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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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웨일스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이자 동시에 공공지식인이었던 버틀런드 러셀은 수학, 논리학, 철학, 언어학, 분석철학 그리고 인식론과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앞선 분석철학과 관련해 러셀은 제자인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해당 철학분야를 창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사회와 더불어 그런 사회가 초래하는 비참한 전쟁들에 대해 자신의 양심을 걸고 비판했던 살아있는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참혹한 양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러셀은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냉전하에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인의 의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을 비판했으며, 미국의 원자탄 사용에 있어 간혹 유감스러운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는 필연적으로 냉전 체제 전반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 시민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러셀의 이 책은 '사회 재건의 원칙'이라는 주제로 1916년, 런던에서 행해졌던 강연을 기본으로 출간된 것입니다. 국역된 책 제목인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는 1917년 처음 미국에서 출간된 책의 제목이 국내에 출간된 책에도 제안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y Men Fight"로 2010년도에 미국에서 새롭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8월 번역 출판 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러셀의 이 강연록은 그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두고 천착했던 여러 주제들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국가의 역할이라든지 전쟁의 원인, 민족주의,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로인한 시민들의 삶, 개인의 창의성, 교육과 여성의 진정한 자유 등에 대해 거의 가감 없이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수록된 강연에 대한 내용이 1916년임을 감안해 본다면 오늘날에도 충분히 그의 비판적 사고가 쉽게 투영될 수 있을 사례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특히, 전쟁과 그 원인에 대해 논한 3장은 정체된 사회가 시민들의 창의력과 관심을 건전하게 돌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사회가 민족주의적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이 일정 부분 전쟁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었는데요. 그는 후반부 논증에서 전쟁 자체가 다른 사회와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는 것이냐에 대해 진정한 회의를 품고, 전쟁에 모든 시민을 끌어들이게 하는 '모든 것을 쥔 정치'와 이것이 결국 무고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끝내 비극으로 이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이 기본적으로 판단하는 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권력의 집중화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회 전반에 권력에 대한 건전한 비판 의식을 유지시키는 정치 체제입니다. 그가 거듭 강조하는 대로 역사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요. 러셀이 이 글의 초반에서 논증하는 대로 영국과 프랑스의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결단코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이 새롭게 재무장을 하게 될 때, 이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독일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러셀은 이들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성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에게 간혹 보일 수 있는 전투적인 공격 성향은 이들 시민들이 자신들의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고 성장에 대한 욕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 등을 사회가 채워주지 못할 경우,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평가하는데요. 이처럼 본래의 시민들을 삶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건전한 욕구를 채우게 끔 하는 사회 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이 된다면 그만큼 스스로 벌이려고 하는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더불어 민족주의에 대한 대두에도 이와 비슷한 해법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전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비참한 물결은 바로 러셀의 경고에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음 2장에서는 전쟁이라는 국가의 원초적인 기능과 관련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국가에 대해 복종하고 그 국가가 규정하는 시민의 의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지 논하고 있습니다. 이미 법률과 질서로부터 최대의 이익을 얻는 사람들, 이를테면 부유층은 국가 권력이 축소되어 무질서한 상황이 되면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물론 러셀의 시대의 국가와 지금의 국가는 상당한 인식적 괴리가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사회에 기인하든 국가에 기인하든 얼마간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이들은 체제 내에서 질서가 붕괴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물론 대다수 시민들도 이와 비슷한 입장일 텐 데요. 현재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있음으로 해서 최소한의 복지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필요한 일은 해야만 한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국가는 국민 개병제를 비롯, 제국주의적 잔재하에 국가가 일반 시민들에게 군림할 수도 있는 과거의 잔재를 갖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위협에 따라 내부적인 위협이 만연할 수도 있다."