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앞서 경성제국대학을 학교 자체만으로 다루었다. 800여 명 졸업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거기 없다. 이 문제를 다룬 연구가 있으나 세부적 이야기보다 여기서는 상징적인 내용 하나만 하고 지나가겠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이 보인 행보 이야기다. 장세윤이 쓴 논문 <경성제국대학의 한국인 졸업생과 고등문관 시험> 요약 일부를 인용한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경성제대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주로 법과 출신 인사들이 주로 고등문관 시험(행정사법과)에 응시합격했는데, 이들 70여 명의 합격자들은 일제 통치기구의 중견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제 통치집단의 주변 엘리트로 포섭되었지만, 간접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의 정관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성제대 법과 출신 고등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해방 이후 행적을 검토한 결과 상당수 인물들이 이승만의 3선개헌과 315부정선거, 그리고 박정희의 516쿠데타 정권 참여와 유신체제의 지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정권 참여 등 한국현대사를 굴곡지게 한 고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적지 않은 경성제대 고등문관 출신 인사들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협력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나아가 한국현대사의 발전에 부정적 역할을 수행한 사실은 일본 식민지 제국대학 체제의 본질과 기능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조선 왕족, 귀족, 지주, 식민지 부르주아 후손이 경성제대보다 더 많이 몰려간 곳은 일본 본토 제국대학이었다. 일본 본토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대략 784, 학업을 중도 포기한 이들까지 더하면 1,000명이 넘는다고 본다. 경성제국대학 졸업자보다 더 높이 대우받은 최고 엘리트 집단인 이들에 관해 정종현(동국대 교수)이 쓴 제국대학의 조센징(휴머니스트, 2019)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본다. 이 책 연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도쿄(163), 교토(236) 399명에 국한된다.

 

본토 제국대학 출신 유학생들은 식민지 조선에 돌아와 사법ㆍ행정 관료나 교육자로 크게 활약했다. 도쿄제국대 졸업생 64, 교토제국대 졸업생 96명이 관료가 됐다. 교수직을 거친 사람은 도쿄제국대 53, 교토제국대 46명에 달했다. 광복 이후 이들은 정부 요직에 발탁되거나 정치권과 사법부 등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제국과 식민지 체제를,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과 군부 독재 체제를 작동시키는 유용한 부품으로 작동했다.

 

이 책에는 본토 제국대학 출신이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가문 이야기가 있다. 우선,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지냈고 두 차례나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이회창 가문. 그 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지주였고, 큰아버지 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 홍규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후 검사를 했다. 외삼촌 김성용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냈고, 이모 김삼순은 홋카이도제국대학을 나왔다. 장인 한성수는 1942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방 이후 대법관, 대법원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본가·외가·처가 모두 화려한 배경을 가진 이회창 가는 제국대학과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서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 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

 

