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MBN에 등장한 새로운 프로그램. 내 손님 - 내 손안의 부모님. 새로 시작한다고 광고했을 때는 별 관심 없었다. 내 취향의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그 시간에는 엄마 때문에 TV를 잘 보지 못한다. 엄마는 보통 9시 정도에 잠자리에 드는데, 많이 예민한 편이라 불이 켜져 있거나, TV 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자다가 깨곤 한다. 그래서 밤에 TV를 켜놓기가 불편해서 잘 안 보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tvN의 <문제적 남자> 같은 건데, 나중에 찾아보기는 해도 본방송을 본 적이 많지 않다. 그러니 밤 11시에 새로 시작한다는 프로그램에 관심 둘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 손안의 부모님이라니... 부모님과 함께 만드는 예능프로그램인가 싶었다.

 

그런데, 어제는 엄마가 이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궁금하다고 그 시간에 안 주무시는 거다. 요즘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면서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밤 11시에? 어쩌다 보니 그 시간에 둘 다 깨어있었고, 엄마와 나는 그 프로그램을 같이 보기 시작했다. 박상면, 서경석, 김형범. 세 아들이 엄마(부모님)와 1박 2일을 함께 보내는 거다. 서경석이 엄마 집을 향하면서 하는 말은, 엄마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이 10년이나 되었다고 하더라. 결혼하고 나서 혼자 엄마를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고. 혹자는 이 말을 듣고 ‘왜?’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정말 이상하다. 딸은 결혼하고 나서도 혼자 친정을 찾아오는 일이 있던데, 아들은 결혼 후에 혼자 본가에 갈 일이 없나 보다. 그럴 것도 같다. 평일에는 출퇴근 때문에, 주말이나 휴일에는 자기가 꾸린 가족과 시간을 보내느라 엄마를 찾아올 시간적 여유가 없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일은, 명절이나 가족의 경조사 때뿐이다. 서경석의 그 말을 듣고, 나는 작년에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남동생(엄마의 아들)이 결혼한 지 5년이 좀 넘었다. 그 전에는 몇 년 정도 나가서 살았고. 결혼 전에 남동생은 엄마에게 종종 전화도 하고, 가끔 평일에 엄마를 만나러 다녀가기도 했다. 남동생 하는 일이 공휴일이나 연휴를 지켜가면서 쉬는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히려 평일에 휴가 내서 다녀가는 게 엄마에게는 더 좋았나 보다. 그런 아들이 결혼했고,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 올케의 친정은 여기서 차를 타고 30분 거리에 있다. 그래서 남동생이 내려올 일이 생기면 늘 자기 가족들과 함께 왔고, 친가와 처가를 왔다 갔다 해야 하므로 시간을 오롯이 엄마에게 할애하지 못한다. 그마저도 엄마는 아들이 다녀가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마냥 아쉽겠지... 남동생이 그렇게 다녀갔던 어느 날, 집에 많은 일이 있었고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이 있었는데, 엄마는 남동생과 통화를 하다가 이런 말을 하더라. ‘시간이 되면 혼자서라도 잠깐, 피곤하고 힘들겠지만, 당일치기라도 왔다 갔으면 좋겠다’라고...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물었다. 일하느라 피곤한데, 당일로 왔다 가기에도 힘들 텐데 뭐하러 그런 말을 했느냐고. 그랬더니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보고 싶다’라고. 아들이 보고 싶어? (딸은 안 보고 싶고? ㅎㅎ)

 

엄마의 마음은 그런 건가 싶었다. 시간이 안 되고, 자기 가정 꾸리니 더 바쁘고 챙겨야 할 것도 많고, 크게 별일 없이 사는 게 다행이고 좋은 거라고 여기면서도, 엄마를 보러 와주기를, 전화 한 통 더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마치 연인 사이에서 바라는 일들 같았다. 그런데도 다른 건, 부모와 자식 사이의 어떤 감정인 듯하다. 내리사랑. 엄마는 아들에게, 아들은 또 자기 자식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져 가는 애정. 서경석뿐만 아니었다. 김형범의 어머니는 뭐하러 왔냐고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박상면의 어머니는 힘든 몸을 하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온다는 아들을 기다렸다. 특히 내 눈에 가장 많이 보였던 건 서경석의 어머니였다. 아들은 오후 두시에 온다고 했는데,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씻고 준비하고 하면서 아들을 기다렸다. 아, 정말이지 기다리는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서 모른척할 수가 없더라. 그 사이에 아들이 방송하는 라디오를 습관처럼 틀어놓고 말이다. 부모의 마음은 그런 것인가...

