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레이먼드 카버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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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 단편과 에세이들.

에세이들을 통해 카버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된다.
글을 쓴다는 일에 얼마나 진심인 작가였는지, 그 열망이 와닿는다.

레이먼드 카버의 생애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엮은 책을 읽다 말았는데, 그런 길고 긴 지루한 책보다 카버가 직접 쓴 에세이들을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레이먼드 카버라는 벽돌책을 다 읽게 될런지 그건 모르겠다.

- 일 분 정도 생각에 잠겼다가 공책을 펼치고 비어 있는 하얀 페이지 맨 위에 공허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라고 적었다. 마이어스는 그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맙소사, 완전히 쓰레기로군! - 불쏘시개 중

- 내게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문장 일부를 적은 3x5 카드가 있다. "...... 그리고 돌연 그에게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나는 이 단어들에 경이로움과 가능성이 가득함을 발견한다. 나는 이 단어들이 보이는 단순명쾌함, 그리고 은연중에 내비치는 이후 벌어질 사건의 암시가 마음에 든다. 이 문장에는 또한 수수께끼도 담겨 있다. 이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확했다? 왜 이제는 그것이 명확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러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가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또렷한 안도감 그리고 기대를 느낀다. - 163

- "시간을 더 들였다면 훨씬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거야." 소설가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더 잘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쓴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과 그 노동의 증거가 아닌가. - 167

- 그러니까 교육을 받겠노라는 욕망과 함께, 내겐 글을 쓰고 싶다는 아주 강한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이 어찌나 강한지 '분별력'과 '차가운 현실' - 즉 내 삶의 '실체' - 이 계속해 나에게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이제는 꿈을 버리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해 글을 썼다. - 196

- 나는 좋은 단편이 보여주는 재빠른 도약을, 종종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흥분을, 최상급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감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단편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다 쓰고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시처럼!) 이는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여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338


2024. mar.

#내가필요하면전화해 #레이먼드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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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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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 볼 문장이 넘쳐난다.
두 번 정도 되돌아 읽었지만, 아직도 시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겠기에, 틈틈이 다시 읽어볼 만하다.

-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 7

-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왜 학교에서는 '슬픔학'을 가르치지 않는가. 혼자 공부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벽에 부딪힌다. 예컨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 라는 벽.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힌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다. 이 분야의 열등생으로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펴내기도 했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 - 48

- 그러나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강조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사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존재 일반'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고통에도 성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 67

-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아나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132

2023. aug.

#인생의역사 #신형철 #공무도하가에서사랑의발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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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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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라는 것이 남지 않은 사람들.
로사가 와 있는 곳에는 어떠한 연민도 남지 않았다.
마그다의 숄에 사로잡힌 채 남은 인생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로사.
그녀에게 고모의 삶을 살라고 다그치는 스텔라.

둘의 관계성과 입장이 충분히 이해돼서 그 상실감에 공감할 수 있다.

평범한 전차가 평범한 선로를 따라 바르샤바의 한 구역을 관통해 지나는데도, 그들이 몇 번씩이나 목격하던 유대인 구역의 비참함을 모두가 외면했듯, 위험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온 이들에게도 분명히 존재하는 부재와 상실을 핀트 나간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그것이 세상이 무탈한 척 돌아가는 이치일까 생각한다.


- 내가 스스로를 가둔 이곳은 지옥이야. 한때 나는 최악은 그야말로 최악이니, 그 후로는 최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알겠구나. 최악이 지나갔어도 더 많은 최악이 있다는 것을. - 25

- "내가 거들지요." 노인이 말했다. 그는 신문을 내려놓고 엉킨 빨래 푸는 걸 도왔다. "생각해 보세요. 바르샤바에서 온 두 사람이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만나다니. 1910년에 나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는 꿈도 못 꾸었다오."
"저의 바르샤바는 아저씨의 바르샤바와 달라요." 로사가 말했다. - 32

- 그가 다시 물었다. "아직도 두려운 거요? 여기는 나치도 없고, 하다못해 큐클럭스클랜 단원들도 없어요. 대체 댁은 어떤 사람이기에 아직도 두려워하는 거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로사가 말을 받았다. "아저씨가 보고 계시잖아요. 39년 전에는 다른 사람이었지만요." - 33

