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손자로서 역사적 존재성이 확실한 ˝자사˝라는 대사상가에 의하여 일관 의도를 가지고 지은 역저라고 보는 것이 도올의 결론이자 사계의 공통된 의견으로 본다.

제1장 천명장부터 제33장 무성무취장 3,560자로 이루어져 논어 13,700여 자에 비하면 그 양이 방대하지는 않다.




그런데 중용"에 대한 가장 큰 일반인들의 오해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자세에 있어서 어떤 행동규범상의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는 근거없는 통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용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호언하는 자는 결국 회색분자도 안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중용"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문제의 핵심을 도피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유도하거나, 이것도 저것도아닌 우유부단한 머뭇거림의 비겁한 방편을 제시하는 그런 말장난에지나지 않는다. 공자나 자사는 그러한 "중용"을 말한 적이 없다. 대개그러한 "중용"의 개념은 서양철학에서 온 것이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 Ethica Nicomachea』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언어에대한 피상적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 P52

인격적 훌륭함이란 습관ethos의 축적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윤리적ethike 이라는말은 습관athos이라는 말의 형용사형이다. 즉 윤리와 습관은 같은 어원을 가지는 말들이다. 인격적인 또는 윤리적인 훌륭함은 습관을 통하여형성되는 것이다. 인격적인 또는 윤리적인 탁월함은 천성으로 생기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P56

그러나 중용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 따라 중용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앞의 인용문에서 "탁월성은 이성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의 상태"라고 말했던 것이다. 중용은 그 상황상황에서 선택proairesis을 요하는 것이다. 선택은 반드시 이성의 개입을 동반한다. 선택은 가볍게 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 목적과 심사숙고 bouleusis가 수반되어 있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보후밀 흐라발(1914~1997)

 

- 49살에 첫 소설집 [바닥의 작은 진주]를 출간.

 

- '체코 소설의 슬픈 왕'으로 불림

 

- 체코에서만 무려 300만부 이상 팔려나가고, 30여 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

 

- 8편의 작품이 영화화

 

- 1997년 5층 창문에서 비둘기 먹이를 주려다 떨어져 사망

 

 

첫 문장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9쪽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 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 10쪽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11쪽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 주었다.-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어 제4편 이인 제사
논어 제5편 공야장 제오

2편의 강해가 실려 있는 제3권입니다.

˝자유로운 고전풀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자유를 구속하는 기존의 주석에 대한 치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논어의 주석은 엄청난 통시적 축적태이며, 그것은 동시에 각 시대에 있어서의 공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 주석을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필로로기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논어를 말해서는 안된다.˝ -2001년 4월6일 아침 낙산재에서 도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올의 중국일기 5 - 세기의 대결 도올의 중국일기 5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일기 5권에서 장학량의 일생담을 엮었다.

장학량(1901~2001)은 과거 우리가 고구려 최고의 영역을 차지한 땅과 비슷한 동북지역 3성을 총관할하는 사령관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1931년 일본이 만주에 쳐들어왔을 때 

중국 전체를 통틀어 육해공군과 30만의 정예군인으로 이루어진 최고의 동북군이 아무런 저항(부저항)도 하지 않고 단 하루만에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3개 중대에 불과한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파괴와 무참한 살육을 당해가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동북의 역사에 관하여 너무도 무지하다.

그런데 책에서 도올 선생이 말한 것처럼 중국인들에게도 동북의 역사는 중국역사의 메인스트림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별로 없는지라 

그들도 마찬가지로 무지하다는 평설은 실로 놀랍다.

위급상황에 총을 잡고 앉아서 괴멸되는 군인의 역사는 이 지구가 개벽된 이래 장학량의 부저항 단 한건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은가?

실로 책을 읽어가며 그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 JTBC에서 방영한 차이나는 도올 12강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내용이었지만 

동북(똥뻬이)의 사망, 그들에게 우리의 경술국치와 같은 날인 9.18사변(우리가 흔히 만주사변이라 일컫는 역사 용어를 중국인들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은 여태 살면서 처음 공부한 내용이었다. 또 부끄럽고 또 희열을 느낀다.

