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암살사건
조셉 로지 감독, 리처드 버튼 외 출연 / 키노필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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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많이 감상하지 않은 나로서 영화배우에 대해 잘은 모른다. 물론 국내 배우 이름 몇몇이나 진짜 유명한 해외배우 이름 몇몇 정도는 기억한다. 그런데 1972년 리처드 버튼과 알랑 드롱이라는 유명한 배우가 동시에 영화에 나온 줄은 몰랐다. 영화 제목은 트로츠키 암살사건이다. 제작감독은 조셉 로지로 내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대신 그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제작한 점과 이번에 제작한 트로츠키 암살사건 역시 영국에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영화를 만든 만큼 이번에 출연한 알랑 드롱의 경우, 그가 1960년 전후로 등장하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남배우라는 점과 지금도 왕성히 영화감독으로 활동한 점에서 그가 30대 중후반에 들어서게 되면서 그의 연기관록이 이미 쌓은 만큼의 시기이니, 제목 그대로 트로츠키 암살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묘미는 트로츠키의 죽음에서 알랑 드롱이 연기한 킬러의 역할은 매우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허탈한 담담히 잘 드러난다.

 

 

트로츠키, 그는 레프 내지 레온 트로츠키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조지 오웰의 문학소설인 “동물농장”이다. 소설과 더불어 영화로도 봤지만, 트로츠키라는 인물에 흥미가 가는 것은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흉악한 돼지에 의해 무참히 정치적 숙청을 당하면서 동물농장의 미래를 불행한 폭풍우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나폴레옹에게 무참히 쫓겨난 스노볼이란 작은 돼지가 바로 트로츠키이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을 겪은 러시아와 그것에 대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은 러시아의 무능한 차르 왕권과 봉건사회를 허물었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과 동시에 트로츠키는 레닌과 동시에 러시아혁명의 영웅으로 추대되고, 트로츠키는 그 탁월한 능력과 윤리적인 가치,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질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으로 큰 장벽이 있었다. 그의 태생은 유태인이었다.

 

 

아무리 다 같이 무능한 봉건사회에 핍박받는 군중이라도 러시아란 나라에서는 러시아인이 있었으나, 유태인이었던 트로츠키로서는 민족의 벽에서 자신이 레닌 이후 최고 대표를 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처음부터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트로츠키의 지식인적인 요소에 많은 사람들이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이에 레닌이 지목한 6명 중에서 조셉 스탈린은 매우 난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군권을 조금씩 잡아가면서 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모든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세력에서 트로츠키 주변 인물들을 배제하고, 트로츠키의 의견에 대해서는 매우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선동을 했다. 그게 레닌 사후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면서 어느덧 1929년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다른 국가로 추방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러시아혁명의 주요핵심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의해 그는 그렇지 못한 자라고 하였으며,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중에서 트로츠키와 같이 활동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 무능한 차르왕권과 귀족들의 악정에 지친 국가를 프롤레타리아의 국가로 가자고 한 볼셰비키 혁명이 어느덧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요, 우리 전 인류에게 큰 선물로 다가온 임마누엘 칸트가 1789년 자신이 살던 옆 나라인 프랑스에서 큰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행동을 보였다.

 

 

그가 늘 산책 가는 시간에 산책을 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체계가 전복되어도 다른 체계가 기존 체계를 따라 가는 것에서 혁명이 일어나도 근본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떻게 생각해보면 현대의 민주자유주의에서 그 시초는 프랑스혁명이 맞다.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목이 단두대 아래 나누어지면서 봉건사회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원인은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로 인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게 하나의 분노로 표출되었다. 또 다른 계급인 부르주아는 아무리 능력과 재산이 있어도 태생적인 문제로 자기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단합하여 왕족을 무너뜨렸다. 왕족이 무너져 세상이 변할 줄 알았으나 농민과 노동자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왕족과 귀족 자리를 부르주아가 대신하여 차지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 근본의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체제가 변화되어도 원점이라는 점이다. 물론 칸트의 생각을 본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을 토대로 꾸준히 봉건사회에서 공화제로 가고 있었다. 단지 그 과도기적인 기간 아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역사란 항상 희생을 토대로 세우진 것일까?

 

 

어째든 그런 역사적인 변증법적인 현실을 보아도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씩 변화하는 듯하다. 그래도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런 끝없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 만큼 그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식 역시 끝없이 등장한다. 그런 존재가 바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사이었다. 트로츠키는 비록 자신이 러시아에서 추방되어도 저 멀리 남미 멕시코에 있어도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64년 마르크스가 만든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의 정신을 유지하여 레닌이 세운 제3의 국제노동자협회, 국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인 코민테른을 올바로 지속하기 위해 제4의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한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숙청한 스탈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이란 공산주의국가가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무장한 공산주의로 전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분단선에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마찰을 빚는 북한이 바로 스탈린에 의해 노동자를 이름만 내걸고 노동자를 억압하는 독재국가로 된 것처럼 말이다.

 

 

