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사생활 아이의 사생활 시리즈 1
EBS 아이의 사생활 제작팀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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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이를 키우다 보면  사소한 일들에 놀래거나 난감할 때가 있다. 누가 일러주는 것도 아니고 짜인 틀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처음의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정작 아이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뒷전이고 주위의 열기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하기 때문이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얼마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 사회가 분화되고 더욱 전문화될수록 이러한 양육의 조건이나 환경이 나눠지는 것도 큰 이유다. 그렇다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붙들어 매고 재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막막하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해서 부모로서의 역할과 아이와의 상호관계를 기술한 책들이 날개 돛인 듯 팔리고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아이를 제대로 잘 키워보자는 바람이다. 잘 키운다는 것의 의미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아이의 학습적 성취를 높이고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있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와의 관계 혹은 양육의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상황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는지 모른다. 결국 아이에게 주입된 바람은 부모의 희망의 다른 모습이다. 그 바람에는 아이의 희망과 인성, 재능은 암묵적으로 배제되었으며 단절된 절름발이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많은 육아전문가, 아동심리학자, 소아심리학자, 소아정신과 전문의 등이 연신 충고하고 잘못 꿰어 진 단추를 제대로 맬 것을 당부하여 왔지만 우리는 잊어버리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 <아이의 사생활>은 어떤 책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직설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소재의 특성 상 지식의 전달, 문제의 해결, 사고의 전환 등을 차치하고라도 이 책의 가치는 아이의 시각과 어른의 시각의 어긋남을 교정해 주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책이다. 이 책의 사례 내지 TV에서 방영된 갖은 문제 상황의 검증에서 예기치 않은 결론과 사실에 엄청난 여파의 충격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언제부터인가 일등에만 치우친 나머지 우리의 아이들을 주변인으로 내모는 제도와 관념의 허상의 결과다 이러한 왜곡되고 삐뚤어진 현실을 거름망 없이 반영해 주는 불편한 거울에 비친 진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이처럼 아이를 제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으로 부터로의 시작을 통해 끝을 예측할 수 없는 기나긴 여정이다. 그래서 아이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고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해법을 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바로 이러한 물음과 필요에 의해 기획된 것이 <아이의 사생활>이다. 얼마나 아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무지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모로서의 권위만을 앞세웠는지를 바로 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전체 5장으로 나뉘어 아이의 정체성, 성별에 따른 차이, 다중지능, 도덕성, 자존감을 카테고리로 연결시켜 올바른 양육관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해법이 정답은 아니다. 단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설정된 통념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상태와 환경, 조건 등을 따져 아이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의 믿음과 신뢰가 정답이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를 형성하는 의문과 실수 내지는 왜곡현상을 바로잡고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서 이 책의 필요성이 부각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아이는 우리 사회가 만든 제도, 관념, 문화, 규범 등을 배우고 익혀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 별 거부감 없이 흡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뒤쳐지고 거부반응을 보이는 아이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개성인자의 조합은 인간의 사회성을 공격하는 위협적인 요인처럼 비쳐지기 쉽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은 타고난 기질적 특성과 환경적 조건에 따라 천양지차로 변한다. 그러한 인간의 차이는 뇌의 기능적 차이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다중지능으로 연결된다.  아이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없다. 어떤 아이는 인간친화력이 뛰어나 사교성이 우월하고 어떤 아이는 음악지능이 특출나게 뛰어난 경우를 흔히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워드 가드너가 창시한 8개 지능이론인 다중지능이론이다. 다중지능은 아이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는 키워드로 유전자에 각인된 강점지능을 깨우는 선결작업이다.