- "바래다주리다."
"아니, 아니에요. 사람은 가끔 혼자 있을 필요가 있죠."
"너무 많이 혼자 있다는 건, 너무 생각이 많다는 거요."퍼스키가 말했다.
"삶이 없는 사람은," 로사가 대답했다. "자기가 살 수 있는 데서 사는 거죠. 가진 게 생각뿐이라면, 생각 속에서 사는 거고요." 로사가 대꾸했다.
"댁의 삶이 없다고?"
"도둑들이 빼앗아갔어요." - 45

- 질병, 질병이란다! 인도주의 맥락, 이건 무슨 뜻일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흥분. 그들의 입에 침이 고이고 있다. 미국에서 염증으로 피 흘리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라니, 무슨 쓰레기 같은 소리인가. 그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단어 또한 생각해 보라. 생존자. 무언가 참신하다. 그들이 인간을 말할 필요가 없다면 말이다. 과거엔 난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존재는 없다. 더 이상 난민은 없고 생존자만 있다. 번호와 다름없는 이름 - 평범한 무리와는 따로 셈해지는 존재. 팔에 찍힌 파란 숫자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들은 어쨌거나 당신을 가리켜 여자라고 하지 않는다. 생존자라 한다. 심지어 당신의 뼈가 흙먼지 속으로 녹아들 때도 여전히, 그들은 인간을 잊고 있을 것이다. 생존자와 생존자 그리고 생존자. 언제나, 언제까지나 생존자. 누가 그런 단어를 지어냈을까, 고통의 목구멍에 붙은 기생충 같은 단어를! - 59

- 내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가게를 열어 운영했을 때,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어 - 우리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까지 하고 싶었지. 그런데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더구나. 그것이 놀랍기만 했어, 불과 얼마 전에 벌어졌던 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었어. 그러니까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들을 몰랐던 거야. - 104



2024. apr.

#숄 #신시아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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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없음 오늘의 젊은 작가 14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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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 장르를 읽을 때마다 밀려드는 아득한 난감함이 있다.
이야기에 이입해 나라면 그 지난하고 고단한 여정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높은 확률로 그냥 지레 포기하고 칩거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
굳이 고난과 비이성과 상황에 의해 일깨워지는 야만을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이 이야기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다.
다행히도 이야기 속 세계는 끝간데까지 망가지진 않은 이성이 조금은 남아 있는 그런 세상이라 너무 괴롭지 않게 읽었다.

빨간 눈이 내리는 세상을 떠올리니 얼마 전 읽은 매니악에서의 핵실험 장면이 떠올랐고, 그 때 알게 된 실험지역 근처에 캠핑을 하던 사람들의 경험담이 떠오른다.
눈이 내린다고 생각해 신나하며 핵폭발 재를 만지고 먹어보고 했다던...
끔찍하다.

죽은 이 탄생보다 흔한 일이 되고 있다는 문장에 정작 다가오는 아포칼립스는 엄청난 재난, 위기가 아니라 더 이상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게 되는 그런 상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따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즈음 차이를 발견해 구별하고 차별한다는 건 성가신 일이 되어 있었다. 그 해골은 죽은 후에도 남는 것이니, 사람이란 결국 해골로 태어나 해골이랑 살다 해골을 간직하며 죽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삶이라는 얇고 불안한 표피를 덧입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 11

- 그게 온다고 한다.
그 말이 정말 현실로 닥쳐올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나는 간곡히 그 문장을 의심하고 싶어졌다. 아니,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어떤 악마의 얼굴을 하고 찾아올까. 전쟁처럼 올까, 전염병처럼 올까. 혹시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로 벌써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앉아 있었던 건 아닐까. - 23

- 혹시 그게 오려는 것일까. 그게 지금인 걸까. 저건 경고음일까, 예비음일까. 바라건대 지금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못다 한 말과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이 있었다. 많이 남아서 우리는 떠나지 않았다. - 60

- 인생이 한 권의 소설이라면 우리의 페이지는 작가의 말을 읽는 중일까, 아니면 쓰는 중일까. 작가의 말이 없는 소설은 작가의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독자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가짜로 지어낸 소설의 첫 페이지가 아니라 그 소설을 완성해 낸 작가의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말이라는 진짜 속생각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 가는 거라고. 소설과 작가의 한 시절과 창작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끝 페이지.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우리의 페이지는 가장 솔직해야 하는 순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었다. - 151

2024. mar.

