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다큐멘터리 [How violent are you?]를 시청했다. 한국어 제목은 [당신은 어떻게 폭력적인가]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How를 '어떻게'로 번역한 구글번역기보다 못한 방송사의 번역 담당에게 큰 분노를 느꼈다=_= 

How stupid are you? 

당신은 어떻게 멍청한가? 

라고 쓴 메일을 보내고 싶었지만, 이 아주 흥미로운 다큐를 무료로 봤으니 여기에 [당신은 얼마나 폭력적인가]가 옳은 번역이라고만 쓰고 넘어가기로 한다. (근데 정말 이해가 안 가긴 한다. 번역이 잘못된 것만 문제가 아니라, 당신은 어떻게 '형용사'인가 라는 말은 그냥 한국어로도 말이 안 되는 문장인데.) 

사실 자막도 엉망이어서 애써 자막을 무시하며 봤다. IPTV에 자막 끄는 기능이 생겼으면 좋겠다.


내가 나쁜 번역에 대해 느끼는 분노는 제쳐놓고, 프로그램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내재되어있으며 이는 보통 사회화 과정을 통해 억제된다. 다만 생각보다 손쉽게, 사상의 주입이나 자극-보상 훈련 혹은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이 억제는 풀릴 수 있다.'가 되겠다. 

흔히 사춘기 즈음 폭력성을 습득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아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3살 아기들이 가장 폭력적이며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이런 본능을 제어하는 회로가 두뇌의 전전두엽에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전전두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일 앞부분, 즉 이마 바로 밑에 존재해서 급가속과 급감속을 경험하기 쉬운 차 사고에서 가장 쉽게 부상당하는 부위라고 한다. 차 사고를 겪은 뒤 갑자기 성격이 바뀌는 경우는 대부분 이 부위 부상 때문이라고.

프로그램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기 인형 두 개를 이용한 수면 박탈 실험에 참여한 프로그램 진행자의 발언이었다. 아기 인형들은 실제 신생아의 행동을 따라해서 랜덤하게 엄청난 볼륨으로 울기 시작해서 특정 조치들이 다 취해질 때까지 계속 울게 되어있었는데 (그리고 모든 조치를 다 취해도 그냥 기약 없이 계속 우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았다...덜덜), 수십시간 째 잠을 한 숨도 못잔 진행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며 '연구진이 아기가 더 자주 울도록 세팅을 바꿔놓고 갔어요'라고 하고는 이후 실험 종료 때까지 계속 '아기들이 아니라 연구진에 대해 큰 분노를 느끼고 있다. 이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연구진은 실험 내내 아기의 세팅을 바꾸긴 커녕 아기 인형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자신을 '평화주의자'라고 말하며, 살면서 단 한번도 육탄전을 벌인 적이 없다는 진행자였다. 수면 박탈이 고문의 한 방식일 만큼 스트레스가 심한 조건이긴 하지만, 아무런 물리적 고통이나 실제 사람과의 갈등도 없이 심지어 자신이 자청해서 참여한 실험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도 이런 피해망상을 만들어내고 분노할 대상을 찾아 화를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게 아주 신기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혐오 발언들이 피해망상 혹은 (혐오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 이루어질 것이라 헛되이 기대하는) 희망사항을 기본으로 깔고 있고, 진짜 문제의 핵심이 아닌 쉽게 분노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통제된 실험에서도 같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아하! 하는 깨달음과 허탈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런 혐오의 방식이 높은 스트레스 하에 놓인 인간의 기본 반응 방식이라면, 모든 사람이 스트레스가 적은 사회를 만들기 전에는 혐오는 끝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나마 교육과 사회화 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아이들을 폭력성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울 수 있고, 각종 사회적 장치들을 통해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을 예방하고 발생했을 경우 치료할 대책을 마련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희망인 것 같다. '교육'과 '시스템'이 앞으로의 인간 사회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두 키워드일 것이다.

모든 인간의 본성에는 폭력성이 존재하며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폭력성은 쉽게 억제될 수도 있지만 쉽게 고삐가 풀릴 수도 있다는 과학적인 지식은,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현재의 처벌 위주의 제도가 얼마나 잔인한지 알려준다.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더라도 이런 쉬운 실험만으로도 범죄와 범죄자에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미 여러 생물학/인류학 지식을 통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협동은 우리의 생존 본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설에는 항상 회의적이었고, 영아 살해 현상이나 사회적 협동을 간접적 유전자 전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계산식들을 공부하면서 인간이 협동적일 수는 있으나 '선하다'고 표현할 만한 성질은 타고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폭력성을 띠는 개체들이 살아남아 현생 인류가 된 것은 폭력성이 어떻게든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폭력적 본성이 발휘된 사건들 중에는 우리가 사악한 범죄라고 할 만한 것도 있겠지만 보호 혹은 희생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본성, 혹은 행위에는 선함도 악함도 언제나 공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힌두교의 세계 창조 신화에서 세상 만물이 '에너지' 혹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묘사하는 등 현대물리학적 발견들을 암시하는 내용이 다수 발견되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신을 섬겼다. 힌두교 신화와 현대물리학적 발견의 일치는 우연이겠지만,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그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혜에서 나온 것일 것 같다.


일단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고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고, 아직 사놓고 못다읽은 인류학 책들-인류의 기원, 사피엔스, 숲 사람들 등-부터 읽고 탐내기로 했다. 3월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점점 책 읽을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게 느껴져 마음이 급하다. 책이든 영상이든 접하고 난 뒤에 그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그 경험을 무척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아 알라딘에도 다른 매체에도 즐겁게 쓰고 있었는데, 글 쓰는데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고 책 읽을 시간은 점점 바닥나고 있어서 조금 초조해하고 있다. 글은 당분간 접거나 빠르게 대강 써서 비공개로 남겨두고 일단은 책을 읽는데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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