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인류가 더 안정되고, 환경을 더 잘 다스리게 되고, 마을과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내면적인 삶을 추구하고 파괴적인 충동을 통제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대략 기원 전 900년에서 200년에 이르는·······시기에 인간의 정신적 발달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종교혁명이 일어났다.·······자비는 이런 활동의 핵심 요소였다.(43-44쪽)


종교혁명의 핵심 요소인 자비는 붓다의 ‘자리이타自利利他’ 또는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된다. 진부해 보이는 이 말은 그만큼 그 시대의 비상한 타락을 함축한다.


종교혁명의 시대에 인류가 더 안정된 삶을 누렸다는 저자의 말은 틀렸다. 흥융興戎 시대였다. 환경을 더 잘 다스리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은 틀렸다. 환경 침식 시대였다. 마을과 도시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내면적인 삶을 추구하고 파괴적인 충동을 통제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은 틀렸다. 자비의 추구는 마을과 도시 형성이 인류의 무자비 타락을 극에 달하게 했기 때문이다.


종교혁명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 문명비판의 산물이다. 종교혁명은 정신 발달의 계기가 아니다. 정신 회복의 계기다. 본디 있었던 자비 시대를 다시 열려는 부정의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을 무한히 계속하면서 ‘대’긍정의 땅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혁명은 오늘도 진행된다.


오늘 우리가 실천해야 할 혁명은 저 기축시대의 종교혁명을 다시 혁명하는 것이다. 세계의 타락상이 그 때와 비교할 바 아니다. 멸절의 징후가 읽힌다. 물러설 수 없으므로 실패할 수 없는 혁명을 해야 한다.


문제가 크다고 해서 각자 할 일이 모두 큰 것은 아니다. 소소하고 미미한 사람들은 소소하고 미미한 일상에서 소소하고 미미하게 자비를 깨우면 된다. 속삭여 묻는다. 나는 자비로운가? 속삭여 답한다. 나는 자비롭다. 말한 대로 움직인다. 혁명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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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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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성상 인간이 무자비하리만큼 이기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자기중심주의는 약 50억 년 전, 살아남으려고 태고의 진흙탕에서 몸부림치던 파충류에게서 물려받은 ‘오래된 뇌’에 그 뿌리를 둔다. 이 생명체는 오로지 생존만을 목적으로 신경과학자가 ‘네 가지 F'라고 부르는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 먹기feeding, 싸우기fighting, 달아나기fleeing, 짝짓기fuxxing가 그것이다. 이런 본능적 욕구는 즉각 반응체계로 발전되어 파충류가 먹이를 두고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모든 위험을 격퇴하고, 영역을 지배하고, 안전한 공간을 찾아내고, 자신의 유전자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우리 파충류 조상은 오로지 지위, 권력, 지배, 영역, 성교, 개인적 이득, 그리고 생존에만 관심이 있었다. 호모사피엔스는 이런 신경학적 체계를 물려받았으며, 뇌 기저의 시상하부에 자리한 이 체계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것이 일으키는 감정은 강렬하고 반사적이며, ‘모두 다 나와 관련된 것’이다.(21쪽)

  네 가지 F는 매우 강력해서 이성을 앞세우는 대신 조금 더 자비롭게 살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뒤집어 엎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발달된 ‘새로운 뇌’를 가진 생각하는 존재로서 네 가지 F를 감당할 능력을 지닌다. 우리에게는 더 파괴적인 본능에서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위태롭게 분열된 이 세상에서 자비는 최고 관심사다. 그러나 자비를 얻으려면 정신적·영적으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32쪽)


5년째 내게 주요 건강 문제를 의지해온 92세 어르신이 급체한 것 같다면서 진료 마감 직전에 황급히 침 치료를 요청하셨다. 모시고 온 가족에게 뭘 드셨느냐 물으니 요즘 부쩍 견과류 군것질이 느셨다고 귀띔해준다. 피틴산을 많이 함유한 견과류나 지방이 산패한 견과류는 소화불량을 야기하기도 하나 도리어 소화를 돕는 견과류도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양약을 다량 장복 중인 상태와 고령을 감안하여 나는 당분간 견과류 섭취를 자제하시도록 당부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구성된 세계는 그 대칭으로 말미암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일방의 실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실재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 실재는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니다. 이 실재를 모르던 시절 서구가 발견한 형식논리의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은 여전히 서구 지성을 지배한다.


뜨르르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카렌 암스트롱도 형식논리 프레임 안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자비하게 이기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파충류의 오래된 뇌에서 왔는가?


카렌 암스트롱은 직선·일방 진화를 전제한다.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진화하면서 오래된 뇌는 새로운 뇌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 본성을 파충류 뇌에서 찾고 파충류 뇌가 무자비한 자기중심주의라 한다면 뇌의 진화는 왜 본성의 진화로 연결되지 않는가? 영장류, 무엇보다 인류의 새로운 뇌는 새로운 본성을 지녀야 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인간 본성은 무자비하리만큼 이기적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가? 새로운 본성으로 이기를 극복하고 자비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 자연Sein 아닌가? 자비를 얻으려면 왜 정신적·영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가?


카렌 암스트롱의 직선·일방 사고는 여기서 임계점을 맞는다. 자비를 본성이라 해도 말이 안 되고 본성이 아니라 해도 말이 안 된다. 본성의 내포를 바꾸든가 본성의 외연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을 바꾸든 그것은 형식논리의 경계를 넘어간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파충류 뇌는 무자비한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다. 파충류 뇌는 나와 남을 나누지 못한다. 인간이 남이라 부르는 대상은 파충류에게는 내가 살려고 쓰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남이라 부르며 자기중심주의 운운하는 것은 인간 위주 직선·일방 사고다.


