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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보낸 하루 ㅣ 라임 틴틴 스쿨 11
김향금 지음 / 라임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김향금은 지리학과 국문학 등을 공부한 저자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는 그가 ‘조선에서 보낸 하루’를 쓴 지 3년만인 2018년 출간한 책으로 일제 강점기의 서울인 경성에 대한 가상 여행을 전제로 쓴 책이다.(‘~에서 보낸 하루’ 시리즈 책은 2019년 ‘가야에서 보낸 하루’까지 이어졌다.) 가상 여행이라 했지만 시간 여행의 의미를 갖는 말이다.
일행이 경성을 방문한 시기는 1934년 무렵의 어느 봄이다. 1930년대는 우리가 사는 현대 생활의 거대한 뿌리다. 규율, 폭력, 통제 등이 시작된 시점이다. 일행의 여행은 하루 일정의 여행이다. 한 친일파 은행장의 저택에서 시작해 그곳에서 끝나는 여행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여행기인 한편 생활사를 담은 역사책으로 규정했다.
일행이 본격 여행에 앞서 들른 곳은 1925년 9월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건설된 경성역이다. 도쿄역이 아닌 루체른 역(스페인의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Santiago Calatrava’가 설계. 루체른역은 1971년 화재로 사라지고 현재는 현대식 역사가 들어섰다.)을 모체로 한 역사(驛舍)다.
당시 경부선 시간표에 경성에서 부산 가는 기차에 상행, 부산에서 경성 가는 기차에 하행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일본 본토가 아닌 조선이나 만주에서도 모든 것이 도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도쿄쪽인 부산 방향을 상행으로 삼은 것이다. 원래 경부선은 조선의 전통 도시인 공주와 강경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조선 시대 공주는 충청도 감영이 있던 중심지였고 강경은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시장이 설 만큼 교통의 요지였다. 일제는 조선의 전통 도시를 무시하고 대전에 기차역을 세우고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그 뒤 대전역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몰려와 잡화상과 여관, 술집을 열고 장사를 했다. 허허벌판이었던 대전은 경부선이 지나게 되면서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경부선과 경의선은 일제의 만주 진출의 발판이었다. 당시 일본은 1872년부터 자국에서 시행하던 좌측통행을 우리나라에도 적용했다. 본문에는 사라진 광화문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총독부 맞은편, 옛날 의정부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붉은 벽돌로 된 경기도청 건물 이야기도 나온다.(서울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경기도에 속한 경성부라는 일개 도시로 격하되었다.)
공조(工曹) 자리에는 체신국이, 이조(吏曹) 자리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가, 호조(戶曹) 자리에는 순사 교습소가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있다. 본문에는 고종 이야기도 나온다. 개혁을 추진했지만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여러 열강의 간섭 때문에 개혁 추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34 페이지)
일제 강점 초기만 해도 조선인들은 북촌, 일본인들은 남촌에 모여 살았다. 이때 북촌과 남촌을 가르는 기준은 청계천이었다. 그러다 1926년 남산 아래의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자리로 옮김에 따라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북촌에 진입했다.(39 페이지)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분이 건축왕 정세권이다.
1920년대에 물이나 음식물에 들어 있는 세균에 의해 전염되는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다. 호랑이에게 찢겨 죽는 것 같이 아프다고 해서 호열자(虎列刺)라 불린 이 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콜레라, 장티푸스 등은 위생 관념 부족 탓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수도 시설 등 인프라 부족 때문이다. 청계천은 탁계천이라 불릴 정도였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악랄하게 심문한 폭력 통치의 상징이라면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식민지 경제수탈의 상징이었다.(71 페이지) 일제 강점기 학교는 규율의 제국이었다.(76 페이지)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차별과 동화라는 모순적인 정책을 펼쳤다. 모두 천황의 신민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나 자치권을 주지 않고 차별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에게 일본어와 일본 역사, 일본 지리를 가르치며 일본식 의식주 문화를 퍼뜨리는 동화 정책을 폈다. 일제의 이런 동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 학교였다.(82 페이지) 1919년 3월 전국적인 민족 저항 운동인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무력을 동원한 무단통치에서 회유와 이간질을 곁들인 문화통치로 지배 방법을 바꾸었다.