이 책은 최초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성방직 사장이 된 김연수도 '제국대학'이라는 '사회자본'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경우로 본다. 그는 제국대학 네트워크 도움으로 사업을 확장해 축재할 수 있었다. 일본 패전 직후 만주에서 돌아올 때 남만 방적 물품을 일부 건질 수 있었던 것도 대학 후배인 일본인 철도국장이 화차 열 량을 배정해 준 덕분이었다. 전시체제기에 마침내 김연수는 "민족의 이익과 일본 제국의 이익 다르지 않다는 입장에 서게 됐다." 광복 이후에도 이 가문 자산은 줄지 않았다. 뒷날, 도쿄제국대학 출신 김상협(김연수의 둘째 아들)이 전두환 정권 국무총리를 지낸 사실은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 지배 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로도 기능"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분야는 교육과 학술이다. “오늘날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의 학문 계보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제국대학 출신들과 만나게 될 확률이 높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일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인 민관식이란 인물을 매개로 벌어졌다. 민관식이 한 가장 큰 일은 고교평준화.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1974년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고교평준화를 검토한다. 고교평준화 지시는 왜 내려졌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입시제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을 정도로 권력자의 자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바뀌어왔다. 1958년생인 박정희의 외아들 박지만의 성장에 따라 한국 사회의 입시제도가 바뀐 것은 우연일까?” 박지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시기에 맞추어 박정희는 중학교 입시 준비로 극성을 부리던 초등생 과외 열풍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를 채택했다. 중학교가 무시험 입학제로 전환되자 중학교 입시 열풍은 고등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박정희는 고교평준화검토를 지시했다. 박지만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민관식은 그 해결책을 일본에서 찾았다. 문교부 직원을 파견해 고교 배정 입학제도 실상을 조사하게 하고, 일본 정책을 한국에 맞도록 변형해 시행한 제도가 바로 고교평준화였다. “제국대학 유학생 민관식에게 일본은 급할 때 참조할 수 있고, 참조해야만 하는 늘 앞서가는 근대()의 표상이었던 셈이다.” 빼놓을 수 없는 사실 하나 더. 민관식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냈다. 그가 1966년 태릉선수촌을 만들었다. “국가 엘리트 육성 장치인 제국대학과 국가 대표를 입소시켜 집중 육성하는 태릉선수촌의 체육 엘리트 육성 시스템은 그 세계관과 실제 작동방식이 흡사하다.”

 

나는 박지만보다 두 해 먼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진학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바꿔댄 제도에 가차 없이 희생당한 장본인이다. 196875, 당시 문교부 장관 권오병이 관료적 경상도 억양으로 중학교 무시험 입학을 발표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나는 주저앉아 방성통곡했다. 가난뱅이 우등생에게 그 제도는 저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 그 뒤에도 몰랐다.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가 특권층 부역 집단 음모라는 사실, 그게 거대한 파행 교두보였다는 사실. 첫 단추가 잘못 채워져서 뒤틀려버린 내 인생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늘은 눈물 아닌 핏물이 온 영혼을 적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4. 학교 중심으로 살핀 부역 서사를 인물 중심으로 다시 본다. 교육자로 출세한 부역자 명단과 그 내용을 요약한 뉴스타파 기사를 인용한다. https://newstapa.org/article/fxFny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김경진, 김원근, 박필병, 서병조 뿐만 아니라 일제 판사와 검사 출신의 계철순, 고재호, 김갑수, 김세완, 이호, 정재환, 그리고 조선총독부와 만주국 관료 출신의 김영훈, 박일경, 윤태림, 이인기, 최문경, 박이순 등이 해방 후 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의 총장, 이사장 등을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일제강점기 기준 경력으로 볼 때 교육·학술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가 2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종교계에서 친일 활동을 한 인사가 21, 총독부 관료와 군수 출신 16, 일제 검사와 판사 출신이 6, 중추원 참의 등 일제 고위직이 5, 경제계 4명 순이었다.

 

학교별로 보면, 동국대학교에서 총장, 이사, 이사장 등을 지낸 인물 8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표됐거나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로 나타났다.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권상로, 일제 판사 고재호와 김갑수,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 이종욱,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법요를 열고 시국강연회에서 강연한 조계종 승려 김영수, 임석진, 허영호 등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6명이 친일 인사가 ()총장, 이사,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김활란, 이숙종, 서은숙, 일제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내고 경기도군용기헌납발기인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순흥, 미영격멸간담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변홍규 등이다.

 

숙명여자대학교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이숙종과 임숙재, 친일 판사 고재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김두헌, 일제 군수 윤태림, 만주국 관료 출신의 이인기 등 5명이 총장과 이사장을 지냈다.

