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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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일스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이자 동시에 공공지식인이었던 버틀런드 러셀은 수학, 논리학, 철학, 언어학, 분석철학 그리고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앞선 분석철학과 관련해 러셀은 제자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해당 철학분야를 창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사회와 더불어 그런 사회가 초래하는 비참한 전쟁들에 대해 자신의 양심을 걸고 비판했던 살아있는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참혹한 양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러셀은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하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인의 의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을 비판했으며,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있어 간혹 유감스러운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는 필연적으로 냉전 체제 전반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시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러셀의 이 책은 '사회 재건의 원칙'이라는 주제로 1916년, 런던에서 행해졌던 강연을 기본으로 출간된 것입니다. 국역된 책 제목인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는 1917년 처음 미국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이 국내에 출간된 책에도 제안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y Men Fight"로 2010년도에 미국에서 새롭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8월 번역 출판 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러셀의 이 강연록은 그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두고 천착했던 여러 주제들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국가의 역할이라든지 전쟁의 원인, 민족주의,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로인한 시민들의 삶, 개인의 창의성, 교육과 여성의 진정한 자유 등에 대해 거의 가감 없이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수록된 강연에 대한 내용이 1916년임을 감안해 본다면 오늘날에도 충분히 그의 비판적 사고가 쉽게 투영될 수 있을 사례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특히, 전쟁과 그 원인에 대해 논한 3장은 정체된 사회가 시민들의 창의력과 관심을 건전하게 돌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사회가 민족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이 일정 부분 전쟁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었는데요. 그는 후반부 논증에서 전쟁 자체가 다른 사회와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는 것이냐에 대해 진정한 회의를 품고, 전쟁에 모든 시민을 끌어들이게 하는 '모든 것을 쥔 정치'와 이것이 결국 무고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끝내 비극으로 이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이 기본적으로 판단하는 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권력의 집중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회 전반에 권력에 대한 건전한 비판 의식을 유지시키는 정치 체제입니다. 그가 거듭 강조하는 대로 역사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요. 러셀이 이 글의 초반에서 논증하는 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결단코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이 새롭게 재무장을 하게 될 때, 이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독일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러셀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성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간혹 보일 수 있는 전투적인 공격 성향은 이들 시민들이 자신들의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고 성장에 대한 욕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 등을 사회가 채워주지 못할 경우,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처럼 본래의 시민들을 삶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건전한 욕구를 채우게 끔 하는 사회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된다면 그만큼 스스로 벌이려고 하는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더불어 민족주의에 대한 대두에도 이와 비슷한 해법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전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비참한 물결은 바로 러셀의 경고에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음 2장에서는 전쟁이라는 국가의 원초적인 기능과 관련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국가에 대해 복종하고 그 국가가 규정하는 시민의 의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지 논하고 있습니다. 이미 법률과 질서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는 사람들, 이를테면 부유층은 국가 권력이 축소되어 무질서한 상황이 되면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물론 러셀의 시대의 국가와 지금의 국가는 상당한 인식적 괴리가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인하든 국가에 기인하든 얼마간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이들은 체제 내에서 질서가 붕괴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대다수 시민들도 이와 비슷한 입장일 텐 데요. 현재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있음으로 해서 최소한의 복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필요한 일은 해야만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국가는 국민 개병제를 비롯, 제국주의적 잔재하에 국가가 일반 시민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는 과거의 잔재를 갖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위협에 따라 내부적인 위협이 만연할 수도 있다."는 증명되지 않은 위기 의식들은 '국민 국가'로서의 체제 안위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러셀은 이러한 국가들의 폭력적인 원동력이 되는 '애국심'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애국심은 종교과는 달리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애국자들이 들끓는 세상은 분쟁이 들끓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지금도 이 애국심을 수단으로 삼아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는 "대부분의 문명국들 내에는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힘 말고도 정치인들의 부탁이 있기만 하면 언제라도 전쟁열로 휩쓸려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인들의 분명치 않은 감정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여 이러한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러셀이 거듭 강조하는 자유에 대한 함의는 이처럼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4장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분명히 논하고 있는 러셀은, 이미 우리가 민주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드러냈음에도 어째서 산업 전반과 자본주의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하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행복에 있어 어느 정도는 기여하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러셀의 경고대로 자본주의의 찬양 내지는 무분별한 '배금주의'는 분명하게도 '인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 두 번 정도 들어봤을 SF 드라마의단골 소재인, "왜 지구인들은 스스로의 정신적인 삶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돈과 생산활동에 집중하고 있느냐."는 외계인들의 그와 같은 의구심은 단적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창의적이지 않고 고유성을 잃은 지 오래라는 소리일 겁니다. 그래서 러셀은 광범위한 행복과 관련된 4장에서, 어떤 산업 체계를 평가할 때 쓰이는 네 가지 주요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생산의 극대화 (2) 분배의 정의 (3) 생산자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생활 (4) 최대한의 자유와 활력과 진보에 대한 자극을 보장하는가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각지의 대부분의 산업이 보다 민주적인 체제를 통해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불행하게도 러셀의 어두운 전망과 마찬가지로 작금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임금 노동 체제가 사회적인 불공평을 야기하고 영속시킨다."고 경고했는데요. 사회 전반이 상당한 불공평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각 시민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들의 양과 노력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이라고 볼 수 없는 인맥과 학연, 사업 파트너와 같은 것들로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능력주의 meritocray의 실체라고 본다면 능력주의 자체가 전반적으로 건전하다 볼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러셀의 강조대로 개인의 삶과 소위 자아 실현은 제도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의 선험적인 주장 역시, 아직 인간 사회의 불공평성이 해소되거나 정의가 정착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일반 시민이 법률의 실효적인 혜택을 받기란 일반적으로 아직도 요원하고, 법률이 규명하여 그것의 실질적인 이익이 될 만한 자들은 거의 돈이 많거나 권력을 획득한 자들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러셀이 판단하는 이론과 현실의 극명한 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자유와 관련하여 우리가 법률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법률의 근본 원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법률을 감수하는 것은 사실상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데요. 일반적으로 모든 이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 자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여성이라는 주제어를 담고 있는 6장은 대부분 여성이 스스로의 권리를 받아들이고 취득하여 무엇보다 삶에 대한 통제와 자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결혼 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기인하여 아직도 불합리한 면이 상존하는데요. 러셀은 그 시대의 새로운 사회 현상일 것도 없는 '혼외 정사 문제'를 언급하며 이를 결혼 제도와 맞물려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 보존이라는 문제에서 도출된 결혼 제도 전반이 남성의 성적 욕망과 일탈이라는 조건 뿐만 아니라 만연한 가부장적 모순에서 어느 시점까지는 함몰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러셀은 이러한 일관된 사회적 비판을 전제하면서도 여성들의 자유가 개인적인 생활과 국가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약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논의되고 있는 결혼 내에서의 남녀 간의 성관계나 결혼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외도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느 정도는 자유와 함께 남녀 모두 기본적인 도덕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관계 자체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서 접근해야만 하고 개인들의 차원에서 제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이 장의 후반부에서 러셀은 이혼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여성이 가정으로부터 탈피해 얻게 되는 자유라는 본질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될 것 인가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어 러셀은 어쩌면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유익하면서 올바른 가치와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도출해 냅니다. 1.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과 활력은 최대한 장려되어야 한다. 2. 어느 개인 혹은 어느 공동체의 발전이 다른 개인 혹은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일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한다. 는 시민들을 포함한 모든 사회의 존중의 원칙이라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개별성과 사회에서의 공동체주의적 도덕 원리는 서로 간의 대립된 형질이 아니라 마땅히 상호 발전시킬 수 있는 주제들인데요. 물론 이들은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과는 아주 상이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맥락에서 러셀은 이 강연을 하게 된 진정한 취지로서, 글 도입에 소개된 벤담과 밀의 자유주의를 대체하고 픈 마음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러셀의 주장대로 개인의 충동을 얼마나 사회의 제도 원리로서 통제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통제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찰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물론 본능의 제어는 무엇보다 필요하고, 앞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국가를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것과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통제 안에 들지 않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사회와 국가를 건전한 원리 밖으로 퇴락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덕적 통제는 마땅히 사회에 필요한 것이고 그런 틀 안에서 시민 각각의 고유성과 개별적인 창의성을 확대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한편으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러셀이 모든 시민들이 섣불리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이러한 강연을 준비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러셀을 터무니 없이 백안시 하지만 그도 역시 지금의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인 휴머니스트가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이 그리워지는 저녁입니다.