트로츠키는 11년 동안 망명생활하면서 계속 스탈린과 투쟁한다. 영화에서 보면 뭔가 집필을 하고, 연설을 하여 녹음하여 방송하며, 스탈린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스탈린에겐 강력한 무기와 병력, 그리고 권력이 있었으나, 트로츠키에겐 큰 힘이 없었다. 그는 멕시코 어느 마을에서 정원이 달린 집에서 가축을 돌보고 식물도 재배하며, 밤에는 원고를 집필한다. 그의 무장력이 얼마나 없었으면,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하는 라몬 메르카데르이 반트로츠키파를 이용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할 때 트로츠키 일원들은 무력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스탈린의 청부를 받은 그들에겐 위장경찰복과 손에는 기관소총이 들려 있었다. 운 좋게 트로츠키는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의 충직한 부하 쉘던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스탈린에 대한 저항심과 그 저항심과 더불어 지식인으로서 의무, 그런 그를 받쳐주는 아내 나타샤만이 존재했다. 트로츠키는 고립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프랑스에서 지원금이 들어와야 하나, 1940년 8월 트로츠키가 살해되기 전 6월에 프랑스는 나치에 의해 점령당했다.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광기와 그 광기 속에서 제국주의들의 욕망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식민지 국가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 현상에서 트로츠키의 존재는 스탈린에게 큰 혹이었다. 그의 한마디가 세계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런 트로츠키의 제거야 말로 스탈린의 최고 목적이었다. 당시 1929년에는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쉽게 죽이지 못했기에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죽는다. 라몬 메르카데르의 손에 들린 피켈이 그의 뒷머리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트로츠키는 이미 죽음을 늘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서랍에는 권총 하나가 있었으며, 스탈린이 항상 자기를 노리고 있음과 오랫동안의 망명과 저항으로 트로츠키는 병이 있었다. 밤에 일찍 잠을 들지 않고, 글을 읽고 쓰는 지식인으로서 살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백발의 노년이라도 눈빛이 항상 살아있었다.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인생을 본다면 끊임없는 투쟁과 혁명정신이다. 프랑스 위대한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어떻게 보자면 진정한 인간주의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이 트로츠키가 분명하나 그런 그도 폭력이라는 수단은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폭력을 부당한 폭력을 종언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스탈린과 스탈린 이전의 차르 왕권은 폭력을 지속하기 위한 폭력이었다.

 

 

그리고 그 폭력에 저항하던 그는 테러리즘이란 폭력 아래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살아서도 혹은 죽어서도 스탈린에게 저항한 이유로 노동자의 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반트로츠키파의 행동을 보면 그들 역시 노동자 내지 일반 서민인데도, 트로츠키를 노동자의 배신자로 보고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1990년 스탈린주의로 물든 소비에트 연방은 붕괴되고, 이제는 공화국으로 변모되어 폭력으로 유지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없어졌다. 물론 본래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폭력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권력유지에 힘쓰던 사람들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체제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더불어 트로츠키라는 인물이 다시 재조명되고, 마르크스-트로츠키주의도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00% 트로츠키를 옳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 마르크스가 1867년 자본이 나올 때 17년 정도 집필했다. 그런 이유가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유럽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외교가 계속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바뀌고 거기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 말이다. 트로츠키가 말한 것은 당시에 맞은 답이나 지금은 틀린 답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를 계속 알아보는 것은 그가 그냥 그대로 멈추는 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과 이상에 대해 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현실을 본다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처럼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가? 어지러운 세계전쟁 속에서 파시스트들은 다른 국가를 짓밟고, 노동자와 농민은 계속 착취당하고 살며, 스탈린은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척, 노동자와 농민을 위하는 척하며 그들을 착취한 현실에서 누가 가장 현실적인가? 라몬 메르카데르는 자신과 같이 호흡하던 요원의 대화에서 현실적이지 못한 인물이 트로츠키라고 했다. 현실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트로츠키가 비현실적이지 못했다는 말에 과연 당시 사람들은 이성적일까? 현실적일까? 라고 생각해보면 참 난감하다.

 

 

니체가 말했듯이 정치는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처럼 인간의 권력이 있는 자에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그 권력이 향하는 곳이 과연 옳고 그릇된 것을 판단해본다면 옳지 않은 것에 가고 있고, 게다가 그것이 하나의 도덕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가 당시 살아가던 사회의 도덕에 대해 깊이 유감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사회의 도덕에 대한 유감은 트로츠키가 살아가는 시대나 지금 내가 살아가던 시대 역시 유감적인 일들은 계속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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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 -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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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치는 무엇이고? 사회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평생을 머물게 된다. 먼저 가족이라는 작은 혈연지간의 사회, 다음에 학교와 지역사회,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군대와 직장, 국가까지 연계된다. 사회라는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만의 의견과 생각으로만 살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이란 사이를 이어주는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무엇이 필요 한가 라고 상기시켜보면 정치라는 큰 조율적인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문제가 있다. 인간은 언제나 사회라는 틀에 머물기 때문에 인간 본인이 사회적 존재가 아닌 동물적 내지 무의식 또는 식욕, 수면욕, 성욕까지도 사회적 영역에 벗어날 수 없다.

 

밥을 먹는 시간과 공간마저도 사회 안에서 이루어질 문제고, 잠을 자는 공간 역시 자기의 집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집인지 또는 집단 무리인지, 성욕도 부부의 합법적인 행위로 이어지는지 혹은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미성년자들끼리의 동의로서 오묘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난감한 상황이 계속 벌어진다. 인간이 가진 기본 무의식 욕구마저도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에 계속 변화가 온다.

 

인간이 동물적인 요소로 살아가는 것마저도 사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정치적인 영역 아래 영향을 받는다. 실제 저런 기본 욕구마저도 인간이 만든 이성과 그 이성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로서 통제를 받는다. 지나친 무의식의 표출은 사회에 큰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은 자기의 무의식적 세계의 표출과 또는 욕망, 이성적으로 추구하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좋은 것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행동하기에 정치적인 중재나 판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대부분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리고 자신 주변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현상에 대해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이야기하고 옳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다른 누군가가 부정하게 될 경우 상당히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상한다. 타인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가치가 월등하게 높은 것이 인간 본인들의 운명이다.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 나 역시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로 얼룩진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이익에 대한 인간의 집착과 그 집착을 받쳐주는 권력이나 힘의 대결로 이어질 것이다.

 

실제 많은 역사적 기록이나 사건을 참고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란 결코 아름다운 문화 창조만이 아니라 투쟁과 전쟁, 갈등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많은 문제들이 문화 창조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즉 파괴를 위해 창조가 일어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위한 기술 중에서 대중교통과 의료기술이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빠른 병력이동과 빠른 적군의 타격은 자동차, 선박, 항공기로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화학전, 생물학전, 방사능전의 공격이 약학과 의학, 그리고 엑스레이 등과 같은 영상진단장치 기술을 발달시켰다.