 

여러 대학의 총장과 이사장 등을 거친 친일파도 있다. 일제 징용과 학도병, 징병을 독려한 조동식은 상명학원 초대 이사장(1945), 성균관대학교 초대 이사장(1947)을 거친 뒤, 1950년 동덕여자대학교를 설립했다.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은 성신여대 이외에도 숙명학원(숙명여대) 이사장(1964), 이화여대 이사(1952)를 맡았다. 신봉조는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1953)하고, 상명학원(상명대) 이사장(1954), 이화학원 상무이사(1961) 등을 지냈다.

 

고황경, 곽종원, 김영훈 등 15명은 1968년 박정희가 공표한 국민교육헌장을 사회에 구현했다는 공로로 박정희와 전두환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또 김준보, 윤태림, 조재호, 최문경 등은 5·16 혁명이념을 교육 현장에서 구현한 공로로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았다. 수여일은 19631217일인데, 박정희가 쿠데타 성공 후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가 시작된 때였다. 박정희가 초대 총재를 맡은 ‘5.16 민족상 재단의 이사와 심사위원을 맡거나 5.16민족상을 받은 인사도 송금선, 이병도 등 모두 5명이었다.

 

뉴스타파는 해방 후 대한민국 교육 분야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 87명의 명단을 인터랙티브 페이지로 제작해 공개한다. 짙은 붉은색 배경으로 표시된 인물은 친일 부역 행위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 정권에 부역한 이력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독재 부역 이력과 훈장 내역도 이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인물 사진을 클릭하면 이들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교육 관련 이력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된 인물인 경우 반민규명위원회가 2009년 작성한 결정 보고서 원문을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1. 도저히 여기서 이야기를 접을 수는 없다. 사학재단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겠다. 능력 한계로 말미암아 내 연구 자료도 아니고 인용한 자료조차 그렇게나 따끈따끈하지 못해서 안타깝다. 아래 실은 글은 2014년 고발뉴스닷컴(필자는 아이엠피터’)에 실린 내용이다.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특권층 부역자 정권이 들어선 오늘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리라는 추정을 보탬으로써 증폭된 문제의식이 공유되기를 간절히 빈다.

 

사립 초중고등학교 재단의 수익용 자산 규모는 4조 원가량이다. 수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학재단이 재단전입금으로 내놓은 돈은 총 1,342억 원에 불과하다. 서울지역 사립고등학교 재단전입금 상태를 보면, 재단전입금 0.00%인 학교가 전체 199개교 중 무려 17개교다. 1% 미만 재단전입금 가지고 학교 운영하는 사학재단이 124개교로 전체 60%를 넘는다. 기본적으로 사학재단은 자기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 돈은 거의 내놓지 않으면서 학교를 운영하니 재정이 좋을 리 없다.

 

법정부담금은 교직원 연금 부담금, 건강보험 부담금, 재해 보상 부담금 등으로 사학재단이 기본적으로 내야 할 돈을 말한다. 2011년 사립 초중고교 법인이 부담해야 할 법정부담금 2,797억 원 중 실제 사학법인이 납부한 금액은 615억 원으로 전체의 22%에 불과하다. 전국 1,723개 학교 중 법정부담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은 학교가 173개교(8.5%), 0%~5% 미만 학교가 574개교(33.3%), 5% 이상~10% 미만 학교가 313개교(18.2%), 100% 완납한 학교는 188개교(10.9%)에 불과하다.

 