 

그렇다면 다중지능의 발견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 자신에게 걸맞은 강점지능을 찾고 효율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하더라도 이것이 아이의 행복과 연결되는 전제조건은 아니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화두 또한 이론적인 지식의 기저에 숨겨진 공감, 경청, 신뢰, 지지 등이 한데 뭉쳐 옹골지게 버무려져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인간의 뇌를 자극하는 외부적 환경과 내부적 요인의 특성과 차이를 아는 것 보다 어쩌면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진심으로 대하고 눈높이를 맞추어 바로 보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설계하는 출발점인지 모른다. 우리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때문에 아이의 역할모델은 부모라는 말이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4장, 도덕성, 작지만 위대한 출발은 그러한 의미를 각인 시켜주는 내용이다. 책은 사회가 요구하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다. 실험을 통해 드러난 흥미로운 결과는 충격을 넘어 아이를 어떠한 시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를 되묻게 된다. 성인을 대상으로 약속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건네주고 이를 받아들이는 피실험자의 상태를 관찰한 실험이다. 결과는 우리의 도덕성이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나약한 본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처럼 어른의 언행불일치의 생활태도와 성공일변도의 위험한 결과지향주의에 대해 아이는 고스란히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작용했다. 아이는 어른이 한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진실처럼 알면서도 받아들이기에는 거부감이 앞선다. 하지만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깊이 각인되어 우리의 아이는 위협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 책이 찾은 양육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자존감, 즉 자아존중감을 찾는 것으로 귀결한다. 자존감은 아이를 긍정적으로 만들고 실패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지지대로 행복에 다가서는 소중한 발걸음이다. 그 속에서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보듬고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다. 믿음은 아이의 숨은 재능을 찾게 한다. 칭찬은 아이를 춤추게 하고 밝은 아이로 만든다. 그러므로 아이는 부모의 사랑으로 자란다는 말처럼 아이는 사랑으로 키운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이를 격려하고 심지가 굳은 아이로 만드는 자양분이다. 이러한 아이를 향한 사랑은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고 어느 곳 막힘이 없이 소통하는 사회로 만드는 초석이 된다. 이처럼 아이의 생활은 알고 보면 어른의 생활을 본 뜬 우리의 다른 모습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를 소유하려고 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 만약 아이를 귀찮아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는 부모가 있다면 이미 부모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지금처럼 아이의 출산이 하향세를 이어가는 현실을 반영한다면 아이의 존재가치는 무엇으로 산정할 수 없다. 저 출산 사회에서 아이의 미래는 불투명한 미래와 위협받는 내일의 암울한 모습을 지우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이것을 구실로 아이를 성공의 틀로 재단하거나 밀어 넣을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드는 작업은 어른의 몫이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고 아이의 숨은 능력을 신뢰한다면 지금과 같은 편협된 학업성취주의에 치우친 흔들리는 양육방식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상식과 건전함이 통용되는 높은 수준의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첫 단계가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드러난 부모의 자세는 치우친 양육태도에 경종을 울리는 자성의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아이의 사생활은 아이만의 것이며 공감은 아이를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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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1-2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심리치유서 위주로 책 읽을 때 이 책 목록에 넣었다가 뺀 것인데, 곡우님 리뷰로 만날 줄 알았으면 읽어둘 걸... 한결 같이 정돈된 글을 쓰시는 걸로 보아 어디 연재하시는 것 같아요. 그저 경외감을~

穀雨(곡우) 2010-01-29 08:48   좋아요 0 | URL
느와르님, 경외감을 이렇게 남발하시면 안됩니다. 전 그저 읽고 쓰는게 좋아서 하는 일이지,
밥벌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ㅎㅎㅎ

후애(厚愛) 2010-01-29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가끔씩 곡우님 서재에 와서 글만 읽고가는데 제 서재에 댓글남겨 주셔서 용기를 내었어요.^^
정말 리뷰 잘 쓰세요! 부럽습니다~

穀雨(곡우) 2010-01-29 11:03   좋아요 0 | URL
전 게으른 블로거라 댓글 남기에 인색했던 모양입니다.
아직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함이니려니 해주세요.
리뷰는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라 실체는 없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 주시니 기쁠 따름이지요..^^
 
