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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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티나가 1년 전 죽은 아들 대니를 보는 환영과 악몽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순간 급격한 추위가 동반되고 죽지 않았어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전달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마침내 이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대니가 현재 살아있고,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엄마에게 직접 알려주는 신호임을 확신하게 된 티나는 전직 군인이었던 엘리엇과 함께 아들을 찾아 나선다.

    

 

위험을 감지한 시점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인물과 비밀을 공유하고 자연스럽게 조력 관계를 맺게 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모험을 시작하는 구성에 어느 하나 빈 공간이 없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장치 덕에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간다. 티나와 엘리엇이 대니를 찾아 나서는 여정, 그 추진력에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훼방을 놓는 악역도 장애물도 없다. 물론 티나와 엘리엣이 짧은 시간 견고하게 쌓아올린 사랑의 힘이 합동작전을 수월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티나의 모성애가 주는 무조건적인 확신과 엘리엇의 직감은 혹여나 느슨해질 흐름에 탄력을 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를 안전하게 자신이 있는 곳으로 인도한 아들과 그 신호를 놓치지 않은 엄마, 그 둘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도운 엘리엇의 판단력이 완벽하고 튼튼한 정삼각형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티나는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느껴지고 글자로, 음악으로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 마다 밤과 그림자, 어둠의 눈’(249p)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 소름끼치는 두려움이 혹시 진짜 살아서 보내는 대니의 울부짖음이 아닐까라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더 이상 절망이 아닌 희망의 신호가 되었다. 아들의 간절한 외침이자 삶에 대한 열망을 본능적으로 느낀 엄마의 믿음은 때로 무모해보이기도 했다. 딘 쿤츠도 어쩌면 독자들이 이런 무모함을 느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모성애라는 것이 원래 가늠할 수 없이 거대하고, 계산적인 어떤 것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이니까.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에도 아들을 잃은 엄마가 등장한다. 전등이 제멋대로 켜지고 꺼지는 것을 사라진 아들 윌의 신호라고 여긴 엄마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윌의 메시지를 보기위해 알전구 아래 알파벳을 벽에 늘어놨던 엄마 조이스와 대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지도 위에서 펜을 들고 기꺼이 최면에 걸린 엄마 티나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마치 미국판 김진명 작가의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시원시원한 문체와 전개가 가독성을 높인다. 특히 연구원 돔비의 증언에는 코로나 발원지일 가능성으로 회자되는 우한지역과 바이러스 연구라는 키워드가 등장하여 화제다. 무려 40년 전에 쓰여 진 소설임을 감안할 때 현재의 상황을 미리보기 한 것 같은 유사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천연 항체 덕분에 바이러스에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무사히 엄마의 품으로 돌아간 대니. 우리는 천연 항체도 초능력도 가지지 못한 한없이 무력한 인간이지만 다시 아무렇지 않았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 소설의 결말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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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 - 무민 골짜기, 시작하는 이야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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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속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위태롭고 절망적이었던 그 순간 피어낸 희망의 씨앗이라니 정말 아이들의 밝은 꿈을 위한 놀라운 역설임에 틀림없다.

 

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 제목부터 난관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해피엔딩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위기가 주는 극적임을 넘어서면 마침내 행복이 올 것이라는 것은 토베 얀손이 주고 싶었던 가장 큰 메시지임을 알기 때문에.

    

 

무민의 엄마와 무민은 아빠를 찾아 나선 여정에서 낯설지만 작은 동물을 외면하지 않는다. 작은 동물이 조금은 무례하고 제멋대로여도 말이다. 햇빛을 찾다 만난 노신사의 달콤한 안식처, 개미귀신의 모래공격, 바다 트롤이 키를 잡은 배에서의 항해를 거쳐 결국 아빠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얻은 무민 일행. 남쪽으로 떠나는 길에 우연히 조난을 당한 고양이 가족을 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빠의 메시지가 담긴 유리병을 발견한다. 또 우연히 발견한 안경을 주인인 대머리 황새에게 전해주자 무민의 아빠가 있는 나뭇가지까지 단숨에 데려다주었다. 저 두 번의 우연에는 작은 동물의 눈썰미가 한 몫 했다. 마침내 무민의 아빠가 홍수 전 골짜기에 지은 멋진 집에 도착한 무민 가족의 완전체. 작은 동물의 마지막 우연인 진주 목걸이 발견도 이 소중한 보금자리 앞에서는 그 이상의 행복이 될 수 없다.