 

인간의 갈등이 인간을 파괴하면서 이룩해온 인류의 문명과 역사 속에서 정치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 현재의 순간만으로 판단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과 저기 너머, 앞으로 다가올 미래 그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들,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이런 문제에 난봉을 겪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와 사회에 대해 쉽게 말할지언정 그 정치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원인과 문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방법이나 가치들은 정말 찾아가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와 사회를 일상 속에서 말하고 살지만, 정치학과 사회학에 대하여 대부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며, 정치학과 사회학의 원류가 될 수 있는 철학을 더더욱 멀리한다.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 밸리의 군주론으로 통해 철학이 정치에서 분리된 최초라고 하여도 정치에 철학이 따라붙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는 인간을 상대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는 윤리적인 영역이지 결코 공학적으로 보는 수단적인 영역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많은 인간들이 희생되고 고통 받고 억울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지 않은가? 이번에 읽은 김만권 박사의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들”이란 도서는 정치와 사회에 관한 철학에세이로서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담론하는 도서다. 이미 김만권 박사의 서적은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으로 통해 미리 접촉한 바가 있다.

 

앞에도 읽어본 이 책 역시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맞으나 그 이야기 뒤에는 사상과 사상가가 있었다. 사상가는 결국 사회학과 철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2가지 책에서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을 쉽게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라면,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은 좀 더 내용이 깊이를 추가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두 책에서 마키아 밸리의 등장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다루어야할 근대 내지 현대철학자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열일곱 개의 시선에서 철학적인 영역에서 가장 중요시 다루는 사건은 세계 제1차 내지 2차 대전이다. 20세기에 들어온 인간들이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는지 아니면 광기에 빠졌는지 당시 구분하지 못할 병폐가 세계 도처에 만연했다. 히틀러라는 독재자와 히틀러만큼의 난폭한 스탈린의 등장은 전체주의적인 사회와 국가의 권력이 민주주의사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로 이어지는 여파로 이어졌다.

 

인간이란 자기의 주관과 가치를 명확히 이해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그저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개인이 자각과 판단 의지를 모두 살해당한 채 말이다. 인간의 광기가 폭발하던 시기에 인권이 무엇인지? 또 그런 인간들이 무참히 살아가야했던 지난 세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지 이 책에서 하나의 의문을 던지고, 그 의문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으로 풀어나간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많은 공감과 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란 단순히 한 가지로 잴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그런다고 하여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야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그 가치적인 영역에서 많은 고민이 든다. 루소가 인간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니체는 인간을 평등하다는 것이 오히려 불평등하다는 점, 인간의 자유적인 가치가 평등한 인권이 아니라 개인적인 재산권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 등등에서 어떻게 우리는 제대로 판단하고 살아야할지 또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어야 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중(mass), 선동가(mobs), 시민(people, 책에서는 인민)에서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들이 선동가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구도를 지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듯 하다. 인간이 합리주의 사상이 나오기 전에 신을 믿는 신화적 세계에서 그것을 제거하는 계몽 자체가 다시 억압이라는 신화로 탄생했다. 오히려 더 합리적인 가치라고 하여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억압과 비이성이란 형태로 나오지 않았던가?

 

아니면 인간은 너무 이성적인가? 혹은 아직 이성이 결여되어서 그런가? 내가 볼 때는 인간은 분명 이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은 너무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란 모든 경험적인 조건을 배제하여 순수하게 형이상학적 관념으로서 판단하려고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처럼 이성의 영역은 모든 인간에게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성 자체에 대한 의심과 비판 없이는 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나는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에 어느 큰 비이성적인 대규모가 하나의 합리적 이성으로 변모하여 마녀재판을 열어 인간을 사냥하듯이 말이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의 이성으로만 바라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인간에게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만 남겨 놓는다면 그것은 육체라는 껍질만 지닌 인공지능 로봇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존재가 바로 전체주의적인 국가이며, 그곳에는 오로지 국가권력 합리화를 위해 약자를 계속 희생시켜야만 한다. 누군가 정의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정의롭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그 사회의 정치적 도덕이라고 한다면 정말 정치적이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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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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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이 말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전에 내가 근무하는 회사와 계속 거래를 하고 있는 인쇄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당 보고서를 발주처에 납품하기 위해 나는 보고서를 제본하기 위해 인쇄소에 들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 나를 아주 반갑게 반겨주시는 사장님, 그 사장님은 참고로 연세가 60이 이미 훌쩍 넘은 여사님이다. 내가 <남자의 물건>이란 서적을 들고 가니 순간 놀라면서 나에게 이렇게 했다.

 

“이 책 나 사려고 했는데, 너무 야한 것 같아서 안 샀다. 손님들이 여기 와서 이 책이 있으면 이상하게 여길까봐”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야하지 않다고 했다. 물론 내용 중에서 야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책 내용 자체만으로 야하다고 보기에는 많음 무리수가 있었다. 가령 그것은 프로이트가 남자는 성욕에 눈이 먼 동물이라고 하여 그가 저술한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입문>과 같은 도서가 야하다고 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무의식 세계의 리비도 즉 성적 에너지를 담아 그것을 표출하려는 본능은 숨기지 못할 요소는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인간의 성적 무의식 본능을 연구한다고 해서 야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야한 것에 대한 것을 제대로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정운 교수가 이번에 내놓았던 <남자의 물건>은 정말 그런 식의 느낌일까?