트래픽 - 운전습관과 교통체계에 숨겨진 인간의 비이성적 본성 탐구
톰 밴더빌트 지음, 김민주.송희령 옮김 / 김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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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성의 로망이라면 단연코 자동차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엣지 있는 스타일의 자동차는 언제고 본능을 깨우는 욕망처럼 분출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에 자신이 있든 없든 남자라면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런 경향을 보이는 남성은 대개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운전을 곧잘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운전을 잘한다는 것의 정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도로 주행 시 교통여건ㆍ정체상황ㆍ운전습관 등 제반여건을 모두 고려할 때 목적지까지 최단시간에 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편향이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 본 시각이지만 이 책에서라면 눈 여겨 볼 판단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처럼 운전을 잘한다는 인식으로 가득한 남성들이 대부분 운전 중 사고를 유발하는 잠재 사고유발자라면 수긍이 되는가? 반대로 여성이 운전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서툴다는 편견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생각일까? 우리는 운전에 담긴 익숙한 행위에 다양한 편견과 비뚤어진 관점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 여성과 남성은 인지체계의 특성상 공간지각, 상황판단을 관장하는 영역의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여성이 운전을 못한다는 협소한 시각은 편견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능력이 처리할 수 있는 개별적인 특성의 차이가 빚어 낸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또한 운전이 생활화 되고 기술의 발달로 운전 중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해 진 것도 사고의 주범이다. 멀티태스킹의 위해는 이미 학계에서도 보고된 바 있으며 실제 처리속도가 개선될 것 같은 착각 외에는 이도저도 아닌 업무의 집중도만 저하시키며 스트레스만 가중시킨다. 따라서 이 책 <트래픽>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교통체증의 현상에 착안하여 왜 이러한 비생산적인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지에 대해 묻고 그것이 인간을 둘러싼 다양한 착오, 관습, 그릇된 행위, 관념에 연결되어 있음을 심리학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고찰했다.




그러한 만큼 책은 실제 궁금했으나 별로 중요치 않다고 치부했던 사소한 궁금증에서부터 고난도의 복잡한 심리적 문제까지 골고루 섭렵하였기에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리학의 일반이론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재료로 충분히 활용되었으며 무엇보다 저자의 깔끔하고 명료하게 정리된 예제와 정리가 돋보이는 책이다. 미국의 교통상황과 국내의 교통상황이 엇비슷한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현실에 실제로 적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나아가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과 실험적인 사례를 통해 인간의 인지체계의 부조화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심오하게 전개되는지 조목조목 따져 묻는다.




책은 운전에 얽힌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 하나의 행위로부터 연결된 다른 행위로 연결 짓는 결정을 하기까지의 판단과 처리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문제는 눈으로 보고 인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다. 오류는 인지부조화를 촉발하고 실제와는 다른 각도로 사물을 판단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부정확하게 인지된 사고체계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사고를 유발하는 잠재요인으로 예컨대, 정차해 있는 제설자동차나 응급차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추돌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겠다. 이는 인간의 심리는 일정한 영역을 설정하고 마치 배가 닻을 내리듯 정박하는 관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관습이나 환경에 묶이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은 일반심리학으로 본 인간의 행동들, 즉 편향(Bias)적 특성에 대한 담론이다. 고속도로 위의 막히는 구간을 통과할 때 갓길을 따라 운행하는 얌체운전족이나 막판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운전자에게 분개하는 심리를 기가 막히게 잘 설명해 주며, 정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시간대나 갑작스런 정체상황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인간의 본성과 연결시켜 규정하고 있기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사고의 접근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심리기제라는 유동적인 관점을 통해 드려다 보는 세상은 가히 운전이 주는 형식적 행위 속에 담긴 실질적 의미를 엿보는 창에 다름 아니겠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는 일정한 틀에 의해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하는 단계에서 작용하는 대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이 책에 의하면 메뚜기, 개미 등 곤충의 놀라운 군락형태를 통해 효율적인 통제와 흐름을 제시하여 보여준다. 개미가 지닌 행동특성에 담긴 체계적이고 매우 영리한 보행시스템은 인간의 교통사정과 극명하게 대비케 한다. 자유의지로 걷고 이동하고 보행할 권리는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 우선권이다. 서로의 이익의 만족추구로 인해 충돌하고 상충하는 갈등관계의 원만한 해결은 건실한 사회를 유지하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개미들의 행동양식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이렇듯 인간의 내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심리영역의 파장효과는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위험한 길일수록 더 조심하게 되고 반대로 익숙한 길일수록 더 느슨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보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지 않을까 한다. 트래픽의 부하에 걸려 잠시의 만족을 위해 대를 희생하는 소탐대실의 현실을 이제는 벗어나야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을 통해 -고속도로가 정체에 걸리고 그 가운데 멈춰 서 있는 경험을 한 이라면 누구나 알 듯- 운전은 순리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최선의 지름길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음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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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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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 권리와 의무에 대한 사회통념을 녹여 만든 최상위 법률의 총체다. 헌법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평등의 산물인 셈이다. 그만큼 중요하고도 또 중요하다. 하지만 헌법에 대한 우리의 현실적인 태도나 이해는 어떠한가? 헌법 조문의 드러난 의미는 고사하고 딱딱하고 고루한 문체에 거리감마저 생기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의 반영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본다. 교육의 부재는 물론이고 실재와 당위에서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하루를 살기에도 벅찬 오늘날 헌법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기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실재로서의 명분이나 규범적 가치를 떠나 현실을 살아내기에 힘겹고 숨찬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도 국가적 시스템과 얼개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갈 때야 가능한 일이다. 자유와 권리만을 앞세워 서로 충돌한다면 혼돈과 갈등이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하기에 권력의 남용과 권리충돌현상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인 대한민국호의 항로이자 좌표이다. 


