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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
캐스린 길레스피 지음, 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9년 10월
평점 :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달걀껍데기에 보면 초록색으로 도장이 찍혀있는데 거기 마지막 숫자가 4면 안 좋은거래. 난 이제까지 마트가면 제일 싼 달걀만 샀는데 내가 산 건 다 4더라고. 너도 한번 봐봐.” 냉장고를 열었더니 당연하게도(나도 제일 싼 것만 샀으니까) 4가 찍혀있었고 그 숫자가 주는 의미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마지막 숫자 1~4는 닭 사육환경을 구분하는 번호인데 1이 자유방목이라 가장 좋고, 4는 A4용지 반만한 케이지에 갇혀 날갯짓 한 번 못하고 모이만 먹고 알을 낳는 걸 반복한다. 흙 목욕을 안 시키니 털에 붙은 진드기를 제거하기 위해 살충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고, 밤낮으로 불을 켜서 산란율을 높이거나 강제 털갈이를 하는 등 스트레스를 주니 결국 그 닭이 낳은 알에는 숫자 4가 찍혀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너무나도 늦게 ‘동물복지’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조금 더 공부해보기로 했다.
<지금부터 진짜 리뷰>
인간의 행복을 위해 짓밟혀지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어떤 내용일지 표지만 봐도 감이 오기에 책을 펼치기 전에 다짐 한 것이 있다. 난 그래도 라떼, 치킨, 삼겹살, 육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누구에게 말한 건 아니다. 그냥 나 혼자. (참 이기적인 인간이다. 결국 진실이 무엇이건 포기는 안하겠다는 거니까)
나는 엄마 젖 대신 우유를 먹고 자랐고 지금도 라떼를 거의 매일 마실 정도로 우유와 가깝다. 새하얀 액체를 보면서 빨간 핏덩이, 고기, 도축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푸른 초원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젖소의 모습을 떠올릴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
사실 닭, 돼지, 소가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섭취’에 그 목적을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닭, 돼지, 소를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이런 생각이 뿌리박히게 된 계기도 물론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하교하는 길 교문 앞에서 파는 노란 병아리를 단돈 500원에 사들고 와서 마당에서 키운 적이 있다.(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동전 하나로 맞바꿀 수 있는 생명이라) 창문과 출입문을 뚫어 놓은 박스 한 귀퉁이에 모이도 뿌려놓고 물통도 만들어줬다. 나와 같은 날 친구 집으로 간 다른 병아리들(색색별로 염색까지 되어있었다)과는 다르게 우리 집 병아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이내 닭벼슬을 가진 어엿한 닭의 모습을 했다. 이른 아침이면 정말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꼬끼오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닭은 옆집 할머니가 혼자 지내기 적적하다며 엄마가 홀랑 줘버려 없었고 그 날 저녁은 닭볶음탕이었다. 며칠 뒤 바로 옆집인데 왜 아침에 닭 우는 소리가 우리집까지 들리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내게 엄마는 이미 내 뱃속에 있다는 말로 닭의 근황을 전했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내가 경험한 이 과정은 ‘이중사고’이고 어릴 때부터 ‘어떤 동물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하며 ‘특정 종의 동물을 먹는 것은 용인 가능하다는 믿음’이 학습되는 거라고 한다. 그래야 잔인하고 폭력적인 도축과정들을 합리화 할 수 있으니까.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모든 소들은 꼬리와 뿔 등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본능과 가능성이 거의 제거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들이 받는 고통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소들의 상품성에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곧 경제적 손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게 먹어도 체중을 늘리기 용이하도록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곡물을 섭취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라 끔찍한 인공수정 과정을 거쳐 새끼를 품어볼 수 없는 여러 번의 출산을 한다. 우유와 각종 파생 식품들을 생산해내면서 쇠약해지면 도축되어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고기의 모습이 되고, 식용이 불가한 부산물들은 렌더링 공장(사체를 가공하는 곳)으로 보내져서 가죽, 비누, 골분 사료 등의 소비재 생산에 이용된다. 오로지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해 길러지며 사는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생명이 끊긴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못한다.
작가는 이렇게 생명이 으스러지는 과정을 쓰레기에 비유했다. 우리가 내다 놓는 쓰레기봉투는 누군가가 치워주기 때문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내 기억에서도 사라진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버린 그 쓰레기들이 진짜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동물의 생존권을 우리의 이익에 맞게 주무른다. 그 과정에서 생명의 존엄성보다는 작업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상품적 가치와 경제적 이윤에 대부분의 초점을 맞춘다. 작가가 경매장에서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소와 눈이 마주치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때, 나는 영화 워낭소리에서 할아버지의 반평생을 함께한 소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결국 나도 그 소가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기고도 할아버지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를 가슴으로는 공감하면서도 식생활과는 별개의 문제로 선을 그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영화관에서만큼이나 짧고 얕게 동물원에서 동물의 감정과 특성을 이해하는 척 해본다. “저기 갇혀서 얼마나 답답할까, 넓은데서 뛰놀아야 하는데”하는 생각, 아주 잠깐 일 뿐이다.
이 책을 보고 내 식생활에서 잡생각이 더 많아져 불편함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몰랐으면 했던,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걸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에 생기는 찝찝함이랄까. 감정도 제멋대로다. 화남, 슬픔, 부끄러움이 적절히 섞인 것 같다. 그 와중에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대안이 나오겠지’하며 또 모른척하려고 시동 거는 내가 조금은 한심해지려고 한다. 대신 앞으로 내가 마주할 살아있었던 어떤 것들에 대해 조리 전 애도를 표하기로 했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