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인생에 미안하지 않도록 - 이제는 엄마나 딸이 아닌 오롯한 나로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평점 :
열 번 중 세 번은 한탄과 푸념이 섞인 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서 도망치듯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위로의 한 문장을 발견했다.
「누구나 고통 받으면서 산다. 삶이란 절반의 고통과 절반의 배신 사이에 잠깐 빛처럼 스쳐가는 행복 때문에 질긴 끈에 매달려 있다.」 _270p
돌이킬 수도, 기대나 희망을 찾아볼 수도 없는 현실을 오늘도 살아내는 엄마의 무너진 마음을 잠시나마 외면하고 싶었다. 엄마가 감정을 풀어내는 유일한 창구인 나는 그저 묵묵히 언제라도 듣고 또 듣지만 언제부턴가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그 속에서 빠져나가야 내 인생에 덜 미안한 일이란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그것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아마 누구의 방해도 협조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사색의 깊이를 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과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관계를 마주하는 데는 애정 하는 여행지도, 지긋한 나이도, 극단적인 상황 가정도 필요 없다. 그저 일상을 살다 어느 한 부분에서 문득 내 삶의 조각들과 맞닥뜨려지는 순간을 잘 지켜보면 된다. 책 속에서 소중한 문장들을 건져 올리는 것처럼.
「“아무리 촘촘하게 짠 체라도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해. 버무려져 살아야지.”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 거름막이 있어야 한다고. 가볍게 토해내는 말이나 술렁거리는 감정의 누수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_225p
「관계란 거대한 하늘의 망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태어나서 소멸하는 날까지 이어지고 어우러지는 인과의 망이다.」 _294p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맺고 있고, 맺을 것이다. 나름의 유사성 있는 기준으로 걸러져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과 때로는 마음을 때로는 그저 인사만 나누며 관계의 허무함에 씁쓸해하고 인연이라는 이름의 놀라움에 대해 감탄해마지않는다. 필연적 관계와 선택적 관계의 경중을 따지고 얼기설기 얽혀있는 관계 속 내 역할을 곱씹어 볼 것이다.
엄마에게서 전화 오는 시간대를 살피고, 첫마디를 내뱉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통화내용이 하루 종일 맴돌아서 엄마의 원망의 대상을 원망하느라 다른 것에 당최 집중 못하던 날들이 길었다. 나는 그 전화 한통에 한동안 울적해지는데 엄마와의 다음 통화에서 행복의 끈을 발견할 때면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언제 끊어질지 모를 그 끈 덕분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내 역할에 분명한 선을 긋고 분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시적인 감정쓰레기통 그 이상이 아니라고. 내가 유일한 대나무 숲이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후련하다는 엄마의 바람과 지나치게 몰입하여 감정소모 하고 싶지 않은 내 바람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 도피처로 독서를 선택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음을 다치지 않는 방법은 선택할 수 없지만 지친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마주하지 않고 도망가는 법만 터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오롯이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니 오늘도 ‘내 인생에 미안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비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