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기 쉬운 마음을 위해서
오수영 지음 / 별빛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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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섬세한 사람의 자기고백이다. 글을 읽을수록 행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온 마음을 다해 조심스레 살아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정해진 모양도 크기도 없지만 생각만큼 그리 단단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당신의 삶이 읽히는 장소> _160p

지금 내가 사는 집을 부동산 직원과 함께 보러왔을 때가 떠오른다. 깡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아주머니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었고 나 또한 엉거주춤 불편한 자세로 집에 들어섰다. 사실 휑하다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거실에서 맞바람을 맞는 순간 이 집에 반해버렸다. 그 전에 방문했던 집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주머니는 깐깐해 보였던 인상답게 성격상 집에 흠집 나는 것이 싫어서 모든 가구를 벽면에서 한 마디씩 띄우고 배치했고 모든 서랍장과 방문 뒤에 스펀지를 일일이 붙여 놓으셨다. 베란다 확장과 화장실, 싱크대 리모델링은 물론 벽지와 장판도 교체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 오래 된 아파트의 내부라고 느낄 만한 것은 현관이나 방문, 창문, 앞뒤 베란다 정도였다. 집안 곳곳에서 더 오래 살고 싶은 곳인데 남편의 공장이전으로 어쩔 수 없이 갑작스레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실제로 이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안전을 위해 거실 베란다를 마치 커다란 창문 같이 바꿨고 확장된 공간에서 큰 책상을 두고 함께 공부했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자신이 20년 넘게 살아온 집에 대한 설명을 그토록 진심어린 눈빛으로 간간히 미소를 띄며 전해주시던 그제야 비로소 아주머니에게서 편견이 벗겨져 인간적인 온화함이 드러났다. 직접 주문 제작하셨다는 식탁에 앉아 이곳저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냉장고에 붙은 가족사진을 보며 나도 이 집에서 살면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까지 들었다. 아무리 리모델링이 된 집이라도 아주머니의 개인취향과 우리가 살고 싶은 공간에 대한 이미지는 달랐기에 또 손을 거쳐야 했지만 자신의 거주공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깨끗하게 살아온 그 자체에 이 집에 대한 마음이 기울었다.

    

 

우리의 입맛대로 바뀐 이 집에서 산지 벌써 1년이다. 가끔 거실을 바라볼 때면 내가 집을 보러온 날 중문을 지나자마자 느꼈던 휑할 정도로 깨끗했던 이미지가 떠오른다. 딱 필요한 것만 알맞게 자리 잡고 있었던 그 깔끔함이 앞으로 내가 이 집을 어떻게 보여 지게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군더더기 없이 살되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는 소중한 스토리가 꼭 있기를. 집이 보여주는 내 모습이 불필요한 욕심으로 비춰지지 않기를. 물론 방문객들에게 사진처럼 박제되는 이미지가 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겉으로는 멀끔해도 옷장 속에, 서랍장 속에 들어있는 내 또 다른 모습이 누군가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내 모습이다. 전자제품과 가구뿐만 아니라 제때 버리지 못한 쓰레기와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쌓인 먼지까지도 합쳐져야 내가 사는 곳을 완성시킨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이 노력으로 가능할 수도 있지만, 방심하는 사이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드러나게 되는 것 또한 예상할 수 없다.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 흘리지 않겠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가 은연중에 드러나게 되더라도, 그게 설령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습일지라도 너무 자책하거나 창피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또한 내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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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으로 일주일 반찬 만들기 - 요리 초보도 쉽게 만드는 집밥 레시피
송혜영 지음 / 길벗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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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고 나면 책꽂이에 가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 무슨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하거나 다시 읽고 싶을 때가 되어야 손에 닿게 되는데 이 책은 배송 받은 그 날부터 식탁에 두고 매일 뒤적였다.