-3장에서 제법 놀랄만한 문장이 보였는데요. "혁명기의 프랑스가 만약 유럽 대륙과 대영 제국을 정복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더 행복하고, 더 문명화되고, 더 자유롭고, 나아가 더 평화로운 세계가 되었을 것"이라는 러셀의 고백 아닌 고백입니다. 분명 이는 에드먼드 버크와는 매우 상반된 입장일 텐 데요. 앞뒤 맥락으로 봤을 때는 반쯤은 농담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느 정도는 러셀의 자유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원문을 찾아보고 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적의를 품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해도 자신이 느끼는 적의는 상상력에 의지한 이해심과 동정심을 통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옛 선현들이 말했듯이 이성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너무나 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한다. 이성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전쟁을 야기하는 충동과 열정에 반대되는 충동과 열정에서 기인한 적극적인 활동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력을 다해 줄곧 민주주의를 반대해오던 영국과 프랑스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통치자들은 이론상으로 자신에게 허용된 권력을 넘어서는 전제와 억압을 자행하자 희생자들은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으며, 소수의 영화를 증대시킬 목적을 위해서만 살아갈 필요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낡은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협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유기적인 사회가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개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근대적인 감정이 요구하는 개인의 권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종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충동이나 욕구가 조장하는 행동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심이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애국심이 지향하는 선은 전체 인류를 위한 선이 아니라 자기 나라만을 위한 선이다.

애국자들이 들끓는 세상은 분쟁이 들끓을 수 있다. 애국심이 강한 민족일수록 다른 민족이 입는 피해에 무관심해진다.

그러나 나는 법률도 그렇지만 정의 그 자체는 너무나 고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정치 원리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출구가 없으면 사람들은 사회적인 활력과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다.

대부분의 문명국들 내에는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힘 말고도 정치인들의 부탁이 있기만 하면 언제든 전쟁열로 휩쓸려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인들의 분명치 않은 감정이 존재한다.

정의의 관점을 포함해서 그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현재의 분배 체계는 변호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본주의가 통상적인 체제가 아니라 예외적인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세계 각지의 대부분의 산업이 보다 민주적인 체제를 통해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산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화려하고 즐거운 생활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남성들의 찬탄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은 젊음이 지속되는 동안은 출산을 최대한 연기하려고 한다.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그렇듯이 이 문제에서 정치적 지혜의 토대는 바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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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유 - 그리고 정부의 한계 우리 시대의 이슈 총서 4
찰스 프리드 지음, 이나경 옮김 / 바이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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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앤서니 프리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출신으로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영국과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 되던 해인 1948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합니다. 사법 관료 치고는 프린스턴과 옥스포드에서 예술 관련 공부를 통해 예술 학사를 수여 받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 학사를 받습니다. 이후에 1984년부터 레이건 행정부의 법무장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1985년 10월에는 법무 차관 및 법무 장관 대행을 맡게 됩니다. 1989년에 레이건이 퇴임하자 그도 하버드 로스쿨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관료가 되기 전인 1961년부터 하버드 로스쿨 교수를 역임하며, 상법, 헌법, 계야그 형법, 연방 법원, 노동법, 불법 행위, 법철학, 의료 윤리에 관한 여러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현재는 미국 내 초당적인 단체인 캠페인 법률 센터 (CLC)의 이사회에 속해 있습니다. 여기에 다른 일화로 그는 공화당 정부에서 일했고 당적도 공화당에 있으나, 2008년 10월 그해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여 투표하기도 한 이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Modern Liberty : And the Limits of Government"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가 논하고 있는 자유에 대한 의미와 논증을 통한 해석이 '현대'라는 의미에 맞게끔 실제적인 여러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단순이 자유를 분석하는 정체적인 이론 만을 포함한 글이 아니어서 그런지 꽤 호기심을 갖고 일독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이 상세하지 않아 그 부분이 아쉬웠고, 또한 4장의 주제인 '마음의 자유'는 대략 미국 헌법과 미국에 특징적인 사례와 더 가까운 내용이라 논증은 대체로 이해가 될 만했으나 '양심의 자유'에 더 익숙한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생소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적 의미에 대해 이것의 원초적인 시발점은 '개인과 개인이 모여 만든' 것이라는 점을 줄곧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참고로 그의 이런 생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인식과는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즉, "개인주의란, 한 개인이 선택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가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절대선이란 의미가 아니다"라는 그의 해석인데요. 여기에 저자는 자유의 어떤 해석보다 '선택의 자유'를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기반의 해석은 일관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개인과 선택의 자유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죠.

