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몸값
조지 기싱 지음, 김경식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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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로버트 기싱은 19세기 이후 영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스스로 사실주의 문학을 열기도 했고 당시 하층민들의 삶에 있어 돈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거의 적나라하게 주제의식으로 드러냈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여러 작품에서 남녀 간의 결혼에 있어 여성들이 남자가 가진 재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 환경과 그러한 세태를 거의 냉혹하게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낭만이 쇠퇴하고 그 뒤를 현실이 잇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그와 같은 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기싱 본인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뉴 그럽 스트리트' 이후 거의 4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원제는 "Eve's Ransom"입니다. 번역본은 2019년 9월, 문학사상사에서 펴냈으나 번역한 원본이 정확히 몇 년도의 무슨 판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선택할 권리는 각자에게 온전히 부여되어 있을 겁니다.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가치, 관념, 명확한 의미에 대해 적나라한 표현을 서슴치 않기도 합니다만 기싱이 묘사하고 있는19세기의 영국에서 젋은 남녀가 애정에 이르는 길이 표면적으로는 꽤 녹록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가 줄곧 강조하고 다루고 있는 '가난'과 '돈에 대한 거의 꾸밈 없는 절박한 사조'가 그저 안락한 삶 만을 위한 대중들의 지극한 속물 근성으로 공격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이브 매들리는 여성이 으레 보일 수 있는 '상대가 품는 감정에 대한 모호성'을 자기 변호에 끌어와, 그대로 진실을 외면하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알콜 중독에 빠진 부친을 두고 근근히 가정을 꾸려가야 하는 가련한 소녀로서 그녀가 자신의 절박한 환경을 극복하고자 돈이 많은 남자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브 매들린이라는 캐릭터에 제가 쉽게 호의를 보일 수 없던 부분은 가난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와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본인 스스로의 욕망에 비견될 정도로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여러 측면에서 이용했다는 사실일 겁니다. 자신을 절친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패티 링로즈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진실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것이 앞선 진술의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스로의 양심에 맞게 행동하는 고결한 낭만주의자인 모리스 힐리아드는 무엇보다 주변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간직하고 있는 청년입니다. 의도치 않는 반전의 주인공인 그의 절친인 로버트 나래모어와의 대화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물론 당시 영국이 상업주의의 발달로 사회 전반이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규정되는 것에 대한 실제적인 예시가 힐리아드를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합니다. 몰락한 자신의 가족사와 더불어 근근히 하루를 살기 위해 원치도 않는 일을 해나가고 있는 그는 이 상황을 진정으로 타개하기를 원하는데요. 아마도 기싱의 의도적인 장치이겠지만 글 도입에서 그가 얻게 되는 436파운드의 횡재 아닌 횡재는 극적인 삶의 변화를 예고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예기치 않게 더들리에서의 인연이 힐리아드와 이브를 잇게 하는데요. 자신의 감정과 사랑에 대한 열정을 숨길 필요가 없이 자신만만한 힐리아드에게 이브와의 만남은 소설 전반에서 중요한 장치이자 사건이라 여겨지는데요. 사실 그가 이브에 대해 가졌던 처음의 인상은 그저 낡은 사진 한 장 뿐이었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있을 이브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으로 다가올지 본능으로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여기에 제 3자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한 여성에 대한 소소한 기록이 자신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상황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무엇보다 후반부에서 상당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된 것은 이브가 자신의 속내를 힐리아드에게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의 절친인 나래모어와도 이브가 얽히면서, 그간 힐리아드의 더할 나위 없는 호의와 배려를 당연히 이용해 왔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너에게 참혹한 굴레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에 힐리아드가 내밀었던 도움에 대해 그저 "작은 고마움" 뿐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저는 정신적인 아득함까지 느끼게 되었는데요. 소설의 도입에서 기싱이 힐리아드를 가리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삶을 살아온 청년"이라고 규정했을 때 비로소 이 이브 매들리가 그와 대척점에 선 캐릭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에서 이브가 힐리아드에게 그간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속내를 물어보던 긴장감이 흐르던 그 짧은 대화는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역시 자신의 절친과 한때 사랑했던 여인 사이에서 힐리아드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진실을 밝힐 줄 알았는데요. 하지만 힐리아드는 자신의 친구와 그 여인의 입장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 같은 그의 진심에 두 사람을 향한 경멸이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도 저의 억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브는 자신이 끝내 바라는 소위 굴절된 이기심이 어느 정도는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인데요. 기싱의 힐리아드에 대한 간접적인 증언이기도 한 대목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옭아맸던 이브라는 존재에게서 벗어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본래의 자유로운 기질을 되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가 속물임을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우며 더 나아가 남들에게 자신이 속물이라는 평가를 달가워하지 않는 인간들의 이중적인 태도를 고려한다면 무엇보다 힐리아드가 보인 고결한 태도는 낭만주의가 왜 현실에서 퇴장할 수 밖에 없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이용하든 자신의 이익과 그러한 이익 추구가 태생적으로 양심의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는 문제이며, 사회 전체를 점차 상업주의가 휩쓸고 있던 당시 영국의 사조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낸 기싱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이브의 몸값'의 배치가 얼마나 절묘한지 글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서평에 의도지 않게 핵심적인 스포일러가 있어 글을 읽는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버틀란드 러셀의 비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여주인공은 별의별 낯부끄러운 구실을 대면서 가난한 남자를 버리고 자신이 훨씬 더 사랑하는 부를 지닌 남자와 결혼한다." 이에 관한 러셀의 맥락은 조지 기싱이 사실주의에 속한 작가들 중 유독 비관주의에 물든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회적 맥락으로서 부와 돈에 대한 배금주의를 매우 노골적으로 드러낸 기싱은 아마도 현실을 감춘다는 것이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달리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야. 에밀리와 조카딸이 곤궁함으로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일주일에 1파운드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지금에 와서 힐리아드는 자신이 하는 비열한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아가씨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했고, 지켜보게 했다.

이브와 비교해 패티는 대단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힐리아드는 그녀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녀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됐고, 이 사실이 이브를 평가하는 데 아직도 긍정적인 효과를 미쳤다.

그는 이브가 본래 성격과는 아주 다른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주 고역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결혼 자체를 안 할 가능성이 많아요. 남자라면 짜증이 나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죠. 힐리아드 씨 당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자들이란,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다 이해한다고 하기에는 정말로 다른 점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정말로 속기가 쉽죠."

그녀는 그가 사랑을 받고 싶을 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결같기는 했지만, 그것은 열렬한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여성이 보여주는 한결같음이었다.

젊은 아가씨가 자신을 그의 처분에 맡길 때, 그녀에 대해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그 상황에 따른 명백하고 진부하면서 통속적인 결과일 때, 그는 얼마나 많은 자제를 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럼 이제 당신에게 저는 뭐죠?"
"영국의 숙녀, 다른 숙녀보다는 좀 더 지적인."
이브는 만족감에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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