    

 

요리 프로는 나랑 안 맞았다. 흔하다는 식재료는 우리 집 냉장고에 있을 리 만무했고 정말 집 밥과 어울리는 반찬들은 쉽게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에는 바로 냉장고 파먹기에 돌입할 수 있는 무난, 평범, 익숙한 식재료와 반찬구성으로 짜여져 있어서 시간도 돈도 절약되는 최고의 지침서였다. 특히 나 같은 요리 극초보에게.

 

내가 느낀 이 책의 장점은 이렇다.

1. 이 책에 나오는 레시피 대부분은 사진으로 6컷을 넘지 않는다. 한 페이지 안에 하나의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와 이렇게만 하면 내 손으로 만든 반찬이 생기는거야?’하는 자신감 상승은 덤이다.

2. 한 번의 재료구입이 하나의 요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재료로 재탕, 삼탕 다른 요리가 가능하다. 식재료를 활용하는 범위조차 생각해내기 어려운 초보들에게는 정말 경제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3. 휴대폰으로 영상이나 블로그를 보는 것보다 한 번 펼쳐놓은 책이 훨씬 보기 편하다. 이건 개인적인 성향차이겠지만 물 묻은 손을 닦아가면서 휴대폰을 만지는 것 보다 그냥 펴 놓은 책을 오다가다 힐끗 보면서 따라하는 게 편했다.

4. 계절별 집 밥에 어울리는 반찬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제철 재료를 놓치지 않는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상차림이 가능하다. 이 맘 때 쯤 엄마가 해주셨던 반찬을 이제는 내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5. 장보러 가기 전 며칠 동안 먹을 반찬, 소비할 수 있는 기간을 미리 생각하고 가기 때문에 충동구매가 적다. 사실 막상 마트에 가면 갑자기 해먹고 싶은 것이 생기기도 하지만 기존에 남는 재료들을 처분 못해서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당분간 이 책에 충실하면서 재료의 수명, 소비기간과 양을 조절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 적은 내용들은 내가 요리 찐 초보였기에 가능한 감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책에 나오는 완성된 사진과 다른 비주얼일지라도 내가 이 반찬을 만들어보았다는 성취감이 더 맛있을 진정한 초보 말이다. 내 손으로 만든 반찬들이 반찬통에 담겨져 냉장고 속으로 들어갈 때의 뿌듯함, 다음 식사 때 꺼내 먹을 새로운 반찬이 있다는 것에 설렐 수많은 요리 입문자들에게 단비 같은 책이다. 내가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대비 굉장히 보람찬 일이니까. 책을 받은 첫 주에 오이냉국, 무나물, 상추겉절이, 돼지고기고추장볶음을 해먹었다. 남편에게 이 책 목록을 보여주면서 여기 있는 것 전부 할 수 있으니 먹고 싶은 것 체크하라고 큰소리 쳐놨으니 욜로리아님의 다음 책이 96가지 목록 섭렵 전에 꼭 나오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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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억 1~2 - 전2권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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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살아가는 나는 지금 몇 번째 생의 주인일까?

 

르네는 퇴행 최면을 통해 우리의 성향과 행동 그 깊숙한 이면에 전생이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몇 차례 자가 퇴행 최면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과거의 자신과 의사소통은 물론 합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면서 역사 교사로서의 삶을 사는 자신에게 특별한 과업이 주어졌음을 믿는다. 꿈같은 일이다. 내게는 없는 능력을 가진 또 다른 과거의 나를 찾아가는 용기도, 그에게서 삶의 지혜를 얻고 협동하여 위기상황을 모면하는 순발력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이 이래서 늘 놀랍다.