글의 3장과 4장에서 폭넒게 인정되고 있지만 우리가 교과서와 여러 언론 매체,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들 가운데 이 자유라는 가치는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19세기 유럽의 중산 계급들이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고 밝히는 것에서 이러한 인식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나아가 이런 자유가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증명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의 확산 즈음이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증거로 말미암아 저자는 개인의 자유를 때론 침해할 수도 있는 것이 '국가'라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물론 많은 자유와 관련된 논의에서 많은 사상가들과 학자들은 '자유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일관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논증의 도입에서 저자는 이 자유라는 의미를 실제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는 사례로 캐나다의 퀘벡 주가 벌이고 있는 프랑스어 의무화와 마찬가지로 캐나다에서의 국가 의료 보험의 '자유의 제한 즉,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인식하에 논증하고 마지막으로 미국 버몬트 주의 월마트와 같은 대형 마트의 법으로 규정한 영업 규제 등을 유사한 사례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자유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부분이 "자신의 자유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도 중요하다."라는 점일 텐 데요. 그래서 '공화적 자유'와 유사한 맥락인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이 도출된 이유일 겁니다. 아마도 이런 인식적 체계에서 일찍이 버틀란드 러셀이 (필요한) 자유의 통제와 제한을 주장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본질적으로 저자는 캐나다의 전국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 아주 개략적으로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명백한 자유의 침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뒤에 이어지는 재산권과 관련된 국가의 의무와 그에 따른 자유에 의해서 어느 정도 공동체적이면서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간단히 언급한다면 이미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충분한 부와 인맥을 보유한 부유층들은 언제나 면담이 가능한 '주치의'와 그에 따른 폭넓은 최신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자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이들과 다른 계층들의 실효적인 의료 지원을 위해서, 공적인 의료에 대한 의미로 말 그대로 '공동체적인 선'에 기반한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공화주의에서 그 바통을 받은 것이 민주주의라고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다만, 제가 저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민들의 자유를 통제하는 그런 면에서 자유와 권리의 '하향평준화'라고 인식하여 대입한 캄보디아의 학살자인 '폴 포트'의 사례였습니다. 자신의 통치하에 자국의 국민들을 거의 100만명이나 가깝게 학살한 자를 그저 자유의 '하향평준화'라고 담담하게 제시한 것은 너무나 잘못된 예시라고 여겨졌는데요. 폴 포트 사례 말고 시민의 자유가 국가에 의해 침해 받는 사례로서, 좀 더 인상 쓰지 않을 온건한 사례가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은 너무 극단적인 일례로 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 '캄보디아에서의 지옥'이 저자에게는 어떻게 시민의 광범위한 자유를 침해하는 지 아주 극명한 증거라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어찌됐든 이런 일련의 사례들로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부분은 제2장에서 보여지는 논증입니다. "자유가 우리에게는 훨씬 더 큰 가치임에 분명하고, 선택 없는 삶, 선택하지 않은 가치들로 이루어진 인생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그의 해석입니다. 특히. 헌법학자들이나 사법 관료를 지내는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사유 재산과 재산권에 대한 자유의 맥락에서도 상당히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위 자유지상주의자들에 의해, 상당히 보수적이고 제한적인 입장으로 여겨지는 '평등한 자유'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입장이 강하게 전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자본주의가 마땅히 초래하는 경제적 불평등과 빗대어 생각해보면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꽤 명철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도 4장에서, "자본주의적 불평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불평등한 정치적 영향은 통제되어야만 한다"는 일련의 학자들의 작업들에 대해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었는데요. 즉, 자본주의가 만든 불평등의 상황을 민주주의적 가치와 기법을 통해 이를 감쇄해야만 한다는 입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앞서 제가 강조한 바대로, "자신의 자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민주주의가 주도하는 평등한 자유 역시 모두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기본 가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밀러는 정의는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이해되는 평등도) 실체적으로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인정하고 그러한 사회의 구현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에 프리드 역시 평등은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개념이라고 인정합니다. 더불어 그는 자유와 평등은 소위 부사적인 가치라고 확정 짓습니다. 그저 언어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유롭게 선택하며 평등하게 향유한다"는 것이 이러한 맥락 가운데 존재하는 인식일 겁니다. 그럼에도 자유는 꽤 적잖이 제한되는 가치이기도 하고 이는 적절한 규제와 사회 제도를 통해 또는 강력한 법 집행을 통해 각 사회에서 이러한 체계가 잡혀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질적인 보장을 위한 국가의 기능적인 측면은 많은 사회학자가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선적으로 자유에 대한 규제는 공공선적인 측면과 공동체적 이익을 위해서 시행되어야 할 텐 데요. 그럼에도 개인의 재산권 권리를 제한하는 국가에 의한 조세 징수가 대다수 부유층들에 의해 조세 회피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자유와 일반 시민들의 자유는 완전히 다른 궤도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에 시장의 자유, 특히 개인과 개인이 협력하여 자유로운 교섭에 이르는 이러한 경제적 자유가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충분히 인정할 만하나, 시장의 자유가 매번 공동체적인 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이런 비판들이 반자본주의적인 주장으로 매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뒤이어 4장 '마음의 자유'는 어쩌면 우리들 식으로 양심의 자유와 관련 있어 보이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는 미국의 특정한 헌법 가치로 모든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언론의 자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미국 내에서 특정한 주에서는 이 발언의 자유가 헌법에 의해 제한되기도 하는데요.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는 법률은 무효화된다"는 식인데요. 예를 들어, 사람이 꽉 찬 극장에 불이 났다는 식으로 거짓말하는 사례 같은 일들입니다. 저자가 강조해 마지않는 근본적 '마음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인격권, 즉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 사생활과 신체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 받을 자유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움직이거나 남에게 말을 들려줄 장소 등 자원에 대한 권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인데요. 이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에서의 정치'와 관련 깊어 보이고, 오늘날 발달한 인터넷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발언권들이 어떻게 이행될 수 있겠느냐에 대한 의미일 겁니다. 이 마음의 자유에서도 더 많은 자원을 보유한 사람이 좀 더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저자는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만약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마음의 자유'가 모든 시민들에게 중요하다고 본다면 빈곤층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될 교육의 의무와 함께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라면 개인이 세금을 낸 후에도 최저 생활비를 웃도는 가처분 소득이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저자의 전제였습니다. 물론 이를 유토피아적 관점을 치부할 수 있으나 부와 자원의 유무에 따라 시민들의 자유가 차등화가 된다면 '선과 정의, 진실을 구별해야 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에도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끝으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자유의 제한은 온건하고 미미한 정도입니다. 물론 저자의 강조대로 이러한 관행에 우리가 경계할 필요는 분명 있어 보입니다. 다만 자유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민주주의 원칙과 개인의 권리, 즉 자유의 실현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부분은 많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어쩌면 이런 부분에서 지금까지 평등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여러 주장들이 그처럼 기피 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로버트 달의 언급대로 자본주의화 된 민주주의 국가 전반이 헌법의 이론과 주장으로만 시민들의 실질적 평등을 보장하기 어려워진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도 개인의 자유, 권리와 가치로서의 충분한 자유의 보장은 대부분의 시민들이 긍정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자가 1장과 2장에 걸쳐 자유의 한 갈래로서의 선택의 자유 역시, 현재의 자본주의적 불평등 상황에서 자원과 돈의 확연한 차이로 발생된 '차별된 선택의 기회'가 현대의 사회 더 나아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직접 외부 세계에서 인지한 것이든, 남이 알려준 것이든 간에 의식 속에 들어온 어떤 가치를 그 자신이 판단하여 그것이 믿을 만한 것인지, 아니면 환상이나 오류, 거짓인지를 판단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한 개인이 선택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가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절대선‘이란 의미가 아니다.