왜냐하면 이 스토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의 연결고리와 그 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인즉, 동북이 총 한번 잡아보지 않고 대수부가 함락되어 그 이듬해 30만에 달하는 동북항일의용군이 조직되지만 상부조직과 최고의 전투물자들이 날아가버린 지라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괴멸된다. 결국 이 동북항일의용군이 발전하여 동북항일유격대, 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1936년 "동북항일연군"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조직 속에서 김일성이라는 또 하나의 소년장군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이 말은 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을 것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 흠뻑 빠진 때가 있었다. 그 때 일본이 발악을 하던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로 넘어가던 즈음, 우린 도저히 대한민국 땅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시기였다.

우리 독립운동은 대부분 만주에서 텃밭을 일구어 투쟁을 해 왔는데, 그 때 만주가 장학량의 땅 동북임을 감안하면, 동북의 운명이 우리 독립운동과 함께 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동북항일연군이 산속에서 일본이 토끼몰이를 하듯 가장자리부터 싹 훑어 괴멸시키는 방법으로 당한 최후는 누구라도 분기탱천할 역사적 사실이다.

(태백산맥에서 마치 빨치산을 괴멸시키는 방법과 동일한 것은 일본 전략을 그대로 배워온 것이라 추측한다.)


장학량의 일생에 장개석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만주사변과 이후 서안사변, 그리고 중국의 근 현대사는 장개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또한 현대 중국과 대만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일 것으로 그 피상만 바라보게 된다.

도올은 장개석을 이렇게 평한다.

"이승만은 주요정적을 그냥 암살해버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개석은 이승만보다는 교활의 차원이 더 대륙적이었다. 장개석의 전략은 '띄워놓고 병신 만드는 것'이다" -198쪽


장학량을 띄어놓고 병신 만들어 동북을 내어준 것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부저항정책"이라는 것의 역사적 함의, 그리고 그것의 실제적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장개석이 몰랐을 리 없고 그 이후 일련의 쇼를 통해 국제연맹에 호소하는 더러운 거짓 행위는 일본에게 나라를 판 이완용처럼 일본에게 똥뻬이를 할양한 것의 뒷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시적으로 보면 결국 장개석은 동북을 공산당의 텃밭으로 만드는 우를 범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암튼, 그 거대한 땅 동북이 최고의 병력과 최고의 공군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군대 몇 천명에게 하루만에 고스란히 내준 만주사변의 이해는 관심있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린 기실 한번도 역사를 배우면서 이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줄밖에 배우지 못했다.

우리의 학습권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1931년 만주사변" 외우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잊을만하면 망언을 일삼는 이 땅의 친일파들 제발 아래 도올 선생의 글을 읽고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의 네오리버랄리즘을 외치는 유수 대학의 학자들이 이러한 일본의 강점역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시각을 제시하고, 또 반민특위를 좌절시킨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숭상하고, 그 정권의 역사를 보수정권의 자랑스러운 뿌리로 존중하려고 한다. 설령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우리 민족의 역사의 근대화 과정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치자.! 허나 그러한 테크니칼한 역사의 공과는 모두 도덕적 반성이 선행된 이후의 사소한 역사기술의 문제일 뿐이다. 어찌 근본을 망각하고 말폐를 미화할 수 있겠는가? 일본의 수상을 지낸 우익수장 타나카 카쿠게이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9.18과 만주국성립에 만족하고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조선과 만주는 지금도 일본의 영토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날강도짓을 근원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족협화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많은 일본인이 무의식의 담론으로 보지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좌,우를 논하지 말자. 여,야를 논하지 말자! 경복궁 앞에 일장기가 또다시 걸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민족의 상식이요. 당위요. 정의가 아니겠는가! " - 191쪽






덧붙임. 5권이 완결이 아님. 책의 말미에 제 6권으로 이어집니다!! 라고 분명히 !

