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백로白露'다.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시점으로 삼는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이때 쯤이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

뜨거운 볕 아래 맥문동이 힘찬 기운으로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배경 삼았다. 여름볕과는 분명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는 볕이다. 가을날의 까실함이 여기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싶다. 그 성질이 뭇 곡식과 과일을 영글게 하는 것이리라.

속담에 "봄에는 여자가 그리움이 많고, 가을에는 선비가 슬픔이 많다"라고 한다. 백로를 지나면 본격적인 가을이다. 혹, 반백의 머리로 안개 자욱한 숲길을 넋놓고 걷는 한 사내를 보거든 다 가을 탓인가 여겨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간절함'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다. 사명을 다하기 위한 근본 마음자리에 놓이는 것이 바로 간절함이다. 도달하고자는 곳, 이루고자는 바가 있다면 이 간절함에 의지해야 한다.

꽃은 한순간도 이 간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이 담보하는 숙명이다.

미루고 미루다 더이상 어쩌지 못하고 막바지에 초조감을 안고 나선 길이다. 그 길 어딘가에서 두 마음이 하나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간절함, 당신과 내가 함께 설 자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주본다는 것'

가능한일일까? 사람과 사람이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그 사람을 통째로 알아버리는 일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걸까?

감정을 담지 않고 존재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은 객관적인 법칙에 대입하면 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완고하고 수시로 변하기에 대입할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벽을 두르고 상대를 대하는 모든 행위는 그래서 애초에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한 경우와 같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공정하지도 않고 또한 벽을 두른자의 일방적 감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라는 벽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것이라도 해야만 할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이 절박함이 기적을 만들어 왔음을 알기에 그 기적에 의지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해를 마주보는 것은 여전히 버거운 일중 하나다. 그렇더라도 마주보지 않으면 일생을. 한번 볼까 말까하는 명장면을 볼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나, 당신을 마주보고자 함은 이렇게 간절함을 보테 기적이라도 불러오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긴 장마끝 무더위가 시작되는 어느날 이른 아침 불현듯 피었다가 한나절도 지나기 전에 시들어졌다. 고개 숙인 모습이 이토록 애처러운 것은 피었던 때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까닭이리라.

짧은 순간을 화려하게 살았다. 무너지는 것 역시 한순간이다.

체념일까. 좌절일까. 고뇌하는 모습으로 읽히는 것은 내 안의 무엇이 반영된 결과이니 결국, 나를 돌아볼 일이다.

매 순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시간으로 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를테면 공갈빵 같은 거
속을 보여주고 싶은데
알맹이 없는 껍질뿐이네
헛다리짚고 헛물켜고
열차 속에서 잠깐 사귄 애인 같은 거
속마음 알 수 없으니
진짜 같은 가짜 마음만 흔들어주었네"

*이임숙의 '헛꽃'이라는 시의 일부다.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을 헛꽃이라 부르는 이유야 분명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어디 참꽃만 있던가. 화려하게 유혹하는 이 헛꽃의 무상함을 알면서도 기대고, 짐짓 모른척하면서도 기대어 그렇게 묻어가는 것들이 삶에서 오히려 빈번하다.

헛꽃은 바라보는 대상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게도 있다. 이런 헛꽃들이 만나 헛세상을 만들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헛꽃이고 헛세상인줄 모른다. 그래서 헛마음으로 사는 헛세상은 늘 힘들고 외롭고 제 힘으로 건너기 버거운 세상이 된다.

헛꽃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서툴고 여린 속내를 어쩌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자신만이 참이라 여기는 그 마음에 피어나는 것이 헛꽃이리라. 헛꽃들이 허상을 보고 아우성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헛물켜는 것들은 목소리만 높다.

반영이나 그림자 또한 헛꽃의 다른 이름이다. 실체가 있고 그것을 비춰줄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때론 실체보다 더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조건만 사라지면 덩달아 없어지는 허망한 것임을 모른다.

"헛꽃만 피고 지는 이 자리
헛되고 헛되니 헛될 수 없어서 헛되도다"

혹여, 내 일상의 몸짓이 이 헛꽃보다 못한 허망한 것은 아닐까. 시인이 경고한 헛꽃의 그 자리를 돌아보는 것은 연일 폭염보다 더한 사람의 허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침, 비 쏟아졌다 그친 하늘 아래 한결 가벼워진 공기다.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으로 얼굴은 이내 평화로운 미소를 담는다. 멀지 않은 곳에 가을이 머물러 있음을 알기 때문이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