반면 내 자유를 침해하는 사람들은 나의 개인성, 즉 내가 사고력과 추리력, 판단력을 가진 인간임을 알면서도 내 의지를 꺾고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전 세계에서 자유가 가장 많이 보장된 국가들은 내부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과 검사, 감옥 등의 기관을 두며,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유한다.

물론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학 위해서 약자를 이용하여 잇속을 챙기는 ‘개인‘을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나도 동의한다.

자유와 상충되는 모든 가치 중 가장 매력적이며 강력한 경쟁 상대는 평등이다. 평등은 자유와 마찬가지로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실질적인 과정 속에서 추구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내 일신을 소유하며, 내 자신에 대한 권리가 있더라도 움직이고 일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 즉 물질적인 세상의 한 부분에 대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면, 타인이나 국가의 노예일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공공장소를 만들어 마음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기본적인‘개인의 자유가 궁극적으로 대중의 선택에 달렸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문화와 명예, 그리고 공동체를 키워간다고 하는 국가 차원의 목표를 생각해볼 때, 과연 인터넷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더 바람직한‘메시지, 즉, 교육적이거나 계몽적이거나, 문화적 수준이 높은 내용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어야 할 것인가?

여러모로 유해하고 저속한 메시지(폭력의 미화 등)들은 쉽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유해하지 않지만 하찮은 메시지들조차도 보다 가치 있는 메시지를 밀어내버리곤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이 세금을 낸 후에도 최저생활비를 크게 웃도는 가처분 소득이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과세와 지출 정책을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들의 경우, 그 재산을 모은 것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라고 만은 볼 수 없다. 공통된 인간 자원과 교류되는 지식과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재산에 대한 어떤 영향력을 주장할 수는 없다.

