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 - 가축사육, 공장과 농장 사이의 딜레마
박상표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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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의 글들을 보면 인간의 문화에서 있어서 가장 생존에 중요한 사항은 바로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존재해야할 영양소 중의 하나이고, 게다가 탄수화물과 지방을 포함하는 에너지원이다. 문제는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에너지양이 약 4/g이고, 지방의 경우 약 9/g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 단백질과 지방을 포함하고 있는 식량으로는 당연히 동물이다.

 

 

문제는 단백질과 지방을 동물이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효하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적정한가라는 선택에서 많은 갈림길이 나누어진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 과거처럼 복날에 무조건 개를 때려잡아 보신탕이나 개소주로 해먹지 않는다. 그 정도로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가 많이 유통되고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먹고 있는 그 고기들에 대한 현실적 안목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인식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다면 거의 무지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그렇게 여기듯이 환경공학 전공자 입장에서 말하나, 동물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은 의학, 수의학, 보건학, 생물학, 위생학 등과 같은 특정 학문이 아니고서는 일반인들이 알기란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섭취하는 고기와 같은 음식은 일상생활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하나의 생계수단에 등장하는 요소이므로 그것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하기란 어렵다. 그런 점은 우리 인간이 물을 마시는 경우 그 물의 수원과 수질처리과정과 이송과정 및 관리현황을 알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일반적인 상식으로서 전문적인 영역의 지식을 이해하거나 인식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특히 겉으로 음식이나 그 이면에 각종 학문과 영역은 안개 속에 가려진 존재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없으며, 게다가 자신의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마저도 알 수 없다. 그만큼 지식에 대한 한계성은 여실하게 드러나는 점이다. 먹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먹는 것도 그러하나 중간 중간 간식이나 보충으로서 음식을 섭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먹는 음식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현대 사람들에게 내가 아쉬운 점이란 바로 고대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말하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처럼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적 필연적 요소를 너무 멀리하거나 혹은 필요 이상 집착하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은 보편타당한 생활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먹을거리가 문제가 있다? 라고 가정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광우병 파동이 있었지만, 그런다고 하여 모든 사람에게 감염될 확률은 적고, 그것이 비록 뇌질환이란 심각한 질병이라 해도 잠복기를 지니고 있는 이상 우리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동물은 세포의 구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기 내에는 항상 미생물이 감염될 수 있다.

 

 

문제는 고기의 제작과정과 유통과정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태에서 감염된 점이다. 우리 인간의 질병 중에 위장염, 비염, 감기, 근육통과 같은 생리적, 병리적인 질병 내지 근골계 질병이 있듯이 동물 역시 그것을 소유하고 있고, 게다가 인간이 정신적, 심리적 질환 내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동물 역시 가지고 있다. 만약 그런 질병에 걸리거나 노출된 동물을 먹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이 책에서 미국에서 살아가던 어느 사람이 햄버거를 먹고 장독소로 인해 사망한 사례를 보여준다.

 

 

그 식품은 어느 특별한 상황에서 벌여진 사건이 아니라 일반 가게의 음식물이고, 그런 음식들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간단히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이란 점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들은 다양하나, 사육장에서 제한된 공간에 많은 동물들을 집어넣어 환기와 배수가 제대로 되지 위생적으로 보건적으로 엉망이란 사실과 도축과정에서 안전과 위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전염병이 쉽게 감염되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 감염되어 다른 세포까지 이전되면 인간들은 무방비로 노출된다.

 

 

우선 노출 1위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와 그 이후는 식품을 사서 먹는 소비자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권력에 대한 로비와 비합법적인 회사운영에서 소비자와 근로자의 권리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대규모 생산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도축이기에 위험요소는 상당하다. 게다가 도축 전에 살찌우기 위해 단 몇 개월 만에 과잉소화를 시켜 가축들이 비만과 위장장애를 앓는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인간이 먹는다.

 

 

그런 동물들을 빨리 팔기 위해, 좋은 공간에 스트레스로 공격적으로 보이면 병아리의 뿌리를 자르고, 돼지의 어금니와 꼬리를 빼며, 형광등을 계속 주기적으로 on/off로 하여 암탉이 알을 계속 낳도록 한다. 동물에 대한 무차별적 착취로 인해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소비시장에서 고기가 유통되는 것이다. 마약 가축들에 대해 자연적으로 방목과 적당한 생활여건만 조성되면 큰 문제는 발생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독점권을 소유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는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예전에 문제가 되던 광우병 쇠고기만 보고 들고 일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다방면적인 질병관리체계에 대해 홍보와 예방체계가 부실한 것도 문제다. 생각을 해보자. 어느 사육장에 닭들이 좁은 곳에서 눈에 눈곱이 끼여 위장병과 근육통에 스트레스로 히스테리 부리는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돼지우리에 똥과 악취로 가득하여 환기조차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음식을 먹고 싶은가?

 

 

반드시 외국산 물품이든 설령 그것이 미국산이라 하여 먹지 마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과 체계, 이면에 가려진 문제점을 그대로 놓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축의 사육에는 많은 양의 식량이 들어가고, 또한 많은 양의 오염물질이 발생한다. 특히나 지구의 온난화에서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는 온실가스의 주범 중에 하나다. 소는 반추동물이므로 사료를 흡수할 때 위에서 계속 소화를 유지하므로 입에서 트림을 할 때마다 메탄이 발생되므로 매우 유해하다. 지구온난화 피해는 우리도 직접적으로 본다.

 

 

여름철 열대화 현상, 겨울의 온도상승, 태풍과 호우 발생, 가뭄과 해일의 발생은 원래 지구환경시스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지구 대기 순환과정에서 열의 이동이 공기의 이동이기에 결국 자연재해가 닥치는 것이다. 소의 트림이 그렇게 높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소의 트림은 자동차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더불어 중요한 대기환경의 관심거리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저 nonsence comedy와 같은 어이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환경과학에서 인정하는 사실 중의 하나다. 물론 대기오염만으로 끝나면 좋을 지도 모른다.