 

처음 사전 인터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어머니 모두, 아들들에게 말하지 못한 것들을 언급했다. 다리가 아픈데 괜찮다고, 뭐든 괜찮다고... 걱정할까 봐 하지 못한 말들을 꺼내며, 걱정할까 봐 그랬다고 하더라.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들들은 또 눈물을 찍었다. 저럴까 봐 내가 안 간다니까, 라고 박상면은 말했다. 물론 엄마를 보러 자주 못 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엄마가 하는 말을 듣기 싫어서 가기 싫은 마음도 무시 못 했던 거다.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편안한 죽음을 원한다는 엄마의 말은 아들을 자꾸 속상하게 한다. 지들만 잘 살면 되지, 나는 괜찮아, 라고 하는 말들. 이 프로그램이 재밌게 보이기 위해 어떤 설정을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몰랐던 엄마의 마음을 읽는 계기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서 아니 에르노의 책 두 권이 계속 생각나는 거다.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는 아니 에르노가 부모를 생각하며 쓴 책이다. 경험한 것만 기록한다는 그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들의 자취를 기록한 글이다.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까울 수 있는 대상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관조하는 듯한 분위기다. 그런데 역시, 그녀답다. 상당히 담담하게 표현한 그녀의 문장이 오히려 더 감정적으로 읽혔다. 픽션을 거부한다는 그녀의 글을 몇 번 읽어봤기에 뭐 다를 게 있겠나 싶었는데, 밋밋하게까지 느껴질 법한 그녀의 문장에 감정적으로 더 격해지곤 했다. 국경을 넘어선 부모의 모습이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 건가 싶어 말을 잃었다가, 역시 좀 더 애정이 쏠리는 상대에게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구나 싶은 이해가 따라왔다. 읽는 동안, 100페이지 조금 넘는 이 책들이 페이지 수에 반비례하여 가슴을 채우곤 했다.

 

<한 여자>는 알츠하이머로 죽은 어머니를 기억하며 적어 내려간 글이다.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그녀의 글이 재구성한다. 태어나고 자라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 그녀가 듣고 본 장면을 기록한다. 함께 있는 동안 미처 다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죽고 난 뒤에 기억되니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어머니와의 온전한 이별을 위해 기록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 시간은 그녀에게 한 여자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불러온다. 그때야 비로소 한 여자에 대한 사랑과 이해, 이별이 완성된다.

 

나는 그녀의 사랑에 대해 확신했다. 또한 그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자와 우유를 팔아 댄 덕분에 내가 대형 강의실에 앉아 플라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는 그 부당함에 대해서도. (한 여자, 66페이지)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한 여자, 110페이지)

 

<남자의 자리>는 아니 에르노가 <한 여자>와 같은 방식으로 쓴 글인데,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기록한 아버지의 시간이다. 대상이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소를 치는 목동에서 공장 노동자로, 어머니와 함께 꾸렸던 상점의 주인으로, 신분 상승을 바라며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남자가 그녀의 아버지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있던 사람. 그 자리를 딸이 채우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딸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자식에게 잊히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으로 한없는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 그녀의 아버지였다.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채워진 기록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냈다는 것도 <한 여자>와 다를 바 없다. 내가 본 주변의 아버지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보살피며,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해나가려 애쓰는 사람. 때론 실수도 하겠지만, 자신을 지탱해주는 가족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얻기도 하는 사람. 내 주변에서 보편적(?)으로 보아오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래야 한다고 인식된 아버지의 모습. 내가 꿈꾸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니까 당연하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하고 싶어.'라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싶었다. 결혼이라는 건,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된다는 건, 혼자일 때와 다른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 것, 아닌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예절 바르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는 오랫동안 신비로 남아 있었다. 또 나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 때에도 극히 부드러운 어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어조의 인사말을 듣게 되면 부끄러웠다. 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게 어떤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결국 알아차리게 되었다. 몹시 관심 있는 듯한 태도로 질문을 하거나, 이렇게 따뜻하게 미소 짓는 것은 입을 다물고 식사를 하거나 살그머니 코를 푸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남자의 자리, 78~79페이지)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남자의 자리, 127페이지)

 

아니 에르노의 두 권의 책은, 우리가 다 알지 못했던 우리 부모의 모습은 어떤 걸까 생각하게 한다. 당연히 모르겠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다 알고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부모와 자식 관계라도 말이다. 그저 조금 더 알기를, 조금 더 공감하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의 시간을 지켜보는 거다. 거기에 마음마저 더해지면 끈끈하고 애정이 넘치겠지. 걱정도, 안심도 더 늘어나는, 서로의 일상과 생각에 조금 더 침투해도 괜찮은 사이가 되는 거겠지. 엄마는 서경석의 어머니가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라디오를 틀어놓을 때도 ‘에휴...’ 박상면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며 남편에게 연락이 없느냐고 물을 때도 ‘에휴...’ 김형범의 어머니가 아들이 사온 조끼를 입으면서 투덜대면서도 웃는 모습에 ‘에휴...’ 마음과 다르게 나가는 말들에 많이 공감하셨던 듯하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더라. “엄마들은 다 그래...” 그래, 다 그러겠지. 더 못 해줘서 마음 아프고, 더 건강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바쁜 줄 알지만 전화 한 통 더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고, 더 자주 대화했으면 좋겠고, 나의 일상을 공유했으면 행복할 것 같은. 떨어져 있는 자식들이 더 생각나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별일은 없는지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돈이 많아서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도 분명 필요하지만, 여기서 엄마가 원하는 것들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라 손가락 한 번 움직이면 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입으로 한 마디 꺼내면 되는 말들이었다. 그거 한 번 하기가 어려워서 마음이 서운해지고 서글퍼지는 일을 만드는 거다. 미안한 말이지만, 알면서도 잘 안 된다고 핑계를 대고, 쑥스러워서 못 하겠다고 하는 일을 이제는 연습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남동생과 자주 통화하는 편이 아니다. 무슨 일이 없으면 일 년에 한 번도 통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동생은 내가 전화하면 무슨 일이냐고 먼저 묻는다. 집에 무슨 일이 없으면 전화하지 않기에. 그런 남동생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야, 바쁜 줄 아는데 짬 나면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엄마가 요즘 외로워한다. 고기를 먹어도 안 기쁜가 봐. 아들 보고 싶대...” 문자 확인했을 거면서 대꾸도 없다. 안다. 원래 이런 녀석이라는 걸. 이것도 안다. 곧 엄마에게 전화할 거라는 걸...