평등은 사람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자유처럼 행세하지만,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 더 많이 가진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영역을 침범하여 뺏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면 본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주류 세력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려는 노력과 개인의 권리, 즉 자유의 실현은 양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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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몸값
조지 기싱 지음, 김경식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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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로버트 기싱은 19세기 이후 영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열기도 했고 당시 하층민들의 삶에 있어 돈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거의 적나라하게 주제의식으로 드러냈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러 작품에서 남녀 간의 결혼에 있어 여성들이 남자가 가진 재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 환경과 그러한 세태를 거의 냉혹하게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낭만이 쇠퇴하고 그 뒤를 현실이 잇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그와 같은 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기싱 본인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뉴 그럽 스트리트' 이후 거의 4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원제는 "Eve's Ransom"입니다. 번역본은 2019년 9월, 문학사상사에서 펴냈으나 번역한 원본이 정확히 몇 년도의 무슨 판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선택할 권리는 각자에게 온전히 부여되어 있을 겁니다.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가치, 관념, 명확한 의미에 대해 적나라한 표현을 서슴치 않기도 합니다만 기싱이 묘사하고 있는19세기의 영국에서 젋은 남녀가 애정에 이르는 길이 표면적으로는 꽤 녹록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가 줄곧 강조하고 다루고 있는 '가난'과 '돈에 대한 거의 꾸밈 없는 절박한 사조'가 그저 안락한 삶 만을 위한 대중들의 지극한 속물 근성으로 공격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이브 매들리는 여성이 으레 보일 수 있는 '상대가 품는 감정에 대한 모호성'을 자기 변호에 끌어와, 그대로 진실을 외면하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알콜 중독에 빠진 부친을 두고 근근히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가련한 소녀로서 그녀가 자신의 절박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돈이 많은 남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브 매들린이라는 캐릭터에 제가 쉽게 호의를 보일 수 없던 부분은 가난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본인 스스로의 욕망에 비견될 정도로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여러 측면에서 이용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자신을 절친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패티 링로즈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진실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앞선 진술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의 양심에 맞게 행동하는 고결한 낭만주의자인 모리스 힐리아드는 무엇보다 주변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간직하고 있는 청년입니다. 의도치 않는 반전의 주인공인 그의 절친인 로버트 나래모어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물론 당시 영국이 상업주의의 발달로 사회 전반이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실제적인 예시가 힐리아드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합니다. 몰락한 자신의 가족사와 더불어 근근히 하루를 살기 위해 원치도 않는 일을 해나가고 있는 그는 이 상황을 진정으로 타개하기를 원하는데요. 아마도 기싱의 의도적인 장치이겠지만 글 도입에서 그가 얻게 되는 436파운드의 횡재 아닌 횡재는 극적인 삶의 변화를 예고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예기치 않게 더들리에서의 인연이 힐리아드와 이브를 잇게 하는데요. 자신의 감정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숨길 필요가 없이 자신만만한 힐리아드에게 이브와의 만남은 소설 전반에서 중요한 장치이자 사건이라 여겨지는데요. 사실 그가 이브에 대해 가졌던 처음의 인상은 그저 낡은 사진 한 장 뿐이었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있을 이브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으로 다가올지 본능으로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제 3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한 여성에 대한 소소한 기록이 자신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무엇보다 후반부에서 상당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된 것은 이브가 자신의 속내를 힐리아드에게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절친인 나래모어와도 이브가 얽히면서, 그간 힐리아드의 더할 나위 없는 호의와 배려를 당연히 이용해 왔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너에게 참혹한 굴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 힐리아드가 내밀었던 도움에 대해 그저 "작은 고마움" 뿐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저는 정신적인 아득함까지 느끼게 되었는데요. 소설의 도입에서 기싱이 힐리아드를 가리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삶을 살아온 청년"이라고 규정했을 때 비로소 이 이브 매들리가 그와 대척점에 선 캐릭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에서 이브가 힐리아드에게 그간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속내를 물어보던 긴장감이 흐르던 그 짧은 대화는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역시 자신의 절친과 한때 사랑했던 여인 사이에서 힐리아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실을 밝힐 줄 알았는데요. 하지만 힐리아드는 자신의 친구와 그 여인의 입장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 같은 그의 진심에 두 사람을 향한 경멸이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도 저의 억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브는 자신이 끝내 바라는 소위 굴절된 이기심이 어느 정도는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인데요. 기싱의 힐리아드에 대한 간접적인 증언이기도 한 대목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옭아맸던 이브라는 존재에게서 벗어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본래의 자유로운 기질을 되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가 속물임을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우며 더 나아가 남들에게 자신이 속물이라는 평가를 달가워하지 않는 인간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고려한다면 무엇보다 힐리아드가 보인 고결한 태도는 낭만주의가 왜 현실에서 퇴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이용하든 자신의 이익과 그러한 이익 추구가 태생적으로 양심의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는 문제이며, 사회 전체를 점차 상업주의가 휩쓸고 있던 당시 영국의 사조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낸 기싱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이브의 몸값'의 배치가 얼마나 절묘한지 글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서평에 의도지 않게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있어 글을 읽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버틀란드 러셀의 비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주인공은 별의별 낯부끄러운 구실을 대면서 가난한 남자를 버리고 자신이 훨씬 더 사랑하는 부를 지닌 남자와 결혼한다." 이에 관한 러셀의 맥락은 조지 기싱이 사실주의에 속한 작가들 중 유독 비관주의에 물든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회적 맥락으로서 부와 돈에 대한 배금주의를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낸 기싱은 아마도 현실을 감춘다는 것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달리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야. 에밀리와 조카딸이 곤궁함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일주일에 1파운드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지금에 와서 힐리아드는 자신이 하는 비열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아가씨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했고, 지켜보게 했다.

이브와 비교해 패티는 대단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힐리아드는 그녀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녀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고, 이 사실이 이브를 평가하는 데 아직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

그는 이브가 본래 성격과는 아주 다른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결혼 자체를 안 할 가능성이 많아요. 남자라면 짜증이 나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죠. 힐리아드 씨 당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자들이란,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다 이해한다고 하기에는 정말로 다른 점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정말로 속기가 쉽죠."

그녀는 그가 사랑을 받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결같기는 했지만, 그것은 열렬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여성이 보여주는 한결같음이었다.

젊은 아가씨가 자신을 그의 처분에 맡길 때, 그녀에 대해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그 상황에 따른 명백하고 진부하면서 통속적인 결과일 때, 그는 얼마나 많은 자제를 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제 당신에게 저는 뭐죠?"
"영국의 숙녀, 다른 숙녀보다는 좀 더 지적인."
이브는 만족감에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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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그럽 스트리트 - 생계형 작가들의 배고픈 거리
조지 기싱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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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스트 요크셔 주의 웨이크필드에서 태어난 조지 기싱은 아버지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공부에 매진해, 맨체스터 대학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 지성인으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절도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요. 이후에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트리뷴에 단편 소설을 기고하는 등의 현지에서 불안한 생활을 이어 갑니다. 그가 미국에서 겪은 혹독한 생활고의 경험이 바로 이 소설의 자양분이 되기도 했는데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에서 가정 교사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다 차츰 몇 번의 실패를 딛고 오늘날 많은 영국인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 작가로알려지게 됩니다. 특히, 조지 오웰은 기싱을 보며, "아마도 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하기까지 했습니다. 덧붙여, 기싱은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의 낭만주의적 문학 풍조에 반대하며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연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기싱의 기념비적인 문학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원제, "New Grub Street"로 지난 1891년 초도 출판이 이뤄졌고, 코호북스의 이 번역판은 1968년의 펭귄출판사 판본을 토대로 2020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95년에 나온 두 권의 '꿈꾸는 문인들의 거리'를 지난 날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입했으나 읽어보지 못하고 이사 중에 분실하고 말았습니다.   

