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 맥베스 (5막 5장) -


사람은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가 근무하게 될 사무실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이 있으리라는 예측은 못한다.


올해 어느 날 퇴직을 십여 년 앞둔 나의 직장생활에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면 노인회 총회가 있었는데 놓치고 있다가 상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매끄럽지 않은 상황에서 따라갔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상사는 그런 노인회 총회에 빠짐없이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코딱지만 한 방에 다닥다닥 십여 명의 회원들이 앉아 계셨다. 총 28명이 모이신다고 한다. 상사는 한가운데 서서 어제도 했던(어제도 무슨 노인당 총회) 신년인사를 미주알고주알 한다. 들어보니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내가 말해도 저것보다는 잘하겠다고 생각하며 , 나와 여직원은 방 구석진 곳에 앉아 있는데 한분 두 분 계속 들어오신다. 결국 방이 비좁은 상황이었다. 회원들이 원을 그리며 앉아 있는 그 한가운 앉아 집중 시선을 받을 수 없어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나 여직원을 끌고 그냥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밖에서 여직원이랑 잠시 있는 사이 , 5분도 지나지 않는 순간이었다. 상사는 문을 드르륵 열면서 버럭 한다. ‘노인분들이 말씀하시는 거 적어야지. 여기 잡담하러 왔냐고,,‘그래서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엉거주춤 상사 옆에 서 있게 되었다. 그건이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이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사실 상사의 기분은 경로당 가자고 사무실에 내려왔을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며 ‘오늘 노인회 회의 어느 팀에서 가나?˝ 하고 말했는데, 담당자인 여직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상황을 인지 한 후 내가 일어나, ˝ 우 우리 팀에서 가야 줘,,˝하고 말했고 그때야 여직원은 부스스 일어나 같이 따라왔다. 그때 난 이곳에 온 지 딱 1주일 되었고 상사의 성향이나 그런 분위기 파악에 미쳐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가 않은지, 경로당을 나와서도 차 타고 가는 내내 뭐라고 난리다. 오후가 되었고 그 오전에 사건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을 때 상사는 직원을 시켜 날 호출했다.


작정한 모습이었다. 책상에서 일어선 채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유달리 붉으락 낡으락 (마치 낮술 한듯한 얼굴로) 한 데다가 염색을 진하게 했는지 머리색은 아주 진했다. 입모양은 분노와 뭐 그런 걸로 사극에서 마치 ˝저년의 주리를 틀어라 ˝ 하는 뭉개진 듯한 모양새로 경로당 옆 골목 쓰레기를 누가 버렸는지 색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경로당 노인의 건의사항이 바로 쓰레기를 못 버리게 해 달라는 것이라며 상사는 자신의 지시의 뒷배경을 말했지만 그건 그렇게 강력한 지시를 내릴만한 건은 아니었다. 불편한 심기가 감정적으로 표출된 지시였다.


그곳은 골목 어귀로 쓰레기 상습 투기 구역으로 익히 알려진 곳이었고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 쓰레기가 자주 나와도 치워주는 곳이었다. 그 앞에 불법투기 금지 안내판이 버젓이 붙어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인근 거주하는 주민들은 오히려 그곳이 쓰레기 버릴 수 있는 구역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루 이틀 일어난 건의나 사건도 아닌데 생사 결단이라도 할 듯 아주 불이 붙은 모습이었다. 쓰레기를 투기하면 미관상 보기가 싫으니 미화원이 군말 없이 치웠었고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사의 신념은 ‘ 투기자를 알 수 없는 것은 치워라‘ 이기에 소쿠리, 광주리에 누가 이름 써서 버리는 건 아니기에 그렇다면 그것은 미화원이 치워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그런 식으로 수년간 해온 것이다.


감정 섞인 지시를 받고 어두운 발걸음으로 현장가 보니 소쿠리 , 광주리 등 누가 버렸는지 알 수 없는 박스들이 있었다. 그건 투기자를 알 수 없는 것이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거 같았다. 시간은 5시가 넘었는데 미화원을 소집하라고 한다. 미화원은 연가 내고 치과에 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1월 중순의 겨울은 무지도 춥고 길었다. 이제 막 어둠이 내리려고 하는 차에 그자의 분노가 더 극에 달아 걷잡을 수 없고 그게 이곳에서 앞으로의 내 생활을 알려주는 전조가 되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이곳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까?‘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 한켠에 자리 잡았다.


그 후 상사는 지속적으로 청소일을 지적했고 그와 관련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일일이 나열하기도 피곤할 정도의 일이었다.


