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다큐멘터리 [How violent are you?]를 시청했다. 한국어 제목은 [당신은 어떻게 폭력적인가]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How를 '어떻게'로 번역한 구글번역기보다 못한 방송사의 번역 담당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_= 

How stupid are you? 

당신은 어떻게 멍청한가? 

라고 쓴 메일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 아주 흥미로운 다큐를 무료로 봤으니 여기에 [당신은 얼마나 폭력적인가]가 옳은 번역이라고만 쓰고 넘어가기로 한다. (근데 정말 이해가 안 가긴 한다. 번역이 잘못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형용사'인가 라는 말은 그냥 한국어로도 말이 안 되는 문장인데.) 

사실 자막도 엉망이어서 애써 자막을 무시하며 봤다. IPTV에 자막 끄는 기능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나쁜 번역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제쳐놓고, 프로그램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내재되어있으며 이는 보통 사회화 과정을 통해 억제된다. 다만 생각보다 손쉽게, 사상의 주입이나 자극-보상 훈련 혹은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이 억제는 풀릴 수 있다.'가 되겠다. 

흔히 사춘기 즈음 폭력성을 습득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3살 아기들이 가장 폭력적이며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이런 본능을 제어하는 회로가 두뇌의 전전두엽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전전두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일 앞부분, 즉 이마 바로 밑에 존재해서 급가속과 급감속을 경험하기 쉬운 차 사고에서 가장 쉽게 부상당하는 부위라고 한다. 차 사고를 겪은 뒤 갑자기 성격이 바뀌는 경우는 대부분 이 부위 부상 때문이라고.

프로그램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기 인형 두 개를 이용한 수면 박탈 실험에 참여한 프로그램 진행자의 발언이었다. 아기 인형들은 실제 신생아의 행동을 따라해서 랜덤하게 엄청난 볼륨으로 울기 시작해서 특정 조치들이 다 취해질 때까지 계속 울게 되어있었는데 (그리고 모든 조치를 다 취해도 그냥 기약 없이 계속 우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았다...덜덜), 수십시간 째 잠을 한 숨도 못잔 진행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며 '연구진이 아기가 더 자주 울도록 세팅을 바꿔놓고 갔어요'라고 하고는 이후 실험 종료 때까지 계속 '아기들이 아니라 연구진에 대해 큰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연구진은 실험 내내 아기의 세팅을 바꾸긴 커녕 아기 인형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며, 살면서 단 한번도 육탄전을 벌인 적이 없다는 진행자였다. 수면 박탈이 고문의 한 방식일 만큼 스트레스가 심한 조건이긴 하지만, 아무런 물리적 고통이나 실제 사람과의 갈등도 없이 심지어 자신이 자청해서 참여한 실험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이런 피해망상을 만들어내고 분노할 대상을 찾아 화를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게 아주 신기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혐오 발언들이 피해망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이루어질 것이라 헛되이 기대하는) 희망사항을 기본으로 깔고 있고, 진짜 문제의 핵심이 아닌 쉽게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통제된 실험에서도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아하! 하는 깨달음과 허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런 혐오의 방식이 높은 스트레스 하에 놓인 인간의 기본 반응 방식이라면, 모든 사람이 스트레스가 적은 사회를 만들기 전에는 혐오는 끝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나마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아이들을 폭력성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울 수 있고, 각종 사회적 장치들을 통해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을 예방하고 발생했을 경우 치료할 대책을 마련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인 것 같다. '교육'과 '시스템'이 앞으로의 인간 사회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두 키워드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존재하며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폭력성은 쉽게 억제될 수도 있지만 쉽게 고삐가 풀릴 수도 있다는 과학적인 지식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현재의 처벌 위주의 제도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려준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더라도 이런 쉬운 실험만으로도 범죄와 범죄자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미 여러 생물학/인류학 지식을 통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협동은 우리의 생존 본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설에는 항상 회의적이었고, 영아 살해 현상이나 사회적 협동을 간접적 유전자 전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계산식들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협동적일 수는 있으나 '선하다'고 표현할 만한 성질은 타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폭력성을 띠는 개체들이 살아남아 현생 인류가 된 것은 폭력성이 어떻게든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폭력적 본성이 발휘된 사건들 중에는 우리가 사악한 범죄라고 할 만한 것도 있겠지만 보호 혹은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본성, 혹은 행위에는 선함도 악함도 언제나 공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힌두교의 세계 창조 신화에서 세상 만물이 '에너지' 혹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묘사하는 등 현대물리학적 발견들을 암시하는 내용이 다수 발견되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신을 섬겼다. 힌두교 신화와 현대물리학적 발견의 일치는 우연이겠지만,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그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혜에서 나온 것일 것 같다.