(사실은 연말에 엄마와 며느리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고, 엄마는 그 일로 무척 서운해했다. 서로 오해라는 걸 알았고 그날 바로 풀었지만, 엄마는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지 않는가 보다. 지금 그걸 다독여 줄 수 있는 건 엄마의 아들밖에 없다는 걸 안다. 좋아하는 고기를 먹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엄마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아들의 목소리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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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01-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감동적인 글입니다. 저도 부모한테 좀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눈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

구단씨 2017-01-17 11:52   좋아요 0 | URL
알겠는데, 잘 알겠는데... 또 잘 안 되네요. ㅡ.ㅡ;;;
반성 모드입니다.
 

 

 

책을 선택하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유독 세계문학을 고를 때는 더 고민하게 된다.

출판사도 중요하고 번역도 중요한데, 그 와중에 꼭 끼어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책표지 디자인.

읽게 될 책의 내용도 봐야하지만 책 디자인에 결정권이 넘어갈 때가 있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게 고민하여 선택받은 세계문학이 펭귄클래식 판본이다.

소장하고 있는 세계문학 중에서 펭귄클래식 판본을 가장 적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가장 아끼고 싶은 디자인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펭귄클래식의 기본은 블랙판본.

가끔씩 특별판으로 나오는 표지 때문에 독자들의 가슴에 지름신을 부른다.

같은 내용의 책이라면 이왕이면 예쁘고 내 맘에 드는 디자인으로 고르고 싶은 게 진심이디.

나도 그런 이유로 구매한 펭귄클래식이 있다.

주황색의 오리지널 표지. 처음엔 이 책 표지가 어색했는데 그것도 잠깐.

블랙판본 사이에 하나씩 끼어있으면 괜히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물론 나는 그 정도로 꽂아둘 블랙판본의 책이 없어서 아쉽지만, 이 색 자꾸자꾸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더 이 색상으로 출간될지 모르겠지만,

블랙판본 사이에서 홍일점처럼 자리 차지하는 모습에 계속 구입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싶은 추측... ^^

 

 

오만과 편견

가장 최근에 구매한 판본 중의 하나. 양장본 특별판.

특히 넘버링이 있어서 구매 욕구를 상승시키기도 했다.

한정판이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기존 양장본 특별판과 같은 디자인이어서 더 솔깃했다.

사이즈는 앞서 출간된 양장본보다 1cm 정도 작다. 손에 들어오는 안착감은 더 좋다.

책 두께 때문에 계속 손에 들고 읽을 수는 없겠지만

겉표지 느낌이 좋아서 손목에 무리 오기 전까지는 들고 읽을 수 있겠다. ^^

 

 

 

 

지킬박사와 하이드, 가든 파티, 크로이체르 소나타.

3종 세트로 묶어 나왔다. 물론 개별판매도 했다. 지금은 다 절판인 듯하다.

표지가 <오만과 편견>과 같은 디자인에 같은 질감이지만 사이즈는 살짝 크다.

책도 가볍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책의 종이가 사알짝~ 바랜다는 점.

보관을 잘못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종이가 조금 누렇게 변했다.

책을 읽는데 지장은 없지만 초콤 서운하다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흰색 종이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뭐,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의 옆면은 잘 안 보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띠지. 띠지가 블랙판 책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표지는 자꾸 눈에 들어온다. 무섭게 생긴 반쪽 가면 같은... ^^

 

 

 

월든.

 

오리지널 표지에 초록색으로 태어난 특별판. 색이 책과 잘 어울린다.

안전하고 강한 질감의 크라프트지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처음에는 자꾸만 어떤 포대, 자루를 연상했다. ^^

표지 색상에서 나무 색깔 부분이 있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 듯해서 더욱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

 

 

펭귄클래식은 기프트 상품도 같이 나온다.

텀블러, 머그컵, 캐리어, 등등. 뭔가 많이 나오고 있던데,

내가 가진 것은 오리지널 디자인의 머그컵뿐이라 다른 기프트 상품을 못 봐서 아쉽다.