기싱의 이 소설을 완독하고 든 원초적인 생각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고통에 처하게 만들고 그러한 진실을 전혀 돌아보지 않으려는 자는 현실에서 결코 행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교훈 아닌 교훈이었습니다. 일전에 프랑스 혁명 이후,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의 이슬로 만든 혁명가 로비에스피에르는 스스로 더할 나위 없이 무결점의 도덕적 인간이었으나 그에게 결여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타인의 욕망과 이익에 대한 관념'에 무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에드윈 리어던은 누구보다 고결하고 지적인 인물이지만 속세의 알법한 규칙들을 경멸하는 이상주의자이면서 문학에서 만큼은 강고한 원칙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당시 영국의 문학 혹은 비평을 포함한 출판 산업은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는 산파이기도 했는데요. 교육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출판계에 뛰어들어 큰 명성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리어던의 아내 에이미 율 역시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문학 자체가 부와 명성을 가져다 주는 수단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주인공인 재스퍼 밀베인처럼 이 문예계 자체가 이 소설의 주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다소 이질적이지만 계몽주의 시기 사회적 진보의 첨병이 되기도 했습니다.

야심만만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재스퍼 밀베인은 사회적 성공이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꽤 현실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성공을 위한 명목으로 모친의 연금을 매번 사교에 쓰고 있는 약간 비틀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기싱이 여러 장에 걸쳐 강조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는 자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평가에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경우가 재스퍼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는데요. 작품 자체에서 현실적인 사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문학적 목적을 고려해 봤을 때, 지금의 시대에서 바라봐도 이 재스퍼라는 캐릭터는 거의 속물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는 주변 인간 관계에서 자신 만만 하지만 꽤 신중하게 적을 만들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여 자신의 이익이라는 목적에 맞게 교활한 측면도 갖고 있습니다. 극중에서 문학적인 재능이 평범한 사람이라도 주변의 교양있고 명예로운 인간 관계를 통해, 가일층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기싱이 그런 재스퍼와 메이런의 교제를 어느 정도 모호한 수사로 그려내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서 조차 계산적인 재스퍼의 캐릭터성으로 보건대, '진정한 사랑'이라는 개인의 극적인 서사가 현실의 조건 앞에서는 그저 공허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에 대한 어긋난 관념은 독자 자신이 관계에 대한 이상주의를 굳이 견지하지 않더라도 꽤 불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요. 예를 들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한 여자를 수계산을 통해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수단화시키는 점은 당시 영국의 무분별한 배금주의를 감안하더라도 쉽게 이해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그의 연애에 대한 비틀린 조건들은 후에 밀베인의 결혼 시도에 있어 지극히 충격적인 반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기싱에 의해 만들어진 에드윈 리어던이라는 인물이 가브리엘 타르드의 독창적 관념을 넘어설 정도로 높은 개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전반적인 타르드의 해석이 놀라울 만큼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결하여 속세의 일반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거부하는 리어던의 다소 비틀린 성격은 주어진 현실을 도외시하는데 이르는데요. 그렇게 투영된 자신의 가치관을 통해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사람들을 참혹한 고통으로 이끄는 개인에 대한 서사가 그 자체로 비참한 속성을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개연성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글의 사건을 주도하는 인물이기도 한 그가 이런 극단적인 경험으로 끝내 몰락에 이르는 점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설정된 전반적인 서사를 감안하더라도 불편한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요.더욱이 누구보다 고결해 보이는 그의 이상주의와 맞물려 현실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연민이 도가 지나치기도 해서 어떻게 보면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재스퍼와 함께 양자가 극단적인 인물 구도로 극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현실적인 측면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여러 부득이한 조건들을 그저 경멸하고 도외시하는 그의 태도에 안타까운 감정이 들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소위 합리적 사고 자체를 백안시하고, 주어진 현실에 맞게 대처하는 평범한 인물들의 행위 자체도 모멸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어떠한 소통과 타협도 거부하는 행태 자체가 순수 문학이 가지는 비타협성과 연결되어 얼마나 소름이 끼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기싱은 둘이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우 인간이 처한 현실과 그런 인간들을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현실적 제약에 관심을 가졌던 소설가로,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는 것을 자신의 소설로 녹여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결론에 이르러 이 소설의 두 가지 반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로 씁쓸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는데요. 자신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면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알뜰하게 챙기는 밀베인의 행동거지 그 자체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각인시키게 될지는 사뭇 명확해 보입니다. 전적으로 현실주의에 경도된 인물에 대한 서사와 더불어 그런 묘사가 독자들에게 해석 상에 어떠한 여지를 주게 될지는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또한 이 극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조금 소극적인 면모가 없지 않아 있지만 무엇보다 기싱이 만든 메리언 율의 행적은 후반부에서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드윈 리어던의 아내인 에이미 율의 인물 작업 역시 후반부에 너무 전형적으로 흐른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았는데요. 당시 영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관념 자체가 지금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글을 쓸 줄 아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터부가 어느 정도 반영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극에서 꽤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해럴드 비펜의 작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충격적인 선택(아마도 후에 이어지는 에이미의 행복과 관련한 모종의 설정으로서도 읽히는)과 흡사 정상인의 사고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이는 부분,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인물인 엘프리드와 그녀의 딸 메이런의 뭔가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결론 또한 소설의 전체적인 인과성을 고려해 봤을 때, 상당히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부분들을 제외한다면 글의 서사 전반과 생동감 있는 인물들의 행적이 극 전체에서 꽤 설득력 있게 맞물려 크게 긴장감을 더해가는 과정 자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드윈 리어던의 심정적인 변화와 그것의 뜻하지 않는 충격적인 반전이 무엇보다 인상 깊었는데요. 에드윈과 재스퍼의 대비되는 인물 구조와 그에 따른 운명과도 같은 행적, 더불어 에드윈에 비견될 정도로 극단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 엘프리드와 그의 인생사 자체는 제게 깊은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인간의 삶이 한낱 농담과도 같다는 구절도 깊게 공감이 되면서 비틀어진 인간 자체에 관한 기싱의 놀랄만한 묘사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는데요. 그와 동시에 문학계 전반이 성공하지 못한 자들에게 끝모를 좌절과 고통밖에 없다는 그런 냉엄한 실체가 오늘날에도 거의 유효하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 번역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본문 525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뒤에 나온 개정판인데, 이런 오타조차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고 도로 출판한 출판사 편집자에게 실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성공의 첫 발판을 마련하려고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에 죽자사자 일만 해야 합니다.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그 발판을 말이에요

비교적 가난한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불행한) 교육은 대개 잔인한 조롱이나 다름없다

리어던은 가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뇌와 심장이 싸늘해지고 손이 덜덜 떨리며, 세상의 냉정한 무관심에 대한 공포와 수치심, 무력한 분노, 막막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모여든다. 가난! 가난!