 

보통 어른이라면 남자의 물건이라면 가수 박상민씨가 부르던 “무기들아 잘 있거라” 내지 혹은 이 노래 제목을 패러디한 어느 팬의 말처럼 “무기 없이 못살아”라는 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이라는 물건이다. 즉 인간의 신체구조 상의 기관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 볼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없을 만한 사물들이란 점이다. 인간이 아닌 물체 즉 하나의 도구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왜 남자의 물건인가? 예전에 김정운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으나, 그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라는 점은 알았다. TV는 시청하지 않은 본인으로서 매스컴의 영향보다는 매스컴 이외의 인터넷과 서적으로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오히려 일방통행로적인 사고방식은 대중문화의 특성중의 일원화적인 사고와 이원화적인 가치구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알게 된 김정운 교수는 예전에 내가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튬플레이와 같은 하위문화(下位文化) 즉 Sub-culture라는 것을 연구할 때 처음으로 알게 된 문화심리학자이다. 일단 하위문화라는 것이 일반인들에 대해 잘 노출되지 않고 비공개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그런 문화들이다. 물론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코스프레만이 아니라 락, 재즈, 블루스, 헤비메탈과 같은 비주류의 음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하위문화에 대한 나의 시선은 대중문화에 대하여 비교해보면 다른 세계에서 바라보는 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하위문화라고 하여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고, 잘 알 수 없으며,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고 다가가는 것이 어려워서 많이 낯설어 하고 많이 배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한국과 같이 배타적인 문화 관념을 지닌 국가로서는 이런 것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입장에서 이런 하위문화가 배타적인 국내 문화 관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나의 적대의식으로 표출되기 좋은 문화이다.

 

또한 본인 자체가 만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이 국산 작품보다는 미국과 일본 등에서 유입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많은 만화, 애니메이션 콘텐츠상품들은 미국보다는 일본에서 많이 들어온다.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우며, 언어자체가 한자어가 같이 사용하기에 한국어와 일본어 자체로는 다소 많은 차이감이 들지 모르나, 단어 사용에서 한자어의 사용에서는 분명히 한국인으로서 영문으로 이루어진 미국 문화보다 한자 단어가 들어간 일본어가 훨씬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고 생각해본다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안에 담론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 대한 문화에 대한 부분도 생각해볼 만한 것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항상 뭔가 멀리 느껴지는 나라, 게다가 직접 옆에서 보면 한국인과 다른 용모나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인들이 보면 비슷해 보이는 종족이다.

 

또한 과거 한국의 선조들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말도 있고,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가 일본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막상 수목의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한다. 그러면 일본의 국화를 상징하는 이른바 사쿠라라는 것이 과연 일본이라고 외치기도 난해하게 보이는 상황이다. 어째든 친하면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이와 반대로 대하기가 어려우면 어려운 게 일본이다. 아니 일본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인지하고 있을까? 그런 문제에 대해 김정운 교수는 <일본열광>이란 책을 저술했다. 문화심리학자가 보는 일본과 일본인이다. 여기서 그의 일본이란 나라는 상당히 특이한 곳으로 보였다. 뭔가 억압된 공간이고, 뭔가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환타지, 남성이 감수해야할 사회와 압박, 거기에서 피어나는 남자들의 어리광, 서양은 아니나 오히려 서양 같은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의 세계, 일본이란 뭔가 엄청나게 잘 뭉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 무척이나 분산되어 있다.

 

아니 아주 작은 분산덩어리가 여기저기 조합되어 하나의 그룹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일본을 다룬 김정운 교수가 이제는 한국을 다루려고 한다. 일본으로 통해 일본인을 알고 그 후에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보게 하여 우리 자신의 현재를 물었다면,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정석이 아닌가? 이번의 남자의 물건, 정말 남자의 물건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대략적으로 나는 이 책에 대해 조금의 선입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김정운 교수가 일본열광에서 남자의 세계로 통해 본 일본문화라고 하나 단순히 일본남자만의 문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남자의 문화에서 보이는 남자들의 몰락을 다룬 것이다. 남자가 몰락하니 여자가 힘이 세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세진다고 하여 남자와 대등하게 되었다고 하여 남자만 이때까지 누렸던 것을 이제는 여자가 누리지 말라고 하는 법은 없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은 남자는 여자가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본열광이나 남자의 물건이나 비슷하고 기본명제를 깔고 가는 주제가 있다. 그것은 남자의 몰락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남자가 몰락한다고 해서 여자가 반대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남자가 떨어지는 만큼 여자 역시 떨어질 수 있다. 모두 그런 것이 아니다. 남자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과거가 좋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상실해가면서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남자는 평생 혼자서 짐을 지고 가야 할 동물이다.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스신화 오이디푸스왕을 아는가? 자신의 아버지 라이오스왕을 죽이고, 그의 아내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라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한 그 비운의 왕을 말이다.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동시에 모친근친상간이라는 인간의 윤리와 가치를 배반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남자는 바로 이 오이디푸스와 같다. 세상도 그러나 오히려 신화의 세계에서 멀어진 지금이야 말로 신화의 제거인 계몽을 넘어 새로운 억압이 우리 남자들을 오이디푸스로 만들어버린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이 책에서 김정운 교수는 큰 아들이 자라나면서 처음에는 약한 존재로 보았으나 지금은 키도 자기보다 크고 덩치도 좋다고 한다.

 

순간 아들이 화를 내면 거기에 대적하기 힘들고, 길가는 고교생 무리를 보면 기가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거기서 누가 부른다. “아버지!”라고 말이다. 그 두려운 무리의 존재 중에서 아들이란 혈육이 있다. 아버지란 존재는 언제 자신을 앞서 나갈지 모를 아들에게 위협적인 부담을 느끼고, 자신 앞에 있었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방황한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결국 내가 된다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남자의 허망함을 깊고 넓은 한탄으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회사가면 직장 상사와 밑에 후배들의 눈치를 본다. 물론 그 상사와 후배 역시 또 다른 상사와 후배들에게 눈치를 본다. 남자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보이지 않은 뭔가의 긴장감을 타고 있다. 항상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고 거기에 눌려 산다. 사회라는 것은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는 또 다른 아버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억압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언어를 아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들에게 사회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부여한다.

 

하지만 언어로 통해 권력과 지식을 서로 공유하고 생산하므로 언어를 사용하고 살아가야할 인간에게 언어를 사용할 때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권력에 눌려 살아야 한다. 언어라는 것은 자연적이 못한 인위적인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공간을 어디로 두어야 하는가? 직장이라는 공간은 남자에게 하나의 권력세계를 의미하는 바이므로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둘 수 없다.

