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나 - 나를 인정하고 긍정하게 해주는 힐링미술관
김선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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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림에 대해서는 다 모르겠지만,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어느 순간의 울림 같은 거,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어느 찰나를 느끼게 되는 거... 그림으로 치유를 다시 한 번 기대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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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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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데 필요한 무언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단어가 무엇일지 궁금하다면 김훈의 이 책을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밥, 돈, 몸, 길, 글. 그가 이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하는 살아가는 이야기가 가장 기본적이고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먹어야 살고, 돈이 있어야 먹고, 몸이 성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가야 할 길을 묻고 걷고 하는 일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 더 해야 할 말은 글일 것이다. 여전히 자판 두드리는 게 아니라 손으로 글을 쓴다는 그의 말에,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느꼈던 분위기가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김밥은 과자나 떡 같은 주전부리가 아니라, 당당히 '밥'의 계열에 속한다.

김밥은 끼니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끼니를 해결하는 밥 먹기의 엄숙성에서 벗어나 있다. 김밥은 끼니이면서도 끼니가 아닌 것처럼 가벼운 밥 먹기로 끼니를 때울 수가 있다. 김밥으로 끼니를 때울 때, 나는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삶의 하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김밥의 가벼움은 서늘하다. 크고 뚱뚱한 김밥은 이 같은 정서적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난 내용물이 쏟아져나올 때 나는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14~15페이지)

 

김밥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털어놓는 사람 흔하지 않을 테니까. 먹고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는 그의 말을 알 것도 같다. 제목 때문에라도 이 책이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이 정도의 깊이일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세상 구석구석의 장면을 그의 글을 통해 대신 듣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단순하게(?) 먹는 일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그는 아들에게 하는 말로 표현했다)에 팍팍한 세상을 현실감 있게 버틸 수 있는 자세를 전수한다. 자기는 상관 말고 '네 돈 벌어서 너 잘 쓰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부모에게 잘해야 하는 건 맞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 부모를 넉넉히 챙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모두의 고통이자 숙제일 것이므로. 투덜거리듯 하는 말이 아니고, 그저 그게 맞는 것이니 그리 살아보아라, 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의 그런 말투와 표정은 라면에 대해 이십 페이지 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장면 하나하나를 그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 행위에 삶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담고 싶었던 걸까.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알 것도 같은 감정들에 그의 산문을 기다렸던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세상의 돈은 자꾸만 양명한 들판을 버리고 음습한 계곡으로 흘러가려 한다. 돈은 실물의 그림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돈의 탄생은 하찮다. 그러나 이 그림자가 실물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키고 유통의 마당에서 몰아내기도 한다. 돈이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무늬와 질감을 드리우고 있는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사람들의 정서가 돈으로부터 완전히 격절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주는 안도감과 돈이 주는 불안감, 돈이 주는 성취감과 돈이 주는 절망감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칠 수가 없다. 돈은 추상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완벽하게 완성해낸다. 무서운 일이다. (187~188페이지)

 

타인의 삶을 대하듯 관조하며 한발 물러서려 했던 습관 같은 나의 감정을 그의 글로 좀 더 가까이서 보게 된다. 끝난 일도 아니고 무던해질 수도 없는 일인 세월호 사고부터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어마어마한 일들을 놓치지 않는다. 화려한 것 이면이 얼마나 어둡고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지,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그의 평발 아들을 언급하더라), 옳은 일을 보는 눈으로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게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품게 한다.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밥벌이가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계속해나가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일상의 푸념처럼, 토닥임처럼 들린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보다 슬픔을 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모든 것은 그 이후에 이어지기 마련이므로.

