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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의 산책자 ㅣ 나와 잘 지내는 시간 1
양철주 지음 / 구름의시간 / 2022년 7월
평점 :
은은한 분홍빛 컬러의 책 가운데 은색으로 글을 새긴 듯한 '때로 삶은 꿈을 찾는 시간이 아닌 꿀 한방울을 찾는 시간일 때가 많다' 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한때 시인을 꿈꾸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것이 이력이 전부라는 작가 소개와 함께 과장법인줄 알지만 종이 위를 산책한다는 표현은 너무나 멋있게 다가왔다.
'나와 잘 지내는 시간 01', 책을 펴낸 곳이 '구름의 시간' 책 제목 '종이 위의 산책자' 책장을 넘기기 전에 책 표지만 보더라도 절로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200여 페이지 에세이집을 음미하며 읽어볼 수 있었다.
글과 문장 속으로 산책을 간다고 표현하는 저자는 책을 통해 '필사' 에 대한 필사적 사랑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보았을 '필사'. 책을 손으로 직접 베껴 쓰는 일을 의미하며, 글 잘 쓰기 위한 법으로 꼭 한번은 언급되곤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이어지는 글자 속에서 뒤엉킨 생각들이 차분하고 가지런하게 정돈이 되는 기분일까.
저자는 필사를 무엇을 창조하려 함이 아닌 작품의 곱씹음 혹은 작가에 대한 사랑 고백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막에서 방향을 잃는 사람, 꿈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우연히 필사를 시작하면서 사막의 갈증을 견디고 스스로 자신감을 복돋으며 사막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필사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들어보자면, 필사는 저공비행이며 사랑의 행위이라고 묘사한다. 이는 일반적인 독서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더 느리게 천천히 진행하며 볼 수 있고, 빨리 해치워야 하는 일이 아니고 아무리 느려도 감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문장과 작가의 정신과 사랑에 빠진다라.. 산문집을 보고 있지만, 텍스트 하나 하나가 시처럼 울림이 있고 곱씹을만했다. 글자를 통해 시각, 청각, 후각이 함께 열리는 기분이다. 이윽고 사각이는 소리를 내는 연필로 꾹꾹 종이 위를 채워나가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책을 읽으며 텍스트 전체의 구조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지만, 한 문장의 유의미함과 그 짜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더 좋을 것이고, 단어와 그 뒤를
잇는 단어에서 어떤 끈을 느낄 수 있다면 그 필사자는 자신이 짓는 집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p.35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어느 한 시절을 벗어났다고 해서,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 때의 간절함과 열정이 부정되지 않기를. 그 시절의 간절함 속에서
우리는 가장 뜨거웠었다.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다른 열정 혹은 빙하기를 통과하는 중이라 해도. p.143
개인적인 이야기, 프루스트, 허먼 멜빌, 카뮈 등의 작품을 필사한 이야기들과 함께 책의 마무리까지도 필사의 매력에 대해 열거한다. 작품에 접근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요, 오아시스인 책 곁에 머무리는 것과 같으며, 자신을 비추는 거울, 나 자신을 아끼고 보듬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름답고 힘이 되는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며, 필사하는 글에는 내 등을 쓸어 주는 따스한 손, 나를 응원해 주는 목소리가 있기에 그러한 응원에 힘을 얻으며 스스로 어려움에 맞설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텍스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고 하니 이 정도면 진정 '필사' 를 사랑함이 틀림없다. 요즘 말로 찐으로.
속도에서 내린 사람인 저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쓴 순수 창작물들을 곱씹어보며 필사의 매력 속으로 들어가본다. 책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 '필사' 다. 지금보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매일 일기를 쓸 정도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쉬운 책 하나 골라 필사를 시작해보아야겠다. 필사가 주는 위로와 즐거움을 나 역시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