세상에는 이미 사람이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많은 걸작이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사람들이 한 번 이상 읽을 시늉도 안 하는 글을 생산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금전적 가치가 있는 걸 만들거나 혹은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냉정하죠."

삶이 공허한 나머지 무덤에 묻힌 후의 보상을 믿어야만 하는 수백만 명의 비참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긋지긋하게 계속 되는 남편의 실패에 질린 지금 그녀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밀베인을 보며, 그의 성격과 재능의 세속적 가치를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단순하고 당연했다

그녀와 같은 부류의 무수한 사람들이 그렇듯 율 부인은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았다

"제가 누구에게나 하는 말입니다. 당신도 여러 번 들은 이야기에요. 천재가 아닌 이상 문필업은 안락한 삶과 명예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인생의 중대한 문제들이 그런 하찮은 사건에 좌지우지 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 없지. 삶은 거대한 농담이야."

"자네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 척도 안 하는 군. 글쟁이들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체하게 유도해서 돈을 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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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5
데이비드 밀러 지음, 이신철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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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인 데이비드 밀러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포드를 거쳐 현재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가르치면서 경제, 정치 및 사회학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너필드 칼리지의 공식 펠로우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랭커스터 대학과 UEA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특히 '사회 정의'인데요. 아무래도 공적인 측면에서 공공선과 그것을 기반으로 시민들의 삶에 충분히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마련에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식인들이 범할 수 있는 이론과 글을 너무 과신하지 않고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상 정치철학이라는 분야가 현실 정치와 사회제도 및 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그가 밝히는데요 정치철학 자체가 현실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다는 세간의 주장들은 어떻게 보면 정치철학에 대한 뿌리 깊은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Political Philosophy"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는 도입에서 정치철학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것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는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요. 제가 이 책을 끝까지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느낌은 전체적의 글의 방향과 논지가 일관되고 정치철학 뿐만 아니라 정치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지난 역사와 민주주의를 개괄해보고. 이에 독자들에게 건전한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3장 민주주의와 4장 자유와 정부의 한계, 5장 정의는 모두가 몇 번이고 읽고 곱씹어 봐야하는 부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저자인 밀러의 이 훌륭한 글은 전반적으로 투입된 논증들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여러 논의와 주장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정치철학과 정치 및 사회학의 강고한 편견에 빠지지 않게 하는 조심스런 배려가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많은 논증과 주장들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시민들, 즉 우리가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테제인데요. 글 말미에 저자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사이의 선택은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더 거대해지고 복잡해져 좋은 정부의 형태가 변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언제나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라고 진술되는 것과 거의 유사한 맥락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철학이라는 학문이 소위 정치엘리트들이나 교수, 공무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시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클로드 르포르가 강조했던 정치철학의 존재 의의가 퇴색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자인 밀러 역시 그러한 점에서 착안해 정치철학 자체를 과신하지 않고 현실적 한계와 이론과 현실이 아직 일치하지 않는 미완성인 부분을 언급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솔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전에 루소가 언급한 대로 "민주주의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들 만을 위한 것"이라든가, 5장 정의에서 "사회정의는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있다"는 진술들은 명확한 현실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인 정치권력을 다루고 있는 2장은 무엇보다 "정치권력 자체가 시민 전체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일전에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그런 연유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을 평생 체화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국 정치가 얼마간 실종된 상황을 몸소 경험한 그가 아마도 인간이 야만적인 자연상태와 같은 무법적인 상황에 내몰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정치는 그것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여겼습니다. 저자인 밀러 역시 그런 의미로 정치권력 자체가 시민들 사이에서 그리고 시민과 사회 전반에서 서로 간의 신뢰를 이어주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타인과 타인의 관계 혹은 이런 타인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가 어감이 좋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통제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러한 맥락을 그토록 거부하는 자유 지상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도 극명하게 인지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밀러가 이 글 4장에서, "개인의 자유가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주장은 선뜻 거부감을 운운하더라도 그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전자의 자유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우파에 대해 어느 정도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한데요. "자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진지한 성찰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정부와 자유"와 관계에서 양자 간의 권력 관계를 많은 수사를 통해 분석하려 하기 보다는 자유 자체는 정부가 없다면 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고르게 보장할 수 없다는 진실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2장과 3장에 걸쳐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의무'와 다음에 나오는 '사회 정의'는 유사한 의미이기도 한데요. 특히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거부되어온 '정의'라는 관념, 더 나아가 '사회정의'는 그저 말로만 내뱉는 쓸데없이 허망한 단어가 아니라 그만큼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 체제를 기반으로 누구나 마땅히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회의 존재 의의는 시민들의 삶이 스스로의 선택과 통제에 의해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와 법을 통해 이를 지지하는 것에 있겠는데요. 사실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건국에 이른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여러 정치적 논의들 가운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고, 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약간 상이해 보이는 논증일 수도 있지만 4장 전반은 오늘날처럼 각종 자원을 보유한 소수 기득권층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를 신봉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헌법이나 제도 바깥의 현실 측면에서 여타 시민들이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그 자체로 순수한 욕망의 한 발로라는 것을 긍정하고 이러한 관념을 사회 전체를 가득 채워 자신들에게 쓸데없는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치밀하게 관리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에 다수 시민들이 생계의 덫에 빠져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물론 공공선과 사회 책임과 의무라는 가치를 인지하고 있는 다수 시민이 현시점에서 무슨 혁명 같은 걸 기대하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여기에서 짧게 논의되는 '시민 불복종'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맞게 세밀하고 촘촘하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한데요. 