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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10월
평점 :
그게 옳은 일이라고, 그때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믿으며 그 순간을 견딘다. 여러 경우를 떠올리며 계산을 한다. 뭔가를 더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덜 잃을 것을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든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므로 그쪽으로 손을 뻗는다. 잘했어. 잘한 거야. 토닥토닥. 그리고 안도한다.
이제는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더 중요한 걸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조금만 참으면 다 좋은 거야. 하지만 괜찮지 않다.
좋은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 아닌 게 되는 거다. 참아야 할 게 있고, 참아서는 안 될 게 있다. 셀레스트가 용기를 내고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할 때,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631페이지)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거다.
자신이 처한 진실을 숨기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은 점점 몸을
불리고, 표정을 가리기 위해 쓴 가면의 화장은 점점 두꺼워진다. 읽다 보니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이들의 사연에서는 좀 불편하다.
그저 마음속 말들을 표현하지 않은 거라고 해 두자.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은 게 거짓말인 건 아니니까. 피리위 반도에서 만나게 된 세 여자
매들린, 셀레스트, 제인의 숨겨진 마음을 듣는 게 독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서로에게 인간적인 애정을 품은 사이지만, 그녀들은 정작 마음
깊숙이 자리한 고통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못했다. 아마 그 세 사람만의 처세술은 아닐 거다. (나도,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 사람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예비학교에 다니는 다섯 살 아이를 둔 학부모들, 자기 아이가 세상의 유일한 천사인 것처럼, 가정이 이룬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학교
안에서도 적용된다고 믿는 개념 없는 부모들의 태도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권력을 정한다. 시쳇말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 안에서
세상의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마흔의 여자 매들린,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며 부유한 삶 이면의 것을 감당하는 셀레스트, 우연히 찾아든 해변의
매력에 빠져 아들과 함께 피리위 반도에 스며든 싱글맘 제인. 세 여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예비학교의 학부모들과 각자의 인생이 들려줄 소소하고 큰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끌고 간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을 파헤치는 수사의 과정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물을 한 명씩 배치해놓고, 그들의 말을 잠깐씩 끼워 넣으며
독자가 사건을 추리하게 한다. 도대체 누가 죽은 거야? 왜? 범인이 누구기에 이 사람들의 진술을 다 듣는 거지? 근데 모두 엇갈리는
진술뿐이잖아?
폭력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난폭해진다. (451페이지)
예비 학교 학부모들의 퀴즈대회가 있던 밤, 누군가 죽었다.
소설은 퀴즈대회가 있기 6개월 전의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매들린과 셀리스트, 제인의 개인적인 일들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세 여자의 삶을 독자의
눈에 각인시킨다. 학교에서 전남편의 새로운 가족과 아이를 봐야 하는 매들린은 쿨한 전처이자 엄마가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이성이 이끄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들린의 상황이다. 이런 희한한 상황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견디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려 애쓴다. (이런 관계가 뭐 어때서? 나,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면서 그녀 안에 자리한 용감무쌍함을 매 순간 발휘한다. 자상한 남편과
쌍둥이 아들, 부유한 환경이 우아한 삶을 부여한다고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셀레스트는 많은 여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사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고 잘 사는 거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나를 위한 모든 게 최상이에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만족이 셀레스트의 행복을 얼마나 지속하게 해줄지 궁금해질 무렵, 이 소설의 분위기가 전환된다. 가난한 싱글맘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언제까지 알게 하려고 하는지, 제인과 그녀의 아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첫날부터 호의적이지 않다. '카더라 통신'의
중심에 선 학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선입견으로 이방인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인은 포기할 수 없다, 아직은. (이런 아름다운
풍광이 자리한 곳에서 정녕 내가 발붙일 곳은 없는 건가요? 내 아들과 행복해질 권리가, 나에게도 있어요...)
이 소설의 제목만 보고, 처음부터 등장하는 학부모의 말을
듣고,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거로 생각했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읽어가면서 내내 느꼈다. 이 거짓말의 주인공은
아이일 수도 어른일 수도 있지만, 그 대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미 커져 있는 상태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그게 인생을 얼마나 휘두르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게 이들의 실수라면 실수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렵겠지만,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린 순간의 안도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는 거다. 그저 한 번, 두 번, 그냥 지나가고 말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쓴 약을 삼킨 뒤 달콤한 사탕 한 알 입에 넣는 것과는 다르다. 전혀 다른 무게다. 너무 늦게 알게 되는 일들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답을 줄 수도 있음을 소설은 말한다. 무엇보다, 친밀하다고 여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이자 반전으로 흥분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동시에, 서로 다른 삶을 걸어온 이들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시사한다. 새로울 게 없는 말이지만, 어쩌면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서로에게
시종일관 가면무도회장에 초대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상대를 향한 진심을 가린 채로, 앙숙처럼 지내다가도 순간의 목적을 위해 손을 잡기도 하는,
다른 엄마에게 질 수 없어 소리 없는 발악을 내지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을 눌러 담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알 수 없고, 알리고
싶지도 않다. 그 표정 너머의 진심을 말하고 싶지 않은 거다.
다른
사람 문제는 항상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 아이는 항상 고분고분해 보이는 거야. 재빨리 걸어가는 지기를 보면서 매들린은
생각했다. 제인이 가족사진을 가지러 간 사이에 매들린은 제인의 작고 깔끔한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언제나 그렇듯 애비게일과만 함께했던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떠올렸다. (260페이지)
제발, 그러지 마. 참지 마... 나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주문을 걸면서 읽고 있었다. 더는 그러지 말라고, 가리지 말라고. 그렇게 나의 시선은 그녀들이 언제쯤 터트릴 것인가 하는 기대감으로 문장을
쫓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과 공감할 수밖에 없는 개운함이 밀려왔다. 등장인물들의 엇갈린 진술 속에서 진실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야 마주하는 진실은 뜻밖의 감정을 불러왔다. 이렇게 풀릴 수도 있다는 걸 보면서, 누군가를 향한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긍정의 기대를 품게 한다. 아줌마들의 가벼운 수다 한판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안의 뿌리 깊은 진심을 전혀 가볍지 않았다. 인간의
겉모습 뒤로 가린 삶이 얼마나 많고 다양할 수 있는지, 어떤 고통으로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 사소한 거짓말이 결코 '사소한' 것으로
머물지 않음을 풀어낸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겪는 오해와 진실에 관해 이만큼 재밌게 읽게 하는 소설이 있을까 싶다. 동시에, 읽는 재미는 더없이
좋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우리 삶을 그대로 마주하는 것 같아서 아팠던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달콤한
초코파이에서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