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를 잠깐 들춰봤다. 말 그대로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며 읽으면 될 책 같았는데, 오히려 나는 저자의 말 몇 마디로 늙는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됐다. 병 앞에서 죽어가는 시간에도 제대로 사는 일에 대해 말하는 듯한데, 그런 말보다, 죽음보다는 늙어간다는 것에 더 많은 부분을 떠올리다가 그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나왔다. 그날, 종일 늙음에 관한 책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너선 실버타운의 <늙는다는 건 우주의 일>까지 구매목록에 넣게 되었는데, 제목에서부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진리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소개 글에 써진 이 말 때문에 늙어간다는 것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노화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비통한 심정을 25편의 시를 통해 보여주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소개 글. 주제 자체가 어두워질 수 있음이 뻔했는데, 그 주제로 사람을 얼마나 부담 없고 편하게 해줄 수 있는지 기대하고 싶어져서다.

 

그게 불과 지난 주말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죽는다는 거나 늙는다는 것을 떠올리는 게 생각처럼 긍정적이게 되지 않았다. 어제오늘, 늙음에 대해 밀려오는 서글픔 때문에 도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에 우울해졌다.

 

 

엄마 나이 쉰이었을 때, 엄마가 노래 부르듯 하던 말이 있다. ‘내 나이가 마흔이었으면 좋겠다...’ 그땐 나도 어렸을 때여서 그냥 어른들이 하는 말로 가볍게 생각했다. 항상 지나간 시간에 마음 두기 마련이니까, 그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엄마가 쉰다섯이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내 나인 쉰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때는 느끼는 게 좀 달랐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에서 아쉬움을 찾고 있지만, 우리에게 더 해주지 것들에 미안함을 담은 말로 들렸다. 엄마로, 가장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부족한 많은 것에 계속 마음을 두었던 듯하다.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그때 기억에 엄마는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말을 했었는데... 아직 키워야 할 자식들이 많은데,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든데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않았을까.

 

나도 점점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고 있다. 나이라는 숫자가 그렇고, 외모와 육체의 나이 듦이 그렇다. 엄마의 자식으로 살면서 의지했던 마음을, 이제는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드러내곤 한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고. 여전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사는 내가, 여전히 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니까. 그냥, 엄마의 뒤를 조용히 밟으며 가는 느낌이 들어서 요즘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가장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동안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다. 우리 형제들이 나이보다 어려 보이던 동안 외모는 엄마를 닮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이 부를 때 “학생~” 이렇게 부른 적이 많았다. 병원에 가서 진료받는 것만 아니면(병원은 접수할 때 이미 실제 나이가 그대로 기록되니까) 아무도 내 나이를 그대로 보진 않았다. 친구랑 같이 다녀도 한참 동생처럼 보여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곤 했는데, 올해 시작하면서 나의 외모는 내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봐도, 다른 사람이 봐도 내 나이로 보인다. 언제까지 동안으로 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게 불과 며칠 사이에 눈에 확 보일 정도일까. 엄마 나이 일흔이 넘었는데, 사람들은 이제 환갑이 지났느냐고 묻곤 했다. 엄마의 실제 나이보다 평균 열 살은 어리게 보였다. 남들이 봐도 내가 봐도 엄마의 실제 나이만큼 보이는 외모는 아니었다. 이제껏 늘 그랬는데, 이제는 남들이 아니라 우리 형제가 봐도 엄마가 나이 들어 보인다. 어제는, 내가 “엄마,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물었더니, 안 그래도 언니랑 동생이 전화할 때마다 요즘 그 얘기를 한단다. “엄마, 지난번에 가서 보니까 많이 늙었더라...” 막내 남동생이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나 장가갈 때까지는 늙지 마. 결혼사진 찍을 때 엄마가 늙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가 늦은 나이에 남동생을 낳았고, 아무래도 자기가 자라는 동안 같이 나이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이 조금 더 일찍 보였나 보다. 친구들의 엄마보다 한참 나이를 더 드신 엄마를 보는 게 슬펐을까. 다행히도 남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는 젊어 보였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런데 그때보다 몇 년이나 흘렀다고, 이제 엄마가 늙어 보인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엄마의 얼굴이 그 나이의 노인으로 보인다. 하아...