특히 앙증맞은 캐리어, 꼭 한 번 보고 싶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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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엄마는 집안의 많은 것을 정리하는 중이다. 오래된 집의 정리라고 해봤자 버리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살펴보고 분류해서 버려야 하니 틈나는 대로 하는데도 아직 정리할 게 많이 남았다. 그중에서도 엄마의 장독대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라 오롯이 엄마가 다 손대고 있다. 30여 개에 달하는 장독을 지금은 거의 다섯 개만 사용하는지라 나머지 빈 장독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했더니, 이때다 싶어 사람들은 서로 달라고 했고, 엄마는 깨끗하게 씻어 놓을 테니 가져가라고 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장독을 하나씩 비우고 정리하고 씻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정리하려니 힘이 드시나 보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손댄 김에 하겠다며 굳이 다 정리해놓겠다고 하는 걸 보니, 그걸 보는 내 마음이 불편했다. 말려도 계속할 것 같아서 쉬어가면서 하시라고 했더니 엄마가 하는 말, "죽으면 푹 쉴 텐데, 뭘..." 아, 어느 정도 인생 살아온 엄마가 생각하는 쉼은 죽음 이후의 시간일 수도 있구나.

 

 

휴식이나 쉼을 떠올리면, 여행이나 늘어짐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요즘처럼 여름에 주어지는 며칠간의 휴가는 어딘가로 떠나기 좋은 시간이고, 평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면 한없이 게으름 피우며 뒹굴고 싶었다. 쉰다는 건 그런 거로 여겼다. 짧게 든 길게 든 보너스 같은 시간에 부리는 마음의 여유. 그 여유에서 가장 먼저 선택되어야 할 조건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여행이든, 책 쌓아놓고 방바닥 뒹굴며 읽는 것이든, 며칠 동안 밀린 잠을 자든, 그 무엇을 하더라도 내가 좋아해 선택한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바로 쉰다는 거로 여겼다. 그런데 엄마의 한마디에 내가 생각하는 '쉼'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됐다. 죽음이라는 건, 또 다른 의미의 쉼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인생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을 생각하면 시작점부터 열심히 달리다가 끝점에서야 겨우 쉬는 거라고, 그 끝점이라는 건 우리 눈 감은 후에 이뤄지는 안식 같은 게 아닐까 하고.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제대로 된 휴식을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여행용 가방에 필요한 것을 싸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여행이 시작되듯,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는, 긴 휴식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사실, 그 준비를 모르는 건 아니었던 듯하다. 뻔한 답이지만, 죽음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떠오르고 후회 없이 살아가는 시간과 과정을 이루는 것이 제대로 된 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이의 죽음이나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지켜보면서 그 의미를 더 깊게 고민하게 된다. 헨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은 신경외과 의사인 저자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의사로의 삶뿐만 아니라 여러 환자의 모습을 다양하게 비춘다. 환자와 함께하며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다. 때로는 환자를 살리고 때로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도 하지만, 그 바탕에서 피어오르는 건 보다 나은 다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의사이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도 하지만, 그때마다 진심을 드러낸다. 목숨을 살릴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전달해야 하는 마음의 불편함도 그대로 쏟아낸다. 그런 그가 찾아낸 괜찮은 죽음의 조건이 고요히 스며드는 것처럼 다가온다.

 

 

가끔, 누군가 “우린 아직 이 사람을 보낼 준비가 안 됐어요…….”(88페이지)라고 말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괜찮은 죽음이란, 죽은 이를 떠나보내며 아쉬워하는, 그 죽음을 붙잡고 싶은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올 때라고, 그런 목소리를 들으면서 떠난다면(떠났다면) 참 멋지게 살고 가는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아쉬운 이별의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25가지 에피소드에 생과 사의 온갖 생생함을 보면서 끝도 없는 생각이 이어진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어떨까,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죽음을 미리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죽음이 다시 보인다. 그냥 숨이 끊어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슬픈 이별일 수 있는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이제야 비로소 편히 쉬는 시간임을 보게 된다.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를 윌과 루의 로맨스로만 봤던 기억이 변한다. 윌은 자기의 휴식을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 거였다. 2년여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난 거였다. 그의 선택을 두고 많은 이가 슬퍼했겠지만, 그에게는 편안함의 시작이었을 거라고 이제야 보인다.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한마디는 남기고 싶다. 그 한마디가 고운 말이 되었으면 하기에,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 의식을 차렸다 잃었다 하는 동안 모국어인 독일어로 이렇게 되뇌셨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했어.” (275페이지)

 

 