악명 높았던 헌병 경찰 제도도 보통 경찰 제도로 바꾸었고 조선인의 신문 간행도 허용했고 무관만 임명하던 조선총독 자리에 문관도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기만적인 정책이었다.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 총독 자리는 전부 현역 군인이 맡은 것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친일 지식인 양성도 당시 추세였다.(92 페이지)
당시 일본인들이 호들갑을 떨며 즐기는 하나미(はなみ; 화견; 花見; 벚꽃놀이)를 위해 경성 시내는 벚나무 천지를 이룰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선명하게 구별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계천이 아니라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이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선이었다.(103 페이지)
청계천 북쪽을 북촌이라 부른다. 이름은 같지만 조선시대에 지배층이 살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과는 엄연히 다르다.(103, 104 페이지) 일제 강점기의 북촌은 종로를 중심으로 발달한 거리다. YMCA와 한성전기회사, 화신백화점 같은 근대식 건물이 간혹 보이고 넓은 거리에는 전차가 무시로 지나갔다.
청계천 남쪽에는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경성우편국(중앙우체국 자리, 건물은 철거됨),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전기주식회사, 혼마치호텔 같은 근대식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를 미츠코시백화점 자리에서 광화문통으로 옮긴 뒤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북촌에 진출했다.
북촌이 정치, 행정, 교육의 중심지였다면 남촌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다. 일본은 경성에 반듯반듯한 바둑판 모양의 도로를 만들어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한양의 골목길은 대부분 사라졌다.(105 페이지) 일제가 들여온 근대 문물과 제도는 일본인과 극소수 상류층의 조선인들만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당하며 빈곤한 삶을 떠안았다.
일제는 1929년, 1940년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연이어 열었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박람회 및 공진회를 170여회 열었다.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의도였다. 소설가 박태원의 구보는 갑빠라는 머리 스타일을 했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종묘, 창경원 앞 대학병원, 경성운동장, 훈련원, 약초정, 본정을 지나 조선은행 앞에서 내렸다.
원래 구보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해부학을 담당하던 일본인 교수 이름이었다.(114 페이지) 해부학 교실에서 실험용 해골이 사라지자 조선인은 해부학 실험 대상이라는 망언을 한 사람이다. 보통학교 시절 학교에 약을 가져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박태원을 누군가 그 일본인 이름에 빗대어 어이, 구보 박사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별명이 되었다. 박태원은 이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기 별명을 구보라 칭했을 정도였다.
일제는 순종이 죽자마자 종묘 관통 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를 공원화하려는 속셈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광화문에서 안국동을 거쳐 돈화문을 지나 종묘를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해 창덕궁, 창경궁, 종묘를 강제 분리시켰다.(119 페이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북촌의 상징인 종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926년에 조선 총독부가 광화문통에 자리 잡은 뒤 조금씩 바뀌었다. 1930년대 들어서서 은행, 회사 등 3, 4층의 근대식 건물들이 세워지고 조선인이 운영하는 백화점도 문을 열었다.(123 페이지) 본문에는 제비다방이 나온다. 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이다. 이상이 기생 출신 '금홍'을 마담으로 앉히고 1933년부터 중구 다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인 1935년까지 운영한 다방이다.
