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였던 사람이 떠나갔을 때 태연히 밥을 먹기도 했다 (무지개 리커버 에디션) - 개정증보판
박근호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내가 읽는 책에 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잊고 싶지 않은 글자들에 내 마음과 생각을 보태어 노란색 띠를 새기는 일이 감사하게도 이번 책에 꽤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 또한 얻는 것이라는 걸 기억하길 바란다_12p

처음 도전해 본 스타일의 옷이 나와 어울리지 않을 때, 늘 주문하던 것과 다른 음료를 시켰는데 영 입맛에 맞지 않을 때, 내가 선택한 직업이 일할수록 나의 성향과 맞지 않음을 느낄 때. 보통 이럴 때 우리는 시간 낭비, 돈 낭비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다음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을 얻은 것이다.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생각을 마음껏 해도 되는 순간_25p

새벽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다음 날 아침 눈을 뜸과 동시에 깊숙이 숨어드는 잡다한 생각들은 다시 잠들기 전 어둠과 함께 스믈스믈 기어 나와 때로는 생각의 끄트머리가 꿈속까지 따라오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잠시나마 저런 순간들을 지나기 때문에 타협 없는 현실을 조금 더 견뎌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나이만큼의 딸이 있어도 손 꼭 잡고 낯선 곳으로 여행가야 해요_74p

함께 나이가 들어 우리가 처음 만날 때만한 자식이 있어도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손을 잡고 떠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내가 저기서 가장 꽂힌 단어는 바로 낯선 곳이다. 처음 만난 나이만큼의 자식이 있으려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을 텐데 그럼에도 둘의 발길이 닿아본 적 없는 어딘가를 손 꼭 잡고 여행 간다는 것이 낭만적이라서.

 

어느 날 되지 않겠다던 사람이 되어 있어도 여전히 되지 않을 것을 찾을 것이다_139p

닮고 싶지 않은 무언가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해도 분명 그것보다는 더 나은 모습의 내가 되고자 하는 다짐이 돋보이는 문장이다. 사실 되지 않겠다던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최악이 아닌 차악, 차악보단 차차악이 되고자하는 의지를 배운 문장이다.

 

전하지 못한 말142~143p

인생은 타이밍이다. 두꺼운 장갑과 쇳덩이, 튼튼한 사다리를 구하러 떠나있는 시간동안 전구는 계속 뜨거운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맨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차가워진 전구 앞에서 전하지 못한 말이라는 제목을 떠올린 작가의 의중을 감히 헤아려본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적거리거나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덤벼들어 해야 할 말을 적기에 하지 못하는 일은 전구를 갈아 끼우는 일보다 조금 더 중요하다. 불을 끄고 좀 기다렸다가 너도 나도 준비가 됐을 때, 그 때를 찾자.

 

가장이라는 단어를 삶에 붙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겠다는 것을 배웠으니까.156p

나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가장이라는 말은 내게 너무도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슬플 때는 어떤 노래가 떠오르는지, 간편한 집 밥 레시피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영화장르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세상엔 좋은 노래도 영화도 음식도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나만 꼽지? 그래서 질문을 듣자마자 탁탁 대답을 뱉어내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우유부단한 나와는 달라보여서.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1순위로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가 없기에 요지부동의 비교대상이 없어서 매번 만족하며 지낼 수 있다. 순위를 매기지 못하는 것이지 호불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늘 가장 빠른 수단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취향의 순위까지 강요하지는 말자. ‘가장은 누군가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성의 없는 질문일 뿐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