 

 

오늘, 생각지도 못한 일에 나이 먹어가는 시간을 아파하고, 나이 든 사람을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2년 넘게 치과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별일 없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치과에 간다. 지난주 진료 때 입안에 다른 장치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고 해서 본을 뜨고 오늘 병원 가서 입안에 새로운 장치 하나를 붙였다. 최소 석 달은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말을 할 때나 뭔가를 입에 물고 있으면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고 웅얼웅얼하는 것처럼 들렸다. 자칫 방심하면 입 옆으로 침이 줄줄 흐르고... 이걸 못해도 석 달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한숨이 쉬어지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장치를 붙였다 떼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치위생사가 와서 괜찮은지 묻는다. 그에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오더라. “어른들 틀니 하는 게 이런 원리인가요?” 그렇단다. 똑같단다. 이제야 틀니 하는 사람들 불편할 게 이해가 된다고, 지금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말했다. 나는 틀니를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고 괜히 속상한 마음인데. 이런 거였구나.

 

치과에서 다음 진료를 예약하고 나와서 바로 안과로 갔다. 며칠 전부터 눈이 무겁고 답답하고, 책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진료도 받아야겠고, 안경도 새로 해야겠기에 겸사겸사 진료받으러 간 건데, 눈에 무슨 질병이 있는 건 아닌데, 시력이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고, 현대인의 생활 습관이 그러하고... 우리 몸은 늙어가고 있으니 눈도 마찬가지라고. 우리 몸이 천 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했는데, 평균 수명의 절반쯤 살아온 나는 이미 구백 냥을 모두 써버린 것 같았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다시 채워지지 않는, 말 그대로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게, 우리 한 생애의 시간인 건가... 안과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설마 내가? 내 눈이? 말도 안 돼. 좋은 눈은 아니었어도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단 한 번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시력검사표를 들고 안경점으로 가서 다시 검사에 30여 분을 소요했다. 이런 시력에, 이런 상태에, 이런 렌즈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에게 노안이 온 건가요?”

“중년안이 시작되는 거죠. 요즘엔 70대까지는 중년안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중년안이라고 할게요.”

“아아... 선생님...”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계속 울었다. 그 큰 안경점에, 직원이 열 명도 넘게 있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건 말건 내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꺽꺽대다 고개를 들고 보니 나를 담당했던 안경사 아저씨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요즘엔 삼십 대 초반에 중년안이 오기도 하고, 이런 렌즈는 초등학생이 끼기도 합니다.”

“아,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제 안경 보이시나요? 제 안경 렌즈가 바로 그런 렌즈입니다. 하나도 표가 안 나죠?”

그 안경사 아저씨의 실제 나이는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면오십 대로 보였다. 나를 위로하려고 그런 건지 몰라도, 그냥 다 이해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진정되고 나니, 다시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안경 주문서를 넣었다. 기존에 사던 안경 가격의 두 배에 가까운 돈을 내면서 손이 후덜덜 떨렸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는 생각에 더 슬퍼졌다. 나빠지는 몸을 유지라도 하려면 이래야 하는구나 싶어서...

안경은 일주일 후에 찾으러 오라면서, 안경사 아저씨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네면서 그제야 말을 꺼낸다. “고객님이 갑자기 우셔서 아까는 제가 너무 당황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신가 봐요.” 감수성이고 뭐고, 하나도 귀에 안 들린다. 그냥 내 눈이 너무 늙어버렸다는 진실만 깊게 새겨졌다. 언젠가, 노안은 예방할 순 없지만, 진행을 늦출 수는 있다고 들었다.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몸에 찾아오는 대부분 병에서 들어온 말과 같다. 우리 몸은 그렇게 늙어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거였다. 예방도 불가능하고, 진행도 막을 수 없고, 다만, 그 진행을 늦추는 게 최선인 처방으로...

 

 

 

 

 

 

 

 

 

 

 