일단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고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고, 아직 사놓고 못다읽은 인류학 책들-인류의 기원, 사피엔스, 숲 사람들 등-부터 읽고 탐내기로 했다. 3월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점점 책 읽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게 느껴져 마음이 급하다. 책이든 영상이든 접하고 난 뒤에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그 경험을 무척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아 알라딘에도 다른 매체에도 즐겁게 쓰고 있었는데, 글 쓰는데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고 책 읽을 시간은 점점 바닥나고 있어서 조금 초조해하고 있다. 글은 당분간 접거나 빠르게 대강 써서 비공개로 남겨두고 일단은 책을 읽는데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 Man Called Ove : Now a major film starring Tom Hanks (Paperback)
Backman, Fredrik / Sceptre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점에 놀러갔다가 가판대 위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인 [오베라는 남자]를 집어들었다. 책날개에서 저자 소개를 읽고나서 아무데나 펼치고 몇 문장 읽는데 바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웃긴 부분이 나왔다. 휘리릭 다른 곳을 펼쳐보니 말장난을 이용한 농담을 역자가 한국어로 직역한 뒤 괄호 치고 영어로 설명해둔 부분이 나왔다. 

해리포터를 번역서로 먼저 읽고 원서로 다시 읽으며 재차 깨달은 것이지만, 역시 농담은 설명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스웨덴어-한국어보다는 스웨덴어-영어 번역이 농담을 더 잘 살려줬을 것 같아 영어판본을 구입했다.

***영어판 구매를 고려하시는 분들을 위해: 영어판 역자가 스웨덴 출신 영국인이라 영국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미리 알면 좋겠다. 내 영어실력이 부족한 탓이 크겠지만,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도 꽤 있었고 (특히 비속어나 낮춰 이르는 말들 중에ㅋㅋ) 몇몇 단어는 스펠링도 신기했다 (maneuver를 manoeuvre라고 쓰고 fetal을 foetal이라고 쓰는지는 처음 알았다). 단어만 넘어서면 문장도 술술 잘 읽혔고, 여러모로 한국어본 보다 말투랄까 흐름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다.

***사족이지만 인터파크와 알라딘 사이트에서 영어 판본은 번역가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더라;; 스웨덴어->영어 번역가는 작가 & 번역가 Henning Koch다.


우선 웃기다ㅋㅋㅋㅋ 진짜 웃기다. 시트콤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블랙 코미디라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오베가 생각하는 내용을 적은 것도 오베가 행동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도 정말 엄청 웃기다. 웃음이 필요한 분이라면 매우 추천한다. A few good laughs는 보장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슬프고 아프다. 다행히 그 슬픔은 감동으로 승화되긴 한다. 현재 진행형인 챕터들을 읽으면서는 마치 코미디 영화 보는 마냥 소리내어 웃었지만, 오베가 살면서 겪어온 사건들을 읽으면서는 ('a man who was Ove and ###', 한국어로는 '오베였던 남자와 ###'라는 제목을 단 챕터들) 비명도 지르고 헉 하고 숨도 들이마시고 눈물도 여러번 지었다.


개인적인 감상은 쓰다보니 너무 길어져서 아래 분리해놨는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는 너무 불행하고 비관적인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그래서 이 책도 읽다가 중간에 한번 너무 충격받고 마음이 아파서, 다시 읽을 용기가 날 때까지 며칠 책장에 다시 넣어두어야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었다는 행복함만 남는다. 비문학 말고 문학 작품도 더 찾아읽을 도전정신이 조금씩 자라고 있어 기쁘다 :)



*아래는 좀더 개인적인 이야기


나는 어릴 때부터 한국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교과과정에서 배우고 추천받는 중요한 한국 소설들,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배우는 한국 소설들 대부분이 사회의 하층민을 다루거나 (and/or) 아주 비극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가 강간당하는 등 모종의 이유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 않는 작품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아무리 문학적 가치가 높더라도 나를 우울하게 만들 작품들은 읽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 초중고 교과과정에 나오는 한국 문학작품들 중 상당수가 청소년에게는 너무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90년대에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 한국사를 통틀어서든 전세계를 통틀어서든 매우 운이 좋은 경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저 '왜 한국 작가들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만 하고, 그것도 다 비극을 그리기만 했을까, 전쟁 이야기를 하더라도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인공이 대통령이나 성공한 사업가인 것처럼) 결정권자들의 이야기를 그릴 수도 있지 않았나'하는 의문을 품는 것까지밖에 못했다. 