그러고 일주일이 지난 즈음, 상사가 참고한다며 팀별로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서 내라고 했다. 하지만 보통 그런 오더가 떨어졌는데도 서무로부터 며칠까지 제출하라는 아무런 언급도 없는 데다가 연초라 다른 일로 너무 바빠 정신없이 시간은 가고 즐거운 금요일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오후 다섯 시 반쯤 서무가 격앙된 얼굴로 이층 상사의 룸에서 뛰어 내려오면서 상사가 팀별 업무 매뉴얼 주고 퇴근하라는 전갈을 했다.(매뉴얼 제출하기 전에 퇴근하지 말라는 말이다. 매뉴얼 도대체 그게 뭐라고 마치 학교 다닐 때 숙제 제출 못 한 사람 집에 가지 말라는 뭐 그런 게 떠올랐다).


불금 퇴근을 앞두고 벌어진 상황서 다들 술렁술렁했다. 직원들이라고 해봤자 고작 십여 명 직원이다. 누군가는 데이트 약속이 잡혀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술 약속이 있을 것인데 설레는 그 황금시간대에 악마는 인간의 약점을 잡아서 괴롭히려는 듯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옆 팀 팀장이 같이 올라가서 상사한테 부탁을 하자고 제안했다. 주말에 해놓을 테니 직원들을 보내자는 것이다. 사실 노인회 사건 이후 상사의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에 실망감을 가지고 있어서 대면하기가 꺼려졌다. 옆 팀장 혼자 교섭하고 오라고 보냈는데 다행히 통과되어 모두 퇴근했다.


기분은 다운되었지만 그렇게 끝난 나 싶었다. 집에서 소파에 편하게 누워있는데 서무로부터 갑자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상사가 우리 팀 업무 매뉴얼을 찾는다고 한다. 아직도 사무실서 퇴근을 안 하고 상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었다. 황당했다. 다른 팀장이 올라가서 말하지 않았냐고 서무에게 말하니 그건 그 팀의 상황이고 우리 팀은 팀장인 내가 말하지 않았기에 주고 갔어야 한다는 상사의 말을 전했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상사에게 매뉴얼을 주말에 해놓겠다고 말한 팀장이 자기 팀만 말한 게 아니고 전체 직원을 대변해서 한 말인데 상사는 그 팀만 인정했다. 남들이 다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상사 혼자만 다른 생각을 한다면, 아랫 직원들의 사소한 애로에 대해 어떤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고 공포가 일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 그런 사람과 같은 조직에서 일을 한다는 것,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못하고 공감을 못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서무는 직접 내가 상사에게 말씀을 드려야 할거 같다고 했다. 상사는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다고 했다. 그 상황이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이 조직생활 28년 차에 퇴직을 10여 년 앞두고 내가 무엇이 두려울 것이며, 뭔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대화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남자 팀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쉬운 데로 그에게 부탁해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팀도 주말 해 해놓는다는 말을 해주라고 부탁했다. 그가 전화를 했더니 상사하는 말이 ‘네가 팀장이냐?˝ 했다고 한다.


상사의 목표는 나였나? 정말 내키지 않는 전화를 돌렸더니 상사 왈, ‘ 그 남자 팀장이 우리 사무실 대표냐?, ‘그 남자 팀원이 팀장이냐? ‘ 며 팀별로 언제까지 한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그렇게 퇴근해버린 것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당최 상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귀에 들려오지 않은 상태로 ,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급하게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죄송하지 않은데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죄송하다고 했다는 것에 대해 후회를 했다. 죄송할 상황이 아닌데 죄송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은 70년대도 아니고 사회주의 국가도 아닌 2020년의 한국이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갑‘질 아닌가? 너무도 일방적이고 터무니가 없다. 무조건 억지 써서 명령만 내리면 되는지 아나보다. 아직도 혼자 구시대의 낡고 비툴 어진 상관 행세를 하고 있다. 퇴직이 이제 일 년도 남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온갖 분노와 공포로 휩싸여 쌕쌕거리고 있는데 30분 후 그러니까 9시쯤 단톡 방에 상사의 메시지가 올랐다. ˝ 모두들 주말 잘 보내고 어쩌고˝ 하는 말이다. 갓 들어온 20대 남직원은 감사의 응대를 했다. 이해 불가한 상황 끝에 이런 메시지라니...‘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도 아니고 너무 이해가 안 돼서 단톡 방을 나가버렸다. 그 단톡 방은 얼마 전 서무가 단체회식 때 점심메뉴 조사차 만든 곳인 줄 알았는데 기존에 존재했었나 의문이 들었다.


그 후 상사는 가끔 직원들 전체 멜로 써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보내고, 같은 내용을 단톡 방에도 올려놨었다. 깡마른 형태에 음습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치 은둔의 시간 중 타인에 대한 증오와 복수만을 갈고닦은 사람처럼 모든 것에 다소 신경질적이고 편집적이다.


내가 단톡에서 나가고 며칠 후 서무가 다른 일로 날 불러들였고 어느 평온한 주말 저녁때쯤 상사는 유튜브 음악을 올렸고 그런 이중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껴 난 단톡 방을 또 나갔다. 그 후 상사 카톡의 프사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진한 검정 염색머리의 화난 생쥐상의 얼굴에 검은색 양복 트레이드 마크를 프사로 해놓은지 내가 알기로 한몇 년 된 거 같은데.