    

 

앞선 생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점차 진화하는 인생이라면 지금의 우리들은 결함 없는 인간들 이어야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차 완벽에 가까워져야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일상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하자가 발견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르네는 과거 몇 명의 자신과 마주하면서 현생은 앞선 과거의 내가 소망하던 삶으로 재탄생됨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현생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전생의 누군가를 미워해도 되는 걸까? 물론 아니다. 전생의 내가 소망하는 삶을 머릿속으로 그릴 때는 그 삶이 주는 전체적인 영향력까지 고려하진 않는다. 내가 가장 결핍됐던 어떤 것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삶을 살면서 생길 또 다른 문제점에는 접근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직접 살아봐야 완벽해 보이는삶이 가지는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생은 전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전생과 현생이라는 연결고리를 배제하고 그저 삶의 모습이 다른 타인과 나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존재라는 것은 실제로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도 있을 때에 붙이는 명사이다. 존재는 기억과 기록으로 증명되기도 한다. 르네는 자신이 목격한 자기 역사의 시작인 아틀란티스인의 실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자신의 과거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 하지만 퇴행 최면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과 기록은 곧 역사이며 철저하게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다는 것을 활용한다. 아틀란티스인들의 문명을 집어삼킨 대홍수를 미리 대비해 생존자들이 스스로의 역사를 후대에 알릴 수 있게끔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대홍수를 뚫고 멤세트를 떠나오는 탈출기보다 새로운 터전인 멤피스에서의 적응기가 더 인상 깊었다. 게브가 그들의 땅에서 상상할 이유조차 없었던 노동, 종교, 전쟁, 권위, 감시체계 등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모습은 그가 근심이란 것을 평생 모르고 산 평화로운 얼굴을 가졌다는 것, 유체이탈이 가능한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신비로운 섬에 갇힌 거인들이었을지라도 결국은 눈앞에 닥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간과 영혼, 죽음과 삶에 대한 기발한 상상력을 낯설지만 익숙한 소재와 방식으로 녹여낸다. 작가의 메시지를 찾아가는 책 속의 도구들과 내가 만나는 접점이 잦기 때문에 더 풍부한 감상이 생기기도 한다. 몇 번째인지 모를, 바로 이전의 삶을 살았던 또 다른 나는 아마 다음 생에 좋은 반려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 같다. 그리고 미래에 존재 할지도 모를 내 다음 생을 살게 된 누군가가 있다면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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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의 기술 - 일하는 커플이 성공하는 법
제니퍼 페트리글리에리 지음, 곽성혜 옮김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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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부부는 신혼에서 노년으로 가는 긴 세월 동안 세 번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시기에 따라 부부에게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돌파해나가느냐에서 부부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그 흐름이 서서히 옮겨간다. 부부가 가족으로서 함께 나아갈 미래를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재단해나가는 제1전환기, 파트너의 개별화를 인정하고 조율해나가는 과정인 제2전환기, 가정과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을 때 느낄 수 있는 공허함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제3전환기가 바로 그것이다.

    

 

각자의 삶을 살던 둘이 만나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주거지역을 정하고 자녀계획을 논의하는 것부터 직업의 특성이나 경력유지에의 갈망에 따라 합의과정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으며 출산과 양육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갈등은 더 심화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혼은 부부로서의 행복감을 가장 크게 느끼면서도 결혼이 주는 상실감과 회의감을 처음 만나는 때이기도 하다.

 

일과 사랑의 기술은 파트너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더 높은 연봉과 승진가능성을 따져 남자의 일자리가 있는 곳으로 신혼집을 정했다고 하자. 갑작스레 경력을 단절하고 새로운 곳에서 재취업, 출산, 육아를 시작해야하는 여자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남편이다. 상대방이 처해진 상황과 낯선 환경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하고도 막막한 감정들은 반대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임을 명심해야한다. 파트너는 기꺼이 나와 가정의 미래를 위해 희생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책의 포인트는 나와 배우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일과 사랑 사이를 저울질하는 것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더 빛을 발하는 기술이 된다. 가장 쉽고 빠르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 공유하기온전한 집중이다. 부부가 헤쳐 나가야하는 수많은 갈등상황과 결정에는 차마 다 표현하지 못하는 무수한 감정들이 가려져있다. 우리의 목적은 결국 갈등해결이고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을 원하지만 과정을 절대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부부 중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이 센 사람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따른다거나 감정 공유를 제때, 충분히 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영부영 결론지어지는 해결방법은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갈등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각자 바쁜 일상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루 3분만이라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하루 종일 별 소란스러운 일 없이 지내는 사람은 있어도 아무 일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어떤 말이든 서로의 눈만 바라보고 또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목소리에만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서로의 감정과 가치관을 즉시 공유하는 행위는 부부가 더 부부다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사실 일과 사랑의 기술이라 함은 굉장히 막막하다. 공동의 최대이익을 위해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때로는 희생도 감내하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 스스로를 잃지 않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과 사랑에 대한 한없이 추상적인 감상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풀어나가는 연습을 하다보면 나름의 노하우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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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였던 사람이 떠나갔을 때 태연히 밥을 먹기도 했다 (무지개 리커버 에디션) - 개정증보판
박근호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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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읽는 책에 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잊고 싶지 않은 글자들에 내 마음과 생각을 보태어 노란색 띠를 새기는 일이 감사하게도 이번 책에 꽤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 또한 얻는 것이라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_12p