여튼 그래서 한국 소설들을 피하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소설 전반에 흥미를 잃었었다. 아마 최근 10년간 읽은 소설이 (디폴트가 해피엔딩인) 추리소설들, 해리포터-나니아연대기-반지의 제왕, 그리고 이미 다른 매체로 이야기를 여러번 접한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나무를 심은 사람] 같은 유명한 작품 몇 권 외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아,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 거의 유일하게 유머러스하고 설정도 이야기도 재미있다고 추천받아서 즐겁게 읽었었다.

내가 책보다 영상물에 더 익숙하고, 소설을 소화하기에는 인내심과 소양이 부족해서 소설을 읽기 힘들어하는 것인데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의 독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독서라면 나는 좀더 즐거운 이야기들을 읽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마냥 웃기고 따뜻하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내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 생각하게 될만큼 강한 슬픔과 강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면을 보고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고 난 뒤 비로소 주인공 오베의 생각과 행동이 와닿는 경험을 했다.

여전히 나는 주인공이 악하거나 너무 심각하게 슬픈 엔딩을 갖는 영화를 피하고, 소설에서도 비슷한 취향을 보이긴 할 것이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그저 한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그 인물의 감정과 역사를 공감할 수 있게 쓰는 것도 정말 대단한 것이고, 글이 꼭 웃기거나 유익하지 않고 이야기가 감동적이지 않더라도 글을 '즐길' 수는 있구나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문학은, 논리성과 실용성 위주로 돌아가는 내 사고로는 아직 너무나 막연하고 그 평가에 대한 납득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렇게 아끼는 책이 하나씩 생길때마다 뭔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뭉뚱그려 불리우는 그 무언가가 조금씩 자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책의 문학적인 가치가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굉-장히 재미있게 아껴가며 읽었다. 나중에 우울할 때 아무데나 펼쳐 읽고싶은 책이다. 감상 끝!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1-14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국소설을 잘 안 읽어요. 그런데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은 좋아해요. 학창시절에 자주 봐서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

망고林 2016-01-14 19:16   좋아요 0 | URL
!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고등학교 국어 공부를 제대로 못했었어요ㅠㅠ 제가 좀 특이한 고등학교에 다녔거든요.. cyrus님 말씀 듣고 보니 그래서 제가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더욱 멀게만 느꼈던 건가 싶어서 더 아쉽네요^^; 조금씩 독서력을 키워서, 소설을 즐기며 읽을 줄 알게 되면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소설들부터 차근차근 읽어봐야겠어요ㅎㅎ

YoonSoo 2016-02-0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는데, 쉬운 말투로도 조물조물 이야길 끌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뭣보다 스웨덴은 좀 단정하게 사나 했더니,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데구나 하며 쿡쿡 웃었습니다.// 올리신 글 읽고 들렀는데, `이기적 유전자`에 관한 좋은 조언까지 덤으로 챙겨갑니다.
 
빵의 역사 - 빵을 통해 본 6천년의 인류문명, 개정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보통 사람들은 영상을 보다가 `빵 터지는` 것에 대해선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책을 보다가 웃음이 터지는 날 보고선 약간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ㅋㅋ
하지만 영국인의 도발에 대응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이런 기지 - 그들의 주장대로 스코틀랜드가 훌륭한 인재들을 낳은 것이 틀림없음을 보여주는 - 를 보고서 어떻게 소리내어 웃지 않을 수가 있나! 영국인은 참 멋지면서도 글로벌 동네북인 것 같다..ㅋㅋㅋ