 

가을의 바람은 세상을 스쳐서 소리를 끌어낼 뿐 아니라, 사람의 몸을 스쳐서 몸속에 감추어진 소리를 끌어낸다. 그 소리 또한 바람이다. 몸속의 바람으로 관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호흡은 그래서 가을날 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바람 부는 가을날,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서 떨릴 때, 나는 내 몸속의 바람을 가을의 바람에 포개며 스스로 풍화를 예비한다. 악기가 없더라도 바람에 내맡긴 내 몸이 이미 악기다. (376페이지)

 

오랫동안 다시 만나길 기다렸다는 그의 산문을 이렇게 읽고 나니, 말랑말랑한 것보다 단단한 분위기를 먼저 느꼈다. 그의 필체를 본 적은 없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지만 아마 힘 있는 글씨체일 것 같다. 그의 말투가 그렇다. 아프고 여린 이야기마저 기운 내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은 힘을 낸다. 얼핏 투박하게 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 또 그의 글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조금 더 내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그의 문장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읽고 싶어졌다. 그가 글에 담은 힘이 나에게 조금 더 다가올 수 있도록.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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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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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읽기 힘든 글이 있다.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다. 좋아하는 분야인데 그 작가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배수아의 글이 읽기 힘든 글이다. 그녀의 책 읽기를 여러 번 시도했으나 완독한 책이 없다. 아마 이 책도 출간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자의로는 선택할 일이 없었을 거다. 낯선 그곳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조금 다른 분위기의 여행서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함께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읽게 됐다. 아주 더딘 호흡으로, 가끔은 그녀의 문장으로 장면을 그려가면서 읽었다.

 

알타이. 몽골 소설가 갈잔의 소설 한 권에, 무언의 손짓에 그곳으로 향한다. 그녀에게도 낯선 곳일 테다. 하지만 무슨 유혹에 빠지듯 그녀는 그곳을 향해 길을 나선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텐데, 그 쉽지 않음조차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에 이끌렸겠지. 대부분의 여행이 그러지 않을까. 나를 부르는 어떤 것을 향해 저절로 걸음 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결국 향하고야 마는 것.

 

초원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 동화되어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도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불편함을 주는 삶도 싫어하기에, 문명이 전한 편함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마음을 돌린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야크 똥을 주우러 다니는 일, 말이 이동수단이 되는 것에 내 몸은 아우성을 칠 거다. 광활한 초원을 보면 시원함을 느끼다가도 그곳이 화장실과 동의어가 된다고 상기한 순간 민망함을 품은 불편함이 또 한 번 다가온다. 걷고, 경험하고,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가며 동요되는 시간이 채워주는 게 분명 있을 테지만, 그녀의 여행길에 온전히 동참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 자리하기 시작한 어떤 공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운명처럼 그곳을 향한 그녀의 모습에 부러움마저 들곤 했으니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끈끈한 기운에, 살면서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데 그 어떤 이유도 물을 수 없는 거다. 그녀는 그저, 그래야만 했을 거라는 생각에 어떤 물음을 떠올리는 것조차 우스웠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녀의 그 길, 걸음, 사람들, 삶, 일상 같이 녹아든 그 시간을 보고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그 운명처럼 끌렸던 그 향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편한 게 좋은 거라는,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나의 익숙한 생각에 조금이라도 다른 여지를 넣어준다면, 그거면 된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내가 가진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들의 삶을 색칠했다. 바람 같이 뿌연, 흙처럼 투박한 그들의 표정을 넣어준다. 편함이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닌,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그런 모습을 순수라고 불러도 된다면, 그들은 순수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내가 느낀 불편함은 그 순수가 없어서일 거라고 말이다.

 

은행잎이 다 떨어져 인도를 덮었다. 며칠 내린 비로 그마저 축축해져 거리는 더 스산했다. 그걸 보고 아쉽다는 생각을 했는데, 바로 옆에서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떨어져 눅눅해진 낙엽을 쓸고 있었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내 마음과는 다르게 그들에게는 번거롭고 해치워야 할 불편함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서글퍼진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완전하게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내려놓지 못했던 어떤 감정 하나가 뭘까 궁금했는데, 아마도 그런 느낌이었던 듯하다. 가는 시간을, 계절을 담담하게 볼 수도 있는 어떤 분위기를 그리는 것. 화려한 여행기가 아니라, '그냥, 그 길을 걷고 왔어.'라고 같은 음으로 얘기하는 목소리 같은...

