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얼굴에 생긴 점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피부과 가서 점을 뺄까? 안 아플까? 가만히 보니 코도 좀 높았으면 좋겠다. 얼굴도 좀 더 갸름했으면 좋겠고... 성형수술을 할까? 아니야. 무서워. 만에 하나 생기는 부작용이 나에게 오면 어떡해.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이 가시긴 하지만 좀 아쉽긴 하다. 여기도 조금, 저기도 조금, 어떻게 조금씩만 안 될까? 그렇게 마음이 오락가락하면서도, 막상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이 얼굴도 좀 봐줄 만 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얼굴이 좀 부어있고 누렇게 떠 있는데, 어라? 괜찮아 보이네? 흠. 세수하니까 얼굴이 더 깨끗해 보이고, 음... 그래, 그냥 이대로 살자. 이제껏 이 얼굴로 잘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못 살 건 뭐야. 살이나 더 찌지 말자, 라고 말은 하지만 늘 아쉽다. 막상 누가 손잡고 끌고 가더라도 성형외과에 들어갈 용기도 없으면서, 그냥 가끔 내 얼굴이 서운해지는 거다.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참 오랜 시간 답이 없는 고민을 했더랬다.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어디 가서 뛰어나게 예쁘다는 평가는 못 받아도, 대놓고 못생겼다는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적은 없던지라, 그냥 이게 '평범'이려니 싶었다. 그런데도 자꾸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 눈에 더 들어온다. 내 신체의 열성인자는 대부분 엄마에게 물려받았다. 두상이 안 예뻐서 커트할 때마다 머리 옆 부분이 신경 쓰이는 것도, 발등이 높아서 신발 신으면 안 예쁜 것도 다 엄마 탓을 했다. 누가 봐도 우아~ 예쁘다 할 수 있게, 좀 예쁘게 낳아주지 왜 이런 거냐고. 엄마 눈에 있는 쌍꺼풀도 우리에게는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형제의 절반은 그 쌍꺼풀이 후천적으로 생겼다. 그건 좀 다행인가? 그래, 어쩌겠어. 생긴 대로 살자. 살다 보니 없던 쌍꺼풀도 생기는데, 설마 이보다 더 나빠지기야 하겠어. 이대로 유지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이번에 건강검진 받으면서 또 한 번 절망했다. 키는 2cm 정도 줄었고, 몸무게는 1kg 정도 늘었더라. 몸무게가 좀 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키는 충격이었다. 나이 먹으면 키도 줄어든다는데, 정말 그래서 키가 줄었나? 평소에 키가 3cm만 더 컸으면 좋겠다던 나의 바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오히려 키가 줄었으니, 속이 상했다. 몸무게는 빼면 되지만, 줄어든 키는 복구가 안 될 거잖아. 날씬하고 키도 커야 옷을 입어도 테가 나지, 라고 생각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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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호지의 『발가락 코 소년』을 읽다가 또 한 번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로버트는 태어날 때부터 이상한 외모 때문에 부모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크게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자라났다. 여러 차례 수술하면서 얼굴과 몸을 변형시켜왔다. 조금은 더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말이다. 두 다리는 짧고 곧지 않았기에 절단해서 의족을 채웠다. 이마에서부터 코까지 내려온 혹은 제거했다. 그 자리에다가, 잘라낸 발에서 뽑아낸 연골로 코를 만들었다. 물고기처럼 양쪽으로 멀어진 눈 사이의 거리를 조금 가깝게 하는 수술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상(평범)이라고 부르는 외모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은 수술을 했는데도, 의학의 기술을 최대치로 끌어왔는데도... 그런데도 그는 잘 성장했다. 학창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지만, 친구들의 놀림과 자기 스스로 보게 된 차별을 인지하면서 고통스러웠겠지만, 그는 발견한 거다. 의사들이 시도했던 더 잘생겨지기 위한 수술도, 그를 위한 일이라면서 설득했던 가족의 말도 그 자신의 마음보다 우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음 수술을 결정해야 했을 때 부모님은 말한다. 너의 몸이니 선택은 너 자신이 해야 한다고. 수술을 또 해야 할까? 다시 수술하면 이 얼굴이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반복된 수술과 수술 후에도 기대만큼 크게 변하지 않는 외모에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더 이상의 수술은 하지 않겠노라고. 로버트가 진정으로 자기 몸의 주인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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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부분에 그의 어린 시절 사진과 성인의 모습 사진이 있다. 도서 상세페이지에 그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과 태어났을 때 동영상도 있다. 책을 읽기 전에 그 사진들과 동영상을 먼저 봤다. 그 시작점을 알고 읽으면 그가 하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었음에도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난 그가 성장하면서 겪었을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막연하게 아프겠구나, 상처가 되었구나, 힘들겠구나, 싶은 추측이 이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이 아닌 채로, 그처럼 의족으로 걷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이 책의 부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어느 소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라는 걸 그대로 확인하면서 생각이 좀 많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가 다른 사람들과 외모가 같지 않음을 인지하면서 겪었을 마음의 혼란, 더 나아지기 위해 했던 수술이 더는 만족하게 해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외모와 장애로 인한 차별을 감당해야만 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내가 '얼굴이 좀 더 예뻤으면,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좀 더 날씬했으면 옷이 더 예쁘게 잘 맞을 텐데' 하고 바라던 마음과는 크기가 다르다. 비장애의 몸으로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과 장애의 몸으로 비장애를 바라는 마음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지금 모습이 더 든든하고 멋있어 보인다. '나는 내 몸의 주인이에요. 나는 장애가 나의 발전을 갉아먹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내 몸에, 내 삶에 주체적이고 당당해지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나요. 이렇게, 멋진 삶을 계속 살아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오늘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 이렇게 자라왔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오래전에 읽었던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못생긴 여자와 조금은 잘생긴 남자, 그들의 멘토 같았던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그들 세 사람의 조화가 참 묘한데, 특이하면서 즐겁게 읽힌다. 그건 아마도 못생긴 여자와 조금 잘생긴 남자의 조합 때문이었던 듯하다.