난 유시민의 역량과 사람됨에 대해 중립적인 편이다. 그가 참여정부시절 숱한 갈등과 문제의 중심에 섰을 때에도 치우쳐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성숙하지 못한 생각의 알갱이를 현실의 살벌함에 맞서 무모하게 휘둘릴 때 안타까움마저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국민연금법개정 당시가 그랬고 그의 사적인 치부가 까발림 당할 때도 그랬다. 그나마 싸움닭처럼 달려들던 그의 강단한 용기와 베짱이 오히려 그를 밀어내지 않았던 요인이었으리라. 


그가 펴낸 이 책 <후불제 민주주의>는 지식소매상으로서의 그의 역량을 드러낸 글이다. 헌법을 배웠든 배우지 않았든 알기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성공한 에세이가 아닐까 싶다. 사실 나는 학부시절 전공이 법학이다. 그 알량한 지식조각이 이 책에 대한 선입견으로 작용해 여태껏 피하다 이제야 손에 쥐었다. 아웃당한 정치인이 떠드는 지식전개가 곱게 비쳐 보일 리 만무했다. 책을 덮은 후 이러한 모든 생각은 속 좁은 나를 탓해야겠다. 이 책은 한마디로 유시민답다. 평소 그가 보여준 색깔 그대로 감정의 결이 곧고 정연하여 시종일관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렇다고 이 책이 헌법을 상세하게 풀어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갖춘 교과서는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헌법이 제정되고 공포된 이후로 민주화의 열망과 투쟁의 영혼이 선연히 살아 있는 정신을 되새기기에는 이만한 책도 없지 않을까 싶다. 독재와 탄압에 암흑의 세월을 보낸 선배들의 애환과 고초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기에 당시의 열기와 몸부림의 뜨거웠던 온기 하나하나까지 묻어나기 때문이다. 법이 기록되고 활자화된 것만을 받아들인 세대인 나로서는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강학적(講學的)인 이유만을 내세운 건조함과 딱딱함이 생산한 직접적인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민주화의 열사들이 온몸을 던져 획득한 투쟁의 역사는 현실에 파묻히기 마련이다. 


유시민은 이러한 이론과 실제의 착각에 빠진 현재에 무지의 고통과 자유의 소중함을 고하고자 헌법을 그 매개체로 소통하고자 하였으며 화두로 던졌다. 그가 겪었든 겪지 않았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이 분명하며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고 기회의 균등이 공평하게 돌아가는 나라임을 추종해야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선연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벽을 허물고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끌어안는 대승적 해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하였다.