도리언 그레이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나이 먹지 않는다면, 늙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건 몰라도 눈이 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는데, 결국 내 몸에서 그 눈이 가장 먼저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도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은 점점 책을 거부하는 눈이 되어 간다. 눈물이 안경점에서 멈춘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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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이래도 되는 건가? 제목 때문에 막 웃고 싶은데, 내용도 궁금하다. 요즘 본의 아니게 치킨 못 먹고 있는데, 이 책 보니까 치킨이 미치도록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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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 뭔데? - 한 장애인이 청소년에게 묻는다 장애공감 1318
쿠라모토 토모아키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영화를 보려고 극장이 있는 빌딩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는 4층. 마침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1층에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니 빨리 올라가겠구나 싶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뿐인데, 내가 너무 놀라서 당황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분명 그도 놀랐을 텐데, 놀란 것보다는 미안해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왜?’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했던 거다. 너무 놀란 나의 제스처가 그를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3층을 눌러달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건데 3층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로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던 거다. 그가 앉은 상태로 보면, 팔이 그의 가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아, 그래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 안에서 혼자 얼마나 애가 타고 있었을까. 보통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수 누르는 버튼이 문 쪽으로 세로로 만들어져 있고, 벽 쪽으로 안전 바와 나란히 가로로도 있어야 했는데, 왜 그런지 그 건물 엘리베이터는 층수 누르는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다. 그냥 습관적으로 타고, 누르고, 내리곤 했던 터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건물 엘리베이터에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없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는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 엘리베이터가 2대 있었는데 한쪽에는 가로 버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탄 쪽 엘리베이터에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였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3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몇 초 동안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무안함을 감추며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어서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놀랐다고,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그가 전동 휠체어를 작동해서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전에 어느 방송인이 자국의 장애인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서비스, 정부 정책 같은 걸 시행할 때 당사자인 장애인이 그 기획 단계에서부터 같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무엇이 불편하고 필요한 것인지 피부로 직접 닿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참여가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은 그 몇 초의 경험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도 그 빌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엘리베이터였다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애에 관한 책 몇 권을 일부러 찾아봤다. 쿠라모토 토모아키의 『보통이 뭔데?』는 나에게 그날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한울림스페셜의 '장애공감 1318'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자라오면서, 일상을 지내면서 겪은 시선을 이야기한다. 내가 알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정작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날 내가 봤던 일과 그로 인한 생각을 이 책이 그대로 말하고 있던 거다. '네가 그냥 생각하는 것과 직접 부딪혀서 알게 된 것은 이렇게 달라.'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정한 기준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그 보통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보통의 전제가 처음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일부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비장애인에게 치우친 보통의 개념이 장애인에게는 보통이 아닌 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반대로 장애인의 기준으로 '보통'이 이루어지면 비장애인은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보통의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보통이란 기준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보통'을 실현하면서 '공생'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하고.

 

저자의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던 게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인 쿠라모토 토모아키는 시각장애인이다. 약시에서 전맹으로 진행된 경우다. 어렸을 적 그가 약시였을 때, 친구들과 야구를 했던 기억은 즐거웠지만 '참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놀이였다. 약시인 그를 배려하며 진행된 야구,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친구들은 야구의 규정을 약간 변형했다. 그에게 공이 날아들 확률이 적은 자리로 수비를 배치해주었고, 그의 자리로 공이 날아오면 옆의 수비수가 대신 공을 받아주곤 했다. 타자로 그가 마운드에 섰을 때는 투수가 가까운 거리로 와서 공을 던져주었다. 친구들은 같이 하기 위해 그에게 이런 배려를 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참여의 의미가 상실된 야구였을 뿐이다. 어른이 된 그가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은 맹인용 지팡이를 짚은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지하철 안에서 잘 안 보이는 통로를 걸어 서 있을 자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을 취했던 거다. 그가 말하길,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아니니 굳이 자리 양보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다치게 된다. 이때 생각할 건, 사람들의 구조정신이 아니라 지하철을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스크린도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필요한 안전장치가 아니겠는가.) 건물의 문턱을 없애 휠체어가 잘 다닐 수 있게,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저상버스를 운행하는 등 배리어 프리가 많이 적용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 공생에 가까이 왔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숨기거나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것이 비교적 쉬운 때문인지, 경도인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중도장애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장애가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조금이라도 비장애인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82페이지)

 

시각장애인만 놓고 보면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또 청각장애인이라면 조금은 들리는 사람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장애가 심하면 더 힘들고 심하지 않을수록 덜 힘들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해서 어려움도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도장애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어렵거니와 어중간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리를 해야 해서 오히려 중도장애인보다 더 힘든 점이 있습니다. (99~100페이지)

 

특히 저자의 이야기에서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경도장애와 중도장애의 차이에 관해서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경도', '중도' 장애라고 부른다. 장애의 정도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차이로 장애의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데다,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오해가 경도장애가 중도장애보다 불편함이 '덜' 할 거라는 거다. 저자의 경우 약시보다 전맹이 더 심한 장애라는 오해에 대해 말한다. 내 생각도 그랬다. 희미하지만 약간 보이는 것과 아주 안 보이는 것 중에서 약시가 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체의 장애를 겪지 않은 나의 착각이었다. '덜' 불편한 것과 '더' 불편한 것의 차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약시일 때의 불편함, 전맹일 때의 불편함이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장애에 대해 알고 있던 약간의 이론마저 온전히 알지 못했던 거다. 내 머릿속에 있던 장애에 대한 지식을 다 지우고 다시 새겨 넣어야 하는 거였다.

