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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평점 :
2023년 마지막날, 2024년 첫날에 걸쳐 이 책을 읽은 건 행운이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땐 너무 어린애같은 만화책이 아닌지 싶어 그냥 후루룩이면 다 읽겠는데 싶었는데 제목 그대로 한방 얻어 맞았다.
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말 난 뭘 모르는 어른 바보, 멍청이였던 것.
4학년이 된 정훈이는 좋아하는 친구와 짝이 되지 못해 속상해 하다가 3반의 똘똘이 지혜에게 일기장에 짝을 바꾸고 싶다고 쓰는 게 어떤지 조언을 구하는데..
이 장면부터 나는 나의 4학년을 떠올렸다. 정훈이와 마찬가지고 5학년이 되면서 꼭 같이 가고 싶은 친구가 생겼고 일기장에 그 바람을 썼더니 정말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된 추억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맘때쯤 모두 느끼는 친구의 소중함과 간절함은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마음이었다. 친구가 세계의 중심이고 전부인 시절을 지나와 지금은 너무도 냉소적으로 변한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짝이 되고 싶었던 친구와 짝이 되지 못한 정훈이가 새로운 짝꿍에 대해 갖는 마음은 내 마음을 녹이기 충분했다.
이상하게도 이 만화는 슬프다. 그림체, 이야기, 등장인물 모두 밝게 살아가고 우리 옆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사람들인데도 순수하게 집중하는 모습에서 그려지는 여러 에피소드가 읽고 나면 아련하다. 내게도 있었던 일들이었고, 또 찰나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는 장면들이 많아서였을까?
추억을 복기하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더없이 따뜻하고 재밌는 책이었다.
특히 짝꿍의 할머니가 끓여주신 맛없는 짜파게티를 먹을 때나, 팝콘 만두를 한 사람당 2개씩 먹어야 하는데 3개 먹었다고 오해하는 장면에서, 짝꿍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구를 위로해주기 위해 맛없는 짜장라면을 끓여주는 4학년의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우정과 의리가 이토록 순수해 보일 수 없다.
각자의 세계를 키우는 시기에 만나 또다른 감정의 폭을 겹치고 쌓여 이뤄내는 친구들의 우정이 재밌는 책이어서 어른들도 쉽게 공감하고 응원하게 되는 책이랄까.
마냥 어린이들의 삶이 철없고 웃기다고 생각하면 이 만화를 보면 달라질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온 친구가 듣는 말을 차별이라고 구별할 줄 아는 어린이가 있고, 손주를 위해 놀이터를 지어달라고 시위하는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꿀물을 선물하는 어린이가 있고, 2학년 후배에게 선뜻 비오는 날 우산을 건네는 11살의 어린이가 있다.
아, 이제 알았다. 내가 이 책을 순수하고 슬프다고 한 이유를.
어른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함께 해나가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느낀 감동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감정과 생각이 세밀하고 예민한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순수한 집중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멋졌다.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의 가슴 속에 한번쯤은 품었을,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그 순수함을 다시 꺼낼 수 있게 만든 책을 오늘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