지난 10년을 보수정권은 잃어버린 시절로 풀이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가 더 좌로 좌표를 이동하여 계층 간 균형을 허물고 사회주의식 체제 전환으로 모두 가 못 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속내다. 결집된 집권보수층의 권력 카르텔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들이 닦은 터전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는 아집으로 뭉쳐 우리 사회를 가르고 무엇이 진실인지 여론을 호도하며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천을 방해하였던 지난한 세월이었다.


유시민은 그 가운데 섰던 장본인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보수층에 대해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이도 있을게다. 물론 호불호에 따라 갈리기는 하겠으나 이제라도 바싹바싹 타들어갔을 그의 가슴에 쌓인 한 줌 재를 토해내었다 생각하면 여유와 관용으로 넘겨 볼 일이다. 그의 주장이 구구절절 옳을 수는 없다. 그의 말마따나 헌법 제 1조 2항에 아로새겨진 자유의 또 다른 표현인 셈이다. 


결국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의 신파 섞인 참여정부시절의 못 다 한 소회의 감정이 아니라 바로 헌법이 가진 실재적 존재의미다. 행복, 자유, 평등의 인권의 보편적 진리가 아무런 대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우리의 굳어 버린 영혼을 흔들어 깨우자는 의미겠다. 지난 역사를 통해 엄청난 독재와 압제를 극복하고 일궈낸 숭고한 가치를 더 이상 천박한 저들의 행위에 목 놓고 있지 말자는 동참의 목소리다. 이것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민주주의의 구현이자 인간다운 삶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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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테러리즘
헨리 지루 지음, 변종헌 옮김 / 인간사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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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신자유주의가 생산해 내는 문제에 대해 갑론을박이 잦다. 현재의 금융위기를 위시해서 불거져 나오는 각종사회현안문제에 이르기까지 곱지 않은 시선 일색이다. 불과 사반세기 전만해도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기세가 등등하여 하늘을 찔렀던 이념의 헤게모니가 끝없이 추락중이다. 왜 신자유주의는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왜 신자유주의는 탐욕과 집착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신자유주의는 어떠한 명쾌한 해답도 내 놓지 못하는 실정이다.


실제 신자유주의의 태동은 영국의 대처수상에 의해 비롯되었다. 대처리즘으로 불리며 가라앉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획기적인 경제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그 빌미를 제공한 신자유주의는 미국으로 건너 가 더욱 공고히 다져지게 되었으며 확고부동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이 미국의 레이건대통령을 중심으로 확고부동하게 다져지기 시작하여 현재 오바마정권 이전의 돌아온 탕아 부시대통령에게로 정점의 봇물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강력한 경찰국가를 지향하며 정부의 다운사이징을 기치로 공공영역의 민영화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열광하며 빠르게 시민적 가치를 소비적 가치로 재편하는 현상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미국식 제국주의의 야망이다. 누구나 능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도 알고 보면 신자유주의가 배출한 이념의 터전이다.


이 책 <신자유주의의 테러리즘>의 저자 헨리 지루는 신자유주의가 뿌리 내린 미국사회의 부정적 현상을 고발하고 부시정권이 다진 오만한 정권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는 거시적 안목으로 사회전반에 걸친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광범위한 분석과 치밀한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고찰하고 그 속에서 드러난 거대담론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통찰하였다.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이 이념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던 세계정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한손에 거머쥐고 새로운 미국식 파시즘으로 돌변한 이유도 신자유주의라는 욕망의 정체가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기실 미국의 최근 행보는 위험하고 돌발적인 깡패국가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 준다. 타협과 관용은 부덕의 소치요 방종과 방임에 의한 군사주의화로의 이행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자율, 책임의 사유화, 무관용에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권위주의에 도착된 미국의 실상도 신자유주의의 이념에 경도된 그것과 같다. 정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감세를 통한 양극화를 부추기고 사회보호망을 뒤흔드는 정책의 모든 출구는 탐욕과 통한다. 소위 말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악취 나는 현실의 대변이며 분출이다. 애국심을 무기로 군국주의를 자극하고 미란다원칙을 유린하는 오늘날 미국의 현실은 시민민주주의의 자유가 송두리 채 뽑힌 희망이 얼어붙은 암울한 모습이다.