알고 보니 상사가 나를 카톡에서 차단한 것이었다. 다른 팀장한테는 보인다는 것이다. 그 후 상사는 단톡 방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단톡 방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도 좋다‘라고 했다는데 그렇게 말했는데 젊은 직원들이 쉽게 나갈 리가 없다. 그는 다른 곳에 근무할 때도 직원들이 미우면 책상에 책으로 담을 쳐서 다른 직원들과의 벽을 쌓았다고도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전화 수신거부 및 카톡 차단은 예사인 듯했다. 상사의 내부에는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철없이 비뚤어진 자아가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힘든 2월을 보내고, 3월, 4월 사이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다 세세하게 기록할 수 없다. 나는 은밀히 그 소굴을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후 그 탈출 시도는 어떤 운명의 이끌림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 후 그렇다 할 사건이 없어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 지속될지 알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듯한 일이 일어났다. 이틀 연가를 내고 돌아온 상사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나와 다른 팀장급 직원의 출장 결재를 안 하는 것이다. 그러다 며칠 후에 결재를 하고 또 올리면 다른 직원 들것은 다 하고 나와 팀장급 직원 것만 빼놨다가 또 며칠 후에 하는 것이었다. 계속 굶기다가 며칠에 한 번씩 빵을 던져주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주인에 대해 너무도 감사해하는 하인의 모습을 바라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희들이 뭔가 잘못을 했으니깐 그랬겠지라는 ‘타인의 처지‘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길 바랄 뿐이다.


지난 시간을 되돌려봤다. 노인회 사건 이후 그자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점, 어쩌면 권위를 중요시하고 ‘갑‘이라는 위치와 자신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사람에게 상대가 자기가 상대에게 기대에 상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그 분노는 온갖 다양한 형태로 보복된다고 하는데 지금 그가 그걸 자행하고 있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불안˝ : 알랭 드 보통


상사는 그 자리에 오른 지 2년 남짓이고 내년 상반기면 그자의 운명도 끝난다. 그런데도 엄청난 권력을 손에 거머쥔 것처럼 지금 출장 결재 하나로 직원을 약을 올리고, 의욕 상실하게 하고 무기력에 빠뜨리고 있다.


갑자기 1월 중순의 일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든 와서 대면보고‘를 하라는 것이다. 문서로 출장 보고, 메모보고를 올려도 다 못마땅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올라와 ‘아뢸 것‘을 바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뚤어진 권위의식과 이해할 수 없는 저 비틀린 감정의 긴 심연 끝을 봐버린 이상 대면은 두렵다. 적응할 시간도 없이 직원을 막다른 길로 내몰아놓고는 직접 와서 ‘아뢰지‘않는다고 치졸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다. 소통 자체가 불가하게 막을 치고 차단을 해놓고는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직접 와서 아뢰게 하는 것의 진짜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출장뿐 아니라 문서도 며칠 후에 결재완료 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데로 해주지 않는 보복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보복이라는 자체로 생각 못하고 네가 미우니 결재하기 싫다는 유아기적인 생각을 했을 수 있고 자기한테 더 이상 결재 올리지 말고 너희들 알아서 하란 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상사에게 올라가 왜 내 출장 결재를 안 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이유는 내가 그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기가 판단한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을 절대 바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말 한다는 것도 참 비참한 것이다.


상사에게 그런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경우 그는 또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합리화시키려 할 수도 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마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 최면술에 걸려들지 않는 이상 그의 궤변에는 절대 동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대면 자체가 정말 위험스러운 것일 수 있다. 이미 너무도 불합리하고 황당한 행위를 했기에, 왜 결재를 안 하냐고 따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되어 이것을 공개적으로 이슈화했을 때 나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피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도시와 달리 시골 사회라 조직이 상당히 경직되어 있고 합리적이지 않고 다분히 칙칙하다. 게다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줄 만한 믿을만한 시스템이 없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오죽하면 그랬냐느는둥, 그럴만한 일이 있지 않았겠냐는등 세상의 눈으로 보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잣대에 의해 그릇된 평판으로 상당기간 피해를 볼 수 있다. 게다가 그자는 내년 6월 말에 끝난다.


나는 그렇다지만 오십 대 후반의 팀장급 남자는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얼굴은 검은빛으로 변해가고 가뜩이나 당뇨까지 있는데, 자신의 출장이 최종 결재가 안되어 빨간색으로 뜨는 걸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오래 못 살 거 같다고 한다. 하루에 그는 파우치로 된 약을 네 봉지 이상 먹고 있다. 자리가 바로 내 뒤라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정말 누구 하나가 쓰러져야 관심을 가져줄 것인가?