 

 

가축들의 분뇨는 인간보다 더 많고 농도가 강한 것이다. 물론 닭과 같은 가금류는 모르지만, 소와 돼지와 같은 대형동물들은 엄청난 양을 배출한다. 이들의 분뇨에는 과량의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 화학적산소요구량(COD), 부유물질량(SS), 총인(T-P)과 총질소(T-N), 총대장균군과 분원성대장균군과 같은 수질오염물질을 발생시킨다. 최근 환경부와 각 유역환경청, 지방자치단체에서 설정하여 관리 중인 수질오염총량관리에서 생물화학적산소요구량(BOD)과 총인(T-P)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하천이 유입되면 그대로 수질오염이 되고, 환경정책기본법과 수질 및 수생태계 보전에 관한 법률에 제시하고 있는 수질환경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 상수도계획에서 하루 평균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물의 양은 300~400L. 그 물로 마시고, 세수하고, 빨래하고 요리한다. 물이 오염되는 것은 결국 우리 보건위생학적으로 치명적이란 사실이다. 가축사육장 자체의 환경적인 여건이 부실하면 당연히 후처리에 해당되는 오수 및 폐수처리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실내형이 아닌 반실외형 또는 실외형의 문제는 비가 오거나 다량의 물이 유입될 경우 가축의 분뇨가 그대로 하천으로 방류된다. 만약 대지에 식생군락이 형성될 경우 최소한으로 분뇨와 같은 비점오염원을 저감할 수 있으나, 필요이상으로 유출되면 하천에 유입되고, 그것은 결국 수질오염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는 약간 다행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조류독감이나 구제역과 같은 질병이 돌면 인간에게도 위협을 가한다.

 

 

예전에 탄저균이나 콜레라 같은 질병 역시 동물이나 인간에게 걸리는 질병이다. 그런 질병이 수 없이 존재하고 있고, 그런 질병에 걸린 동물을 폐사시키는 과정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최근 한국에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수많은 가축들이 땅속에 매몰되었는데, 본래 토양과 지하수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미국에서 하수처리장에 나온 분뇨슬러지를 조사하던 연구원들이 포도상구균에 감염되어 죽는 일이나, 일본 병원하수처리장에 콜레라균이 노출된 일에서도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질병에 걸려 그것도 모자라 땅에 매몰할 경우 더 많은 질병에 노출되는 것이다. 만약 위생매립으로 통해 차수막과 우수유입방지시설, 침출수관리대책이 완벽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당시 상황에서 위급한 일이라 부실한 관리는 필연적인 일이다. 가축들의 사체에서 발생한 피가 지표면에 노출되거나,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안에 피 냄새가 진동하거나, 혹은 하천에 피가 유입되면 감염위험과 수질관리에 큰 문제를 만든다.

 

 

기본적으로 토양 내에는 약 24~30%의 토양간극수 즉 물이 존재한다. 물은 언제나 토양 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강우 시 상층수를 받아들이고, 기존에 물은 아래로 흘러서 지하수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지하수는 주변에 하천이 존재하면 일정 수위를 같이 유지하기에 하천수와 지하수 내의 이동된다. 그래서 구제역 파동 시 가축들의 매몰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그런 것이다. 실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문제점은 심각한 것이다.

 

 

가축이 건강해야 하고, 가축이 안정해야 하는 점은 우리 인간의 생존과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국내산 고기가격이 급등했고, 일정 수준의 소득을 유지할 수 없으면, 일반가구에서는 소비할 수도 없고, 국내 가축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소득원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소비자와 생산자의 식사와 이윤창출 만의 문제는 아닌 것만 같다. 인간에겐 단백질은 필수적인 영양소고, 안전하지 못한 음식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왜 이 글의 첫머리에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이름을 거론했냐면, 그의 이론들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의 이론에 중요사항으로 인간의 문화에서 식량은 피할 수 없는 생존요소이고, 단백질이 공급처인 동물의 서식과 가축화는 인간사회의 필수적인 생존전략이다. <식인과 제왕>이란 도서에선 아즈텍문명과 같은 고대사회국가에서 왜 식인풍습을 했는가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는 행위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식인과 제왕>처럼 그 도시의 문헌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가축들이 없던 점과 거기는 대부분 옥수수 재배로 통해 식량을 해결했다.

 

 

하지만 고기를 먹기는 어렵고, 결국 최후의 수단은 가장 가까운 단백질 공급처인 인간이다. 물론 20세기의 문화인류학 도서에서도 원시부족이 상대부족과 전쟁을 벌여 포로를 체포하여 바로 죽여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 따지고 보면 잔혹한 일이나 다르게 보면 노예로 삼아 노동시킬 조건이 되지 못한 점이다. 우리 인간들이 식인행위를 좋아하지 않은 점에서 분명 보편적 사고이지만, 단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존이 불가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채식으로 대체하려고 하나 견과류와 같은 식물성단백질은 생산능력이나 수학이 가능한 시기나 양이 너무 적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동물로 통해 보충해야하는 현실적 구조에서 우리의 선택은 안전하고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제대로 찾아야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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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크리스 헤지스 지음, 정연복 옮김 / 개마고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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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적으면서 필자는 기가 막힐 수가 없었다. 정말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이라면 정말 있어서도 안될 일이며, 게다가 공학도로 이 책에서 보인 문제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미국 양심적 지식인의 책들과 많은 전쟁, 테러, 폭력과 억압의 역사에서 한 줄기 커다란 맥이 보였는데,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는 모습이 보여주었다. 초반에 책을 읽었을 때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서적인 <아무 것도 되는게 없어>라는 것이 생각났다.

 

 

 

왜 그런 생각이 날 수밖에 없을까? 작고한 문화인류학자가 1980~1990년 사이의 미국의 현실을 문화인류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인데, 먼저 그 학자는 철학을 전공하였고, 문화유물론을 연구한 점에서 기본적으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학적인 영역을 소유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 책에서 보인 미국의 현실은 암담했다. 생산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서비스업종에 근무하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오히려 고객들의 항의들은 늘어만 가고, 생산직종의 종사자들이 줄어드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효율이 증가했기 때문에 많은 인력이 필요 없어서 해고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효율과 기계의 성능이 올라가면 그만큼 제품의 능력과 안정성을 탁월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더 저하되고 있다. 가면 갈수록 불만투성이와 항의들, 삭막해져가는 사회와 엉뚱한 미치광이 종교에 빠지는 사람들, 특히 TV를 보면서 사이비종교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사람들은 그야말로 쇼크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것은 20세기에 있던 일이고, 21세기인 지금에도 있는 일이다. 그것은 미국만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다. 오움진리교라는 일본 안의 사이비종교단체가 저지른 테러행위는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공포들이 엄습해온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해 줄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점들이 왜 있는가? 라고 자문해본다면 전부 글쎄?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본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미국처럼 세계적으로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이 막강한 나라가 왜 오히려 거꾸로 가는 기분인가라는 점이다. 21세기에 와서 문명을 소유한 나라는 미개한 문화를 가진 원시종족과 비교할 수 없는 물질적, 경제적 혜택을 받고 있으나, 그것은 이상하게도 정신적 안락에는 치중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황당한 사실이 바로 그런 엉뚱한 인간들이 인간들 머리에 올라가려는 점이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고 하면서 그 바벨탑을 뒤에서 은밀히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단어다. 이 책에서 왜 자유가 무섭고도 귀중한지 생각하게 되는 의미가 된다. 바벨탑의 올림은 결국 자국의 자유와 타국의 자유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선 밝히는 바처럼 서평을 적고 있는 본인은 공학도이다. 게다가 공학이란 것은 과학의 기초가 되어 응용하는 학문이므로, 구체적이고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자료와 증거가 없다면 절대 인정할 수 없는 무리들에 속한 것이다. 물론 귀납적인 증명에 의해 이루어진 공식과 자료라고 해도 연역적인 이론에 대한 사고와 논리 역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런 귀납적인 영역과 연역적인 영역이 모두 허물어지게 하는 것이 그 파시스트들의 논리다.