사학재단의 가장 큰 문제는 학교를 가족 재산으로 여기며 세습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도구로 이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방법에는 각종 편법과 비리, 불법이 동원되고 있다. 2011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를 보면 사학비리는 단순 비리가 아니라 범죄다. 예컨대 진명학원 진명여고이사장은 수익용 기본재산 45천만 원을 횡령했고, 학교 돈 88,630만 원을 친척에 무단 제공했다. 발전기금 22천만 원을 개인 채무 변제 등에 사용했다. ‘상록학원 양천고는 바지 사장을 내세운 급식 비리 88천만 원’, 옹벽 공사, 소화 배관 공사를 통한 금품 수수 7천만 원등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부를 축적했다. 사학재단은 비리를 저질러서 아버지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나도 부인이나 아들, 딸이 그대로 이사장직을 승계한다. 진명학원 이사장도 비리로 물러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들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국에 비리 사학재단이 늘어난 근원에는 친일 부역 집단이 있다. 민족 교육과 인재 양성을 표방하며 설립했던 학교 중 일제강점기 동안 살아남은 학교 대다수는 저들이 부역을 실천한 학교들이다. 해방 이후 사립 초중고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유는 당시 재원이 없어 학교를 세우지 못하자 부역 지주들에게 토지 몰수 대신에 학교 세우고 법인화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돈 없이 학교를 세울 수 있어서 좋았고, 부역 지주들은 토지 몰수 대신 자기 재산을 그대로 사학재단에 귀속시켜 부를 세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서 노났다. 사학재단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을 의무화해 놓고 재원을 부역 사학 기증 구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혈연이나 인척 비리가 생겨도 손을 대지 못한다. 사학재단들은 부역 집권층과 손잡고 재산과 특권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하고 있다. 사학재단 비리를 고발했던 교사들은 진실을 밝힌 대가로 오히려 해임되고, 복직 판정을 받아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다. 2003년 서울시교육청 감사 결과 비리가 밝혀진 동일학원을 비롯한 사학재단들은 문용린 교육감에게 고액 정치기부금을 냈다. 왜 사학재단 비리가 근절되지 못하고 오히려 각종 특혜를 받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사립학교라면 어디든 내 의심을 피해 가지 못한다. 아프지만 내가 나온 고등학교부터 촘촘히 톺아 보았다. 자료에 한계가 있어선지 부역 흔적을 찾지 못했다. 진즉 지웠을까? 모를 일이다. 끝까지 의심을 풀지 않겠다. 각성한 부역자로서 변혁에 참여할 trickster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3. 사립 중·고등학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2023424일 이전까지 불렸던 어느 중·고등학교 학교 교가 가사를 보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왜 그런지 단박에 알 수 있다.

 

먼동이 트이니 온누리 환하도다

환한 이 강산에 원석 두 님이 나셔서

배움 길 여시니 크신 공덕 가이 없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가사 중 원석 두 님은 설립자 김석원과 원윤수 두 사람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설립한 학교가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성남중·고등학교다. 김석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으로서 원윤수는 사업가로서 일제에 부역한 대표적 특권층이다. ‘일제 치하에서 광복의 원동력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민족학교 설립이라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사관학교(일제) 준비 학교 특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가 바로 성남중·고등학교다. [출처: 고발뉴스닷컴]

 

오늘날 성남중·고등학교는 어떤 은폐를 시도하고 있을까? 2023424일 새로운 교가를 제정해서 발표했다.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었는데, 2절 가사는 이렇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자랑스런 성남인

삼일칠의 정신 받아 자라나는 우리들

세우자 새 역사를 주인공은 우리들이다

성남 성남 우리 모교 무궁탄탄할지어다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으로서 충무공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삼일칠 정신19600317일 성남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3.15 부정선거 규탄 의거를 기린다고 한다.

 

2023424일 성남중·고등학교가 벌였던 또 다른 행사가 있다. 1942년 만세운동을 펼쳤던 재학생 윤병운 외 7명을 기리는 <항일독립운동 공적비>를 교내 3·17민주공원 내 <3·17민주의거기념탑> 옆에 세웠다. 원승욱(원윤수 손자) 학교 법인 이사장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교훈이 바로 독립투사 이분들이셨다.”라고 기염을 토했다.

 

충무공 정신이든 삼일칠 정신이든 항일독립운동 정신이든 설혹 가감 없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김석원과 원윤수가 특권층 부역자로서 그에 부합하는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 근원을 지울 수는 없다. 부분을 전부인 듯 말하는 협잡이 바로 전형적인 가짜 뉴스다. 특권층 부역 세력은 곳곳마다 깨알같이 이런 짓을 벌여서 역사를 희화하고 사회를 흑화한다.