몇 번이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이런 상황에 대해 몇 번이고 읍소를 했었다. 50대 중반의 나랑 같이 출장 결재 거부당한 사람은 그와 대적하거나 그를 고발하거나 할 수 있지만 정기인사로 인해 헤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신경 쓰면서 자신의 건강을 잃고 싶지 않다고 한다. 결국 자신을 최종 결재로 전결처리를 하며 출장 결재를 했다. 일단 자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죽는다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이다. 몇십만 원 투자해 미간에 보톡스까지 했지만 극심한 상사 스트레스로 인해 그것도 소용없을 정도로 미간이 심하게 파여갔다.

그동안 있었던 무수한 사례는 많지만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최근 기록만 되새기고, 그중 잊을 수 없는 사건만 남아있고, 망각의 힘에 의해 사건은 희미해져 가지만 상처로 남아있다. 바뀐 건 없고 사람은 그냥 남아있고 영혼에는 복수의 날과 인과응보를 떠올려봐도 우린 능력이 없다. 도대체 전생에 뭔 죄를 지었나? 앞으로 얼마나 큰 영화를 보려고 이 꼴 당하 나하는 무수한 상념들이 영혼을 지치게 한다. 시간이 지나가고 버티는 것만이 답인가.


그동안 그 자에 의해 당한 사람은 모두 은밀히 숨죽여 자기 하나만 조용히 살았나 보다. 사건을 들출수록 들춘 사람까지 까발려져 남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게 두려워 피해자가 조용히 숨죽이며 사는 사이 악마는 조금씩 자신의 힘을 계속 키워갔을 것이다. 아니 그는 이 조직에서 팀원들과의 관계로 소문이 큰 사건들의 주인공이었음에도 개선이 되지 않고 그 행태는 반복적이다. 그런다는 건 그가 절대 바뀌지 않는 고착된 인성을 가졌거나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직원을 굴복시키는 그릇된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 사람처럼 직원들의 어떤 감정에도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얼마 남지 않는 퇴직일까지 덕을 베풀어도 부족한 시간에 자신이 가진 그 권력이 막강한 것이라 생각하고 틈만 나면 나와 또 한 명을 상대로 지루한 싸움을 걸고 있다. 아마 바뀌진 않을 것이다. 바뀌려면 진즉 바뀌었을 것이다. 낼모레 60인데 지치지 않는 그 악의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 너절한 짓에 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너무도 피곤하다.


상사는 이 직종보다는 정신 고문 기술자의 직업을 가졌더라면 더 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인데도 위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바람 나는 직장 운운하며 실적위주 평가에만 집중되어 있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숨죽인 조직에 무슨 창의적으로 새로운 일을 추진할 수 있을까? 그냥 인맥 만들기에 집중하고 웅크린 채 행여 나에게 갑질이 행해질까 걱정하며,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행운이라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게 끝이 아니고 시작일수 있다. 앞으로도 수시로 자신의 기분이 어긋나면 그 짓이 반복될 것이다. 이제 나는 앞으로 수시로 가해질 수 있는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강하게 단련시켜야 한다 근육질의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마치 영화에서 보면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단련시키는 복수 종결자처럼 말이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시간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만한 인물이 못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악행은 복수로 연결될 뿐


그러던 어느 날 군청에서 K라는 남자가 사무실을 업무상 이유로 방문했다. 나와 함께 정신적인 피해를 수개월 동안 보고 있는 직원과 K랑 셋이서 담소를 나누다가 K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K가 한때 그 상사와 근무하면서 전 고을이 떠들썩할 정도의 폭행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방적으로 맞은 K는 112에 신고를 했고 그 사건은 최종 검찰로 이송되고, 검사 앞에서 피해자 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자식이 셋 딸린 K는 결국 그 상사를 선처했다고 한다. 자신이 이 조직을 떠나면 모르겠지만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에서 최종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상사가 잘못했다고 자기한테 빌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후 상사는 그런 일 겪은 후 높은 기관에 있는 사람의 배경으로 압력을 넣어 현재 위치로 승진을 하게 되었고 , 승진한 후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고 한다. 목은 물론 어깨도 깁스를 했고 걸음걸이 또한 아주 경쾌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는 개선장군 같았고 수년 동안 입어온 검정 양복을 벗어던졌다. 상사와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K는 미리 예측은 했지만 너무 달라진 걸음걸이, 깁스 한 어깨와 목을 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K는 그렇게 그 사건에 대한 썰을 풀던중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의 이름을 말했다


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 검사의 이름이 나랑 같이 피해를 보고 있는 직원의 이름과 두 번째 글자까지 비슷했고, 그 직원의 핸드폰엔 그 검사의 이름까지 저장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집안이라고 한다. 그러자 어떤 하나의 ‘업보‘ ‘복수‘ ‘인과응보‘‘ 내가 전생의 뭔 죄를 져서 ‘등등이 떠올랐다. 상사의 뇌리에 그때 폭행사건을 취조했던 담당 검사의 이름이 자신과 함께 근무하는 직원의 이름과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어떤 가해자 트라우마를 느끼고 이유 없이 싫은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고 이미 그렇게 틀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내가 구상해본 지금까지 사건 전말과 앞으로 닥쳐올 이냐기를 가상의 시나리오로 구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금껏 상사는 자신이 가해자가 된 몇 년 전 폭행사건의 담당 검사의 이름만 들어도 가해자 트라우마가 생길 판에 새로 온 팀장급 직원의 이름과 검사의 이름이 비슷했다. 그 직원이 그냥 이유 없이 싫어졌다.