 

‘이럴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이렇다’라고 이론으로만 들어왔던 것은 ‘이렇구나!’라고 실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의 몇 초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경험을 허락했는지 알겠다. 실제의 경험과 생각, 시선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됐던 거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경험일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경험은 아닐 터.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무심한 시선을 가진 나에게 일부러 찾아와준, 두 번 만나기는 어려운 아주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에 대해, 세상을 향해 관심 좀 두라고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통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시선을 알게 하고, 공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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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가 선거인데, 그래서인지 이번 9권의 내용이 남다르게 들린다.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차에서 틀어놓은 선거 유세 녹음 방송과 선거 운동원들의 길거리 홍보를 보고 있노라면, 후보자들은 무엇을 위해 선거에 나왔나 싶었다. 개인의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올바르게 가기 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솔직히 정치인들에 대해 호감은 없지만, 때가 되었고 필요한 자리이니 사람을 뽑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봐도 선거 운동은 적응하기 힘들다.

 

학생회 간부 선거를 다룬 9권이다. 아이들은 어떤 학교로 만들고 싶어서 이 선거에 나온 걸까. 아주 단순한 마음이기도 하고, 그동안 쌓여왔던 생각들을 뿜어내는 기회로 만들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후보로 나온 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품고 나왔다. 자기 꿈을 위해 도전하고, 내신을 위한 목적으로 후보로 나오고, 학생회 자체에 즐거움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른들의 선거판과 다를 게 없는데도 분명 다르다. 아이들은 어떤 계산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고자 한다. 자기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것을 목적에 두고 나선 것이다.

 

 

학생회 후보 연설 대회를 통해 아이들의 진심을 볼 수 있었는데, 저마다의 공약을 걸고 간부가 되기 위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 현재의 선거 방식이 가진 문제를 언급하며 어떤 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방안을 내비친다. 무효표가 나오는 이유, 무효표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그로 인해 공개 투표에 가깝게 진행되었던 과거 어느 학교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래서 지금 선거 방식이 어떤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지 보게 하면서 그때의 일을 대응책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의 대안이 100% 옳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아무도 현재의 투표 방식에 문제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아이의 연설은 선거를 목적에 두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문제점은 없는지, 개선해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완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른들의 선거판 역시 이런 게 가장 필요한 거 아닐까.

 

현재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 아이의 연설 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마음은 예상외로 흘러간다. 별것 아닌 일을 문제로 만들어 시끄럽게 했다고, 가장 먼저 탈락할 거로 생각했던 후보가 학생회를 이끌게 된다. 다른 간부들 역시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하다고 맞는 후보들이 선정되었을 테지.

 

학생회 간부 선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다양한 사고가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부족하고 어긋난 방식이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게 목적이라고. 선거는 분명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방식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밖 세상을 먼저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대로 드러내는 '학생회 간부 선거 편'이다. 열심히 제 자리에 맞게 일하는 후보도 중요하고 투표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투표가 왜 진행되고 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소란스럽지만 현명하게 치러낸 선거. 선거가 끝나고 아이들에게 다가온 건 히자쿠라야마 중학교 문화제다. 각자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분야의 축제를 준비한다. 특히 이 아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이 주를 이루는 10권인데, 아이들이 직접 쓴 원고로 오르는 극을 준비하는 과정이 볼만하다. ‘이거 정말 아이들이 한 거 맞아?’ 하는 놀라움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누군가가 쓴 원고가 인정받고, 아이들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오를 연극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역시나 불거진 일들이 있는데, 그건 하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내야 할 관문으로 보인다.

 

특히 스즈키 선생님 지도로 아이들은 연기를 배우는데, 그게 너무 진지해서 숨죽이고 읽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하는 문화제, 그냥저냥 빨리 해치우고 지나가야 할 숙제처럼 여겼는데, 막상 이를 대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도 자세가 너무 진지하다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십 년에 한 번이라도 잘,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임을 간과했던 거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학급 임원도 하기 싫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이게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이 만화에서 유독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문화제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너무 맘에 들었다.