이처럼 시민들에 의한 지배, 그를 기반한 정치 체제 전반, 이러한 체제가 어떠한 정치에 기반하고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는 사회적 의무와 시민 불복종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각할 거리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에서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의 활동을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은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화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사회가 끊임없이 파편화에 이른 것은 거의 사실로 보입니다. 빈부 격차가 나날이 심화되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이 시민들의 개인주의화와 더불어 상황을 악화시켜 왔는데요. 신자유주의화 초기에 공공선과 공적인 책임에 대해 강력한 공격이 이뤄진 이후로 시민들 대부분이 삶을 오로지 스스로의 책임 하에 놓이는 것으로 마무리 되는데요. 즉, 권력을 위임하게 되는 투표 행위가 권력을 조정하고 정치 체제 전반을 감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벤트'로 한정되면서 시민들이 정치에서 더욱 멀어졌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현실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여전히 많고 그 시발점에서 저자의 언급대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건전한 토론에 이를 수 있도록 그런 기반을 만들 수 있어야만 할 텐데요. 뒤에서 재차 현실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자유 또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보에 기반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전무하다면 그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듯 시민들 스스로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 여러 사회적 조건과 정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불어 정치권력을 포함한 정치 전반에 대한 관심과 비판이 전무하다면 그것이 신자유주의화이거나 만연된 정치 불신 혹은 사회적 신뢰의 결여가 원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자유와 삶의 통제를 주장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뒤이어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는 5장의 기본 정의와 확대된 사회 정의는 헌법이 규정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치에 기반하고 이 평등과 정의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이러한 논리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평등과 정의 자체는 만약 사회와 정치 제도를 제대로 정립하여 이를 전체에 걸쳐 편익과 비용의 공정한 분배 그리고 더 나아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토대에서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이 장의 분석인데요. 소위 사회적 비용이라든지 또는 개인의 능력 차이를 중요 잣대로 들이대 사회가 최소 이상으로 해야 될 평등과 정의에 관련된 임무를 거의 수수방관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강화된 민주주의가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저들의 뿌리 깊은 사고에 기인합니다. 물론 앞선 표현은 지극히 순화해 작성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득권을 갖고 있는 계층과 이를 전방위적으로 지지하는 지식인들과 정치 권력에 의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평등과 정의를 논하는 것 자체에도 급진주의적이고 혁명적인 더 나아가 터무니 없는 공산주의의 음모로 몰고가 사회가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는데요. 사실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 자체가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해체를 진행시키고 있고 이런 '위 아 더 월드'로 인해 거대한 자본 차익에 대한 탐욕을 더 보장하기 위한 작업이 되었다는 것인데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기법인 기업들의 아웃 소싱은 지구의 남반구를 북반구에 종속시키는 결과와 개도국을 선진국들의 공장으로 전락시키면서 모두가 함께 번영하지 못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시작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정치는 이제 모든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외치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완인 상태입니다. 더욱이 새뮤얼 헌팅턴과 헨리 키신저와 같은 이들에 의해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심각한 과두제가 아니더라도 시민 전체의 지배를 거부하는 양상으로 기반이 된 정치 변형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미 저런 자들에게 넘어가 버린지 오래다." 라고 체념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데요. 이러한 정치 불신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것은 되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고 6장 말미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정치적 올바름'을 우리 스스로 버려서는 안 될 겁니다. 제가 굳이 여기서 '정치적 이성'이라든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올바른 책무 따위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면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결국 현실 정치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혐오 발언'와 '인종주의', '종교적 편견'을 무슨 인간의 권리인 양 내세워서는 안 될 겁니다. 모두가 누리는 자유, 개인의 기회가 평등한 세상, 시민의 말에 귀 기울이는 정부, 맹목적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시민들 그리고 미완의 사회 정의를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사회 인식은 전부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관계가 있다고 보는데요. 이는 저자의 당연한 인식이자 저 역시 강하게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한 줄기 불길한 생각은 저 극우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모조리 다 파괴하여 결국 모든 사회가 과두제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디스토피아적 공상인데요. 이건 그저 제 상상의 소산으로만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 저자가 이렇게 짧은 분량에 정치의 거의 모든 논의들을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칭찬을 하고 싶은 데요. 이 뿐만 아니라 번역 역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역자의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지배되는지 나쁘게 지배되는지에 따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에 등을 돌릴 수 없으며, 사적인 삶으로 물러설 수 없고, 우리가 지배받는 방식이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의 종언‘ 테제, 즉 본질적으로 모든 사회는 경제적 힘들에 의해 추동되어 스스로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홉스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극단적 급진주의자들만이 민주주의를 정부의 한 형태로 믿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적 관념들의 영향력 있는 원천이었던 루소조차도 민주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홉스가 이런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자신들을 위해 가능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자주 언급되었다

정치권력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대안은 서로 직접 얼굴을 대하는 공동체를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협조를 가능케 하는 초석으로 삼는다

국가가 규제에 나서고 세금을 부과하고 군대에 징집하고 그 밖의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국가를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국가 없이는 잘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시민들 스스로가 쟁점들을 직접 결정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대표해 일군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그 소임이락로 논했다

우리는 비록 여기서 루소가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이 선출한 지도자의 활동을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감시하는 일에 대해서조차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요컨대 정치권력은 결국 시민 전체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로크가 경고했듯이 마침내 우리를 지배하는 사자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인정받을 때에야 비로소 삶의 성취를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개인인 것이며, 이것은 새롭고 인습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가는 공공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모든 사람이 적절한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의료보험 시장을 규제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적절한 건강관리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할 의무를 진다

즉,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 사이의 선택은, 비록 기술이 진보하고 사회가 더 거대해지고 복잡해짐에 따라 좋은 정부의 형태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우리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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