 

 

 

예전에 <논증의 탄생>이란 도서에서 논증의 제시에서는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 즉 윤리적인 입장이고, 아마 다음은 로고스 논리적 입장이며, 그 마지막이 파토스 즉 자신만의 입장일 것이다. 모든 인간과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인 대화와 소통은 에토스라는 윤리적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깡그리 사라지고, 자신들의 논리 아닌 논리 파토스라는 입장만 내세우면 모든 사람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으로 존재해야 하나, 역으로 그것이 하나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왜 인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보다 비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비이성에 빠지는 것일까?

 

 

 

이 책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나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면모와 자신의 존재를 귀속하고, 그 귀속감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배타주의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 여긴다. 과연 그런 것처럼 이 책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파시즘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입장을 나누어 보면, 한국에서 보수자유주의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나, 적어도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인정하며, 특히 자유주의자란 존재적 입장을 확고히 정립하려고 한다. 물론 그 자유라는 단어에 대해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자세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정하여 말이다. 문제는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를 인문주의자, 공산주의자, 페미니즘, 문화상대주의 등과 같이 모두 부정한다.

 

 

 

그들에게 자유란 오직 자신의 하나님이란 존재 아래 있었다. 예수님을 내가 떠올려 본다면 결코 나쁜 분이 아니고, 세계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인데, 어느 순간 예수라는 이름은 사랑과 평화, 화합과 친목이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대신하여 살상과 파괴, 약탈과 억압이란 이름으로 뒤틀려버렸다. 오히려 후자의 행동으로 하여금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장에 떠나는 용사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화려하게 색칠을 한다. 문제는 그 도배를 하는 인간들은 진실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부터 받아들이는 헌금과 정치세력과 결탁하는 권력에 대한 탐함이었다.

 

오죽했으면, 부시 대통령이 당선될 시기에 어느 주에서 부시대통령 지지율이 124%가 나왔다?

 

 

인구 100%에 다 투표해도 124%이고, 공화당 이외 민주당이나 다른 정치적 세력이 있어도 124%이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부시와 더불어 기독교 파시즘은 정치세력과 악덕 자본 세력과의 결탁을 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물론 자본주의적인 구조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행운이다. 문제는 이들의 행운에는 윤리나 최소한의 논리가 없다는 점이다.

 

 

 

서구의 사상을 보면 문명사회와 자연세계에 대한 이분법적인 논리로 인하 세계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오염이 심해지고, 때에 따라서는 인간의 생존과 연결되는 철저한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에겐 자연 속의 자원은 고갈하지도 않고, 영원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공학을 전공한 입장에서 이미 20세기 마지막에 인류의 종말을 고할 수 있는 환경파괴를 부정하고, 대신 휴거라는 말도 되지 않은 종말론적인 관념에 휘말린 것이다. 우리는 있지도 존재하지 않은 망상 속의 관념 안에서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니면 전쟁과 테러 그리고 자연파괴와 환경오염에 따른 지구문명의 종말이 빠를까?

 

 

 

아무리 내가 눈을 이래저래 돌려보아도 답은 보이지 않은 안개 아래 갇힌 듯하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아도 대중들에게 속이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신문과 뉴스를 접수한 그들은 오류로 가득한 미디어로서 대중을 현혹한다. 어째 보면 자원을 풍부하게 넘치고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내쫓거나 죽인다면 말이다. 미국에서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는 바로 인디언 부족과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추방이다. 인디언을 마치 폭력배 집단으로 간주하는 미국영화에서 그 대상은 이윽고 문화전쟁으로 번졌다.

 

 

 

BLACK-WATER라는 사설용역경비업체가 있다. 문제는 이 업체는 군사적인 장비와 더불어 군인 못지않은 무력을 소유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군법은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상종한다. 이들이 이라크를 침범할 시기에 테러리스트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단지 이슬람이란 존재가 자신들과 양존에 있어서 안 되는 필요악적인 존재로 부각한 것이다. 대신 이들이 제압한 곳의 자원은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된다. 그렇게 하여 남미와 중동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먹으면 세계 안의 자원은 끝없는 자신들 소유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대신 그런 농담들이 몇 십 년이나 갈까하는 의구심은 버릴 수 없게 한다. 그들은 환경오염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자행하는 폭력과 억압을 신을 대신한 것이라 여긴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성경에 빠진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에 있는 폭력적 단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헤게모니적인 세상에서 군왕으로서 왕림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왕림하려는 신화적 욕망을 지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머리로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란 점이다. 이런 그들이 왜 생겼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에게 무서운 단어는 아마 희망일 것이다. 희망에는 뭔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나 약속을 전해준다. 단지 그 희망 이전에 맹신자들은 자신의 공포심에 눌러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생을 포기하는 비관,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의 표출, 이들의 대부분은 대단히 폭력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다.