 

 

여전히 그녀의 글은 내게 편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다시 한 번 자의로 그녀의 글을 펼치고 싶은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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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김보영 지음 / 기적의책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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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하고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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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 - 진짜 연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요조 (Yozoh) 외 지음 / 부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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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건 없다. 왜냐하면 연애가 시작되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언제나 실연했을 때 시작된다. (250페이지, 다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성일)

 

그랬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정성일과 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연애할 때 연애소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애소설은 물론이고 책을 가까이할 시간이 없다는 게 더 맞겠다. 집중해서 읽어도 활자가 눈으로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은데, 연애라는 감정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나. 책을 읽지 않아도 하루는 너무 빨리 흐르고, 일상에 연애가 끼어들면 몸도 마음도 바쁘다. 그 사람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놓고 하루를 보낸다. 틈틈이 만나고 많은 것을 나누는 시간을 챙겨야 한다. 정말, 바쁜 거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또 익숙해진 대로 바쁜 하루의 시간이 굴러간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그 연애가 비워진 시간의 상실감이다. 하루를 쪼개 쓰던 머릿속에서 빠져나간 시간이 크다. 없을 땐 없는 대로 살아지는 것들이, 있다가 없으면 그 공백이 배가 된다. 흔한 말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알게 되는 것.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굴러가는데 무료하고 지루하고,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음은 비어 있고 머릿속은 빠져나갈 것들이 제대로 나가지 못해 엉켜 있고. 그럴 때 슬쩍 책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너무 무거운 건 답답할 것 같고, 너무 가벼운 건 마음이 더 허해질 것 같고. 그래서 딱 적당하게 손이 가는 게 연애소설이 될 확률이 높다. 비슷한 경험에 공감하면서, 상실의 자리를 자근자근 밟으며 어떤 감정을 채워주기 좋을...

 

스무 명의 작가가, 그 연애의 공백에 읽어도 좋은 소설을 소개해 엮은 게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연애가 사라진 자리에 채워 넣을 '대리 연애'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몇 페이지 넘기다 보니 그런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됐다. 동시에,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란 실연했을 때만이 아니라 연애를 할 때도, 연애하지 않을 때도 필요한 것임을 인정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연애소설이 다가올 수 있음을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그 소설들이 그들에게 다가온 건 타이밍의 문제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밋밋한 순간에 읽고 넘어갔을 그 소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연애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봤다. 그 소설들에 가득한 연애, 사람의 감정, 살아가는 배경의 문제, 삶의 자세와 같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시간임을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저자들이 겪어온 시간 속의 연애가 들려오고, 그들이 말하는 소설이 이어진다. 어떤 목적지로도 갈 수 있는 게 연애겠지만 대부분 이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소설이 더 깊게 들어올 것 같다. 상대를 얼마큼 사랑했든, 연애의 시간이 길었든 짧았든, 어떤 식으로 헤어졌든, 그들이(우리가) 나눴던 것이 소멸하고 그에 따라오는 상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다. 그러니 이 책 속에서 저자들이 말하는 연애와 소설들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끌어줄지 궁금할 수밖에, 낯설지 않을 수밖에, 공유할 수밖에...

 

연애만큼 모두가 하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행위도 없다. 늘 사랑 아닌 다른 잡스러운 것들로 오염되고 만다. 타인의 시선이나 경제적인 계산이 제일 흔할 테고, 유년기에 해결하지 못한 온갖 불안정하고 비루한 감정들도 날뛸 것이며, 타이밍과 운의 방해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개 치졸하고 더러운 파국으로 끝나며, 그 끄트머리에서 마음속의 습도계 같은 것이 사이렌 소리를 낼 때 연애소설을 찾게 된다. (289~290페이지, 연애소설 애호가를 애호하는 이유, 정세랑)

 