저자는 총6장으로 나누어 신자유주의로 물든 미국을 묘사하였다.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유지하며 권위주의로 탈바꿈한 미국의 모습과 신자유주의의 주된 이념을 통찰하며 속속들이 그 폐해와 문제점을 까발렸다. 결국 사회 전 방위적으로 퍼진 신자유주의정책은 정치로부터 파생된 통치행위에서부터 제반 영역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포괄적 파급효과는 공교육의 붕괴, 인종차별, 부의 양극화의 다양한 문제의 핵심으로 부상하였다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신자유주의는 지구적 통치권에 상응하는 국내적 통치권을 나타내는 조직편성이다. 이러한 통치권은 비밀스런 첩보국가의 행위, 요컨대 기업화된 미디어, 학교, 교도소 그리고 한층 강화된 행정적, 규제적 경찰력을 위한 다양한 기술들을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P-300)


따라서 신자유주의사상은 민주적 가치의 기본이념을 소비적 가치의 경제구조로 인식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결과에 다름 아니다. 이 책의 사례로 소개된 미국의 문화적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권위주의에 압도된 숨 막히는 탐욕과 광기만이 오롯이 남는다. 7살 유치원생이 사소하게 벌인 장난을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과 결박은 도를 지나쳐 제국의 피비린내만 연상케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사회 저변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의 요체는 미디어의 장악에 있다. 미디어를 통한 치우친 이념의 확대재생산은 문화적 변질을 혼동을 빠르게 전파하고 사고를 경직시킨다. 무자비한 규율과 도덕적 무관심의 풍토를 사회의 문제에서 개인의 문제로 격하 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게 된다. 이러한 파괴적 행태는 미국사회의 문제를 떠나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도취된 문화적 현상이다.


이것이 현재 미국의 현실이라면 과연 신자유주의의 광기는 언제까지 그들을 유린하고 목을 죄어 올까? 과연 그들은 이러한 암울한 현상을 타개할 지성과 인식이 실종된 것일까? 비판적 지성이 사라지고 견제와 균형이 요원한 세상은 희망이 없다. 공정하지 못한 출발이 자행된 게임에서 페어플레이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순진한 착각인지 모른다. 신자유주의는 공공선을 승자원칙에 시장의 기능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자유방임이라는 허울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저자가 신랄하게 꼬집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망령에 젖은 모습이 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설익은 신자유주의의 정책이 남발하는 것을 보면 위태하기가 이를 때 없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가둘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시스템 뿐만 아니라 거대기업의 출현과 사회민주주의 붕괴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부의 이익으로 바뀔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의 가치가 인간의 의지마저 지배하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어둠의 세상이다.