그 후 사소한 일로 코 투리 잡고 대놓고 무시하며 횡포를 일삼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 사건 당시의 피해자가 방문하여 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면서 팀장급 남자는 그 당시 폭행사건의 담당 검사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검사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핸드폰 번호도 저장되어 있다. 팀장급 직원은 그 검사에게 전화하여 자신이 그 상사 때문에 힘든 상황을 하소연한다 딱한 사연을 듣게 된 검사는 상사에게 안부전화를 빙자한 전화를 해서, 지금 그 직원은 자신의 집안 동생이며 잘 봐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을 들은 상사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온몸을 부르르 떤다. 은밀히 자신의 트라우마를 간직하며 괴롭히고자 하는 일들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제 최종 승리자는 그 직원이 된 것이다. 결국 상사는 예견치 못한 검사의 전화 이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악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 덕에 나도 평화로운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는 발령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우리에게 행했던 악행의 곱절을 그곳에서 돌려받고 고통스러워하다 초라한 퇴직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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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일손돕기를 많이 해봤지만 인삼꽃따기는 처음이다. 과거엔 오디,복분자,블루베리 따는것이 전부였다. 사실 블루베리나 오디도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만 일손돕기를 맡긴다. 따면서 처음에 살짝 몇개 먹어보기도 하지만 금방 질렸다.

농촌일손돕기를 이렇게 하루종일 계획 했다는 말에 아침엔 조금 놀랐다. 부담이 갈까봐 주로 요즘은 농가에서 아무것도 준비 못하게 한다. 어떤 농가는 우리한테 맡겨두고 외출을 해버린다. 하지만 오늘은 농장주도 같이 작업했다. 좁은 공간에서 허리와 다리를 구부린채 꽃을 따 버려야 하기에 노인분들이 일하기엔 어려워 일손 구하기가 어렵다도 한다. 우리가 가니 기다렸다는 기색이었다. 게다가 10명 맞춰오라는 농가의 요구사항이 있었다. 직원은 여기 저기 긁어모아도 9명인지라 나름 고민을 했다

속속들이 꽃을 따줘야 영양분이 꽃으로 안가고 인삼뿌리쪽으로 간다고 농장주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잡초같이 생긴 작은 꽃이 은근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분명 다 땃다고 하고 지나갔는데 되돌아 온 길에 다른 각도에서 보면 꽃이 보인다. 세번이나 확인했는데도 또 보면 꽃이 보인다. 왔다갔다하며 세밀히 뒤져보며 꽃을 골라냈다. 잎사귀 속에 숨어 있어서 마치 머리를 뒤집어 이 잡는 느낌이다.

시간이 얼마 지난거 같지 않았는데 쭉 따다보니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힘들지만 근육 운동에 도움이 되겠지 하는 기대로 노동을 했다.

오전엔 갑작스런 노동에 허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야산이라 화장실이 없어 급히 차를 몰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무실에 다녀왔다. 오디나 복분자 밭에서는 누구한명 없어지면 ‘도대체 어디갔냐고‘ 마치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서로 감시할텐데 모두 차광막 속에 들어가 있어서 누가 나가고 들어오는지 전혀 모른다.

오후에 나의 목표치 두줄끝내고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농장주가 나타나셨다. 지레 놀라 다하고 쉬고 있다니 웃으며 쉬라 하는데 진짜 본 마음은 아닌듯해서 일어섰다. 내가 땄다고 생각한 그 줄을 보며 잘못 땄다고 하시며 딸때 잘 따야 한다고 안그러면 두번 일이라고 하신다. 그러다 대가 끊어진 인삼을 발견하고 이렇게 밟으면 안된다 하시기에 원래 끊어진거였다고 했다. 다시 보시더니 ‘썩었네‘하신다. 아무래도 인삼꽃따기 일손돕기는 더욱 신중해야 할 거 같다.

사무실에서 간식이라고 준비한건 쵸코파이 한상자와 카스터드 한상자, 알로에 덩어리가 둥둥 떠나니는 음료수와 오렌지 색소음료 한통이었다. 초코파이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뉴스가 갑자기 떠올랐다.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언제 끝날지에 대한 말이 없다. 농장주가 이제 되었다고 가라고 해야 끝난다는 직원도 있고, 4시까지 하면 된다는 직원도 있었다. 농장주는 4시안에 가라고 할거 같지 않다. 오늘 일하는 직원중에 제일 노령인 나는 힘들어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인삼밭 위 언덕으로 널판지로 사다리를 해놓은 곳을 올라간후 잡초로 무성한 무덤 두개를 가로질러 또 괴력을 발휘해 언덕을 올라갔다. 차량이 주차된 곳 앞에는 집 한채가 있었는데 진돗개와 비슷한 생김새이나 전혀 짖지 않은게 이상했다. 혈통불명의 개는 나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차량을 이용해 사무실로 탈출했다. 두고온 직원들에게 미안하지만 어쩔수 없다.