한때 누군가의 결혼, 아기 돌잔치 초대를 많이 받았다. 어떤 시작을 알리는 소식들이 자주 들려오던 때였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장례식에 갈 일이 잦아졌다. 친구 부모님, 친척, 지인. 몇달 전에는 이모부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이제 내가 그런 나이가 되었나보다. 누군가의 탄생이나 시작을 알리는 소식보다, 누군가와 이별하는 소식에 안부를 묻고 위로와 공감을 나누어야 하는 때... 누군가 떠나는 모습에, 잘 헤어져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할 시간이 많아진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런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와 지인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해야 할 이별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죽음이 아주 가까이에서 나에게 말을 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무서워진다. 그 순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 듣고 싶었나 보다. 우리가 만나는 죽음을 어떻게 괜찮은 죽음으로 볼 수 있는지를...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할 때 괜찮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저자의 메시지를 곱씹고 있다. 치료를 중단하는 게 최선일 수 있고, 가망이 없더라도 마지막 희망으로 수술을 선택할 수도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두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건 환자 자신의 결정이어야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마음속의 바람을 말해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건 그 끝에 있는 죽음으로 가는 길, 영원한 휴식을 위한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선택이다. 참, 어렵다. 마음도 무거워진다. 인생의 끝에서 마주할 그 쉼을 위해, 우리가 오늘을 채우는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다. 엄마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굳이 자기 손으로 장독을 정리하는 일도 그 과정일까. 오랜 시간 자기 곁에 머물며 일상을 채웠던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는 엄마의 모습이 새삼 너무 진지하고 중요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어설픈 손이지만 엄마의 그 정리를 돕는 일인 것 같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이 될 시간을 준비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의 편안한 쉼을 위한 준비를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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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2016-12-12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얼굴에 생긴 점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피부과 가서 점을 뺄까? 안 아플까? 가만히 보니 코도 좀 높았으면 좋겠다. 얼굴도 좀 더 갸름했으면 좋겠고... 성형수술을 할까? 아니야. 무서워. 만에 하나 생기는 부작용이 나에게 오면 어떡해.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이 가시긴 하지만 좀 아쉽긴 하다. 여기도 조금, 저기도 조금, 어떻게 조금씩만 안 될까? 그렇게 마음이 오락가락하면서도, 막상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이 얼굴도 좀 봐줄 만 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얼굴이 좀 부어있고 누렇게 떠 있는데, 어라? 괜찮아 보이네? 흠. 세수하니까 얼굴이 더 깨끗해 보이고, 음... 그래, 그냥 이대로 살자. 이제껏 이 얼굴로 잘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못 살 건 뭐야. 살이나 더 찌지 말자, 라고 말은 하지만 늘 아쉽다. 막상 누가 손잡고 끌고 가더라도 성형외과에 들어갈 용기도 없으면서, 그냥 가끔 내 얼굴이 서운해지는 거다.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참 오랜 시간 답이 없는 고민을 했더랬다.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어디 가서 뛰어나게 예쁘다는 평가는 못 받아도, 대놓고 못생겼다는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적은 없던지라, 그냥 이게 '평범'이려니 싶었다. 그런데도 자꾸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 눈에 더 들어온다. 내 신체의 열성인자는 대부분 엄마에게 물려받았다. 두상이 안 예뻐서 커트할 때마다 머리 옆 부분이 신경 쓰이는 것도, 발등이 높아서 신발 신으면 안 예쁜 것도 다 엄마 탓을 했다. 누가 봐도 우아~ 예쁘다 할 수 있게, 좀 예쁘게 낳아주지 왜 이런 거냐고. 엄마 눈에 있는 쌍꺼풀도 우리에게는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형제의 절반은 그 쌍꺼풀이 후천적으로 생겼다. 그건 좀 다행인가? 그래, 어쩌겠어. 생긴 대로 살자. 살다 보니 없던 쌍꺼풀도 생기는데, 설마 이보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어. 이대로 유지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이번에 건강검진 받으면서 또 한 번 절망했다. 키는 2cm 정도 줄었고, 몸무게는 1kg 정도 늘었더라. 몸무게가 좀 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키는 충격이었다. 나이 먹으면 키도 줄어든다는데, 정말 그래서 키가 줄었나? 평소에 키가 3cm만 더 컸으면 좋겠다던 나의 바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히려 키가 줄었으니, 속이 상했다. 몸무게는 빼면 되지만, 줄어든 키는 복구가 안 될 거잖아. 날씬하고 키도 커야 옷을 입어도 테가 나지, 라고 생각해왔는데...

 

 

 

 

 

 

 

 

 

 

 