 

오로지 여기에 반대되던 공간일 뿐이다. 그나마 젊어서는 와이프가 같이 젊기에 서로 열정적인 사랑도 나눌 수 있겠으나, 얼마 후 자녀가 태어나고, 부모들은 서로를 보기보단 자녀들을 더 본다고 한다. 그런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겠으나, 적어도 내 주변에 애를 키우고 있는 직장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내 보는 재미보단 혹은 남편 보는 재미보단 애와 같이 보고 지내는 시간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자녀라고 하여도 언제까지 부모의 그늘 아래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 모두 자녀들이 서로 자기의 품을 떠나 그들만의 사회와 세계에 머물고 있을 때면 자신의 존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그나마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서로 친하게 지내지만, 남자는 쉽게 지낼 수 없다. 나이 들면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반면 남자들은 그렇게 모이기도 어려우나 모여도 그렇게 화기애애하지 않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사회에서 싸워나가야 할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들이 태어나면서 리비도로 통해 성적인 욕망과 더불어 폭력적인 투쟁의식을 가진다고 하나, 이와 반면에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남자는 원래 난폭한 것이 아니라 난폭해지도록 살아야 하는 문화 공간 속에서 난폭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다르지만, 적어도 남자는 항상 싸움과 피할 수 없는 존재임만은 분명하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은 자신을 좋아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남자는 프로이트적으로 리비도의 동물로 성적욕망만 표출할 수 없다. 때로는 새로운 것으로 승화하여 에로스적인 영역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흔히 문학에서 세계를 창조하거나 예술로서 형상화시키거나 이미지로 도출해낼지도 모른다. 예술이 이성의 세계만이 아닌 감성과 무의식 세계라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것 역시 보이게 하는 마법이 있으니깐.

 

그러나 이것만으로 남자가 과연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뭔가 남자들이 집착하고 거기에 얽매이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물욕적인 페티시즘이 깊숙이 들어갈지 모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나 한국남자에게 뭔가 좋아하는 게 있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나이 먹어 한국남자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대부분 이런 것이 생각난다. 낚시와 등산이라고, 아니면 TV보기 정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게다가 낚시와 등산은 여러 명에서 같이 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로 남자들이 위안을 삼아야 하는가? 너무 평범하고 일방적이고 범주가 좁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도 같이 생각하여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의 물건에서 김정운 교수는 이런 한국남자에게 존재확인을 위한 탐사가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부터 먼저 보여준다. 김정운의 모습에서 그의 일반적인 복장에서 만년필을 자신의 입에 살짝 대는 장면이다. 한국의 저명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바로 만년필을 좋아한다. 만년필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만년필이 아니라 상당히 고가에 명품인 만년필을 좋아한다. 몇 십 만원에 모자라 어느 유서 깊은 만년필은 백만 원을 초과한다고 한다.

 

펜 한 대에 거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계속 모우고 또 모운다. 새로운 물건을 산다는 것에서 그 산 물건들을 보는 것에서 또 다른 물건들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말이다. 한국남자들에게 이런 기대감 내지 편안함 기분을 주는 행동이란 있을까? 내가 볼 때는 거의 없다. 그런 남자들에게 필요한 물건! 그것은 바로 그 남자들이 의지하고 싶은 물건들이다. 자신만의 세계이며, 자신만의 공간이며, 자신만의 위안이 되는 그 남자의 물건 말이다. 김정운이 확인하는 한국남자의 존재란 바로 남자들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그런 물체에 대한 고찰이다.

 

왜 고찰을 하는가? 남자들은 나이 먹어가면서 정작 자신을 돌아볼 공간이나 기회조차 없다. 오로지 앞만 보다가 달리다가 뒤돌아보는 순간은 이미 늦은지라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이란 점이다. 확실히 그렇다. 아니 30대 지금 내가 봐도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바라보면서 주변 남자들에게 주말에 무엇을 하느냐? 아니면 좋아하거나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없다.

 

그저 컴퓨터로 영화 보다가 TV로 드라마 보다가 이다. 남자들의 대화의 단골손님이며,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군대이야기와 축구이야기, 그 절묘한 콤비네이션인 군대에서 축구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남자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 확인을 해줄 수 있는 하나의 자위욕구가 아닌가 싶다. 자위라는 것이 반드시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다고 성적인 영역 역시 무시하지 못한다. 항상 억압된 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성적욕망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들은 단순히 억압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 내어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남자의 물건, 그것은 단순히 남자들이 취미나 취향으로 모우거나 집착하거나 즐기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가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증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는 본인이나 다른 누군가, 또는 이 글을 보는 어느 누구라도 그런 것으로 생각 한번 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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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119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백승욱 옮김 / 동문선 / 1997년 5월
평점 :
품절


루이 알튀세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2011년 3월이었다. 당시 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외라는 교수의 “구별짓기” 상권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구분짓기라는 도서는 결국 사회학과 문화학에 대한 담론인 도서로 상당히 구체적이면서도 통계적인 자료도 많았으나, 한편으로 기본적인 철학과 사회학 등 다양한 인문학적 내용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도서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책 겉표지에 적힌 <왜 노동계급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는 반면 ‘사회지도층’은 가리고, 삼기고, 절제하는가? 경제자본, 학력자본(학벌),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인줄) 상징자본의 계급별 구성과 사회적 궤적을 추적하면서 상징이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해부해낸 문화연구 분야의 ‘자본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아직 뚜껑도 열어보지 못한 채 나는 1년이나 이 책을 집에 사두고 방치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읽어야 할 도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당시 우연히 발견한 도서 경희대학교 영미문학전공의 이택광 교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단순히 좌파와 우파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문좌파 즉 지금 뭐가 잘못된 현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이것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논하는 것이 인문좌파이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우리가 생각해야할 철학과 사회학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철학이란 학문은 항상 보면 지금이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오는 당시만 해도 이것은 전혀 반갑지 않은 존재이며, 기존 인식에는 상당히 위험한 사고이다. 가령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당시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가치를 따라 독배를 들어 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신의 신변이 그렇게 좋은 입장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로 그들의 존재는 기존 지배계층이나 권력가들인 소피스트에게 매우 도전적인 인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혹자라면 프랑스 봉건세력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단두대 아래 이슬로 만든 프랑스혁명의 원죄자를 찾으라면 장 자크 루소가 나온다.