처음 도전해 본 스타일의 옷이 나와 어울리지 않을 때, 늘 주문하던 것과 다른 음료를 시켰는데 영 입맛에 맞지 않을 때, 내가 선택한 직업이 일할수록 나의 성향과 맞지 않음을 느낄 때. 보통 이럴 때 우리는 시간 낭비, 돈 낭비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다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을 얻은 것이다.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생각을 마음껏 해도 되는 순간_25p

새벽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다음 날 아침 눈을 뜸과 동시에 깊숙이 숨어드는 잡다한 생각들은 다시 잠들기 전 어둠과 함께 스믈스믈 기어 나와 때로는 생각의 끄트머리가 꿈속까지 따라오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잠시나마 저런 순간들을 지나기 때문에 타협 없는 현실을 조금 더 견뎌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나이만큼의 딸이 있어도 손 꼭 잡고 낯선 곳으로 여행가야 해요_74p

함께 나이가 들어 우리가 처음 만날 때만한 자식이 있어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손을 잡고 떠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내가 저기서 가장 꽂힌 단어는 바로 낯선 곳이다. 처음 만난 나이만큼의 자식이 있으려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을 텐데 그럼에도 둘의 발길이 닿아본 적 없는 어딘가를 손 꼭 잡고 여행 간다는 것이 낭만적이라서.

 

어느 날 되지 않겠다던 사람이 되어 있어도 여전히 되지 않을 것을 찾을 것이다_139p

닮고 싶지 않은 무언가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해도 분명 그것보다는 더 나은 모습의 내가 되고자 하는 다짐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사실 되지 않겠다던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최악이 아닌 차악, 차악보단 차차악이 되고자하는 의지를 배운 문장이다.

 

전하지 못한 말142~143p

인생은 타이밍이다. 두꺼운 장갑과 쇳덩이, 튼튼한 사다리를 구하러 떠나있는 시간동안 전구는 계속 뜨거운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맨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차가워진 전구 앞에서 전하지 못한 말이라는 제목을 떠올린 작가의 의중을 감히 헤아려본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적거리거나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덤벼들어 해야 할 말을 적기에 하지 못하는 일은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보다 조금 더 중요하다. 불을 끄고 좀 기다렸다가 너도 나도 준비가 됐을 때, 그 때를 찾자.

 

가장이라는 단어를 삶에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겠다는 것을 배웠으니까.156p

나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가장이라는 말은 내게 너무도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슬플 때는 어떤 노래가 떠오르는지, 간편한 집 밥 레시피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영화장르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엔 좋은 노래도 영화도 음식도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나만 꼽지? 그래서 질문을 듣자마자 탁탁 대답을 뱉어내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우유부단한 나와는 달라보여서.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1순위로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가 없기에 요지부동의 비교대상이 없어서 매번 만족하며 지낼 수 있다. 순위를 매기지 못하는 것이지 호불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늘 가장 빠른 수단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취향의 순위까지 강요하지는 말자. ‘가장은 누군가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성의 없는 질문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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