 

 

 

폭력으로 통해 모든 것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결국 자신들의 이익에 합당될 경우 그 모든 것은 용납된다. 물론 자신들의 세계마저도 심각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21세기에 우리는 남녀평등은 기본적인 바탕을 가지고 시작한다. 신체적, 생리적, 구조적 특징에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모두 사회적 참여와 정치적 권리를 소유한 점은 분명하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남성에 대한 무조건적 순응과 집안에서의 남편에 대한 헌신이다. 물론 그런 점도 중요하나 그 이상은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발언권이나 의사전달권한도 없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에 대해서 무조건적 배타적이다. 본인이라도 동성애가 좋을 리가 없으나, 적어도 그것을 두고 생명과 사회생활에 치명적 위협을 가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동성애자를 몰아넣고, 가부장적인 기독교사회를 구상하고 있다. 인류는 과연 남녀노소 평등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부적당한가? 그래도 그 곳에는 당연한 이야기다. 그것에 치중할 경우 모든 사랑과 진리를 얻는다. 1,000달러를 기부하면 그 이상을 얻을 것이란 이야기에 인간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현금으로 이루어진 헌금수표가 1등인지 아니면 세상에 고통 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인지 난해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런다고 하여 이 책을 적은 저자들이 반기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도 아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언론인으로서 기자의 역할을 한 사람이고, 그도 크리스챤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연복 편집위원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는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에 근무하며, 기독교 관련 도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기독교주의자면서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이 아니라 기독교 파시즘 그 자체라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점들은 기독교 이외에도 다른 종교에도 소유하고 있으나, 미국의 기독교 파시즘은 도가 지나쳐 살육과 파괴가 하나의 성전으로 묘사되었다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과거 프리드리히 니체의 <선악의 저편>이란 서적을 봤는데, 이때 그 문장이 여기와 정확히 어울리는 것 같다.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분명 생각해보면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고, 교회를 운영하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런 광신도적인 인간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의 마녀사냥에 등장하는 추악하고 잔인하며, 파시즘에 열광적인 당시 기독교 문화를 생각하면 정말 두렵다는 말 한마디 외에는 없다. 물론 그들은 그런 잔혹한 일에 대해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의 수호이니깐 말이다. 그러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는 기분도 없지 않아 느낀다. 공룡은 분명 6,000~7,000 전후의 쥐라기와 백악기 전후로 등장했는데, 공룡의 등장이 7,000년 전에 있었고, 당시 인간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공룡들은 모두 초식동물인데, 이브가 아담과 같이 사과를 먹는 바람에 육식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 육식동물 가령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거대하고 난폭한 공룡이 있다고 치자. 그 공룡의 발톱은 5㎝가 넘는데, 그것은 사냥이 아니라 과실을 잘 꺼내기 위한 신체도구라는 점이다.

 

 

 

지구과학과 생물학을 이수하여 진화론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환경공학 전공자의 눈에는 그저 사이비종교의 도그마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말을 믿고 따르는 작자들이 수백만 내지 수천만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창조론에 따르나, 정도라는 것이 있다. 방사능성상 분석으로 이미 밝혀진 마당에 그것을 하나의 진실한 기록이고 역사고 교과서로 삼으려고 한다. 일체의 과학적 비판과 자아모순에 대한 부분은 최고의 적으로 여긴다. 파시즘의 모든 형태는 자신에 대한 부정과 비판의 상실이 필수다. 철학 없는 종교는 그저 신앙심만 내세우는 사이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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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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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녕 나츠메 소세키 작자의 작품이렸소? 고양이가 세상을 보고,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고양이가 narrator로 변신하여 narrative를 이끌어가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하고도 재미난 글이구나!

 

 

 

이런 엉뚱한 문체로서 이 소설의 감상을 열어가는 내 심정은 그 소설의 문체에 조금 동화되어 적어보려고 한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란 작가는 예전부터 조금 이름을 들어왔다. 예전에 일본의 아주 현명한 문학비평가 겸 사상가인 가라타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일본의 문학도 중에서 나츠메 소세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실로 느끼게 해주었으니 말이로다. 물론 그 이전에 푸른 문학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고코로 즉 마음(心)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참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의 심리를 치밀히 묘사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원전은 보지 않음에도 애니메이션에 담론하고 있는 작품의 묘사력에서 영상효과도 중요하나 그 원래의 스토리라인이 엄청나게 탄탄한 것만은 사실이렸다. 그런 나츠메 소세키 작품의 대작 중에서 대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를 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작가인 것을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문제는 매력적이란 사실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가 적은 것을 읽음이지, 그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마주본 사실이 없기에 그리고 그런 일들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모든 등장인물은 나츠메 소세키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그들은 분리된 자신의 모습이다. 오로지 여기서 현명하고도 풍월을 제대로 외우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고양이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이름조차 없는 고양이다. 이름 없는 자가 어찌하여 인간살이에 그렇게도 상상 이상으로 관찰하고 풍월을 외운다는 말인가? 어째든 그 고양이는 바로 나츠메 소세키의 자아비판을 하는 목소리 중에 하나다. 이 소설은 매우 풍자가 강하고, 현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며, 게다가 고양이가 인격화되어 우화처럼 서술자가 되었으니 이 기묘한 조화는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단지 이 글을 보면 볼수록 재미와 더불어 가슴 한편에 왠지 모를 슬픔이 다가온다. 왜냐하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비록 소설에 가상의 인물들이 펼쳐가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나 그 모티브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부분은 모두 나츠메 소세키란 소설가를 반영한 것이다. 무척이나 우둔하고 겉멋만 들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은 웃기게도 영어교사를 맡고 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영국과 미국 등과 같은 외국과 교역하면서 신문물이 들어오고, 거기에 당시 지식인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큰 변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하오니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 역시 동경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고, 영국에도 유학갈 정도로 수재였지만, 그 역시 구샤미군처럼 자신의 모순에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늘 말하듯이 주인은 책 1권을 들고 몇 장도 읽지 않은 주제에 잠만 탐하고, 주변에 메이테이, 간게츠, 산페이, 스즈키, 부에몬 등과 같은 인물이 오면 마치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츠메 소세키는 열심히 했지만, 그가 그렇게 함에도 그 자신은 구샤미군처럼 느껴질 것이로다. 당시 일본사회는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만든 화(和)를 중시한 시기는 지나갔다.

 

 

메이지유신으로 통해 과거의 봉건국가는 지나가고, 전형적인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한 시기다. 러일전쟁을 거론하는 것부터 당시 사회의 일면을 알 수 있다. 물론 고양이는 자신이 일본인이고, 자신 역시 국가를 사랑하기에 전쟁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의 승기를 바란 것 같아도, 의연금을 내달라는 것에 구샤미군의 쓴 표정에서 전쟁 이후의 당시 상황에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음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까지 그래 생각함에 중요한 것보다는 왜 그리 되었나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분명 고양이가 보는 어느 영어교사의 일상과 주변 인물들의 담화로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나츠메 소세키의 슬픔과 고뇌가 담겨있다. 우선 구샤미군을 보면 그는 위장병을 앓고 있다. 왜 앓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특별히 술을 많이 마시거나 음식을 편식만 하는 것만도 아니다. 그래도 그는 위장병으로 늘 아픔을 느낀다. 그 모습은 마치 나츠메 소세키가 위장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점에서 그렇고, 그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그의 젊은 시절에 신경쇠약증으로 무척이나 고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 풍자로 가득한 글에서 고양이가 풍월을 외우는 자들을 보고 자기도 외우고 있으렸다! 하고 있어도 역시 이 글은 풍자 속에 가려진 나츠메 소세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보고 2년 동안 살며, 산페이군이 가져온 술을 마시고 취해 물항아리에 빠져 죽을 때 고양이는 죽음에 대해 고통보단 오히려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형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마운지고, 고마운지고”라며 최후를 맞이하며 이 소설은 끝을 본다. 하지만 그 전에 고양이는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타인들의 죽음을 예견한다.