 

당시 루소의 철학적 견해는 봉건사회에서는 위험하고 배척해야할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소의 서적은 철학이나 사회학, 역사학에서 다루어야 하나의 학문으로 변했다. 당시에는 학문적인 가치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여파가 큰 존재다. 그래서 루소의 철학을 민주주의사회의 기원에 설명할 수 있는 지금이나, 당시로서 루소는 혁명적이고 극좌파적인 존재다. 그러면 루소는 좌파인가? 우파인가?

 

그런 이유로 인문좌파라는 것은 이런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인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또한 지금과 미래를 어떻게 보고 듣고 판단해야하는지 사고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이론가이드 도서이다. 말 그대로 인문좌파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좌파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 보통 보겠으나, 좌파의 근원은 프랑스혁명 후 루이의 목을 베고 난 후에 생긴 자코뱅당이다.

 

봉건적인 권익을 추구하는 우파에 반대하여 좌측에 있어서 좌파로 통한 것이다. 아마 지금 좌파하면 무조건 매도하는 사람으로서 프랑스역사와 철학사 따위는 머릿속에 제대로 인지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진짜 좌파의 기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실이다. 그런 마르크스주의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눈을 감고 후발주자로서 나타난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다룬 도서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고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람시, 발터 벤야민, 장 폴 사르트르, 게오르크 루카치,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이다. 이중에는 슬라보예 지젝,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실존하는 철학자 및 사상가로 21세기를 대표하는 대석학적인 지식인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는 현대철학과 철학자, 그리고 그들까지 이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알아갔다. 물론 모든 것의 시작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공산당선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본은 계속 새롭게 적어지고 교정되어 가야할 도서지만, 공산당선언은 약간 금이 새어가고 있다. 그 도서의 취지와 달리 현실 속에 보이는 현상들은 어긋나 있었다.

 

이런 문제를 초기에 인식한 사람은 시각의 현상학을 저술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였다. 최근에 읽은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가 반드시 공산주의가 아니라 반공좌파라는 것을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런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공산주의에 대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산주의를 자신들이 추구하던 마르크스주의에서 결별을 선언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생각과 의견을 틀렸는가? 아니면 무엇부터 문제인가? 그런 고민은 남을 수밖에 없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가 적으려고 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 어떻게 루이 알튀세르가 이끌어 가려고 하는지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1부에서 페르난다 나바로라는 멕시코 산 니콜라스 데 이딜고의 미초아키나의 대학의 철학교수와 루이 알튀세르의 대화를 나눈 것이고, 2부는 루이 알튀세르가 편지를 받은 다음 나바로에게 답장을 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보면서 생각하는 점은 루이 알튀세르가 기존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메를로 퐁티가 한국전쟁을 보고 비판한 것처럼 그 후에 다가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래와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로 돌아가려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재미난 사실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사실 철학도서가 아니고 사회과학이라는 점이다. 그의 도서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인 시점으로 통해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분석과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성공이후 대부분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들은 그것을 망각했다. 아니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다루고 있으면서도 결코 철학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또한 분명히 마르크스는 철학과를 전공했고, 당시 헤겔청년파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헤겔의 변증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내가 알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대학교 강의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과목은 개설되어 있고, 마르크스주의는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학문과 그에 대한 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나에게 강의를 하던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교수는 마르크스의 이론만 내놓지 그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면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실천이 아닌 단순히 관념적인 영역에 속한 부류라는 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관념과 행동 그리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보일수도 없는 저 너머까지 연구한다. 그런 철학에서 오히려 철학을 말한다는 것이 철학적인가? 아니면 덜 철학적인가? 상당히 난해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에서 칸트는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순수이성을 논함으로 철학이란 관념적인 부분에 상당히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순수이성비판에서 논리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적이라는 점과 후에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듯이 이성이 실천적으로 행함으로서 타인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은 윤리적인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철학은 관념적으로 봐야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적으로 보는 것인가? 참 난해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을 본다면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는 관념적일 수고 없고, 유물론적일수도 없다고 했다. 아니라면 두 가지를 동시에 대립하면 꾸준히 발전해 나가야할 가치라고 했다.

 

그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존재하는데, 그 철학이 철학으로서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 자체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철학에서 철학적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만 논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는 그는 분명 철학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는 비판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으로서 행동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가 철학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 자체는 철학을 논한 것은 거의 없었으나 그의 인생 자체가 철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순된 사회구조와 더불어 그 사회에서 고통 받는 많은 대다수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했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다. 마르크스의 행동 자체 하나마다 철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자본을 집필하면서 그는 철학적인 부분 관념적인 부분보단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으로 저술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 적는 것 자체도 관념적인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마르크스가 언제나 약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생각하며 저술한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저술한 게 아니라 현실을 보고 적은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관념적이거나 합리주의적인 면에 대항하는 하나의 안티테제 역시 관념적인 영역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하나는 분명히 관념적인 부분에서만 나온 것이고, 하나는 유물론적인 부분을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문제를 Yes or No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원인과 구조를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관념론적 영역과 유물론적 영역을 한쪽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왜 스탈린이 정권은 잡은 소비에트가 마르크스주의에게 독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들에겐 하나의 관념만 사로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거기에 얽매여 착취적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게다가 파시스트에게 대항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제는 자신들이 거기에 대항하였으며, 자신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이다. 분명 그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해 대항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관념이 결국 공포정치로 변화하고, 현실 속의 대중들은 착취에 벗어나지 못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선택받은 후계자 6인 중의 한명이라고 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관념적인 영역으로 끝나 버리고,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외쳐도 그는 그 관념 안에서 머물고 있었지 그 후에는 없었다. 바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에 분명히 철학이 있어도 그것인 철학으로 생산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천으로 철학이 완성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하는 것에 반대하여 발생한 1917년 2월 볼셰비키혁명이 철학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철학적으로 되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끊임없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하고 나가야 할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혁명에 묶여 결국 자신들에게 위기를 안겨준 셈이다.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바라보면서 반면교사하여 새롭게 나갈 것을 권장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적 헤게모니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헤게모니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을 인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다. 마르크스가 윤리학을 위한 도서를 만든 적은 없으나, 그가 살아온 행동은 상당히 윤리적인 입장이다.