 

무민의 엄마와 무민의 언행에는 예의바름이 묻어있다.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며 자신의 의견을 펼칠 줄 알고, 그들의 어려움을 제 일처럼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일까. 작은 동물의 동행이 결말로 갈수록 더 빛을 발한다. 마치 자신을 거두어준 그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연히 작은 동물의 눈에 띈 물건들이 무민의 아빠를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가족이 다 모인 후에도 그들의 안식처를 진주 목걸이와 비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로 느낄 수 있게끔 했다. 무민의 엄마와 무민이 여정의 초반 작은 동물을 외면했다면 아빠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진짜 한 순간의 선택이 생명을 오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타인을 돕는다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님을. 그렇다고 그저 동화니까 가능하다고도 이야기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작은 행동들이 결국 미래의 나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기 때문에. 토베 얀손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목표와 용기, 결단을 잃지 말라고 전해준다. 아빠를 찾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노신사가 만든 허구의 천국에서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고, 내 가족과 이웃을 지킬 수 있는 용기와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매순간 단호히 내렸던 결단들이 모여 만들어낸 해피엔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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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조심! 인종 차별 해요 라임 어린이 문학 32
오드렝 지음, 클레망 우브르리 그림, 곽노경 옮김 / 라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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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현관 앞에 나타난 길 잃은 개 한 마리. 이웃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소문하지만 주인을 찾지 못해 결국 마엘의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미누라는 이름의 이 개는 흑인만 보면 으르렁 대며 적대심을 보여 마엘의 가족을 곤경에 빠뜨린다. 미누의 경계심에 어떤 이유가 있어서인지 가족들의 걱정과 고민이 날로 커져가는데...

    

 

세상에 사람의 인종을 따져가며 차별하는 개는 없다. 미누가 흑인을 보면 보이는 특정 행동에는 마엘의 집 현관 앞에 버려지기 전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이유로 버려지게 되었는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혹여나 자신에게 가혹하게 대했던 주인이 흑인이었고 버림받는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생겼다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적대시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아마 전 주인이 백인이거나 동양인이었다면 경계하는 대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사실 차별은 사람들의 본능이기도 하다. 강대국, 선진국이라 칭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은연 중에 동경하고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싶어 한다. 약소국, 후진국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관심조차 없고 그들의 문화를 미개하다고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피부색이 주는 특권을 막상 우리도 경험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카티 고모는 미누의 엉덩이를 후려쳤고 엠마 아빠는 잃어버린 미누를 찾지 못하면 새로운 품종으로 사주겠다고 했다. 마치 소모품인양 기분에 따라 학대하고 잃어버리면 쉽게 구매하는 행위들 역시 인종 차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 노동자를 입맛대로 부리는 양심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미 뉴스에서 많이 접해보았을 테니까.

 

편견이 생기는 시간은 굉장히 짧다. 유럽여행 중 팔찌 강매를 당하는 5, 트램에서 내 가방에 손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이 마주쳤던 3초 만에 특정 인종에 대한 차별의 샘이 충분히 솟아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그 순간을 지나보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팔찌, 코끼리 장식품 등을 가방에서 자꾸만 꺼내던 그 사람은 그 와중에도 자기나라의 가난함을 이야기했었고, 소매치기를 시도했던 그 사람은 굉장히 앳되어 보이는 소녀였으며 아기를 안은 동행자도 함께였다. 그냥 나와 같이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확립하는 것에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경험으로 치고 넘기기에는 그 사람들을 평생 나쁘게, 가볍게 기억할 것 같아서.

 

 

인종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말라는 문구처럼이나 익숙하다. 우리 모두 같은 피부색을 가졌더라면 인종 차별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어떤 이유에서건 차별은 부당한 것이며 마음의 우울을 유발한다. 그저 한 겹 걸친 가면일 뿐인 피부색 따위 상관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진심을 나누는 세상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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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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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남편과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잘 자라는 인사는 꼭 한다. 물론 내용은 그날그날에 따라 구체적으로 추가될 수도 있다.

르 클레지오의 말처럼 나는 나의 인간성과 나의 육체를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우리를 끊임없이 타인의 삶과 고백 속으로 탐험하도록 밀어 넣는 것 같다._76p

늦은 밤 피곤한 몸을 누이는 침대에서 각자의 하루를 읊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 시작한 새로운 개발품은 어떤 것인지, 근래 화두가 되는 직장 내 이슈가 뭔지 내 호기심을 충족하기에는 남편이 쏟아내야 할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돈 버느라 고생했다는 짧은 말로 대신한다. 그 속에는 더 자고 싶은 눈꺼풀을 억지로 일으키고 욕실로 들어서는 남편의 뒷모습에 대한 애잔함이 묻어있다.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의 말보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했던 시간들에 전하는 위로와 토닥임은 고단했던 하루의 마지막을 깔끔하게 매듭지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밤이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인가보다.