 

이런 현장이 어디 성남중·고등학교뿐이겠는가. 중앙여중·고등학교(황신덕), 성신여중·고등학교(이숙종), 광신중·고등학교(박흥식), 영훈중·고등학교(김영훈), 휘문중·고등학교(민영휘), 풍문여중·고등학교(민영휘 증손 덕기), 상명중·고등학교(배상명), 화곡중·고등학교(나채성-나경원 아버지), 용문중·고등학교(김문희-김무성 누나)···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사학을 특권층 부역 집단 돈으로 세웠거나 접수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사학은 식민지 시대에는 부역 행위 일환이었고, 대한민국 초기에는 신분 세탁과 세금 포탈 통로로 활용돼 특권층 부역 집단이 쌓아 놓은 기득권을 지키는 데 거의 독보적 수단이었다. 학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교사, 학생, 심지어 학부모까지 부역과 수구 정신으로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채널로 작동해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부역 사학 그 본진은 결국 사립 중·고등학교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있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 공교육이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라는 세대에게 참된 민주주의를 기대할 바도 아니다. 국토 전반에 걸쳐 똬리 틀고 검은 네트워킹하는 이 사악한 사학재단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영원한 식민지로 재생산해내는 자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00m 넘는 용문산을 마지막으로 산행에 해당하는 숲 걷기를 멈춘다. 더 가면 내가 숲에 들고나는 목적과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을 고른다.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까치 능선까지 간 다음, 생태 다리 두 개로 관악산과 연결해 놓은 길을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간다.



걷기 쉬운데다가 계곡 물소리가 들려 좋기는 한데 시끄럽다. 산악회 무리가 지나가면서 숲 전체를 흔들어댄다. 날카로운 영남 사투리는 특히나 귀에 거슬린다. 서둘러 능선에 올라 얼마쯤 걷다가 마당 바위를 지나자마자 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되지 않는 소로로 접어든다. 얼마 가지 않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래, 이런 숲이어야 한다! 사위가 고요에 잠기자 비로소 내 몸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들이 숲 생명들과 나누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살짝씩 길을 잃어가며 걷는데 물소리가 들려온다. 홀린 듯 다가가 물과 놀며 옮아가다 보니 또 길이 아니다. 애써 길을 찾고는 다시 물에 홀린다. 손 넣어 만지고, 한 움큼 떠먹고, 야릇한 충동에 휘감기며 이리저리 물길을 감듯 넘나들며 계곡을 내려온다.



인적 없는 상태로 한참 내려오다가 홀연 인기척을 느낀다.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다 모습을 드러낸 인상 좋은 남자 사람 하나가 개울 건너편 바위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가 묻는다. “정상 쪽에서 내려오시는 길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가 말한다. “대단하시네요!” 그 흔한 등산화조차 신지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산 타는 늙은이 모습을 보고 그리 말했으리라. 내가 말한다. “이 길 너무 좋습니다.” 그가 답한다. “여기가 관악산 속 지리산입니다. 아는 사람 거의 없지요.” 과연 그렇다 싶다. 인사를 나누고 조금 내려오니 제법 낙차 있는 폭포가 기다린다. 거기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울대 학생 생활관이 있다. 학생들이 관악산 속 지리산을 알면 좋으련만.

 

먼발치에서나마 강감찬 사당 향해 합장하고 식당을 찾는다. 한참 돌다가 비교적 큰 골목에 왜 보지 못했을까 싶게 떡하니 있는 추어탕집으로 들어간다. 어이쿠, 여기도 영남 사투리가 점령하고 있다. 물경 개신교도다. 여남은 명 앉아 큰 소리로 식사 기도하고 큰 소리로 정치 얘기한다. 나는 애먼 막걸리 맛이나 탓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