어찌되었건 농사를 짓는 사람들 대단하게 느껴진다. 농사 짓다보면 집념도 없어지고 하루 고된일 마치고 저녁먹고 눕자 마자 달콤한 꿈나라로 빠져들거같다. 농사일에 집중하느라 세상살이 인간관계등 그런것들로부터 자연히 멀어져 사람이 참 순수해질거 같은데 그건 나만의 생각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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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 (리커버 특별판)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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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기욤뮈소의 책에 빠져 그의 작품들 모조리 읽은 적이 있다. ‘빅픽쳐‘를 쓴 더글라스 케네디와 비슷해서 더글라스것도 모조리 읽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더글라스 작품이 더 끌린다.

제목이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이라고 해서 단순히 무슨 비밀스런 삶인가 했는데, 한 작가 개인의 비밀이야기 같은것이었다. 어느날 유명작가가 절필을 선언하고 한 섬에 오는데 , 또다른 나라는 화자도 그 섬에 서점종업원으로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서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벌어지고 결말에선 작가가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가 밝혀진다. 어쩌면 스토리를 이렇게 연결시켜 소설을 썼는지 대단하다. 실제 있었던 사건까지 가미해서 스토리를 짜내는데다가, 그 스토리속에는 인간사회속에서 ‘인과응보‘나 ‘운명‘ ‘복수‘등의 요소가 있다.

소설속 작가인 ‘네이선‘이 꼭 기욤뮈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거 같았다.


* 책속에서 새겨둘 좋은 문장은 꼭 발취해놓고 내 삶에도 적용시켜야 한다.

276. : 요컨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넋 놓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사는 동안 적어도 한 번쯤 운명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잖아. 카이로스는 삶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하기도 해. 대체로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지극히 짧은 법이야. 우리네 삶에서 똑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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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 -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 걸어본다 10
김유진 지음, 김란 그림 / 난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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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을 보니 81년생인데도 소설집 네편을 펴냈다. 33개국의 시인,소설가,번역가등이 아이오와 시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 에 참여했고, 3개월가량 그곳에 머문 일상을 기록한 내용이다.

2015년 아이오와 주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하루하루 날짜별로 있었던 일을 담담히 쓴 내용이다. 작가이기에 언젠가 책으로 나올수 있을것이라는 기대로 기록을 해두었을수도 있거나, 직업상 기록을 해뒀는데 우연치않게 책으로 나왔을수도 있다. 2015년의 나는 40대 중반으로 막 승진을 했고 직장스트레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읽는 내내 나의 2019년 상황이 자꾸 떠올랐다. 전국에서 모인 33명이 한달간 UGA에서 영어연수를 하게 되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간 것이고 한달안에 크게 늘지는 않을것인데 기대를 크게 했다. 게다가 나이 50이 되어서야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 난생처음 해보는 미국 영어연수 였는데말이다. 기관방문시 현지 영어를 온전히 알아들을수 없어서 힘들었다. 영어가 내 귀에 잘 들려오고, 나도 자유자재로 말할수 있었다면 자신감을 얻어 여행자 모드로도 즐겼을수도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다. 그이후로 영어공부는 계속 하고 있는데도 토익점수와 현실사이의 괴리로 괴로운 날들이다.

일반 여행기와는 틀리게 나의 상황과 약간 비슷해서 더 공감하며 읽었고 읽는 내내 작년에 하루하루 기록해두지 않은것에 대해 아쉬움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하루하루를 일기든 메모든 기록해두었더라면 2020년에 브런치작가가 되어 그때 스토리를 연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텐데(사람의 미래는 알수없다..)깜빡깜빡하는 기억력에만 의존해 미국 연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문장이 간결하고 필요한 내용만 있다, 그러나, 내가 연재하는 글은 얼마나 구구절절한가ㅠㅠㅠ