#날짜없음 #장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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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언덕 검은 달 1 십이국기 9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외 옮김, 야마다 아키히로 일러스트 / 엘릭시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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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십이국기의 끝이 될런지 그건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나온 신작.

대국의 위기가 네 권으로 펼쳐지는데,
기린의 힘을 잃은 다이키와 행방이 묘연한 왕 교소.

수색의 시간이 너무 지지부진하지만, 뭐... 그런 빌드업이 있어야 절정의 효과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게다가 왕위를 빼앗는데 성공한 아센은 왜 6년이나 나라를 방치하고 움직이지 않는지 내내 궁금했는데, 딱히 별 이유도 아닌데다 큰일을 벌인 이유조차 초라한 질투심 때문이라니. 책 4권으로 쓸 이야긴가... 다른 십이국의 세계도 궁금한데.. ㅋ

홍기로 돌아가 적의 곁에 있는 선택을 하는 기린답지 않은 기린 다이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봉래에서 산 기간 동안도 마음의 상처가 많았던 기린인지라 십이국 세계의 기린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지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황주의 사람인 야리와 로산도 흥미로운 캐릭터.

이 세계관에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것은 태과인 경왕 요시와 기린 다이키.

그리고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에 불과하지만 상인으로 농민으로 군사로 의관, 도관, 하다못해 화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여하튼 뭐든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야기.

- "다친 몸으로 용케 돌아오셨습니다. 봉래는 쉬이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어요. 리사이가 목숨을 걸고 경국에 가서 경왕의 조력을 얻었어요."
"경왕요?"
엔초가 잘못 들은 듯이 되뇌었다. 너무나 뜻밖의 말에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리라. 교시도 마찬가지였다. 경왕이란 대륙 동쪽에 있는 경국의 왕을 이르는 것인가? 그분이 대국에 힘을 보탠다?
교시는 여태껏 나라가 타국에 원조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대륙이라면 그런 일도 있을지 모른다. 대륙의 여덟 나라는 육지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국은 바다에 고립되어 있다. 타국과는 거의 교류가 없다. 분명 겨우 반년 만에 사라진 신왕의 즉위식에는 타국에서 빈객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적어도 천상 세계에 속하지 않은 교시에게는 다른 나라 따위 없으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다들 얼이 빠진 것을 보았는지 다이키가 재촉해 리사이가 입을 열었다.
"경왕은 태보와 마찬가지로 태과 출신이시라 들어서......" - 90

- "황주와 황해 바깥 사람은 일의 우선순위가 서로 달라. 간단히 말하자면 황주는 본인이 입은 은혜는 중하게 여기지만 왕이나 기린, 국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너도 마찬가지인가?"
고료가 묻자 야리는 수긍했다.
"나는 태보가 재밌어.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고료처럼 조건 없이 존귀하다고 여기는 건 아니야."
고료는 야리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평해야 할지 몰랐다. 야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뭐, 걱정하지 않아도 태보의 존체는 지킬 거야. 부탁받은 일이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거든." - 196

- "교소 님이 너와 겨루고 있던 건 따지자면 누가 더 나은 인간인가였어. 교왕의 총애나 지위, 명성은 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왕에게 중용되면 그건 곧 더 나은 인간이라는 소리지. 너는 그러다 뭘 겨루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만 거야. 누가 뭐래도 교왕의 관심을 원했던 거야. 더 중용되고 더 높은 지위를 원했던 거겠지. 하지만 교소 님은 너와 무엇을 겨루고 있었는지 잊지 않으셨던 거야."
아센은 우두커니 로산을 쳐다봤다.
"그래서 넌 도둑으로 끝날 거야. 실체도 없는 것에 휘둘렸으니 당연한 일이지." - 259

- 밀랍처럼 핏기가 가신 얼굴에는 툭툭 튄 피가 묻어 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손을 붙잡고 검을 집어 들려는 손이 있었다.
"잘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
교소는 칼자루를 꽉 쥐고 얼어붙은 손을 억지로 펼쳐냈다. 다이키가 쥐고 있던 검을 넘겨받았다. 막다른 곳에 몰린 듯 까맣게 빛나는 눈이 교소를 올려다봤다. 교소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틀림없는 대국의 핏줄. 혹독한 대국의 겨울을 극복한 치열한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순간 시선을 받은 다이키의 모습이 녹아 흘렀다. - 429

2024. mar.

#십이국기 #백은의언덕검은달 #오노후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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