 

하루 12시간 넘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여성, 하루 12시간 넘게 탄광 속에서 안전 보호 장구도 없이 일하다가 탄광이 무너져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철로를 놓다가 공장에서 일하다 깔려죽거나 폭발하여 죽는 노동자들, 이런 행동들이 지금 도덕적인 가치관에 아니라면 윤리적인 가치관에 옳다고 여기는가? 당시 19세기 유럽의 문제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민주자유주의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 개인의 존엄성이어야 하며, 그 개인에겐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자는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즈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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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과 폭력 - 공산주의 문제에 대한 에세이 우리 시대의 고전 17
메를로 퐁티 지음, 박현모.유영산.이병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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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도서관에 가서 영국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 교수가 저술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라는 서적을 대여하여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이제 막 철학과 사회학 그리고 문학에 대하여 입문할 시절 본인이 직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사와 철학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 도서를 빌려보았다.

 

당시 프랑스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라는 분야를 처음 접하면서 이들의 학문 역시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소쉬르와 같은 근대철학자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연결이 된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도서를 읽으면서 그리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과 그리고 그 이전과 그 외로 하여 시기별로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 밸리, 루소, 칸트, 니체, 마르크스로 점점 따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 철학자 러셀과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가 나왔다.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이란 이름을 여기서 처음 보았고, 현상학에 대한 인식 여부와 더불어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존재했는지도 몰랐기에 사실 당시 메를로 퐁티라는 인물은 상당히 낯선 존재였다. 그러나 인상이 정말 깊은 점은 무엇이냐면, 메를로 퐁티가 1961년 심장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철학적인 연구와 업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많고 많은 연구와 업적으로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에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렸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 메를로 퐁티를 생각해본다면 시각(視覺)의 현상학(現象學)이란 도서를 저술하여 후설과 하이데거를 이은 현상학적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본인은 현상학에 대한 입문을 하지 못했다는 점과, 현상학에서 꼭 다루어야 할 헤겔의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까지도 입문하지 않아 현상학을 뭐라고 딱 표현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 메를로 퐁티라는 사람이 당시나 지금이라도 마르크스주의 내지 신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어떻게 다시 보았는지가 아주 흥미로운 점이다. 수 만명의 인파가 몰려온 메를로 퐁티의 장례식과 달리 현대철학과 사상, 그리고 인문학 전반에 큰 영향을 준 마르크스의 죽음에는 불과 열 명 내외의 쓸쓸한 배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죽어도, 엥겔스에 의한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21세기에 계속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저술한 도서였고, 미완성의 명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죽은 후에 엥겔스는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의 유지를 이어 받아 마르크스의 글과 사상을 정리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마르크스가 시작했으나 그 끝은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딸에 의해 정리된다.

 

완성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미완의 도서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이미 완성된 책이 아니고, 끝없이 적어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하던 무렵 영국 도서관에서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과 같은 경제학자에 대한 도서를 볼 뿐만 아니라 각종 문학과 철학에 대한 도서까지 참고하여 저술했다. 또한 세계가 움직이고 사회가 조금 유동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자본은 집필 도중에 계속 수정과 추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주석과 첨부내용은 마르크스의 자본은 완성본이 아니라 지금도 오늘 그가 죽은 지 130년이 다 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자본은 적어나가고 있다.

 

어떻게 마르크스주의 또는 신마르크스주의는 그냥 그대로 끝내거나 한번 요동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한 지속적인 과학적, 객관적인 탐구와 비판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상실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그저 사이비주의로 전략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이 책은 아마 그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영향이 미친 러시아혁명과 그 후에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담은 도서이다. 참고로 이 책의 후반부에 가면 재미있는 말이 있다. 공산주의가 아닌 좌파 지식인이라는 역자들의 후기가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아직까지도 좌파하면 공산주의로 보는 한국의 현실과 더불어 공산주의 노선만이 좌파라고 착각하는 많은 인식불가한 자들에 대한 조롱이랄지 아니면 착각이랄지 혹은 아쉬움을 나타낸 것인지, 왠지 모를 다양한 생각을 오고가게 하는 문구가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메를로 퐁티의 이 도서의 집필에서 재미있는 이름이 하나 나왔다. 실존주의 철학자이면서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에게 그토록 칭송을 하였던 장 폴 사르트르라는 이름이다. 실존주의적인 장 폴 사르트르는 구조주의 인류학을 만든 레비 스트로스와의 학문적인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는 구조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 이전에 장 폴 사르트르는 학문적 동지인 메를로 퐁티와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의 발발에 의해서다. 기존에 메를로 퐁티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통한 무능한 차르왕권이 무너진 것을 환영했으나, 러시아혁명 속에 큰 역할을 맡은 레닌이 1924년에 죽고, 1929년 트로츠키가 스탈린에 의해 권력을 잃은 채로 타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부터 스탈린주의가 시작되고, 레닌이 후계자로 지명한 6명의 후보자 중에서 트로츠키를 포함한 5명은 모두 죽거나 정치적 숙청을 당하고, 오로지 스탈린만이 살아남아 공안정국을 만든다.