그나저나, 역시 기록이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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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5-21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왜 그리도 힘든 경험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걸 책으로 낼 수 있으니 작가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경험이라도 어떤 사람들은 신세계를 국비로 다녀온다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은 또 그런 것보다 그저 힘들고 피곤함으로 그 시기를 살아내는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만년필이라고 하면 다들 의아해한다. 디지털 시대에 미니멀 라이프 추구하는 세상에 핸드폰에 메모해두면 되었지 무슨 기록이냐고 의아해하며 관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대량의 수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맞춤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수메르인들은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인간은 자신의 뇌 이외에 외부에 저장장치를 활용함으로써 뇌의 용량을 키웠다. 기록함으로써 인간은 뇌를 두배로 사용 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로 기록하는 것도 좋지만 사각사각하는 만년필로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진한 잉크가 펜을 통해 노트 위해 진하게 각인되는 모습을 보면 뇌에도 그 문장들이 동시에 각인이 되는 거 같고 마음은 평온을 되찾으며 평소 자기가 쓰는 글씨보다 더 거룩한 글씨로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만년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한 5년 전이었을 것이다. 업무적으로도 힘든 시기를 막 지나온 상황인지라 마음에도 여유가 있었기에 이것저것 인터넷을 보며 뭐 특별한 것이 없나 하면서 그렇게 우연히 만년필을 알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우연히 인터넷 서핑 결과로 독일제 저가 만년필을 구입하여 조금씩 쓰는 맛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사각사각” “서걱서걱” 때론 스케이트 타듯 만년필 하얀 종이 위에 미끄러지듯 잉크를 머금은 글씨가 완성되는 그 느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마치 그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키 큰 나무들이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오솔길을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며 그 정취를 여유롭게 느끼며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 손에 큰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빠른 필체가 가능한 만년필은 모든 작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본 도구가 아닐까?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도 만년필을 좋아하며 그 글을 썼을 것이다.

만년필 뚜껑을 열 때 별빛처럼 반짝이는 펜촉은 나에게 순수한 힘을 불어넣어준다. 펜촉에서 실올 풀리듯 새어 나오는 잉크가 담당한 활자가 되면 고적한 마음에 램프가 켜진다. 19세기에 출간된 렘브란트 예술을 다룬 책을 읽다가 솟구치는 감흥을 단 몇 줄만이라도 만년필로 적고 싶어 졌다. 만년필은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흑백사진이 인화되듯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벗이며, 심연 속에서 명암을 풀어내는 예술의 연금술사가 아닐까? 만년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느 독일 사람의 사유 도구가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우정의 가교가 되었을 것이다. 「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민병일

저자는 시인이자 어느 출판사 편집일 하다 예술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독일 유학을 갔다. 낯설고 외로운 독일에서 유일한 낙은 벼룩시장을 찾아 고릿적 물건을 구경하고 모으는 것이었다. 맥주잔, 촛대, 할머니의 몽당 연필, 그리고 몽블랑 만년필에 이르기까지 사물에 깃든 영에 대한 단상은 그의 삶과 온전하게 일 체 한 것 같다.

만년필에 관한 책을 골라서 읽은 원인도 있다. 그렇게 명품 만년필 한 자루를 몇 차례 고민한 끝에 들여 버렸다. 그렇게 구입해 놓고도 너무 아까워서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시간만 지나고 있었다. 아득히 젊었던 어느 시절에 그 만년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냥 선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 내 손에 들어온 순간 ‘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진다 ’라는 말을 떠올렸다. 일반 볼펜을 가지고 글을 쓸 때는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아 악필이라 자학하고 있었고, 글씨를 쓰는 행위를 고통으로 여기고 있었던 나의 과거는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사실 물건이란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가의 장식품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생활에 내가 사용하면서 최대의 만족을 얻어야 한다. 삶을 단순화시키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자 하니 꼭 필요한 것은 질 좋은 것으로 구입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물품은 들이지 않고 물건 가짓수도 웬만하면 늘리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은 기부하거나 버리자 삶이 홀가분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최상의 만년필 네 자루를 나의 만년필 애장품으로 종결하고 더 이상의 펜은 들이지 않고 이것만 관리를 잘하자 라는 결심을 굳혔다.

어떤 사람들은 한 자루의 펜만 있으면 되었지 여러 자루의 만년필을 구입할까 의문을 가진다. 막상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이 세상에 잉크가 빨강, 파랑, 검은색만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을 거쳐한 유명한 예술가의 이름을 자청한 황홀한 잉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온갖 다양한 색깔의 잉크를 알게 된 순간 ‘한 만년필에 한 잉크’를 주입하기 위해서 잉크색에 맞는 만년필을 계속 구입하게 될 것이다.


사실 만년필이 내 삶에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우연히 만난 만년필에 빠지면서 뭔가 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글쓰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개인 스케줄 노트에 하루하루 나의 소소한 일정을 만년필로 써가며 색연필로 중요한 부분을 칠하고 마스킹 테이프로 꾸미기 시작하면서 좋은 색연필, 좋은 테이프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개인 스케줄에 대한 기록은 나의 목표를 기록하고 하루 일상에 대한 간략한 일기도 쓰거나 독서노트 쓰는 것까지 발전했다. 독서노트를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또 쓰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했고 그렇게 모아진 독서후기는 개인 블로그에 올리면서 블로그 방문자수도 증가했다. 후기를 쓰면서 와인을 마시며 독서를 하고 만년필로 글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과 일치되는 상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내부에 쌓인 독서기록들은 나의 많은 스토리의 소재가 되었다. 10개월간 참여했던 영어교육에서는 스토리의 소재로 사용하며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를 글로 쓰거나 영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독서후기를 덕분인지 운 좋게 교육체험수기에서도 상을 받게 되었고 후배들을 위한 교육체험 강의할 때에도 만년필 이야기는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 만년필은 나의 인생템이다. 그것으로 연결된 끊임없는 상상력은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영어방송에도 출연하게 하였다.