남의 각성은 포유류 진화에서 비롯했다. 포유 행위에서 남이 탄생했다. 남은 나가 아니다. 자비는 나 아닌 남을 대하는 생명 작용에서 진화해갔다. 나를 중심에 놓는 것과 나를 우선순위에 놓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에서 비롯하여 남으로 번져가는 삶이 자비다. 이 진실을 깨닫는 정도 차이에 따라서 무한한 결과 겹의 자비들이 너울거린다. 인간 자비도 그 밖에 있지 않다.


인간 자비는 다만 본성 문제가 아니다. 문명·문화·정치·경제·종교·교육·······인간의 다양한 삶의 형태와 체계, 그리고 지향에 따라 자비는 심지어 있다·없다 수준까지 차이를 드러낸다. 자비를 얻으려면 엄청난 정신적·영적 노력을 해야 하는 이치가 본성에만 있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구 형식논리라는 한계에다 종교학자라는 한계가 보태져 조금 한가하거나 느슨한 시선이 곳곳에서 노출된다. 긴박하고 촘촘한 눈은 독자 몫이다. 차명 휴대폰으로 비선과 통화하는 대통령의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려온 대한민국 민중에게 자비 화두는 카렌 암스트롱의 그것과 다르다. 촛불의 지속혁명으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세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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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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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비롭게 살아오지 못했으며 심지어 종교의 이름으로 인류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 도덕과 종교의 중심에 자비를 회복할 것

* 폭력과 증오와 경멸을 낳는 그 어떤 경전의 해석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옛 원칙으로 돌아갈 것

* 젊은이들에게 다른 전통과 종교와 문화를 정확하고도 경의가 담긴 정보로써 전달할 것

* 문화적·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장려할 것

*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을 올바른 정보에 터해 공감하도록 장려할 것(14쪽)


오늘 인류 대부분이 서구가 주도한 문명에 제압당한 채 그려내는 수많은 삶의 풍경화, 그 제목은 “무자비” 단 하나뿐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헬 조선’으로 회자되는 대한민국의 지배집단 벌인 협잡만 하더라도 무자비의 극단이니 말이다. 거기에 부역하는 통속한 주류종교의 영성 없는 훤화 또한 무자비를 자비로 둔갑시켜 살포하는 ‘개소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도덕과 종교의 중심에 자비를 누락시키며, 폭력과 증오와 경멸을 낳는 경전 해석을 정통으로 인정하며, 젊은이들에게 다른 전통과 문화를 부정확하고도 적의가 담김 정보로써 전달하며, 문화적·종교적 획일성을 강요하며,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을 그른 정보에 터해 무감하도록 강요하는 세상이다.


일요일(12일) 오후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갤러리에 갔다. 세월호 엄마들의 뜨개 전시가 있기 때문이다. 마침 엄마들과 만나는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 셋이 나왔다. 4반의 웅기 엄마, 6반의 영만 엄마, 순범 엄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이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색채는 단순했고 어둠의 색체는 복잡했다. 이들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무자비 행태는 참으로 무작스러운 것이었다.


빨갱이다, 시체 팔이다, 세금 도둑이다·······이미 진부한 욕이다. 울면 운다고 욕한다. 웃으면 웃는다고 욕한다. 외치면 외친다고 욕한다. 침묵하면 침묵한다고 욕한다. 움직이면 움직인다고 욕한다. 가만있으면 가만있다고 욕한다. 손톱 색칠했다고 욕한다. 머리 염색했다고 욕한다.·······대체 뭘 어쩌란 것인가.


엄마들은 이런 무자비의 질곡 속에서 뜨개를 배우기 시작했다. 뜨개 한 땀에 눈물 한 방울이 응결되어 무자비의 폭력을 뚫고 자비를 인간 세상에 다시 꺼내놓을 수 있었다. 애통과 환희가 하나로 드러나는 순간을 저 뜨개에 고스란히 새겨 넣을 수 있었다. 권력이 재벌이 언론이 종교가 무참히 버린 세월호 엄마들이 이 무자비한 세상을 다시 자비의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본디 버린 자들이 버려놓은 세상을 바로잡는 것은 버려진 사람들이다. 버려짐으로써 새로이 열린 인식론적 지평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부터 먼저 바꾼다. 자신의 삶을 바꾼 사람들에게 거칠 것은 없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을 버린 자의 심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들의 깊은 살갗을 만진다. 정토는 불교에 있지 않다. 하느님나라는 기독교에 있지 않다. 세월호 엄마들의 발길과 손끝에 있다. 직접 가서 만져보면 느낄 수 있다.






* 마지막 사진은 신해욱 시인이 찍어 트위터에 올린 것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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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3 2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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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4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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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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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육십 년 동안의 삶은 네게서 비롯하여 나를 스치고 네게로 돌아가는 삶이었다. 식물적 생명력과 감각으로 우울을 견뎌온 청록 빛 바다였다. 남은 날들은 내게서 비롯하여 네게로 번져가는 삶을 살고 싶다. 주홍 빛 땅을 꿈꾼다. 하필 이 각성의 변곡점에서 만난 책이 『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다. 주의를 기울이고 사색하며 통독했다. 책의 내용이 심오하거나 치밀해서라기보다 변화할 나의 삶을 위하여 음미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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