 

 

 

주인은 조만간 위장병으로 죽는다, 가네다네 영감탱이는 욕심 때문에 이미 죽었다.” 이 소설의 하권이 1907년 나츠메 소세키기가 40세일 때가 창간되고, 그 후 나츠메 소세키는 1915년 향년 48세의 나이로 결국 위궤양에 의해 세상과 이별을 맞이한다. 나츠메 소세키란 인물은 자신이 쇠경쇠약으로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쓰러졌고, 게다가 위궤양이 지독한지 그의 운명을 재촉했다. 그래서 마치 구샤미군처럼 위장병으로 죽는다는 사실에서 자신을 구샤미군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위장병으로 죽고 만다. 이 글귀에서 나는 왠지 모르게 깊은 아픔과 허무함이 드리워졌다.

 

 

 

나츠메 소세키가 일본 근대문학에서 잊을 수 없는 작가고, 일본에서 그의 작품을 100년 동안 사랑한 것처럼 나 역시 그의 작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한국 근대작가 이상의 날개에서 나온 문구가 생각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보이는 나츠메 소세키는 그런 천재적 문학도인 자신의 우울과 그 우울함을 주는 세상에 대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츠메 소세키의 연대를 보니 그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영문과에 다닌 점을 본다면 그의 문학적, 철학적 재량은 상당하다.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을 거론하고 있다. 초인(超人)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메이지시대의 엉터리지식인이라고 해도 정말 엉터리로 볼 수 있을까 이다. 등장인물 중 구샤미군은 무척이나 어리석고, 아둔하며,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심이 있었다. 비록 엉뚱하지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고양이가 어미로부터 생명을 이어받아 무참히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구샤미군의 집에 올 때 그 고양이의 생명은 구샤미군의 은혜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초반에 이 집의 하녀인 볼이 넓은 오상에게 미움털이 박혀 위기에 빠지나, 그 생명을 살게 해준 것은 구샤미군 덕분이다. 비록 아둔하고 어리석어도 말이다. 고양이는 주인의 멍청함과 아둔함을 비웃으나, 한편으로 주인의 입장을 동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고양이와 같은 나츠메 소세키이니 말이다. 당시 일본이 자본주의가 오고, 가네다 같은 영감이 득세하는 시기였다. 학문을 하는 자들은 모두 쓸모없는 자가 되기 시작했다. 간게쓰와 같은 인물은 충분히 영리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려 해도 받지 않은 채 가네다의 딸과의 혼사를 뒤로한다. 대신 산페이 군이 가네다의 딸과 결혼한다고 한다.

 

 

 

고양이가 죽은 것은 바로 왜 가네다의 딸을 간게쓰가 아닌 산페이로 하느냐이다. 이미 일본은 공부를 하고, 인격을 중시하던 과거의 마음을 모조리 버린 채 새로운 문화에 적응했는지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과거의 헤게모니적인 관직이나 권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관직과 재력은 유효하되 인간살이가 점점 삭막해져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구샤미군처럼 어리석고 현실물정은 모르는 자는 가네다와 같은 부자들에 대해 경외심이나 존경심은 없다. 나츠메 소세키가 이 소설을 집필 당시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까지라도 보통 일반인들은 가네다와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 구샤미군과 고양이, 그리고 나츠메 소세키는 매우 좋지 않음이렸다. 하지만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이고, 지식인들의 지식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고, 메이테이 같은 작자는 허풍선이만 늘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웃긴 사실은 그런 엉뚱한 세상에 묻혀버린 지식인들에게 교육받는 이들은 다시 그 지식인들이 원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네다와 같은 인물로서나 혹은 따르는 무리로서 가는 것이다.

 

 

 

이 소설처럼 구샤미군은 영어를 가리키는 교사이고, 나츠메 소세키 역시 교사와 교수를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교육관과 사회관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음에 대한 낙심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가네다 영감이 자신의 딸과 간게쓰의 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메이테이와 구샤미군에 대해 은밀한 공작을 펼친다. 구샤미군 집 옆에 학교가 있고, 그 학교에서 학생들은 가네다 영감으로부터 뭔가의 지원을 받아 야구를 하고, 그 공들이 모두 구샤미군으로 향한다. 공이 날라 오면 당연히 신경이 쓰이고, 귀찮아진다. 그래도 구샤미군은 중학생들 상대로 막무가내 행동을 하고, 엄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 집에 학생들이 와서 인사말로 “공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냥 대문 안으로 보내주었다.

 

 

 

자신 역시 교사인데, 학생들은 교사인 자신보다 가네다 영감의 재력에 마음이 갔다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재미난 풍자이나, 한편으로 보면 나츠메 소세키의 기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도 나츠메 소세키는 이런 세상이 모순으로 너무 가득한 것에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은 분명하다. 본 작품에서 고양이가 주인은 위장병으로 곧 죽겠지만,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자라고 한다. 주인은 곧 죽는다 에서 지금은 죽지 않았고, 가네다 영감은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네다 영감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라는 말에서 풍월을 외는 시대에 뒤쳐진 자보다, 가네다와 친하게 지내는 구샤미군의 옛 친구인 스즈키의 말대로 “그런데 그 돈이라는 놈이 괴물이라서, 지금도 어떤 사업가한테 가서 듣고 왔는데, 돈을 버는 데도 삼각술(三角術)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의리도 없고, 인정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로써 삼각이 된다는 거야, 재미있잖아? 아하하하.”