이 책의 출판이 2015년임을 감안하면 5년 동안 제6권이 나오지 않았는데, 도올 선생님...제 6권은 언제 나오나요? 

(도올 선생님의 책은 시리즈인 경우 대부분 미완성인 경우가 많음, 논어도 글코, 노자도 글코.)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미 그 전날 6월 27일 새벽 3시에 경무대를 쥐새끼처럼 아무도 모르게(군부, 국회의 사람들과 의논치 않았다.) 빠져나와 서울역에서 특별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뺏다. 그것도 대구까지 갔다가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따라 열차를 되돌려 대전에 내렸다. 충남지사관사에서 여장을 풀고, 마치 그가 서울에서 서울을 고수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있는 "쌩거짓말방송"을 했고, 그것은 27일부터 서울중앙방송국에서 광파되었다. 한강다리 폭파는 군사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우행이다. 철교는 폭약불발로 제대로 끊어지지도 않았고, 인도교는 소개명령 없이 폭파되었다. 당시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시민과 50여 대의 차량이 함께 폭파된 것이다. 참혹한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강 이북에 있던 우리 국군이 4만 4천명이나 증발되어 버리고 마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일본인들은 항상 침략을 할 때 그냥 노골적으로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구실을 만드는 자작극을 벌인다. 야비한 위장의 천재라고 할까 둔재라고 할까?(...) 우리가 일본이 자국의 과거사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행태의 근원적 단절을 요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일본인의 후손들을 스스로 잘못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세력은 이러한 일본을 옹호해주려는 멘탈리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 172쪽

장개석은 일본과 싸울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가 진정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국내정적들이었다. 그는 일본의 침략으로 조성되는 비상국면을 활용하여 정적을 타도하는 것만이 그의 주요관심사였다. - 208쪽

나도 내 서재에 수십만 권의 장서가 있는데, 카드를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내 기억에 의존하여 책을 찾고 있다. - 312쪽

사적인 이야기는 많은 왜곡과 일시적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인의 구술이 본인의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가장 부정확한 엉터리일 수가 있는 것이다.(...)
장학량이라는 역사적 인격체는 기실 우봉지가 없으면 탄생되지 않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품격이 높은 여인은 남성에게 "매혹"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여인의 마력은 남자의 존재의 저변에 소리없이 스며든다. - 314쪽

남자는 기실 여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이다. - 3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래 도올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짧은 지식으로 역사의 "팩트"를 운운하거나

역사적 사실의 평가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

내심 상대방의 "무지"로 속단한 과오를 반성하게 된다.

 

 

 

 

역사라는 것은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게 되는 수도 있다. 과도한 정보의 홍류에 휩싸이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 대강의 줄거리를 잡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 홍류를 조감할 수 있는 어떤 초탈한 고지로 차원을 바꾸지 않으면 역사를 바라보는 눈 그 자체가 역사와 더불어 인멸되고 말 수도 있다.

 

 

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도, 한 눈에 반했을 그 순간의 잔상이 가장 진실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여인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체험하고 같이 뒹굴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하다가는 그 여인의 총체적 이미지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첫인상의 매혹적인 모습이 그 여인의 진실인가, 구질구질하게 루틴화 된 정보의 진흙 속에 흐려진 모습이 실상인가?

이것은 정말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이미지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가, 그 의미가 중요한 과제일 뿐이다. (...)

 

역사는 사가들의 도박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츄어가 아닌 전문가들의 도박이란 결국 누가 더 사기를 잘 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사가들이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때로는 엄밀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기들이 사기치는 세련된 기교 속에 갇혀 역사 그 자체를 왜곡할 때가 많다.

 

사가들의 논문은 역사의 무덤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속에서 너무도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지만, "논문"이라는 제한된 형식의 정보유통은 역사 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학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역사기술방식의 가장 현저한 오류는 사건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의 숨결"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 129~1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