비를 맞으면서 걷던 여자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우산을 준비 못 한 게 아니다. 비 맞는 것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그날 그녀가 회사에 가져온 우산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일이다. 그녀의 못생긴 외모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함부로 대해지기 쉬운 이유가 되었다. 외모가 힘이 되는 순간을 그녀가 증명했다. 못생겨서 회사 면접에서 떨어지고, 그나마 입사한 회사에서는 성적이 우수했어도 적절한 자리가 아닌 힘든 일을 하는 자리로 밀려났다. 못생겼으니까... 오랜 시간 그런 경험 때문에 여자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자기 외모와 사랑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거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가 다가온다. 사랑을 거부하고 의심했던 여자는 남자의 마음 앞에서 사랑을 인정한다. 스무 살, 무엇을 해도 예쁠 나이에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한다.
여자가 성장하면서 겪었을 일도 발가락 코 로버트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외모가 힘을 가지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을 터, 그래서 변하지 않는 외모에 주눅 들고 절망하다가, 이내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잊으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외모 때문에 받는 차별을 점점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갔다. 로버트는 아예 그런 외모의 차별을 처음에는 알지 못하고 성장했지만, 그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늘어나면서 왜 그것들을 못하는 건지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다가, 그들에게 '번쩍'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된 거다. 여자에게는 진심으로 다가왔던 남자의 등장이, 로버트에게는 자기 몸의 선택권을 주장하는 부모님이 그런 존재다.
외모가 권력은 아닐진대, 그 외모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을 본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만, 그건 순간이거나 찰나에서 머물 때가 많다는 걸, 이제는 안다. 여전히 나는, 좀 더 예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는 외모나 이미지가 우선이 아니라는 건 자주 경험한다. 외모와 인성이, 외모와 실력이, 글과 인격이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병원에서 만난 잘생긴 의사가 친절한 것도 아니었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질문 몇 가지만 던져도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의사도 허다했다. 예쁘고 잘생겼다고 다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리에서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지가 좋다고 생각했던 작가의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았는데, 문단 내 성폭력의 가해자인 걸 알게 되니,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그들의 책을 읽었나 자괴감도 들었고... 결국은, 그 사람을 알게 되기까지 외모가 첫인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다. 그 사람을 겪어야 알게 되는 게 진짜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외모는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나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관계에서 진심을 내보였을 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내가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외모는 그렇더라고. 남들도 나에게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분명, 그럴 거로 생각하고 싶다.
장애를 가진 외모로 태어났지만, 의술로도 완전해질 수 없는 외모를 가졌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한 로버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바라던 외모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3cm만 더 컸으면 하고 바랐던 키는 반대로 줄어버렸으니 이만 포기하고, 늘 3kg만 뺐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몸무게를 신경 써야겠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성장판이 닫힌 지 한참 지났는데 뭘 더 크겠다고 그렇게 바랐었는지 몰라. 설상가상, 키가 클 가능성도 아니고 이미 줄었다는데 마음을 둬서 뭘 하나. 지금보다 더 나빠지기 전에 살부터 빼자 싶다. (살이 찌니 자꾸 허리와 다리가 아픈 게, 외모가 아니라 건강 때문에라도 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엄마가 물려준 단점들마저 고마워진다. 발등이 좀 높으면 어때, 그것 때문에 신발은 안 예쁘게 신으면 어때, 멀쩡한 두 다리로 걷고 있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데 말이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자주 잊고 사는 요즘을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