 

 

 

저 삼각술에서 의리, 인정, 수치도 없이 돈만 밝히면 그 시대에서 인정받아 성공한다는 자체에 나츠메 소세키와 나츠메 소세키를 분리시킨 고양이와 구샤미군의 일행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런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분명하다. 아마 구샤미군이 위장병은 단순히 음식 문제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구샤미군이 단순히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는 구샤미군과 같은 사람이 멍청하고 어리석게 되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인간이 정신병원에 있는데, 이들은 평소에 멀쩡해도 가끔씩 자신의 재주를 부릴 때만 미친 인간이양 된다. 하지만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미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모두 상대방이 정상인으로 볼 뿐이다.

 

 

 

아니 이 소설에서부터 뭔가 잘못 되지 아니한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란 타이틀로서 고양이가 어떻게 인간과 같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고, 그것도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가 말이다. 온갖 철학과 문학적 지식과 더불어 과학의 지식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만하면 천재 중에 천재인 고양이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사실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서술하는 언어는 마치 화려한 꽃들이 이리 피고 저리 피어 구불구불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현상이렸다.

 

 

허나 고양이가 이토록 전지전능한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인간을 보니, 인간의 모습이란 그저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였다. 고양이는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니체처럼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지 않았기에 말이다. 대신 고양이는 술을 마시고 마치 춤을 추면서 항아리에 빠져 죽는다. 그래도 고양이는 죽음이 고맙다고 한다. 아니 죽음으로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절망 속의 희망을 품은 나츠메 소세키의 외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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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
후루타 모토오 지음, 박홍영 옮김 / 일조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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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구가 가장 인상이 깊었다. “총알은 미국의 것이고, 보급품은 일본의 것이고, 흘린 피는 한국의 것이다.” 물론 100% 조사의 사용은 맞지 않을 수도 있으나 전반적인 내용은 맞다. 무기는 미국이 제공하고, 보급품은 군수기지로 활약하던 일본(오키나와 섬이 베트남과 가깝고, 게다가 거기는 미군이 주둔했다 - 생각해보면 일본의 땅이 아니라 오키나와는 류구왕족이 평화로이 지내던 곳인데, 일본근대사에서 억지로 빼앗은 영토이다. 그러고 보니 북해도의 아이누족 역시 그러하다 - 거기서 B-52 폭격기의 웅장한 날개를 펴고 갔으니 얼마나 무서우랴?)

 

어째든 <역사 속의 베트남전쟁>이란 책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내용을 아주 구체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만든 도서이다. 보통 베트남전쟁하면 무엇인가? M-16A1을 들고 있는 한국용사들이 베트콩을 향해 연속사격을 날리면, 베트콩들은 바주카를 들고 나와 응사해주는 영화 같은 장면들이 생각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실제 없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전쟁을 하게 되면 초반에 군대의 규율에 따라 아주 용감히 전진을 하게 되겠지만, 시끄러운 총소리와 대포소리, 폭격기들의 폭탄투하가 시작되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기본적으로 사격을 해본 남자들이라면 알겠지만, 자기가 직접 가늠쇠에 눈을 조준하며, 겨누는 M-16 기관소총이 조용하지 않은 도구라는 것을 알 것이다. 게다가 군대사격장에서는 반자동모드로 통해 한 발씩 사격한다. 만약 반자동에서 자동으로 넘기어 여러 명이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사격한다면 아마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뭐가 뭔지 모르를 공화상태에 빠질 것이다. 게다가 수류탄이 터지고, 바주카포가 날라 오고, 폭격기의 폭탄이 지면 위로 비오는 뿌리면 인간이 이성은 마비된지 옛날이다.

 

그때부터 도망치기 바쁘거나 땅에 엎드려 떨기 바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자라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것이나,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없는 곳이 전쟁이다. 그런 전쟁에 대한 기록을 어느 직접 참전하거나 지켜본 입장이 글을 쓴다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말이 나올 수 없다. 적어도 자신이 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거나 옆에 있던 사람이 무참히 총이나 폭격에 죽던가, 혹은 전쟁이 끝이 나도 자신 안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끝나지 못한 채 정신적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일까? 물론 멀리서 망원경을 전황이나 보며, 혹은 지도나 전광판에 마치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을 엄청난 고민하고 신중을 기하는 플레이어처럼 말 한마디나 때로는 손가락으로 끝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겐 목숨의 위태로움이 없기에 그들에게 전쟁이란 영광의 순간이다. 병사 수 천 명이 죽어도 적진에 큰 타격과 승리의 전환점이 되면 누가 죽든지 그 원망의 소리 대신 환호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있든지 그 자리에 있으면 객관적인 입장은 불가능이다.

 

어째든 전쟁이란 인류의 역사로 보면 문명의 존재에겐 필요악이란 이름이라고 본다. 전쟁은 분명히 나쁘고 더럽고 증오스럽지만, 인간은 자신의 그 나쁘고 더럽고 증오스러운 존재성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전쟁이다. 그래서 그 전가를 시키는 자들은 매우 비열하고 치사하며 악독한 자들이다. 보통 전쟁에서 승패의 결과나 군세나 혹은 군인이나 전투요원이 아닌 자들이 옆에 말리는 것도 아닌데도, 20세기의 전쟁은 군인과 군인의 전쟁이 아니라, 그 국가의 정치적 권력(안에 숨은 이권단체)과 상대국가(특히 어린이, 여자, 노인들과 같은 저항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그 존립자체이다.

 

실제로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집계하면 총과 칼에 의해 죽기보단 독가스에 의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독가스가 퍼지면 군인들은 방독면이라도 구비하여 막으면 되나, 민간인들은 그냥 노출되고, 면역력이 약한 자들은 그저 죽을 뿐이다. 전쟁이 미친 짓이라고 외치는 것이 백 번, 천 번이고 옳고 지당하다. 전쟁 후에 남는 것은 없다. 그나마 원정 간 국가의 영토는 무사하나, 원정당한 영토는 그야말로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고, 환자와 난민만 무성할 뿐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나라에 다녀간 사람들이 상대국가 정치체계는 몰라도 그 국민에 대한 발언이 정당하냐고 생각하면 이들의 사고회로는 완전히 파시즘의 그물에 걸린 불쌍한 물고기에 불과할 것이다.

 

역사 속의 베트남전쟁이란 도서는 저런 표현이나 느낌을 살리지 못하나, 적어도 그런 상황 속에 전쟁이란 상황을 잘 정리해간 도서다. 책의 저자는 일본 동경대학교 부총장으로 문화연구를 하던 학자이니 매우 잘 정리했다고 본다. 저자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일본이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한국이나 미국처럼 강한 충격을 일본에게 오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은 군사적 목적에서 파병과 같은 전투행위보단 물품이나 팔던 보급기지였다. 생각해보면 1950년 625전쟁에서 가장 피를 본 나라는 당연히 한국과 북한이다. 많이 죽고 많이 다치고, 게다가 농토가 황폐화되고, 도시가 무너졌으니 말이다.

