사내는 바보같은 눈짓을 한다.”
마네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일광욕>이라고 하려 했는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르네상스의 조르조네에서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도 바토, 부세, 코로 등에게 친근해진 고전적 주제를 마네는 현대화하여 나타내려고 했다.
이 작품에 쏟아질 비난을 마네는 상상조차 못했다.
이 작품에서 누드뿐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의 구성,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 부분들의 묘사가 뛰어나다.
마네는 이 작품을 88-116cm의 크기로 그렸다가 그로서는 처음으로 커다란 캔버스에 다시 그렸다. 야심을 갖고 그렸음을 알게 한다.
이 작품은 에밀 졸라가 호평한 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이 무슨 외설이란 말인가! 장성한 두 남자 사이에 옷을 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
사람들은 화가가 뚜렷한 화면공간의 배분과 가파른 대비의 효과를 위해 인물의 구성에서 외설적이고 음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말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풀밭에서의 오찬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한 전반적인 풍경이다.
전경은 대담하면서도 견고하며 배경은 부드럽고 경쾌하다.
커다란 빛을 듬뿍 받고 있는 것 같은 살색의 이미지, 여기에 표현된 모든 것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마르크 앙투안느의 <파리스의 심판>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것이다.
마네는 누드 여인으로 하여금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게 했다.
과거에 누드를 그린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하여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다.
이는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으며, 또한 관람자가 주제를 자신들의 시대적 감각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것으로 작품감상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낙선하자 낙선전을 통해 파리 시민에게 소개되었다.
낙선전은 살롱전 개막 2주 후 5월 15일에 개최되었고 입장료는 1프랑이었는데 무려 7천 명이 관람했다.
낙선전은 큰 규모로 개최되었는데 12개의 화랑에 무려 1천 2백 점이 소개되었다.
마네는 낙선전의 스타로 부상했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는 젊은 세잔의 마음을 뒤흔들었는데 그는 1870~71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을 그렸다.
세잔은 이 시기에 과격한 그림을 그렸으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 위로 곧게 솟은 것과 그 아래 세로로 같은 선상에 있는 세워진 포도주병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마네와 달리 그는 환상의 누드 속에서 성적 욕구를 느끼는 남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1863년 낙선전에서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식사>를 본 모네는 마네의 작품에 버금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을 거듭한 끝에 1866년에 418-367cm의 크기로 완성했다.
25살의 모네의 야심이 담긴 작품이다.
그의 의도는 마네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작품도 화실에서 그린 모델을 풍경 속에 배치한 것이다.
그는 사진을 참조하여 그린 것 같은데 12명이 등장하는 피크닉 장면이다.
모네는 사람 하나하나를 습작으로 연구하면서 그림 전체에 대한 구성을 시도했는데 중앙에 왼팔을 내밀어 접시를 권하는 여인의 모습만이 예외로 그녀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포즈를 취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피크닉을 위해 마련한 음식이 화면 중앙에 펼쳐진 것이 전부이다.
그림에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한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진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쿠르베가 그림을 비평하고 돌아간 뒤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출품을 포기한 것 같다.
쿠르베는 너무 크게 구도를 잡은 그림이라서 야외풍경화라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림의 남자들 대부분은 바지유를 모델로 한 것이며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난 남자는 쿠르베로 보인다.
<풀밭에서의 점심식사>에 여인이 여러 명 등장하지만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열여덟 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으로 나중에 그의 첫 부인이 된다.
훗날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개개인의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 같았다.
1920년 모네의 화실을 찍은 사진을 보면 <풀밭에서의 점심식사>가 벽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방치했으므로 왼쪽과 오른쪽 부분이 손상되어 그 부분들을 잘라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네가 1926년 타계할 때 지베르니의 화실에 있었으며 크기가 248-244cm였다.
그는 이것을 1920년 80회 생일을 맞아 자신을 방문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네의 그림을 따라서 그렸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난 야외에서 그림을 구성한 후 화실에서 완성했지.
난 이 작품을 좋아하는데 미완성이며 많이 상해 있네.
세 얻은 방의 보증금 대신 이 작품을 집주인에게 준 적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캔버스를 둘둘 말아 지하실에 쳐박아 두었네.
돈이 생겼을 때 이 작품을 도로 찾아왔지만 작품이 조금 상한 상태였어.”
1866년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 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