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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크리스 헤지스 지음, 정연복 옮김 / 개마고원 / 2012년 6월
평점 :
이 글을 적으면서 필자는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정말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이라면 정말 있어서도 안될 일이며, 게다가 공학도로 이 책에서 보인 문제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미국 양심적 지식인의 책들과 많은 전쟁, 테러, 폭력과 억압의 역사에서 한 줄기 커다란 맥이 보였는데,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는 모습이 보여주었다. 초반에 책을 읽었을 때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서적인 <아무 것도 되는게 없어>라는 것이 생각났다.
왜 그런 생각이 날 수밖에 없을까? 작고한 문화인류학자가 1980~1990년 사이의 미국의 현실을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인데, 먼저 그 학자는 철학을 전공하였고, 문화유물론을 연구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학적인 영역을 소유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 보인 미국의 현실은 암담했다. 생산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서비스업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오히려 고객들의 항의들은 늘어만 가고, 생산직종의 종사자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효율이 증가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 없어서 해고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효율과 기계의 성능이 올라가면 그만큼 제품의 능력과 안정성을 탁월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더 저하되고 있다. 가면 갈수록 불만투성이와 항의들, 삭막해져가는 사회와 엉뚱한 미치광이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특히 TV를 보면서 사이비종교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야말로 쇼크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에 있던 일이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있는 일이다. 그것은 미국만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다. 오움진리교라는 일본 안의 사이비종교단체가 저지른 테러행위는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공포들이 엄습해온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해 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왜 있는가? 라고 자문해본다면 전부 글쎄?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미국처럼 세계적으로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이 막강한 나라가 왜 오히려 거꾸로 가는 기분인가라는 점이다. 21세기에 와서 문명을 소유한 나라는 미개한 문화를 가진 원시종족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경제적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정신적 안락에는 치중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황당한 사실이 바로 그런 엉뚱한 인간들이 인간들 머리에 올라가려는 점이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고 하면서 그 바벨탑을 뒤에서 은밀히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단어다. 이 책에서 왜 자유가 무섭고도 귀중한지 생각하게 되는 의미가 된다. 바벨탑의 올림은 결국 자국의 자유와 타국의 자유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선 밝히는 바처럼 서평을 적고 있는 본인은 공학도이다. 게다가 공학이란 것은 과학의 기초가 되어 응용하는 학문이므로, 구체적이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가 없다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무리들에 속한 것이다. 물론 귀납적인 증명에 의해 이루어진 공식과 자료라고 해도 연역적인 이론에 대한 사고와 논리 역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귀납적인 영역과 연역적인 영역이 모두 허물어지게 하는 것이 그 파시스트들의 논리다.
예전에 <논증의 탄생>이란 도서에서 논증의 제시에서는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 즉 윤리적인 입장이고, 아마 다음은 로고스 논리적 입장이며, 그 마지막이 파토스 즉 자신만의 입장일 것이다. 모든 인간과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대화와 소통은 에토스라는 윤리적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지고, 자신들의 논리 아닌 논리 파토스라는 입장만 내세우면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으로 존재해야 하나, 역으로 그것이 하나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왜 인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보다 비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비이성에 빠지는 것일까?
이 책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면모와 자신의 존재를 귀속하고, 그 귀속감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배타주의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과연 그런 것처럼 이 책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파시즘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입장을 나누어 보면, 한국에서 보수자유주의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나, 적어도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인정하며, 특히 자유주의자란 존재적 입장을 확고히 정립하려고 한다. 물론 그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자세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정하여 말이다. 문제는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를 인문주의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즘, 문화상대주의 등과 같이 모두 부정한다.
그들에게 자유란 오직 자신의 하나님이란 존재 아래 있었다. 예수님을 내가 떠올려 본다면 결코 나쁜 분이 아니고, 세계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인데, 어느 순간 예수라는 이름은 사랑과 평화, 화합과 친목이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대신하여 살상과 파괴, 약탈과 억압이란 이름으로 뒤틀려버렸다. 오히려 후자의 행동으로 하여금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장에 떠나는 용사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화려하게 색칠을 한다. 문제는 그 도배를 하는 인간들은 진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부터 받아들이는 헌금과 정치세력과 결탁하는 권력에 대한 탐함이었다.
오죽했으면, 부시 대통령이 당선될 시기에 어느 주에서 부시대통령 지지율이 124%가 나왔다?
인구 100%에 다 투표해도 124%이고, 공화당 이외 민주당이나 다른 정치적 세력이 있어도 124%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부시와 더불어 기독교 파시즘은 정치세력과 악덕 자본 세력과의 결탁을 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물론 자본주의적인 구조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행운이다. 문제는 이들의 행운에는 윤리나 최소한의 논리가 없다는 점이다.