 

그 다음으로 미국이나 유엔군, 소련, 중공 순으로 갈듯하다. 그러면 이에 반면에 누가 가장 이익을 봤는가에서 당연히 일본이다. 일본은 전쟁경제로 통해 부를 축척해갔다. 한국전쟁에서 옆집에 불 건너 구경하였는데, 그 옆집이 모조리 불타니 거기에 대한 조치에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는가? 게다가 베트남전쟁이라니, 후루타 교수는 그런 점을 이 책에 명시했다. 적어도 그는 일본에서 망언이나 하는 비양심적 인물이 아니라 순순히 학자의 입장에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객관적인 판단 아래 이 책을 적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이 전쟁에 대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본래 베트남은 고대 중국으로 시작하여 10세기부터 독립하여 다시 19세기 후반 프랑스에게 식민지화 당한다. 중국 역사서에서 남만이란 미개한 종족들이 소개되는데, 아마 베트남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에게 정치적 압박을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왕국이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자본제국주의에 점령당했다. 웃기는 사실은 프랑스하면 자유와 평등이 연상되나, 그것은 자기들만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많이 양호한 편이나 20세기 현대사까지 지켜보면 알제리전쟁과 그 일들은 프랑스가 과연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와 평등을 논할 가치가 있을까 싶다.

 

이에 반해 다른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더불어 서구사회의 식민지로 전략했다. 그러던 베트남이 스스로 독립하려고 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대신 일본이 와서 침략하더니, 이제 베트남 스스로 독립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때 프랑스와 일본과의 충돌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침략을 하려다 실패하고, 1964년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이 있었다. 통킹만 사건을 쉽게 말하면 지나가는 동네 초등학생에 대해 덩치 좋은 고등학생이 다가와 자기 얼굴에 주먹 2대를 날리는데, 한 번은 가짜라는 점이다. 혼자 죽치고 쇼를 하다가 미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하게 된다.

 

물론 정치적으로 1917년 10월 레닌이 만든 러시아혁명을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스탈린주의자로 변질되어버린 소비에트연방이 미국과 냉전 중이라, 베트남이든 중공이든 당시 국민들은 오로지 2차 세계대전과 강대국의 해방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해진 이후 도래할 냉전에는 아무런 감이 없었다. 그 시험무대가 1차 매치는 한국전쟁이고, 2차 매치는 베트남전쟁이다. 그나마 한국전쟁은 미군과 전 세계 유엔군이 왔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정당성이 부여되나, 베트남전쟁은 단독적이고, 그 우군이 한국파병만 도착했다. 물론 다른 남베트남 내지 다른 일부 국가가 있으나, 유럽사회는 그렇게 도착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전쟁은 단순히 겉으로는 좌우이데올로기란 목적의식이나, 그 뒷면에 나온 보고서에는 원유, 고무 등과 같은 자연원자재인 셈이다. 아마 이때부터 전쟁은 조금씩 정치적 힘겨루기와 더불어 원자재 소유 전쟁을 하고, 21세기는 완벽하게 자원과 영토의 목적으로 변모했다. 결국 세계는 시장자유주의라는 것이고,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탈(脫)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더 거센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전쟁은 미소 냉정의 엄청난 여파를 준 전쟁이다.

 

아직도 미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베트남전쟁을 보면 M-16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죽고 또 죽어 죽음의 언덕을 차지한다. 이길 수 없었던 베트남에 대해 최후의 승자는 미국이다! 라는 깃발을 날리듯 그때 미군이 패배해도 21세기에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그래도 전쟁을 알아야 하는 것은 전쟁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특히 퓰리처상으로 올라간 네이팜탄소녀의 모습이 다시 보이면 안되는 것이다.

 

네이팜탄이 자신의 옷에 붙어 그 옷을 모조리 벗어 폭격을 피해 달아나던 그 소녀, 이젠 중년의 부인이 되었지만, 그 사진의 비참하고 급박함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전쟁을 하면 나는 군인이 죽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 특히 어린이들이 학살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누구에겐 상당한 이익과 발전이 되었지만, 그만큼 누군가에겐 그 이상의 피와 눈물을 쏟게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서 모순을 느낀다.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답도록” 정말 누가 그것을 망치는지는 잘 생각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부분은 어느 피해자 내지 가해자의 특이성을 살리는 것보단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는 책이 좋을 듯하다. 비록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도, 우리 역시 그런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에게 가한 폭력을 기억해도, 남에게 폭력을 가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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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경제학 (개정증보판)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4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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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Freakonomics이란 책을 봤을 때 상당히 의아했다. 괴짜경제학이란 말에서 괴짜가 만든 경제학인지, 아니라면 괴짜 같은 사람이 경제학을 연구한 것인지?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안의 경제가 괴짜라는 것이지 말이다. 또 다른 의아함은 이 사람이 무얼 하는 사람인가라는 점이다. 매우 똑똑한 사람이고 독특한 인물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머리말에 들어갈 때 우연히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 로버트 노직 Robert Nozick라는 미국 철학자는 자유지상주의였다.

 

물론 자유지상주의라고 하여 자본주의와 함께 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그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에 대한 자유에 대한 권리이지 자본으로 통한 자유를 모조리 억압하는 형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노직이란 노장의 철학자가 이 책에 등장했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브 레빗이 연회장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말에 이래저래 모두 하고 싶다는 엉뚱한 답변에서 노직이 그에게 나이를 묻자 저자는 스물여섯이라고 한다. 그 대답을 들은 노직은 이렇게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말해주었다.