 

그 후에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 스탈린은 북한과 손을 잡고 한국 즉 남한을 남친하게 된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든 공산주의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문제는 그 공산주의의 환상에 장 폴 사르트르가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후에 장 폴 사르트르는 1968년 프랑스 파리 5월 혁명을 지지함에 따라 구좌파적인 낡은 정신을 비판적으로 보고 잘못됨을 인정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문제는 이 메를로 퐁티가 어째서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는가 이다. 메를로 퐁티는 단순히 어느 문제되는 것에 대해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문제로는 어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개념이 강하다.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안했는지 모른 채 자기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아니라면 “나는 혹은 그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 자체는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 정말 인간은 자신이 믿거나 믿지 못함을 정말 믿고 있다거나 믿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정말 믿는지 혹은 안믿는지 조차도 분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인간의 인식이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한도 안에서 판단하려고 한다. 그 외의 것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음이 보통 인간의 인식이다.

 

인간이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 범주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식 안에서 알고 있다는 것에서 더더욱 심한 편견과 오해가 생긴다. 그런 점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더 크게 빛을 발휘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폭력이다. 폭력은 분명 타인에 대해 일정한 육체적, 정신적, 소유적인 부분을 훼손 내지 피해를 주는 행위이다. 더구나 폭력의 강도가 강해지면 생명과 존재에 대한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이 폭력에 대한 가치와 존재 그리고 거기에 대한 정의, 이 모든 것이 과연 옳고 그런지 혹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주게 된다. 메를로 퐁티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글을 적으면서 기존 차르왕조가 폭력적인 행위 즉 군중억압과 무력사용은 폭력에 의한 정치적 방법이다. 오직 국가만이 폭력의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처럼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 이전 봉건적 국가에서는 국가적인 권력은 곧 군주와 군주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에 대한 정치권력 합리화이므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하나의 정당성을 가졌다.

 

하지만 권력의 집중은 부패하게 되어있고, 부패된 권력은 결국 폭력을 부르게 되기 마련이다. 러시아혁명은 폭력으로 물든 차르왕권에 대해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과 여성이란 하위조직이 부패하고 지나친 횡포로 인해 그들의 차르를 내몰았다. 폭력에 대항하는 혁명이라고 하나 사실 그 혁명조차도 폭력이라는 정당성을 가지게 되었다. 혹은 그런 폭력에 대항하여 폭력을 남용한 혁명가도 이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적인 행위를 당한다.

 

그렇다면 누가 평화와 정의를 위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가치, 도덕적, 순수성, 내적 인간에 대한 허세적인 숭배는 폭력, 증오, 환상과 은밀한 유사성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 본다면 기존 체계에 대한 문제에 대한 반발은 역사적인 주체 당사자에게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반항 역시 기존 체계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을 던진다.

 

이전에 가라타니 고진의 도서에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후진국인 나라에서 그것도 타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독립을 하려고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식민지국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은 진보적인 존재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하는 극단적 인종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보수에 가까운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진보적인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되찾으면 그들은 진보노선이 아니라 보수노선 특히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걷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제 막 세운 국가는 매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의해 건국한 나라는 결국 내외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다소 강압적인 전체주의적인 정치가 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혁명까지의 그 투쟁이 역사는 분명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불안을 초래한 차르의 퇴진은 분명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의 길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세계는 군국주의와 더불어 식민지 개척을 위하여 끊임없이 세계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같은 서구국가들은 대량생산된 공업물품을 팔고, 값싼 원자재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경제적 식민지는 필수였다. 그런 점에서 땅이 넓고 정치적으로 불안한 러시아는 분명 위기의 국가였을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경험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다른 국가 강대국들의 손실을 막기 위한 총알받이로 출전하였던 러시아군으로서는 아마도 통제라는 수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스탈린 체제에 들어서면서 러시아혁명의 혁명가들은 점차 숙청되어가고, 소비에트연방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름이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했다. 또한 자본주의에 반하는 공산주의라도 경제적인 조건은 필요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트로츠키는 숙청당하기 전에 그런 점을 고려하여 농업을 육성하려고 했다.

 

또한 다른 지도자 역시 식량을 위한 농업과 무역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였던 트로츠키가 우파적인 정책으로 부농에게 농업을 유지할 것을 권했고, 이에 반대하던 세력은 집단화를 요구했다. 아마 소비에트연방의 가장 큰 실수는 인간은 모두 이상주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존재가 가깝다는 점을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러시아혁명은 이상주의적인 가치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존에 달린 문제였다.

 

이것에 따라 생각하면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대중, 즉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에 대한 강렬한 의지는 분명히 따르고 이에 이들을 제대로 인지시키고 각자의 존재를 알도록 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성을 키우기보다는 이미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쉽고 편하고 흔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집단주의적인 사고로 전환되어 이른바 파시스트적인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군중심리로 통한 파시즘은 비이성적인 사고와 관념이 그것 자체 합리적 이성과 관념으로 변모되어 폭력적이 하나의 미적인 가치로 변하는 순간 즉 광기가 보편적 가치가 되는 순간 파시즘이란 큰 위기가 다가온다. 소비에트연방에서 추구하던 그 혁명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으로 끝났기에 실패한 혁명이 되었다. 사실 루이 알튀세르가 만들어가고 싶은 마르크스주의란 관념적인 부분과 유물론적인 부분이 끊임없이 서로를 비판하고 존재함으로 그 경향을 찾아 발전을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공산주의는 없어지고, 그나마 남은 북한마저 공산주의국가 아닌 그저 스탈린주의를 모방한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 국가자본주의도 매우 아깝고 아쉬운지 가라타니 고진은 북한 독재체계를 이씨 조선의 연장이라고 한다. 이미 20세기로 넘어오면서 끝나버린 봉건국가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을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인간중심이라 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합당하게 보이게 하는 폭력만이 존재한다. 물론 그런 폭력적인 부분은 반드시 저런 허황된 유토피아(사실은 디스토피아에 가까우나)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테러리즘이 일어나는 현대사회 국제무대도 마찬가지이다. 테러의 발달은 무엇인가? 테러를 가하는 존재가 소수약자라면 반드시 그 소수약자에 대한 폭력적인 수단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에 의해 테러리즘을 일으킨 존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국가나 조직들은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반테러리즘으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도 테러리즘과 별반 차이 없는 폭력이란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위에는 반드시 폭력을 수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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