    

 

며칠에 한 번 습관적으로 클라우드 어플에 접속한다. 1년 전 오늘, 5년 전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나눈 사람과 공유하기도 하고 그날의 일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진을 찍지 않은 수많은 날들은 어디에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겨지지 않은 우리의 지난날들은 A를 보면 B가 떠오르는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BA와 얽힌 추억을 가진 어느 한 사람일 수도, 누군가의 한 마디일 수도, 내 지난날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나는 자잘한 기억을 잘 하는 편이라서 사물을 보면 동시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이 많다.

살다보면 기억을 포맷까지는 아니더라도 파일 조각모음도 디스크 정리도 해야 하건만, 자질구레한 조각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정작 중요한 생각을 못하네. 그럴 공간이 없네._102p

소소한 추억에 가려져 사라져버린 진짜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객관성을 잃고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버린 기억은 또 무엇일까. 용량만 늘리면 순서대로 차곡차곡 저장되는 클라우드처럼 내 뇌에서도 순차적이고 정확한 기억들이 쌓인다면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의 일상은 때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인되고 본능적 필요에 따라 지워진 덕분에 완성된 모습이다. 각자의 용량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기억되고 정리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2018년 오늘내 모습이 사진으로 뜨지 않아도 크게 서운하지가 않다.

 

이 책은 잃어버린 것 같았던 내 시간들에 감사의 인사를 건네게 했다. 내 인생에서 없었던 날인 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도 없어도 분명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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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미안하지 않도록 - 이제는 엄마나 딸이 아닌 오롯한 나로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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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 중 세 번은 한탄과 푸념이 섞인 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서 도망치듯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 위로의 한 문장을 발견했다.

누구나 고통 받으면서 산다. 삶이란 절반의 고통과 절반의 배신 사이에 잠깐 빛처럼 스쳐가는 행복 때문에 질긴 끈에 매달려 있다._270p

돌이킬 수도, 기대나 희망을 찾아볼 수도 없는 현실을 오늘도 살아내는 엄마의 무너진 마음을 잠시나마 외면하고 싶었다. 엄마가 감정을 풀어내는 유일한 창구인 나는 그저 묵묵히 언제라도 듣고 또 듣지만 언제부턴가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그 속에서 빠져나가야 내 인생에 덜 미안한 일이란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그것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아마 누구의 방해도 협조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에서 사색의 깊이를 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생과 나를 둘러싼 것들과의 관계를 마주하는 데는 애정 하는 여행지도, 지긋한 나이도, 극단적인 상황 가정도 필요 없다. 그저 일상을 살다 어느 한 부분에서 문득 내 삶의 조각들과 맞닥뜨려지는 순간을 잘 지켜보면 된다. 책 속에서 소중한 문장들을 건져 올리는 것처럼.

    

 

아무리 촘촘하게 짠 체라도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해. 버무려져 살아야지.”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 거름막이 있어야 한다고. 가볍게 토해내는 말이나 술렁거리는 감정의 누수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_225p

관계란 거대한 하늘의 망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태어나서 소멸하는 날까지 이어지고 어우러지는 인과의 망이다._294p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맺고 있고, 맺을 것이다. 나름의 유사성 있는 기준으로 걸러져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과 때로는 마음을 때로는 그저 인사만 나누며 관계의 허무함에 씁쓸해하고 인연이라는 이름의 놀라움에 대해 감탄해마지않는다. 필연적 관계와 선택적 관계의 경중을 따지고 얼기설기 얽혀있는 관계 속 내 역할을 곱씹어 볼 것이다.

엄마에게서 전화 오는 시간대를 살피고, 첫마디를 내뱉는 엄마의 목소리 톤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통화내용이 하루 종일 맴돌아서 엄마의 원망의 대상을 원망하느라 다른 것에 당최 집중 못하던 날들이 길었다. 나는 그 전화 한통에 한동안 울적해지는데 엄마와의 다음 통화에서 행복의 끈을 발견할 때면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언제 끊어질지 모를 그 끈 덕분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내 역할에 분명한 선을 긋고 분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시적인 감정쓰레기통 그 이상이 아니라고. 내가 유일한 대나무 숲이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후련하다는 엄마의 바람과 지나치게 몰입하여 감정소모 하고 싶지 않은 내 바람의 접점이었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 도피처로 독서를 선택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마음을 다치지 않는 방법은 선택할 수 없지만 지친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마주하지 않고 도망가는 법만 터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오롯이 나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니 오늘도 내 인생에 미안하지 않도록에너지를 비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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