그러다가 이 책은 한 문화권의 세계관의 핵심을 한 문단으로 설명해주기도 한다. 나일강이 하필이면 남북으로 매우 길게 뻗어 있으며 수원지가 하나라 범람이 매년 아주 규칙적인 탓에, 곧게 뻗은 강 주변 몇 미터만 경작 가능한 그런 땅에 산 사람들은 기묘할 정도로 기하학적이고 규칙적인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화나 가상의 세상 속에서나 나올 세상이다. 해는 죽어있는 땅 너머에서 떠올라 죽어있는 땅 너머로 사라진다. 그 사이, 해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때 그 바로 아래에 놓이는 강은 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상의 절대적인 생명줄이다. 모든 생물은 이 강 주변에서만 살 수 있다. 당연히 그 사람들은 방향을 동서남북 직각으로 나눌 것이고, `방향`에 삶과 죽음을 포함한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정말이지 즐거운 독서를 선사하는 책이다. 1944년에 나온 책이라는데, 1944년부터 2015년까지의 빵의 역사는 이 저자가 써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꼭꼭 씹어 재미나게 읽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등학교 때 [초콜릿-신들의 열매]이란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음식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침 학부 때, 교양과목의 다양성이 부족한 우리 학교에도 인류학 교수님이 오셔서 <음식의 인류학>이라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수업에서 [설탕과 권력 Sweetness and power]와 [포 피시 Four fish]라는 책과 [Food Inc.]라는 다큐멘터리를 접했다. (이 다큐는 나중에 책으로도 만들어진 듯 하다. 한국어 번역본도 나왔길래 첨부한다.)


  이 수업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교수님께서는 !쿵 족의 지방에 대한 애착에 관한 짧은 칼럼으로 학기 첫 수업을 시작하셨었다. 수렵채집민이 지방을 어떤 식으로 귀하게 생각하는지 읽자마자 Food Inc.에서 보여주는 현대 축산업의 폐해와 몬산토를 비롯한 대규모 다국적 종자 회사들이 농민들의 삶을 손아귀에 틀어쥔 모습을 접하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당연히 다음 순서는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 Beyond beef]였는데...


  나중에 자세히 리뷰를 쓰려고 벼르고 있지만 언급한 김에 짧게 평을 적자면, 이 책은 도살장의 광경을 끔찍하고 과장되게 묘사함으로써 축산업에 (정당하지 않을 정도로) 나쁜 이미지를 씌우려 하고, 소 축산단지를 없애면 자연스럽게 인류의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비논리적인 주장이 많아 그다지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그러니까 12월 초 쯤에 갑자기 책에 대한 욕구가 폭발해서 알라딘 이용법과 북플도 알게 되고 서점에 들러서 책도 여럿 발견하고 구입했다. 아직 학생이라 수중에 돈이 많지는 않아서 (그리고 쓸데없이 책 고르는 데에 까다로워서) 고르고 고른 책들만 구입했는데, 그중 음식의 역사에 대한 책들은 아래와 같다.

  이 중 [빵의 역사]부터 읽고 있는데, 독서의 즐거움이 흘러넘칠 지경이다. [육식의 종말]은 저자의 주장이 비약이라고 생각될 때마다 멈추고 분석하게 되어서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는데 (잘 비판하기 위해서는 비판의 대상에 대해 아주 thorough하게 알고 분석해놓아야 한다는 또 쓸데없이 엄격한 원칙을 가지고 있어서) [빵의 역사]는 사소하지만 무척이나 재미있는 지식들과 의견들이 계속 멈추고 음미하고 감탄하게 해서 느리게 읽고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누들 로드]라는 KBS 특별기획 시리즈도 무척 재미있게 시청했었다. (지금 찾아보니 책도 나왔길래 첨부한다) 종합하니, 이번에 구입한 책들까지 모두 읽게 되면 , 국수, , , 물고기, 그리고 설탕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다룬 책이나 영상을 한번씩은 본 것이 되겠더라. (혹은 ), 돼지, , 소금, 후추 및 향신료, 그리고 커피의 역사에 대한 책들까지 하나씩 골라읽으면 인간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주요 식량들에 대해서는 얼추 이해하게 되지 싶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신 분들 중에 위의 식량들에 대한 좋은 책들을 알고 계시는 분들은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인간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것이 먹는 것이니 각종 식량들의 역사를 알면 역사와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고, 사소하게는 누구와 무엇을 함께 먹든 나눌 재미난 이야기가 몇 개 쯤은 생길 것이라는 게 '식량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고 싶은 이유다. 