인간관계에도 궁합이 존재하듯, 사물끼리도 영혼이 존재한다. 아무리 비싼 고급 노트라 할지라도 내가 소유한 만년필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필 감도 좋지 않고 잉크 흐름도 좋지 않고 심지어 쓰고 난 뒷면에 비침 현상까지 발생한다. 만년필과 궁합이 맞는 노트를 찾아 이것저것 사용해보며 최상의 잉크까지 섭렵하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모험과 긴 여정을 끝내고 이젠 내가 소유한 만년필과 맞는 노트에 정착하여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만년필의 잉크를 주입하고 쓰기 시작할 때의 마음은 마치 거룩한 문장의 기록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듯 엄숙하다. 잉크를 세척하고 말리며 내가 이 지구의 원자가 되어 사라지는 날에도 이 만년필은 지구의 종말 끝까지 지구 내에 존재하게 될 것임을 생각해볼 때 약간 두렵기도 하다. 아무리 써도 사라지지 않는 이 신기한 물건의 가치를 생각해볼 때 가만히 모셔두는 것보다는 아무리 써도 닿지 않는 만년필은 영원히 내가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이젠 주변 사람들에게 그 효용성을 설파하고 다닌다. 별 관심 없는 사람도 있지만 , 사용하면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며 잘 쓰고 있다는 사람도 있다. 또 그 사람이 다른 지인에게 만년필 사용의 효용성을 전파하면서 만년필 애호가들이 많아지는 걸 보는 것도 큰 만족감이다. 좋은 것은 나눠야 두배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행을 할 때도 만년필과 수첩은 필수이다. 아날로그 노마디스트인 나는 가끔 방문했던 여행지에 대한 그림을 스케치한다. 한두 시간 외출할 때에도 마치 전쟁에 나오는 병사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챙기는 자세로 핸드백엔 화장품도 만년필 네 자루가 든 고급스러운 필통과 만년필 여분의 잉크를 꼭 챙긴다. 하지만 만년필로 비행기 안에서 그림을 그리려는 목표를 단 한 번도 이룬 적이 없다.

비행기 안에서 긴긴 지루한 시간 동안에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상상력 등을 만년필로 스케치하고 글도 써넣은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나의 오래된 로망이다. 외국의 관광지를 세밀하게 만년필로 그리고 옆에 글까지 가미한다면 최고의 여행 에세이가 될 것이지만 기대와는 달리 실상 비행기를 타고 자리에 착석하면 머릿속을 짓누르는 피곤함으로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십상이었다. 여행 가는 기내에서 여행지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하며 와인을 마시며 여행지를 스케치하고 글을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나의 에세이가 출간될 날을 희망하며 오늘도 난 내 만년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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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5-1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만년필 사랑하고 사용해요!! 저는 몽블랑 한 자루 선물받아서 갖고 있는데 아끼느라(?) 못쓰고 있어요. 근데 공작부인 님은 4!!! 공작부인 님은 어떤 종이 사용하시나요? 저는 도모에리버 사용하는데요. 좋은 종이 소개해주세요~.^^

Grace 2020-05-15 22:4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도 종이에 대한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안써본 수첩이 없을 정도로,,,몰스킨부터 시작해서 로디아,로이텀,옥스포드,미도리,어프로치 등등,,,하지만 그나마 로이텀 다이어리에 쓰는게 제일 만족도가 높지만 다이어리 형식이라 필사하기엔 종이가 부족한듯 하여, ˝문방삼우˝라는 카페를 매일 들락거리며 종이 정보를 보느라 ,,,,어제는 클레르퐁텐을 주문했고, 낼은 츠바메를 주문해서 사용해 볼 계획입니다. 요즘 필사를 하는데 옥스포드도 로디아도 쓰고있는 헤리티지 1912가 계속 미끄러지기만 해서, 사무실에서 사용한 이면지를 가져와 그 위에 쓰고 있습니다. ㅠㅠ 도모에리버도 많이 들어봤는데 그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거네요. 너무 얇아도 안되고 , 뒤에 비침이 있어서도 안되고 너무 흡수해도 안되고, 너무 미끄러워도 안되고, 정말 만년필과 맞는 종이 찾는게 더 어려운거 같아요. 썼을때 선명한 느낌으로 다가오는게 좋은데,,그나마 만족하고 있는건 ‘로이텀 다이어리‘랍니다.

Grace 2020-05-15 22:49   좋아요 0 | URL
그리고 만년필은 아끼며 모셔두면 안될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돌려가며 사용하고, 집에서는 필사용, 다이어리 쓰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년필은 아마도 우리 보다 더 오래 지구상에 머무를 물건이라 제가 사용할 수 있는한 최대한 많이 사용하려고 열심히 필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