 

 

연극 한 편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한지, 그 한 무대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이 어떻게 ‘함께’임을 배우는지 보여준다. 캐스팅 과정 역시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려고 애쓰는 스즈키 선생님의 방식이 맘에 들었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 거다. 역할부터 맡기지 않고, 극의 모든 과정과 분위기를 소화하는 걸 지켜본 다음, 그 배역에 어울리는 아이를 캐스팅하는 순서가 긍정으로 다가온다. 배역뿐만 아니라 연극을 올리는데 필요한 스태프 역시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누군 하나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인 거다.

 

학교 축제가 단순히 아이들의 하루 놀이 정도로 멈추는 게 아니었다. 그 준비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겪을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또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 들어주어도 괜찮다.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누구나 겪을지도 모를 일들을 언급한다.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황하는 청춘,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과정, 마음이 아픈 병이 왜, 누구에게 다가올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까지. 다양한 소재로 중학교 2학년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모습을 비친다.

 

공부하기에도 바쁘기 만한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태도에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보는 학교의 분위기가 이 만화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다. 배우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게 학교라면, 그 배움을 끌어주는 게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이 머릿속에 담는 지식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문화제 편에서 줄곧 생각했던 게 그런 거다. 성적을 위한 학습,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지혜와 여유를 배우는 방법을 끌어주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10권의 문화제가 이어진다. 아직 연극은 상연되기 전이고, 배역도 정해지지 않았다. 스즈키 선생님은 모든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아이들 역시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몰라 모든 연습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제들이 있다. 아니, 이건 문제라기보다는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의 성장을 이뤄내는 교육이라고 봐도 좋겠다. 분명 연기는 잘하는데, 무대 위에 서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대역이라는 역할을 주려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작년에도 거절한 것처럼 이번에도 거절한다.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스즈키 선생님은 그 아이가 조금 더 용기 낼 수 있도록 부담 주지 않으면서 기회를 잡아보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연극 연습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아이들은 연극에 푹 빠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그 시간의 매력에 빠진 거다. 실제 무대 위도 아니고 관객도 없는데, 그 연습 시간에 몰입하게 된다. 그 안에 있던, 대역을 맡기고 싶었던 아이. 어느 순간 역할에 빠져들면서 연극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은 완벽하게 용기가 장착된 건 아닐지라도, 그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이미 용기는 시작된 거다.

 

굳이 이 문화제에서 아이들의 연극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에 담아냈을까 궁금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건 아마도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다양한 가치관의 형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극의 흐름은 하나의 인생을 보는 듯했고, 각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역할을 살아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여주면서도, 그 삶을 이뤄 가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건 연극 준비 과정에서부터 누누이 강조되어 보였던 점이다. 역할 분담에서부터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내용을 서로 주고받으며, 얼마나 몰입하고 이해하면서 캐릭터를 살려내고 있는지 보면, 알 만하다. 극장판 「스즈키 선생님」의 무대가 된 게 문화제 편이라는데, 그럴 만하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이 만화의 주제에 가장 걸맞은 에피소드였다. 함께 이뤄가는 과정을 배우는 일,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가는 시간,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서 더 확인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기회. 거기에 선생님이란 역할로 함께 하는 스즈키까지 동반 성장하는 시간을 만든다.

 

 

궁금하지만 낯설게 다가왔던 이 시리즈가 11권으로 다 끝났다. 다 읽었지만, 여전히 이해 못 할 설정도 있고, 다양한 면을 보게 하는 장점도 있다. 문화의 차이라고 봐도 좋고, 세대 차이라고 봐도 괜찮다. 무엇보다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데, 어떻게 일어날 일이라고 예상한 일만 생길까. 언제 어디서든 기존의 생각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라는 건 정해진 대로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이 만화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 이 아이들의 행동이나 다른 설정들이 때로 과격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게 하면서, 나와 다른 면면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가르침은 계속된다고 말하며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충분히 전달된다. 그 배움, 그 가르침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제법 긴 호흡으로, 나와 다른 마음을 알아가는 마음으로, 배우는 시선으로 읽게 된 책이다. 언제 또 시리즈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제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겠다. 이 아이들과 스즈키 선생님의 성장이 여전히 궁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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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어 줘
이노 지음 / 마루&마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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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봐... 『거기 있어 줘』