는 증명되지 않은 위기 의식들은 '국민 국가'로서의 체제 안위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러셀은 이러한 국가들의 폭력적인 원동력이 되는 '애국심'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애국심은 종교과는 달리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애국자들이 들끓는 세상은 분쟁이 들끓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지금도 이 애국심을 수단으로 삼아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는 "대부분의 문명국들 내에는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힘 말고도 정치인들의 부탁이 있기만 하면 언제라도 전쟁열로 휩쓸려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인들의 분명치 않은 감정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여 이러한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러셀이 거듭 강조하는 자유에 대한 함의는 이처럼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4장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분명히 논하고 있는 러셀은, 이미 우리가 민주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을 드러냈음에도 어째서 산업 전반과 자본주의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하지 않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행복에 있어 어느 정도는 기여하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러셀의 경고대로 자본주의의 찬양 내지는 무분별한 '배금주의'는 분명하게도 '인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 두 번 정도 들어봤을 SF 드라마의단골 소재인, "왜 지구인들은 스스로의 정신적인 삶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돈과 생산활동에 집중하고 있느냐."는 외계인들의 그와 같은 의구심은 단적으로 우리의 삶 자체가 창의적이지 않고 고유성을 잃은 지 오래라는 소리일 겁니다. 그래서 러셀은 광범위한 행복과 관련된 4장에서, 어떤 산업 체계를 평가할 때 쓰이는 네 가지 주요한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생산의 극대화 (2) 분배의 정의 (3) 생산자가 견딜 수 있을 만한 생활 (4) 최대한의 자유와 활력과 진보에 대한 자극을 보장하는가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각지의 대부분의 산업이 보다 민주적인 체제를 통해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가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불행하게도 러셀의 어두운 전망과 마찬가지로 작금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임금 노동 체제가 사회적인 불공평을 야기하고 영속시킨다."고 경고했는데요. 사회 전반이 상당한 불공평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각 시민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들의 양과 노력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이라고 볼 수 없는 인맥과 학연, 사업 파트너와 같은 것들로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능력주의 meritocray의 실체라고 본다면 능력주의 자체가 전반적으로 건전하다 볼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러셀의 강조대로 개인의 삶과 소위 자아 실현은 제도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의 선험적인 주장 역시, 아직 인간 사회의 불공평성이 해소되거나 정의가 정착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일반 시민이 법률의 실효적인 혜택을 받기란 일반적으로 아직도 요원하고, 법률이 규명하여 그것의 실질적인 이익이 될 만한 자들은 거의 돈이 많거나 권력을 획득한 자들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러셀이 판단하는 이론과 현실의 극명한 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자유와 관련하여 우리가 법률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현재 법률의 근본 원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이 법률을 감수하는 것은 사실상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데요. 일반적으로 모든 이에게 통용될 수 있는 이 자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여성이라는 주제어를 담고 있는 6장은 대부분 여성이 스스로의 권리를 받아들이고 취득하여 무엇보다 삶에 대한 통제와 자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결혼 제도가 기독교 정신에 기인하여 아직도 불합리한 면이 상존하는데요. 러셀은 그 시대의 새로운 사회 현상일 것도 없는 '혼외 정사 문제'를 언급하며 이를 결혼 제도와 맞물려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 보존이라는 문제에서 도출된 결혼 제도 전반이 남성의 성적 욕망과 일탈이라는 조건 뿐만 아니라 만연한 가부장적 모순에서 어느 시점까지는 함몰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러셀은 이러한 일관된 사회적 비판을 전제하면서도 여성들의 자유가 개인적인 생활과 국가의 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약간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논의되고 있는 결혼 내에서의 남녀 간의 성관계나 결혼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외도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느 정도는 자유와 함께 남녀 모두 기본적인 도덕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관계 자체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태도로서 접근해야만 하고 개인들의 차원에서 제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이 장의 후반부에서 러셀은 이혼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여성이 가정으로부터 탈피해 얻게 되는 자유라는 본질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될 것 인가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어 러셀은 어쩌면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유익하면서 올바른 가치와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도출해 냅니다. 1. 개인과 공동체의 발전과 활력은 최대한 장려되어야 한다. 2. 어느 개인 혹은 어느 공동체의 발전이 다른 개인 혹은 다른 공동체를 희생시키는 일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한다. 는 시민들을 포함한 모든 사회의 존중의 원칙이라 지칭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고유한 개별성과 사회에서의 공동체주의적 도덕 원리는 서로 간의 대립된 형질이 아니라 마땅히 상호 발전시킬 수 있는 주제들인데요. 물론 이들은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과는 아주 상이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맥락에서 러셀은 이 강연을 하게 된 진정한 취지로서, 글 도입에 소개된 벤담과 밀의 자유주의를 대체하고 픈 마음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러셀의 주장대로 개인의 충동을 얼마나 사회의 제도 원리로서 통제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런 통제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찰이 필요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물론 본능의 제어는 무엇보다 필요하고, 앞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국가를 마음대로 부리려고 하는 것과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통제 안에 들지 않으려 하는 것은 어쩌면 사회와 국가를 건전한 원리 밖으로 퇴락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덕적 통제는 마땅히 사회에 필요한 것이고 그런 틀 안에서 시민 각각의 고유성과 개별적인 창의성을 확대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한편으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에 러셀이 모든 시민들이 섣불리 희망을 놓지 않게 하는 이러한 강연을 준비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러셀을 터무니 없이 백안시 하지만 그도 역시 지금의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인 휴머니스트가 아니었나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득 지그문트 바우만의 글이 그리워지는 저녁입니다.



