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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본성상 인간이 무자비하리만큼 이기적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자기중심주의는 약 50억 년 전, 살아남으려고 태고의 진흙탕에서 몸부림치던 파충류에게서 물려받은 ‘오래된 뇌’에 그 뿌리를 둔다. 이 생명체는 오로지 생존만을 목적으로 신경과학자가 ‘네 가지 F'라고 부르는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였다. 먹기feeding, 싸우기fighting, 달아나기fleeing, 짝짓기fuxxing가 그것이다. 이런 본능적 욕구는 즉각 반응체계로 발전되어 파충류가 먹이를 두고 무자비하게 경쟁하고, 모든 위험을 격퇴하고, 영역을 지배하고, 안전한 공간을 찾아내고, 자신의 유전자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우리 파충류 조상은 오로지 지위, 권력, 지배, 영역, 성교, 개인적 이득, 그리고 생존에만 관심이 있었다. 호모사피엔스는 이런 신경학적 체계를 물려받았으며, 뇌 기저의 시상하부에 자리한 이 체계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것이 일으키는 감정은 강렬하고 반사적이며, ‘모두 다 나와 관련된 것’이다.(21쪽)
네 가지 F는 매우 강력해서 이성을 앞세우는 대신 조금 더 자비롭게 살아가려는 모든 노력을 뒤집어 엎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발달된 ‘새로운 뇌’를 가진 생각하는 존재로서 네 가지 F를 감당할 능력을 지닌다. 우리에게는 더 파괴적인 본능에서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위태롭게 분열된 이 세상에서 자비는 최고 관심사다. 그러나 자비를 얻으려면 정신적·영적으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32쪽)
5년째 내게 주요 건강 문제를 의지해온 92세 어르신이 급체한 것 같다면서 진료 마감 직전에 황급히 침 치료를 요청하셨다. 모시고 온 가족에게 뭘 드셨느냐 물으니 요즘 부쩍 견과류 군것질이 느셨다고 귀띔해준다. 피틴산을 많이 함유한 견과류나 지방이 산패한 견과류는 소화불량을 야기하기도 하나 도리어 소화를 돕는 견과류도 있으므로 일방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양약을 다량 장복 중인 상태와 고령을 감안하여 나는 당분간 견과류 섭취를 자제하시도록 당부했다.
비대칭의 대칭으로 구성된 세계는 그 대칭으로 말미암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일방의 실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실재는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 실재는 이것만도 아니고 저것만도 아니다. 이 실재를 모르던 시절 서구가 발견한 형식논리의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은 여전히 서구 지성을 지배한다.
뜨르르한 학자이자 저술가인 카렌 암스트롱도 형식논리 프레임 안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자비하게 이기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파충류의 오래된 뇌에서 왔는가?
카렌 암스트롱은 직선·일방 진화를 전제한다. 파충류에서 포유류로,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진화하면서 오래된 뇌는 새로운 뇌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 본성을 파충류 뇌에서 찾고 파충류 뇌가 무자비한 자기중심주의라 한다면 뇌의 진화는 왜 본성의 진화로 연결되지 않는가? 영장류, 무엇보다 인류의 새로운 뇌는 새로운 본성을 지녀야 하지 않는가? 왜 여전히 인간 본성은 무자비하리만큼 이기적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가? 새로운 본성으로 이기를 극복하고 자비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 자연Sein 아닌가? 자비를 얻으려면 왜 정신적·영적으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가?
카렌 암스트롱의 직선·일방 사고는 여기서 임계점을 맞는다. 자비를 본성이라 해도 말이 안 되고 본성이 아니라 해도 말이 안 된다. 본성의 내포를 바꾸든가 본성의 외연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을 바꾸든 그것은 형식논리의 경계를 넘어간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파충류 뇌는 무자비한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다. 파충류 뇌는 나와 남을 나누지 못한다. 인간이 남이라 부르는 대상은 파충류에게는 내가 살려고 쓰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를 남이라 부르며 자기중심주의 운운하는 것은 인간 위주 직선·일방 사고다.
남의 각성은 포유류 진화에서 비롯했다. 포유 행위에서 남이 탄생했다. 남은 나가 아니다. 자비는 나 아닌 남을 대하는 생명 작용에서 진화해갔다. 나를 중심에 놓는 것과 나를 우선순위에 놓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에서 비롯하여 남으로 번져가는 삶이 자비다. 이 진실을 깨닫는 정도 차이에 따라서 무한한 결과 겹의 자비들이 너울거린다. 인간 자비도 그 밖에 있지 않다.
인간 자비는 다만 본성 문제가 아니다. 문명·문화·정치·경제·종교·교육·······인간의 다양한 삶의 형태와 체계, 그리고 지향에 따라 자비는 심지어 있다·없다 수준까지 차이를 드러낸다. 자비를 얻으려면 엄청난 정신적·영적 노력을 해야 하는 이치가 본성에만 있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구 형식논리라는 한계에다 종교학자라는 한계가 보태져 조금 한가하거나 느슨한 시선이 곳곳에서 노출된다. 긴박하고 촘촘한 눈은 독자 몫이다. 차명 휴대폰으로 비선과 통화하는 대통령의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려온 대한민국 민중에게 자비 화두는 카렌 암스트롱의 그것과 다르다. 촛불의 지속혁명으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세워 나아가는 것이 우리 자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