 

 

불가능하기에 기적이라 부르는 일. 그중 하나가 시간의 회귀 아닐까.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가끔 우리에게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것들. 늘 '만약에' 라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시간을 움직이고 싶은 순간이다.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가는 시간을...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시작하는 많은 것으로 현재의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해 본다. 그러기 위해, 그러고 싶어서 가정하는 거니까. 지금이 아파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란 가정을 품고 살기도 한다. 이경은 좀 반대였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가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우연(?)한 사고가 그녀를 십이 년 전으로 되돌려 놨다.

 

죄책감과 분노와 사랑을 동시에 품고 살면서, 마음을 어느 하나로 붙잡을 수 없는 상태로 하루를 버티는 이경과 승현. 스물아홉의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겪는 현재가, 사랑이 불행하다. 보이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면서도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고통스러운 사이. 열아홉의 겨울, 이경의 오빠 태주가 죽었다. 그 슬픔으로 엄마가 죽었고, 그 사고로 승현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렇게 십 년을 버텨온 두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마음과 현실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스물아홉의 이경에게 사고가 났고, 승현은 울부짖는다. 그리고 눈을 뜬 이경은 열일곱의 봄을 다시 시작한다.

 

이미 한 차례 바뀐 과거부터 시작해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돌아온 현재의 상황이 달라지는 만큼 그녀는 안도했다. 이미 바뀌어 버린 과거는 기억하고 있는 것과 다른 미래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59페이지)

 

호기심이 충분히 일어날 이야기의 시작이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펜던트. 소중한 사람이 주고 간 작은 물건 하나에,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지만, 아이처럼 동화처럼 바라는 순간 기적은 일어난다. 없었던 일로 해줘...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던 간절함을 이루어진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던 외침을 들은 누군가 그 소원을 이뤄준다. 자, 이제 시점은 되돌렸으니 모든 것은 이경이 하기에 달렸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그 장면을 바라는 그녀가 만들어낼, 다시 시작된 시간을 어떻게 그려질까.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처음 보는 소재도 아니 건만, 그 뻔한 설정에 기대를 품게 되는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한 번쯤은 간절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일이라는 것. 처음 불행의 시작을 놓친 시점으로 돌아가 이경이 되돌려놓을 것들을 궁금하게 한다. 이경이 어떻게 그 불행을 막을 것인지, 이경의 바람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되진 않을 텐데 이미 한번 만났던 인연들이 서로를 다시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한 것들이 넘쳐났다. 특히 태주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지, 이경과 승현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서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간다.

 

한번 살았던 스물아홉 해의 시간과 다시 살아가는 스물아홉 해의 시간이 비슷한 듯 다르게 흘러간다. 아무도 모르는 일은 이경 혼자만 알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한다. 그에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이경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동안 불행했던 모두가 제자리를 찾을 거라는 믿음으로 다시 오늘을 산다. 하나씩 변한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다. 삶의 자세가 변하고, 불행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좀 더 현명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안심을 찾아간다.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 또 한 번 그녀를 찾아온다. 이미 한 번 끝난 인연이 당연한 것처럼 시작된다. 정작 이경 자신이 챙기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보게 되는 시작이다. 늘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처럼 존재했던 사람, 상대의 마음을 듣지 않은 채로 최선이라 여기며 선택했던 일들이 다시 보인다. ‘정말,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까?’ 싶은 물음에 대한 답을 이제야 얻는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늘 그러지 못해서 우리는 만약을 떠올리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때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가정을 품으며,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며 잠깐 위로받는다. 그럴 수 없으니까 지금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거나, 추억 같은 시간을 한번 곱씹어 보고 다시 으쌰으쌰 시작하는 다짐의 주문이 필요할 때 만나면 좋을 이야기다.

 

예상하지 못했던 태주와 승현의 브로맨스가 즐거웠고, 걱정스럽고 두렵지만 결국 진심이 이긴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진리였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그대로 증명해 보이는 소설이다. 물론, 당연히 설레게 할 로맨스는 기본이다. ^^ 생각해보니 이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밝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이야기들이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가 좋았던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다 읽지는 않았을 텐데... 다음에 만날 이야기는 또 어떤 설렘을 줄지, 어떤 감정을 끌어내어 공감을 만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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