로버트 호지의 『발가락 코 소년』을 읽다가 또 한 번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로버트는 태어날 때부터 이상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크게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자라났다. 여러 차례 수술하면서 얼굴과 몸을 변형시켜왔다. 조금은 더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말이다. 두 다리는 짧고 곧지 않았기에 절단해서 의족을 채웠다. 이마에서부터 코까지 내려온 혹은 제거했다. 그 자리에다가, 잘라낸 발에서 뽑아낸 연골로 코를 만들었다. 물고기처럼 양쪽으로 멀어진 눈 사이의 거리를 조금 가깝게 하는 수술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상(평범)이라고 부르는 외모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은 수술을 했는데도, 의학의 기술을 최대치로 끌어왔는데도... 그런데도 그는 잘 성장했다. 학창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지만, 친구들의 놀림과 자기 스스로 보게 된 차별을 인지하면서 고통스러웠겠지만, 그는 발견한 거다. 의사들이 시도했던 더 잘생겨지기 위한 수술도, 그를 위한 일이라면서 설득했던 가족의 말도 그 자신의 마음보다 우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음 수술을 결정해야 했을 때 부모님은 말한다. 너의 몸이니 선택은 너 자신이 해야 한다고. 수술을 또 해야 할까? 다시 수술하면 이 얼굴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반복된 수술과 수술 후에도 기대만큼 크게 변하지 않는 외모에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더 이상의 수술은 하지 않겠노라고. 로버트가 진정으로 자기 몸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그의 어린 시절 사진과 성인의 모습 사진이 있다. 도서 상세페이지에 그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과 태어났을 때 동영상도 있다. 책을 읽기 전에 그 사진들과 동영상을 먼저 봤다. 그 시작점을 알고 읽으면 그가 하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었음에도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난 그가 성장하면서 겪었을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막연하게 아프겠구나, 상처가 되었구나, 힘들겠구나, 싶은 추측이 이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이 아닌 채로, 그처럼 의족으로 걷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이 책의 부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어느 소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라는 걸 그대로 확인하면서 생각이 좀 많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가 다른 사람들과 외모가 같지 않음을 인지하면서 겪었을 마음의 혼란, 더 나아지기 위해 했던 수술이 더는 만족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외모와 장애로 인한 차별을 감당해야만 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얼굴이 좀 더 예뻤으면,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좀 더 날씬했으면 옷이 더 예쁘게 잘 맞을 텐데' 하고 바라던 마음과는 크기가 다르다. 비장애의 몸으로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과 장애의 몸으로 비장애를 바라는 마음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지금 모습이 더 든든하고 멋있어 보인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에요. 나는 장애가 나의 발전을 갉아먹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내 몸에, 내 삶에 주체적이고 당당해지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요. 이렇게, 멋진 삶을 계속 살아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오늘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 이렇게 자라왔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오래전에 읽었던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못생긴 여자와 조금은 잘생긴 남자, 그들의 멘토 같았던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그들 세 사람의 조화가 참 묘한데, 특이하면서 즐겁게 읽힌다. 그건 아마도 못생긴 여자와 조금 잘생긴 남자의 조합 때문이었던 듯하다.

 

비를 맞으면서 걷던 여자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우산을 준비 못 한 게 아니다. 비 맞는 것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그날 그녀가 회사에 가져온 우산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일이다. 그녀의 못생긴 외모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함부로 대해지기 쉬운 이유가 되었다. 외모가 힘이 되는 순간을 그녀가 증명했다. 못생겨서 회사 면접에서 떨어지고, 그나마 입사한 회사에서는 성적이 우수했어도 적절한 자리가 아닌 힘든 일을 하는 자리로 밀려났다. 못생겼으니까... 오랜 시간 그런 경험 때문에 여자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자기 외모와 사랑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거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가 다가온다. 사랑을 거부하고 의심했던 여자는 남자의 마음 앞에서 사랑을 인정한다. 스무 살, 무엇을 해도 예쁠 나이에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한다.

 

여자가 성장하면서 겪었을 일도 발가락 코 로버트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외모가 힘을 가지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을 터, 그래서 변하지 않는 외모에 주눅 들고 절망하다가, 이내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잊으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외모 때문에 받는 차별을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로버트는 아예 그런 외모의 차별을 처음에는 알지 못하고 성장했지만, 그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늘어나면서 왜 그것들을 못하는 건지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다가, 그들에게 '번쩍'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된 거다. 여자에게는 진심으로 다가왔던 남자의 등장이, 로버트에게는 자기 몸의 선택권을 주장하는 부모님이 그런 존재다.

 

 

 

외모가 권력은 아닐진대, 그 외모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을 본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만, 그건 순간이거나 찰나에서 머물 때가 많다는 걸, 이제는 안다. 여전히 나는, 좀 더 예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는 외모나 이미지가 우선이 아니라는 건 자주 경험한다. 외모와 인성이, 외모와 실력이, 글과 인격이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병원에서 만난 잘생긴 의사가 친절한 것도 아니었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질문 몇 가지만 던져도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의사도 허다했다. 예쁘고 잘생겼다고 다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리에서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지가 좋다고 생각했던 작가의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았는데, 문단 내 성폭력의 가해자인 걸 알게 되니,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그들의 책을 읽었나 자괴감도 들었고... 결국은, 그 사람을 알게 되기까지 외모가 첫인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다. 그 사람을 겪어야 알게 되는 게 진짜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외모는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나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관계에서 진심을 내보였을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내가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외모는 그렇더라고. 남들도 나에게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로 생각하고 싶다.