저자들이 소개해주는 소설이 다양하다. '이게 연애소설이었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읽었던 기억과 다른 느낌을 말하는 소설도 있다. 그때 이어지는, 저자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소설의 의미가 새롭다. 재밌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연애를 볼 수도 있겠구나, 이때 그녀의 마음은 분노와 복수일 수도 있겠구나, 끝까지 부정할 수밖에 없는 감정도 여기 있구나, 싶은 이야기들. 연애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연애소설일 수밖에 없다. 취향이나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애가 빠질 수 없는 소설들이다. 그러면서 매 순간 우리의 연애 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소설들이라는 게 장점으로 다가온다. 예를 들면, 소년 김보통이 소녀와 데이트에 가기 전에 『속 깊은 이성 친구』를 읽고 갔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걸 보면 연애를 하기 전에 읽으면 좋을 소설일 수도 있다. 정지돈이 『몰타의 매』로부터 사랑이나 여자를 믿지 말 것을 배웠다면, 이도우는 마지막으로 하지 않은 한 마디를 『워싱턴 스퀘어』의 주인공의 말로 대신한다. "당신은 나에게 잘못했어요."라고. 입 밖으로 말하고 나니 약속이 되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금방 또 번복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리는, 쉬운 감정으로 치부되는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박현주가 말한다. 연애의 비겁함이며 동시에 연애에 신중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스무 명의 저자가 말한 게 연애와 소설과 삶 전부는 아닐 테지만, 그에 더 가까이 다가가 우리의 시간의 도움이 되게 하는 순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어떤 기대를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보게 하면서, 그 마음이 드러내는 온갖 감정을 표현한다. 그 안에 각자가 생각한 연애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들이 만난 소설에서 보이는 장면들과 대화, 끝을 알 수 없는 방향에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고, 그의 태도가 괘씸해서 화가 나는 순간들. 그렇게 연애를 이어가고 연애에 마침표를 찍게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소설 한 권쯤 있지 않을까. 쌓인 책탑 맨 아래에 눌러놓고, 마음이 텅 비었을 때 한 번씩 꺼내보고 싶은 소설. 그때가 연애가 끝났을 때일 수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때일 수도 있다. 지독한 상실감에 온몸이 마비된 듯한 때일 수도, 다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심장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때일 수도 있겠지. 어떤 때든, 그때 내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가 하나쯤 가슴 저 깊숙이 숨어 있지 않을까. 저마다 사랑했던 소설에서, 현실로 연결된 연애를 품은 이야기 말이다.

 

생각보다 숭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의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반드시 그 시절 그 나이에 접근해야만 한다.

그런 게 바로 마음의 일이 아닐까. 어느 나이의 어느 마음이 하는 일. 다른 나이의 어떤 마음에게는 해석이나 미화가 필요한 일화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이의 바로 그 마음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온전한 무언가. 여러 경로로 '데브다스'를 접했지만 그 파멸적인 사랑에 관해 최종적인 해석을 내려야 할 때면 결국 사라트챤드라 챠토파드히아이의 원작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다. (244~245페이지, 무모하게 사랑할 특권, 배명훈)

 

이들이 말하는 소설의 분위기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정작 나에게 이 소설들이 어떻게 다가올지 금방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내게 가까이 오지 못했던 소설이 있는 걸 보면 그 소설들이 꼭 같은 의미로 작용하지는 않을 거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소설이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곰곰 생각해보지만, 선뜻 떠오르는 소설이 없다.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아서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이 책 한 권이면 감정을 다스리고 뭔가를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만한 책을 읽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이 말한 소설의 목록을 천천히, 더 오래 살펴보게 된다. 이 소설들이 그들에게 전했을 '어떤 순간, 어떤 감정, 어떤 토닥임'이 나에게도 그대로 전해오길, 어둠이 내려앉은 듯한 모든 순간에 만날 수 있는 소설이기를 바라면서. 연애소설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건, 연애가 끝났을 때뿐만 아니라 마음이 구멍 난 모든 순간에 필요하다. 어쩌면, 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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