 

“이 친구는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네. 그렇다면 벌써부터 굳이 통합적인 중심 주제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 젊은이는 재능이 너무나 풍부해서 하나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친구인지도 모르지. 결국 그때그때 질문을 하나 택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거라는 애긴데,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과연 철학의 거장다운 말이다. 그런 거장의 안목이 있었는지 이 스티븐 레빗의 감추어진 능력은 정말 재미있다. 책을 넘길 때마다 오! 이런 면이 있었나? 라고 생각 드는 것도 있었고, 한편으로 본인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부분도 있었다. 어차피 인간사회는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안다는 말처럼 단지 스티븐 레빗은 절대적인 영역의 인간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에 비해 머리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호기심과 분석하는 과학적 사고가 훨씬 발달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보자면 그가 가진 가치관인 것 같았다. 그는 클린턴 정부시절 부시의 잘못된 선거운동에 대한 자문관이라고 했으니, 그의 가치관은 얼마든지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엘리트 출신의 학자이고 당연히 백인이지만, 그것에 하나의 헤게모니적인 권력을 바라기보단 그것을 파헤치려고 했다. 왜냐고 이 책을 자세히 보면 나오지 않은가? 미국의 극단적인 백인우월사상으로 가득 찬 인종차별주의자 KKK(Ku Klux Klan)단에 대한 일화에선 분명히 그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가 만약 백인우월주의자라면 자신들 백인들의 문제점과 난폭함, 그리고 잔혹함을 그대로 떠버릴 수가 있을까? 예전에 본 미국역사에서 흑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 레빗은 이미 그런 기존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고정관념에 대한 공격으로 볼 수 있다. 마약상에서 왜 부모와 사는지, 낙태문제와 범죄문제, 교육과 주변 환경 요소는 분리하기 힘든 요소이다. 특히나 부동산과 스모선수는 폐쇄적인 정보로 통해 이익을 챙기는 부당성을 고발한다.

 

인간에게 항상 자신만의 영역이란 것이 있다. 그 영역에서 하나의 신성함을 인정받으면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는 것 같다. 단지 일본의 스모선수의 경우 스모선수의 사회에 내재된 비리와 부정을 고발한 두 명의 용사는 어느 순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뿐이다. 정보를 고립하는 것과 대중들이 정보를 알아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 인식 자체가 너무 당연한 이데올로기이니 말이다. 우리는 이상한 이데올로기 안에 갇혀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간다.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정보란 한계라는 점이다. 그 정보 자체가 어마어마한 경제적 효과나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시장에 채소를 사러갈 때도 같은 골목길 안의 가게인데도 어느 가게의 채소는 양도 풍부하고 가격도 합당하고 게다가 영양가도 좋다. 반대로 어느 곳은 그러지 못하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분명한지 구분할 수 없다. 그들은 식물학자 및 전문상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상인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지역의 어느 농장에서 값도 합리적이고, 영양가가 높고 신선한지를 모두 타인에게는 비밀이다.

 

영업의 전략에서 정보라는 것은 매우 사소한 일상의 부분까지 미친다. 그런 정보이니 그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겐 어느 정보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조차 불분명할 때가 있다. 분명 그 판단을 내리는 순간만큼 우리 인간들, 혹은 본인 같은 일반 사람 역시 “나는 분명 이 선택이 옳고, 틀리지 않았으며, 합리적이고 정확한 판단이었어.”라고 하나, 막상 돌이켜보면 그것은 틀린 답이었다. 레빗의 괴짜경제학에서 부동산이 그렇게 보였다. 분명 42,000달러에 매매를 할 수 있어도, 중개업자가 40,000달러로 팔아 자신에게 수수료가 적게 떨어지더라도 유도하는 점이다. 그러나 수수료를 비율로 받아가기 때문에 몇 백달러 이상 차이나지 않으며, 오히려 빨리 거래를 성사함으로 부동산 업체 사람에게 그 만큼 거래물량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부여한다.

 

흔히 시간만 끌면 광고비와 운영비가 나가니 이왕이면 어서 나가는 편이 이익이란 점이다. 그러나 업체사람은 판매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42,000달러가 적정하나 요새 시세는 40,000달러입니다. 2,000달러를 낮추면, 금방 팔리고 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말은 자신의 심리적 욕망을 남에게 떠미는 꼴이다. 사소한 부분들은 이래저래 좌충우돌한다. 특히 인상 깊은 점은 범죄다. 누구나 자신은 안전하고 안락한 사회생활을 누리기를 바란다. 문제는 자신은 그런 욕구를 가지나 주변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부분으로 넘어간다. 가난하고 못배우고, 게다가 집안환경이 나쁜 청소년이 범죄확률은 매우 높다.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10대 청소년들이다. 이들의 범죄원인은 부모이다. 어머니가 10대 미혼모로서 흑인들이 주로 많고 술, 마약, 담배 등으로 매우 심각한 부작용이 온다. 물론 이런 아동들은 원하지 않은 임신이고, 낙태가 거절당하면 무리하게 낳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낙태수술비까지 비싸고, 불법적이라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부적절하게 관리된 산모의 자녀들은 편부모에 가난한 집안에 학교에 가서 교육의 기회도 낮고, 좋은 직업도 얻지 못하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는 학교보단 거리로 나간다. 그때부터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매우 값이 저렴한 일이나, 혹은 불법적 일이다. 마약의 손길은 그러하다. 어느 유색인종 학자가 몇 년 동안 마약r 갱들과 지내며 그들의 생활을 봤는데, 처음에 그는 죽을 수 있으나, 그 역시 유색인종으로 미국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고, 흑인사회에서 흑인들 역시 그를 보면서 처음에 적대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같이 밥도 먹고 생활까지 돌봐주는 사이가 되었다.

 

딱히 범죄자와 학자에 대한 친밀도를 높이 사기보단 그들을 주시할 때 왜 그렇게 되는가이다. 우리는 그냥 흑인이니깐 가난한 할렘가의 불량배라고 하나, 막상 왜 그렇게 되고, 그것이 된 배경과 사유에는 관심이 없다. 스티븐 래빗이 그런 일들을 어떻게 잘 포착하여 책까지 썼는지 그의 자유이나, 적어도 그가 그렇게 본 것은 괴짜경제학은 단순히 경제라는 합리적 계산이익으로 보는 경제학이 아니라 정말 그 경제 자체를 연구하는 하나의 사회과학이다. 물론 이 사회과학에는 철학이 있다. 철학은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범답안이 아니라 왜 그 문제가 생겼는지 알고 싶은 것에 대한 원인의 답이다.

 

괴짜경제학은 정말 그가 괴짜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괴짜처럼 되지 않으면 건들지 못한 부분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별과 고정관념, 일부 사람들의 정보 독점과 왜곡이다. 결국 그것은 그 사회에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괴물이다. 처음에 괴물은 큰 살모사처럼 독만 내뿜다가 결국에 메두사처럼 모든 것을 돌로 만든다. 적어도 살모사는 무조건적으로 사람을 위협에 빠뜨리게 하지 않지만, 메두사는 보는 인간 모두 망가뜨린다. 결국 망가져 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못한 사회의 이면이다. 물론 두 눈 크게 뜨고 생각을 한번만 아니라 또 다시 한번 더를 유지하면 가능할지 모르나, 그것이 되었다면 레빗이 책을 적어 낼 이유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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