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예상했던 대로 순식간에 케일럽이 눈앞에 와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일으켜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친다. 주먹이 어찌나 세던지 그는 휙 날아가고 뒤통수를 식탁 모서리에 부딪치며 땅에 떨어진다. 그 바람에 와인 병이 위에서 떨어지고, 와인이 꿀럭꿀럭 바닥에 쏟아진다. 케일럽은 울부짖으며 병 주둥이를 잡고 그의 뒷목을 내리친다.

"제발." 그는 말한다. "케일럽, 용서해줘 ? 미안해, 미안해."
하지만 케일럽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는 늑대다, 코요테다. 근육과 분노다. 그리고 그는 케일럽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먹이다, 쓰고 버리는 물건이다.

그는 소파 가장자리로 질질 끌려가고 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

어릴 때,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을 때, 그때는 자기 몸을 떠나버릴 수 있었다. 어디론가 딴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는 생명 없고 감정 없고 감각 없는 목격자

자신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연민도, 분노도, 어떤 것도.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는x는 항상x와 같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가 뭘 하든, 수도원에서, 루크 수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하든,x는 항상x와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는 우지직하며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고, 순간 고맙게도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휙 멀어져간다

x=x, 그는 생각한다.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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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모든 것을 본 남자
데버라 리비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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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생각은, 뿌리 없는 난과 달리, 온실에서 자라지도 않고
현재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고 시들어 버리지도 않는다.

카렐 타이게, 『사격장(The Shooting Gallery)』(1946)

"우리는 죽은 자다. 며칠 전에,
우리는 살았고, 새벽을 느꼈고, 노을이 빛나는 걸 봤고,
사랑했고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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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친구가 죽었을 때 "내 모든 행위의 공연장이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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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것은 가장 심각한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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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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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가장한 요구, 연약하다고 짐작되는 자를 함부로 대하는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들의 수치심 없는 행동. 담요와 시트 속, 캄캄한 어둠속에서 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들은 생체실험에 앞서 인격이 박탈당한 채 수술대 위에 올려진 싸늘한 실험체를 내려다보듯 찬찬히 로를 관찰하면서 비웃는다. 꼬마야, 어른도 없이 너 혼자 이런 데 오면 안 되는 거야. 누군가의 말에 나머지는 배를 움켜잡고 킬킬 웃어댄다. 여자들은 어린아이에게 겁을 주듯 두 손을 얼굴 앞에서 흔들며 유령 흉내를 내기도 한다.

공용화장실.
이 도시에서 그의 신변을 보호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 언제나처럼.

자신의 만족을 위해 경계 밖에 서 있는 타인을 함부로 대한 것, 존엄하게 대하지 않은 것, 그 사람이 아프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것, 나는 그런 것 때문에 화가 나 있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슬펐던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안도할 수는 있었지만 안도 이후엔 또다시 쓸쓸해졌다. 목소리, 감각, 감정, 가족, 관계가 사라진 그곳이 현실과 단절된 곳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되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다시 가야 하는 곳은 이렇듯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 자신의 슬픈 마음조차 의심해야 하는 폐쇄된 공간이란 걸 알기 때문이라고.

‘굿 슬립’에서 나온 로가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간 곳은 생 미셸 대성당이다

은은한 선율은 로의 몸속으로 들어와 그의 지나간 시간들을 어루만지며 맥박과 숨소리에 섞여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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