  아니면 사실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말한 '무용한 지식의 즐거움'을 즐기면서, apricot의 어원이 precocious (조숙한; 살구는 다른 과일보다 이른 시기에 익는다)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살구는 더 달게 느껴진다는 그의 말처럼 내가 지식을 통해 모든 음식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라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ㅎㅎ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1-10-13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명의 : 심장에 남는 사람 명의 1
EBS 명의 제작팀 엮음 / 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자궁을 `들어낸다`라고 써야 할 부분을 `드러낸다`라고 쓰는 등의 극히 초보적인 맞춤법 오류가 심심찮게 보인다. `2조억 개`라는 없는 말이자 매우 틀린 수치-재생불량성 빈혈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수치가 모두 현저하게 내려가는 병이며, 평범한 사람의 총 백혈구 수는 약 200억에서 600억 개 정도이다-도 보인다.
암 협회의 로고에 게가 등장하는 이유도 잘못 설명했다. 암이 cancer라고 불리게 된 것은, 최초로 이름붙인 사람들이 유방암의 잘린 단면이 게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암이나 게의 속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구글링은 고사하고 영문 위키피디아 `cancer`페이지 중 `history`항목만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지식이다.
자궁암 편에서는, 여성들이 자궁을 `여성의 근본`이라 여긴다는 뜬금없는 말도 나온다. 초등학교에서도 성호르몬을 내놓고 난자를 성숙시키며 여성의 특징이 발현되는 데 중요한 것은 난소라는 것을 배운다. 대체 어느 여자가 난소도 아니고 자궁을 여성의 `근본`이라 여기는지 묻고 싶다. <명의>의 작가님이 여자분이라는 점에서 더 의아하다. 또한 어떤 장기를 여성의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기분이 나쁘다. 그러면 `남성의 근본`은 남근이라고 주장하실 것인가?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think with his balls라는 농담은 실제로 자주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think with her womb나 think with her ovaries라는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 없으니 말이다.
신체에 대해 무지해서, 관리에 소홀해서, 혹은 단지 운이 나빠서 병에 걸리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데 `못난이 자궁은 자기 몸에 관심을 가지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며 환자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말을 쓴 이유는 뭔지도 묻고싶다. 간경화 환자의 딱딱해진 간이나, 백혈병 환자의 비정상적 모양의 백혈구들이 저런 말을 던진다는 식의 표현은 어느 편에도 없었고 오직 자궁암 편에만 이런 말이 있었다.
심지어 `성생활 등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위험인자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까지 있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HPV는 남성에서는 거의 증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여성에게 HPV를 옮기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다. 따라서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HPV 백신을 접종받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여성 청소년에게 HPV 백신이 의무접종 대상이다. 남녀 모두 제때 HPV백신을 맞고 콘돔을 쓰면 성관계로 인해 HPV에 감염될 확률은 한없이 작아진다. 이런 정보 대신 이렇게 쉽게`성관계를 피하라`는 말을 쓰다니...

취재 기획도 좋고, 병원에서 환자와 의사들을 취재하고 어려운 의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알겠다. 하지만 책을 제대로 된 감수도 없이 오타와 오류와 편견을 잔뜩 담은 채로 내는 바람에, 나는 이 책에 아주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환자들과 의대 교수님들이 솔직하게 나눠준 이야기와 감정들에 공감해 여러번 눈물짓고 탄식했다. 그 이야기들은 참 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차마 별 하나를 주지 못하고 두개 주었다. 출판사가 의료계 종사자 몇명과 편집자와 함께 이 책을 개선해 개정판을 냈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1-0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 다큐프라임 제작팀이 만든 <짝짓기>라는 책도 사소한 오류 몇 개 있어요. 다큐는 잘 만들면서 책을 허술하게 만드는 것을 보면 대필 의혹이 살짝 들긴 합니다.

망고林 2016-01-04 22: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친구 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EBS 다큐멘터리 팀이 내놓은 다른 책에도 흡사한 문제가 있군요. 저도 다큐멘터리 <명의>를 몇 편 흥미롭게 본 뒤에 이 책을 읽어서 더 아쉬웠습니다. 좋은 책을 만들고자 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영상 만드는 내공이 책을 만드는 일에 통하지는 않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