 

 

 

장애를 가진 외모로 태어났지만, 의술로도 완전해질 수 없는 외모를 가졌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한 로버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바라던 외모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3cm만 더 컸으면 하고 바랐던 키는 반대로 줄어버렸으니 이만 포기하고, 늘 3kg만 뺐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몸무게를 신경 써야겠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성장판이 닫힌 지 한참 지났는데 뭘 더 크겠다고 그렇게 바랐었는지 몰라. 설상가상, 키가 클 가능성도 아니고 이미 줄었다는데 마음을 둬서 뭘 하나.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 전에 살부터 빼자 싶다. (살이 찌니 자꾸 허리와 다리가 아픈 게, 외모가 아니라 건강 때문에라도 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엄마가 물려준 단점들마저 고마워진다. 발등이 좀 높으면 어때, 그것 때문에 신발은 안 예쁘게 신으면 어때, 멀쩡한 두 다리로 걷고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데 말이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자주 잊고 사는 요즘을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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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진양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 문자를 받았다.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글이 있어서 알림 소식을 받고 있었다. 이번 신간은 참 오랜만이다. 게다가 기존 현대물만 써왔던 작가의 시대물이다. '음, 시대물은 내 취향 아닌데 어쩌지?' 싶은 노파심도 잠시, 일단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더랬다. 내 인생 최고의 작가는 아니지만, 나는 처음 이 작가의 이름 때문에 괜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겼다.

 

 

 

 

 

 

 

 

 

 

처음 로맨스소설을 읽었던 건, 이도우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때문이었다. 도서관 서가를 돌다가 발견했다. 책이 너덜너덜. 이런 경우는 두 가지인데, 보통 만화책이거나 이용자의 손때가 많이 탔거나... 이 책은 소설이니 아마도 후자였으리라. 궁금해서 대출해와 읽었는데 정말 재밌었다. 그래서 검색해보니 로맨스소설이란 장르에 속하더라. 뭐지? 이런 장르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렇게 시작된 로맨스소설 읽기였는데, 그때 뭔가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름이 '진양'이다. 이름이 본명인지 필명인지 모르겠지만, (뭐, 나중에 찾아보니 아마도 필명일 거란 생각이 들긴 하는데...) 혹시 내가 기억하는 그 애가 아닐까 싶은 궁금증이 마구마구 생기더라고. 항상 책만 보던 그 애, 교과서 앞에 소설 책 세워두고 미친 듯이 읽었던 애가 있었어. 정말 이 소설을 쓴 작가는 그 애가 아닐까? 나는 그 이름 때문에 이 작가의 작품을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했던 거다.

 

고등학교 때, 그런 애가 있었다. 고3때 같은 반이었던 애가 있었는데, 그 애 이름은 '진양O'이었다. 친하지는 않았고, 우리 반에 그런 애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 애와 친하지 않았는데도 잊을 수가 없는 건, 그 애는 수업시간에 교과서 세워두고 그 안에 다른 책을 두고 읽곤 했다. 어쩌다 한 번이면 스쳐지나갔을 텐데, 거의 모든 수업시간에 그러했으니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당시에 만화 주간지가 인기였는데, 그 애는 용돈 대부분을 그 만화 주간지를 사는데 썼고, 할리퀸 문고 사는데 쓴다고 하더라. 그 애가 학교에서 읽는 책은 주로 세 가지였다. 만화책(만화 주간지 포함), 할리퀸 문고(그 손바닥만 한 작은 책), 두툼한 소설. 담당 과목 선생님에게 걸리기도 하고 안 걸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그렇게 걸려서 혼났어도 꾸준히 그 습관을 이어갔다는 거다. 그 애가 만화 주간지를 사면 반 아이들이 돌려봤는데, 그렇게 한 바퀴 돌고나면 책을 후줄 해졌고, 그래도 괜찮았는지 아마 상당 기간 동안 그렇게 만화 주간지가 돌았던 게 생각난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쟤는 대학에 안 가나? 수업 시간 내내 저렇게 다른 책만 보고 있으면 수업 진도를 어떻게 따라가지? 방과 후에 따로 공부하나? 뭐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성적도 상위권이 아니었다. 흘려들은 소문에는 하위권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남의 일이지만 정말 걱정이 되더라고. 수업 잘 들어도 힘든 시험인데, 어쩌려고 저렇게 딴(?) 책만 끼고 사나? 그러다가, 우리끼리 얘기하다가 주제가 된 게 수능시험이었는데, 그 애는 다른 과목은 별로였는데 유독 언어 영역에서 점수가 높았다. 지금은 수능시험이 어떤 분위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 언어 영역 점수 잘 받기가 힘든 때였다. 오히려 답이 정해진 수리탐구 영역에서 만점 받기가 쉬울 거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니 유독 언어 영역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그 애가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무리 언어 영역에서 점수가 높아도 전체 점수가 있으니 대학 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말이 돌았다. 그렇게 우리는 수능 시험을 봤고, 졸업을 했다. 친하지 않았기도 했고 각자의 진로에 정신이 없어서 아무도 그 애 얘기를 꺼내는 걸 듣지 못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후였나, 점심을 먹으려고 학생 식당에서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등을 톡톡 두드리는 거다. 누구지? 돌아서서 보니 그 애였다. 고3때 매일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보던 그 애, 진양O. 어머나~ 놀래라. 각자 다른 일행이 있었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할 정도로 친분이 없던 터라 가볍게 인사만 했는데, 그 애가 같은 학교 불문과에 입학했다고 하더라. 괜히 반가웠다. 친하지 않았지만 알던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는... (아마 처음에 학교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때여서 그랬나보다) 나중에 몇 달쯤 흘렀을 때 고등학교 동창에게 그 애 얘기를 들었는데, 그 애가 수능시험에서 언어 영역 만점 받고 대학에 갔다고 하더라고. 여전히 다른 과목 점수는 높지 않았는데, 언어 영역이 그 애를 살려준 거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덩달아 나온 말이 이거였지. 그 애는 수업시간에 죽어라 다른 책만 읽더니, 만화책만 읽고 할리퀸만 읽고 소설책만 읽더니, 어떻게 언어 영역 만점을 받고 대학에 가냐, 진짜 대단하다, 뭐 이런 말이 한참 돌았다더라.