이처럼 이 책의 저자가 통찰한 거대담론의 실체에 한 번 놀라고 매우 정교하게 정리된 그의 주장에 또 한 번 놀란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외투 속 내밀한 풍광을 속속들이 드려다 본 기분이다. 중구난방으로 드러나는 신자유주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아울러 미국이라는 거대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사회의 협약을 비웃고(교토의정서와 관련한 환경협약) 거대 금융기구를 내세워 이익을 착취하는 실체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다. 더 이상 신자유주의는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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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에 선 미국 - 이슬람의 도전과 사라지는 강대국들
마크 스타인 지음, 현승희 옮김 / 인간사랑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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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미국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미국이라는 거대욕망의 정체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그렇고 슈퍼경찰국가랍네 자유주의를 무기로 휘두르는 것을 보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돌아서면 뒷맛을 구리는 게 영 아니올시다. 하지만 국내 정서는 아직까지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다. 부시정권이 들쑤셔 놓은 각종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젊은 피 오바마가 이어받은 뒤론 호감도가 다시 상승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것 같은 미국의 파워가 나날이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붕괴이후 통합된 이념적 실체를 드러내며 대항할 강력한 권력(국가)의 실체가 없었다는 것도 미국을 독주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후 중국의 자유화로 인한 성장잠재력이 미국에게 대항할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대안이나 약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게 막강하던 미국의 권력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치닫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무엇이 미국과 대치되는 안티가 되고 반대세력이 되는 현실인지 곱씹어 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래서 미국이 전통우방에게서 조차 곱상한 시선을 받지 못하는 깡패국가처럼 분류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가 밝힌 이슬람 대 미국의 관계는 불편한 진실의 한 부분인지 모른다. 미국을 비롯한 주류 선진 강대국들의 슬로건은 개방, 자유, 포용이었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용은 인권을 무기로 한 평등사상에 도취되어 차별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역으로 수출된 이슬람주의는 미국과 서방세계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어 버렸다. 무차별적으로 급진적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이슬람의 피가 흐르는 그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돌진하는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위험스러운 현실은 이슬람주의에 경도된 자국민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한 모든 주제가 바로 이슬람의 번성과 궤를 같이한다. 미래를 가르는 최고의 화두가 일할 인구, 즉 대체인력의 보유다. 하나 둘 채워 나가기 시작한 유럽의 이슬람 이민은 이제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뺄 만큼 수가 증가하였다. 사실 우리에겐 강 건너 불구경이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배척의 골이 높은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지만 시나브로 스며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경고는 넘겨들을 일이 아닌 것은 확고하다. 그래서 미국이란 나라가 처한 현실을 벼랑에 섰다는 극단의 시선으로 빗댄 저자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다.

실제 200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 자폭테러는 이슬람을 주적으로 모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명분은 자국민을 보호하고 악의 축에 대한 응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시정권의 실리를 채우는 야욕이 숨어 있다는 뻔뻔함만 제대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내지른 오만방자함은 자가당착의 덫에 빠졌는지 모른다. 따라서 노암 촘스키가 그의 저서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동평화의 걸림돌은 바로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유럽이 노쇠하고 사회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늪에 빠졌다는 것도 저자가 짚은 현실이며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영국으로 이민 온 사우디계 영국인의 이슬람 전통의 고수가 이곳이 기독교의 본산이 맞는지 실소를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금을 타내기 위해 죽은 노모를 끌어안고 산다면 이게 올바른 사회보장제도일까. 이미 붕괴된 유럽의 기존 체재전통은 더 이상 가까운 미래에는 흔적을 찾기 힘들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밝힌 이슬람에 대한 시각은 미국인들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미국이 유래가 없는 불량국가로 전락한 위험천만한 현재를 대변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읽어 내기가 수월치만은 않다. 주절주절 덧붙인 인용과 은유가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분량에 비해 쉽게 앞으로 나가질 못했다. 번역과정의 어려움보다 원서의 산만함이 오히려 이유지 싶다. 그리고 저자의 통찰이 신선해 보이는 것에 반해 극단으로 치우친 면이 되레 지나쳐 보인다. 또한 무엇보다 가장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결국 미국이라는 패권국가가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도 장래에도 이어가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속내다.

중동의 모래바람이 미국을 덮어 버리기 전에 자각하고 깨어나라는 주문이다. 중동의 그들이 선동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으로 무장할 때 미국과 유럽은 늙어 간다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논리다. 지극히 보수적이고 신자유주의에 푹 적셔진 사상의 추출물이다. 물론 저자의 논의가 현실적 문제를 반영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슬람주의가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기 전에 제대로 바라보고 치유하자는 격양된 논거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를 둘러싼 강호들의 몰락을 넋 놓고 보고자 함은 아니다. 예의 주시해야 하는 현실은 서방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우리의 역학관계라는 진실이다. 미국이 좋든 싫든 북한과의 대치상황에서 현실적 타개책은 체제옹호를 위한 확고부동한 이념적 무장이다. 다소 과장된 이슬람문화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이슬람의 시선이다. 이슬람문화로 무장한 그들의 가미가재식 돌격대가 우리에게도 촉각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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