종각역 1번 출구로 나와 걸어가면 만나는 농협 인근인 종로1가 33번지에 위치했던 다방으로 벽에 이상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1931년 일제 강점기에 개최된 미술 공모전인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입상한 그림이다. 이상 시인과 신명소학교 동기동창생인 구본웅의 막내 아들 구순모씨가 자신의 큰형 구환모씨가 아버지를 따라 몇 번 다방에 간 뒤 자신에게 이곳이라며 손으로 가리켜 보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은 인사동에 카페 쓰루(つる; 鶴)를 세우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제비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 1889 - 1923)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제비처럼 날렵하고 신출귀몰 했기에 붙은 이름이다. 제비다방이란 이름은 구본웅이 이런 글을 남긴 데서 비롯되었다. “아침 7시, 제비 길을 떠났더이다. 새봄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1933년 이상이 폐결핵에 걸려 총독부 건축 기사 일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 온천으로 요양 갈 때 함께 한 친구가 구본웅이다.
구본웅은 열일곱 살 때 학교에 가다가 우연히 의열단원인 김상옥의 최후를 목격했다. 독립운동 탄압의 총본부라 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제 경찰들과 대치하다 자결한 분이다.(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있다.) 박태원과 이상은 이태준, 이효석 등과 함께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에 몸 담았었다.
본문에는 서대문형무소 이야기도 나온다. 1930년대 경성 트로이카라는 지하혁명 조직을 이끌며 일제에 저항한 사회주의 운동가 이재유(李載裕; 1905 - 1944)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남북한 모두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분이다. 독립 운동가 일송 김동삼(金東三; 1878 - 1937) 선생 이야기도 그렇다. 만주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분으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운 분이다.
3.1 독립운동 기념터인 선은전 광장 이야기를 보자. 선은전(鮮銀前)이란 조선은행 앞이라는 의미다. 명동역 5번 출구 한국은행 앞 인도 오른쪽이다. 광장 가는 길에 조선호텔이 있다. 일제가 철도 호텔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원구단을 철거하고 세운 호텔이다.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운 일제는 같은 방식으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원구단 자리에 서양식 호텔을 세운 것이다.
원구단이 자리한 곳은 소공동이다. 소공로는 조선 태종의 둘째 공주인 경정 공주가 살던 궁이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거리 이름이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었고 1916년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 - 1924)가 살았다 해서 하세가와마치로 불리기도 했다.(166 페이지)
당시 북촌에는 조선인이 세운 화신백화점이 있었고 남촌에는 미츠코시백화점을 비롯 네 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정원)은 시인 이상이 날개가 돋기를 꿈꾸었던 장소다.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추모하기 위해 새운 제단이다.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175 페이지)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 경성신사, 박문사를 지었다. 박문사(博文寺)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리는 절이다. 박문사의 박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いとうひろぶみ)의 박문이다. 일제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다 이름까지 경춘문이라 바꾸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혼부라(ほんぶら)란 말이 있다. 현재의 충무로인 본정(本町) 즉 혼마치를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플라뇌르에 해당?)을 말한다. 동경의 긴자 거리를 헤매는 것인 긴부라에서 따온 말이다. 원래 이곳은 진고개라 불린 곳이다. 지금의 중국 대사관 뒤편의 충무로 2가 언덕길이다. 혼부라를 하던 남녀들을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에 세 명의 왕이 있었다. 박흥식은 화신백화점 사업으로, 정세권은 북촌의 대단위 한옥 단지 사업으로, 최창학은 삼성 금광 사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당시는 황금광 시대였다.
여행은 정동을 거쳐 경성역에서 끝난다. 이 여행은 전작인 ‘조선에서 보낸 하루’에서 한양 여행을 한 지 141년이 지난 시점인 1934년에 감행한 하루 여행이다. 일본 제국은 1868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다. 1868년은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해이다.
경성은 상업 도시이자 소비 도시였다. 당시 경성의 외국인 비중은 30%에 달했다. 당시 북촌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남촌은 불야성을 이루었었다. 여행은 설레지만 경성 여행은 역사적 무게 때문에라도 그리 편한 여행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경성에서 보낸 하루’는 230여 페이지 정도고 활자도 큰 데다가 삽화나 사진의 비중이 크지만 참고 문헌의 수가 많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꽤 알찬 책이다. 전작인 ‘조선에서 보낸 하루’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