 

그런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괜히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 책 읽기가 지금보다 강조되지 않던 때였는데, 책에 푹 빠져 지내던 그 애가 언어 영역 만점 받았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 글을 많이 접한 사람이 글을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언어 영역이 그 애를 살렸든 어쨌든, 대학에 입학한 그 아이가 전공을 살릴지 아니면 책 관련 쪽으로 갈지 궁금했었다. 그러다 만난 로맨스소설에서 그 애와 이름이 비슷한 작가를 발견했으니 이상한 궁금증이 생기는 거다. 이 작가가 혹시 그 애일까? 아닐까? 아니라고 해도 이 이름에 괜히 더 친근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그 애랑 친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름이 불쑥, 계속 생각나는 거지?

 

 

 

 

 

 

 

 

 

 

그런 이상한 이유로 관심 두고 읽기 시작한 작가다. 내가 이 작가의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이별한 사람들만 아는 진실>인데, 약간의 비현실적인 면을 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남자와 여자의 마음이 담겼다. '헤어졌는데 헤어진 것 같지 않아, 왠지 후회도 되는 것 같아, 나를 이만큼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 만나기 힘든데 니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같아, 그런데 우리는 헤어졌어, 어떻게 해야 하지?' 뭐, 이런 분위기. 뻔한 내용인데 그게 또 뻔하게 흐르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하는 거다. 어떻게 할까. 나는 현실에서도 진짜 이런 커플 봤는데, 이보다 더한 커플도 봤는데, 이게 정말 생길 수도 있는 일이구나 싶은 공감이 너무 와 닿는 거였다. 그래서 이 소설을 좋아한다. 괜히 작가의 이름에서 생긴 호기심 때문에 관심 두게 되어 하나씩 찾아 읽다가 발견한 소설이다. 작가의 출간작을 다 읽진 못했는데 꽤 많이 읽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또 다른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으면 싶다는 바람이 무색하게, 그 이후로 만나는 작품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시들해지고 신간이 나왔다고 해도 안 읽고, 그렇게 넘긴 게 몇 년.

 

 

 

 

 

 

 

 

 

 

간만에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 문자를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소개 글을 보니 이거 시대물이네? 어라? 무슨 도깨비가 나와? 이상한 거 아냐? 반가운 마음도 잠깐, 노파심이 먼저 생긴 거다. 시대물 내 취향 아닌데 이번에도 비껴가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구매해서 읽었는데, 정말 재밌다. 이상한 도깨비의 등장이 아니라 귀엽고 섹시하고 매력 있는 도깨비'들'이다. 물론 스토리도 볼만하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고, 그 틈틈이 등장하는 웃음의 요소도 거북하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서 작은 모티브를 가져와 시작되었다는 이 소설은, 우리만의 정서와 분위기로 바뀌어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한다. 닮았지만 닮지 않은 이야기다. 슬럼프를 겪었다던 작가의 말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게 읽힌다. 아, 이 작가는 현대물뿐만 아니라 시대물도 잘 쓰는구나. 또 하나의 퓨전 사극으로 나와도 정말 좋겠다는 바람이 들게 한다. (아, 물론, 극본이나 연출, 출연 배우에 따라 이야기가 산으로 갈 위험이 있긴 하지만... ㅠㅠ)

 

한 번 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면서, 몇 년 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을 다시 떠올려본다. 비슷하지만 비슷하지 않고, 진짜겠지만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 작가 이름 앞에서, 그 애가 계속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마음 하나를 더 보탠다. 괜히, 그냥 그래.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는 않은데, 그냥 그 애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면 좋을 것 같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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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크 2016-10-3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다 궁금하네요...ㅎㅎ 아..궁금해...

구단씨 2016-11-02 14:58   좋아요 1 | URL
저도 궁금해요. ㅎㅎ
안다고 해서 어떻게 할 것도 아닌데, 그냥마냥 궁금하더라고요.
그 애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

푸른희망 2016-11-0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그 애 였으면 좋겠네요~~

구단씨 2016-11-02 15:01   좋아요 0 | URL
아.......
이것 저것 살펴보니 아닐 가능성이 많은 것 같지만,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