-3장에서 제법 놀랄만한 문장이 보였는데요. "혁명기의 프랑스가 만약 유럽 대륙과 대영 제국을 정복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더 행복하고, 더 문명화되고, 더 자유롭고, 나아가 더 평화로운 세계가 되었을 것"이라는 러셀의 고백 아닌 고백입니다. 분명 이는 에드먼드 버크와는 매우 상반된 입장일 텐 데요. 앞뒤 맥락으로 봤을 때는 반쯤은 농담도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어느 정도는 러셀의 자유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원문을 찾아보고 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적의를 품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해도 자신이 느끼는 적의는 상상력에 의지한 이해심과 동정심을 통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옛 선현들이 말했듯이 이성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너무나 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한다. 이성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전쟁을 야기하는 충동과 열정에 반대되는 충동과 열정에서 기인한 적극적인 활동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력을 다해 줄곧 민주주의를 반대해오던 영국과 프랑스의 모든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통치자들은 이론상으로 자신에게 허용된 권력을 넘어서는 전제와 억압을 자행하자 희생자들은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으며, 소수의 영화를 증대시킬 목적을 위해서만 살아갈 필요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낡은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협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유기적인 사회가 성장할 수 있게 하려면 개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근대적인 감정이 요구하는 개인의 권리를 구체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각종 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감정에 휩쓸리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이익이 된다고 스스로를 기만하거나 충동이나 욕구가 조장하는 행동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국심이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애국심이 지향하는 선은 전체 인류를 위한 선이 아니라 자기 나라만을 위한 선이다.

애국자들이 들끓는 세상은 분쟁이 들끓을 수 있다. 애국심이 강한 민족일수록 다른 민족이 입는 피해에 무관심해진다.

그러나 나는 법률도 그렇지만 정의 그 자체는 너무나 고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정치 원리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출구가 없으면 사람들은 사회적인 활력과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다.

대부분의 문명국들 내에는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힘 말고도 정치인들의 부탁이 있기만 하면 언제든 전쟁열로 휩쓸려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인들의 분명치 않은 감정이 존재한다.

정의의 관점을 포함해서 그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현재의 분배 체계는 변호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본주의가 통상적인 체제가 아니라 예외적인 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세계 각지의 대부분의 산업이 보다 민주적인 체제를 통해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산업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화려하고 즐거운 생활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남성들의 찬탄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여성은 젊음이 지속되는 동안은 출산을 최대한 연기하려고 한다.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그렇듯이 이 문제에서 정치적 지혜의 토대는 바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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