서구의 사상을 보면 문명사회와 자연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논리로 인하 세계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때에 따라서는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는 철저한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에겐 자연 속의 자원은 고갈하지도 않고, 영원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이미 20세기 마지막에 인류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환경파괴를 부정하고, 대신 휴거라는 말도 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관념에 휘말린 것이다. 우리는 있지도 존재하지 않은 망상 속의 관념 안에서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니면 전쟁과 테러 그리고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무리 내가 눈을 이래저래 돌려보아도 답은 보이지 않은 안개 아래 갇힌 듯하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아도 대중들에게 속이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신문과 뉴스를 접수한 그들은 오류로 가득한 미디어로서 대중을 현혹한다. 어째 보면 자원을 풍부하게 넘치고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내쫓거나 죽인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는 바로 인디언 부족과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추방이다. 인디언을 마치 폭력배 집단으로 간주하는 미국영화에서 그 대상은 이윽고 문화전쟁으로 번졌다.
BLACK-WATER라는 사설용역경비업체가 있다. 문제는 이 업체는 군사적인 장비와 더불어 군인 못지않은 무력을 소유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군법은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상종한다. 이들이 이라크를 침범할 시기에 테러리스트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단지 이슬람이란 존재가 자신들과 양존에 있어서 안 되는 필요악적인 존재로 부각한 것이다. 대신 이들이 제압한 곳의 자원은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된다. 그렇게 하여 남미와 중동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먹으면 세계 안의 자원은 끝없는 자신들 소유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대신 그런 농담들이 몇 십 년이나 갈까하는 의구심은 버릴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환경오염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억압을 신을 대신한 것이라 여긴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경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있는 폭력적 단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헤게모니적인 세상에서 군왕으로서 왕림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왕림하려는 신화적 욕망을 지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머리로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란 점이다. 이런 그들이 왜 생겼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에게 무서운 단어는 아마 희망일 것이다. 희망에는 뭔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나 약속을 전해준다. 단지 그 희망 이전에 맹신자들은 자신의 공포심에 눌러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생을 포기하는 비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의 표출, 이들의 대부분은 대단히 폭력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다.
폭력으로 통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결국 자신들의 이익에 합당될 경우 그 모든 것은 용납된다. 물론 자신들의 세계마저도 심각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남녀평등은 기본적인 바탕을 가지고 시작한다. 신체적, 생리적, 구조적 특징에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모두 사회적 참여와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점은 분명하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과 집안에서의 남편에 대한 헌신이다. 물론 그런 점도 중요하나 그 이상은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발언권이나 의사전달권한도 없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무조건적 배타적이다. 본인이라도 동성애가 좋을 리가 없으나, 적어도 그것을 두고 생명과 사회생활에 치명적 위협을 가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동성애자를 몰아넣고, 가부장적인 기독교사회를 구상하고 있다. 인류는 과연 남녀노소 평등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부적당한가? 그래도 그 곳에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것에 치중할 경우 모든 사랑과 진리를 얻는다. 1,000달러를 기부하면 그 이상을 얻을 것이란 이야기에 인간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현금으로 이루어진 헌금수표가 1등인지 아니면 세상에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지 난해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적은 저자들이 반기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언론인으로서 기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고, 그도 크리스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연복 편집위원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에 근무하며, 기독교 관련 도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기독교주의자면서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이 아니라 기독교 파시즘 그 자체라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점들은 기독교 이외에도 다른 종교에도 소유하고 있으나,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도가 지나쳐 살육과 파괴가 하나의 성전으로 묘사되었다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과거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란 서적을 봤는데, 이때 그 문장이 여기와 정확히 어울리는 것 같다.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분명 생각해보면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고, 교회를 운영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런 광신도적인 인간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의 마녀사냥에 등장하는 추악하고 잔인하며, 파시즘에 열광적인 당시 기독교 문화를 생각하면 정말 두렵다는 말 한마디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그런 잔혹한 일에 대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의 수호이니깐 말이다. 그러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는 기분도 없지 않아 느낀다. 공룡은 분명 6,000~7,000 전후의 쥐라기와 백악기 전후로 등장했는데, 공룡의 등장이 7,000년 전에 있었고, 당시 인간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룡들은 모두 초식동물인데, 이브가 아담과 같이 사과를 먹는 바람에 육식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육식동물 가령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거대하고 난폭한 공룡이 있다고 치자. 그 공룡의 발톱은 5㎝가 넘는데, 그것은 사냥이 아니라 과실을 잘 꺼내기 위한 신체도구라는 점이다.
지구과학과 생물학을 이수하여 진화론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공학 전공자의 눈에는 그저 사이비종교의 도그마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말을 믿고 따르는 작자들이 수백만 내지 수천만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창조론에 따르나, 정도라는 것이 있다. 방사능성상 분석으로 이미 밝혀진 마당에 그것을 하나의 진실한 기록이고 역사고 교과서로 삼으려고 한다. 일체의 과학적 비판과 자아모순에 대한 부분은 최고의 적으로 여긴다. 파시즘의 모든 형태는 자신에 대한 부정과 비판의 상실이 필수다. 철학 없는 종교는 그저 신앙심만 내세우는 사이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