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이유도 없이 새벽에 한 번 잠이 깨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는 5시 30분에 맞춰진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밖은 여전히 캄캄했고 습관적으로 운동복을 꿰어 입은 나는 무거운 몸을 겨우 추스르며 현관을 나섰다. 새벽 기온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아파트를 벗어날 무렵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낭패였다. 우산을 가지러 다시 돌아가자니 귀찮고 우산도 없이 그냥 가자니 빗발이 거세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비좀 맞으면 뭐 어때'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산을 올랐다. 귀차니즘이 결국 나를 압도한 것이다.

 

산을 반도 오르지 못했는데 빗발이 굵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전히 푸른 나뭇잎들이 직접적으로 비를 맞는 건 막아주었다는 점이다. 능선에 있는 체육공원에 들러 몸을 풀었다. 정자 밑에서 체조를 하고 팔굽혀펴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했다. 철봉은 이미 빗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잠시 있었다. 피가 머리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산길을 걸었다. 늘 다니던 길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웠던 탓에 발을 헛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휘청 하면서 중심을 잃었다.

 

'정말 간절하게 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다 같이 도와주'지는 않았다. 'Sunsiri' 아줌마 정도의 영적 능력이라면 비라도 그치게 했을 텐데 말이다. '더 블루 K'라는 회사를 만들고 사업이 번성하기를 간절히 원했더니 전 우주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청와대와 문체부는 나서주지 않았던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영적 능력이 턱없이 낮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무리 간절히 원했건만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명 위기 국면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있지만 권위는 무너졌다. 임기라고 해야 1년 남짓 남은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했다면 그것은 이미 대한민국 내에서 최고권력자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명예로운 퇴진은 아니지만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라도 직을 내려 놓는 게 현명한 처신일 것이다. 측근에서 보좌하는 사람들도 대통령에 대한 충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퇴진을 건의하는 게 맞다고 본다. 적어도 자신들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대통령을 끝까지 남아 있도록 한다는 건 비겁하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위기 국면을 타개하고 장기적인 아노미 상태를 극복하는 유일한 해법이리라.

 

정부와 여당은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 몇몇을 처벌함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인 양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권력을 상실한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인물도 없으려니와 권력이 살아 있을 때 미처 말하지 못했던 그간의 비리들이 봇물처럼 터질 것임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힘 없는 대통령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날 테니 말이다. 그런 비리들이 하나둘 드러날 때마다 대한민국의 위기는 증폭되고 국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갈 것이다. 결국에는 쫓겨나듯 등 떠밀려 직을 내려 놓는 것보다는 지금 스스로 물러나는 게 낫다는 얘기다.

 

이제 비는 그쳤다.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의 실상처럼 여전히 하늘은 어둡고 찬바람이 불 때마다 으스스한 한기가 옷깃을 파고든다. 다들 무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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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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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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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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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을 거스르며 바람이 불고 있다. 스산한 느낌이었다. 스산하다는 그 느낌에서 나는 생각을 멈춘다. 그래. 가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바람은 이미 불고 있었지. 심지어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의 어느 날에도 나의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시원한 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어. 그것은 다만 시원하다는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손끝에 감지되지 않는 어떤 것이었을지라도 내 머릿속에선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상상처럼 가을이 왔고, 가을도 다 가기 전에 벌써 스산하다고 느낀다는 건 나는 이미 겨울을 염려하고 있거나 상상 속에서 겨울을 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같은 계절을 두 번 사는 게 아닌가. 한 번은 상상 속에서, 또 한 번은 현실에서.

 

가을 햇살이 옅어지던 오늘, 나는 박주영의 소설 <고요한 밤의 눈>을 읽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의 90퍼센트의 사람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노예이거나 소모품이라는 전제를, 나머지 10퍼센트의 사람 중에 다시 10퍼센트, 즉 전체의 1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조종하고 기획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정 나라를 언급한 적 없으니 어쩌면 전 세계를 의미하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책은 단순히 스파이 소설에 불과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현대인의 절망적인 삶과 파편화된 개개인의 모습을 조망하고 있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X는 X의 일을 하고 Y는 Y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파이이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는 하나이거나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세상, 그 세상의 이면에 우리가 있고, 우리의 이면에 또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 우리를 모른 체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등 뒤를 모른 체한다.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하지만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결국 우리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언젠가 뒤돌아서 등 뒤를 보아야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p.132)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생각의 날틀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순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으로 불시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체도 없고,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도구로서의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고 보듬어야 할까. 소설에는 여러 이니셜로 지칭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15년간의 기억이 사라진 채 깨어난 서른다섯 살의 남성인 X와 X가 병원에 있는 동안 보호자 역할을 했던 여성 요원 Y와 정신과 의사 D와 스파이 조직의 중간 보스인 B와 소설가 Z 등.

 

"인간이 기억의 총합이라면 그 기억을 가진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그 누군가. 하지만 그녀는 정답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십 년 전의 나만을 알고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말은 진실일 테지만 그것은 그녀의 진실뿐이었다." (p.39)

 

성인이 된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은 X는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 정신과 의사 D를 만나기도 하고 자신의 친구라고 기록된 Y를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자신을 안다는 한 남성이 접근하여 그가 과거에는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는 애널리스트로서 조직을 위해 일했노라고 말하면서 다시 조직에 복귀할 것을 종용한다. 한편 신분을 바꿔가며 중요 요원들을 감시해왔던 Y는 X가 다시 스파이 일에 복귀하도록 조종하는 임무를 맡고 X에게 접근한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p.162)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스파이에 자원했던 수석요원 B는 자신도 단지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새로 들어오는 신참들은 그런 꿈마저 없이 오직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소설가인 Z를 지목했던 B는 Y에게 그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겼었지만 X와 가까워져서 그를 설득하고 감시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Z를 감시하는 일은 다른 요원에게 맡겨진다. Y는 X의 서재에 꼽혀 있는 Z의 책을 발견하고 Z와 X가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 일상은 매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알람에 맞추어 겨우 일어나 요기를 하고 일터로 나가는 분주한 하루의 시작부터 그 하루를 바삐 보내고 지친 몸으로 귀가해 식사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켜놓은 채 앉아 있다가 잠드는 나른한 하루의 끝까지, 그 하루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는 누군가의 몸짓을, 이야기를 시간과 함께 잊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기록한다. 하지만 기록은 기억을 완전히 대신하진 못한다." (p.63~p.64)

 

Y와의 결혼을 염두에 두었던 X는 Y의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정신병원에 있는 Y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한때는 스파이였던 Y의 어머니도 딸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정신병자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X는 알게 된다. 한편 Z가 X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Y는 Z의 감시 임무를 다시 맡게 해달라고 B에게 부탁한다.

 

"현실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사람, 바꿀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는 격렬한 희망을 여전히 품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p.288)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스파이 조직이 어떤 성격의 조직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소수의 상위 그룹에 집중된 권력의 편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다수의 대중은 점차 냉소와 무관심만 더해가는 현실에서 '생각은 최고의 지성이었고 최상의 사치'로 변모해 간다. 그런 환경이 지속될수록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운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 작가는 우려스러운 것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주변은 온통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스파이들의 세상으로 바뀌고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사라진다. 이러한 비극적은 결말이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회복해야 하고, 그 원동력은 바로 독서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을 터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던가. 실체도 없고, 진실도 없었던, 어쩌면 종교보다 더 성역화 된 '반공'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 온 게 아닌가 싶다. 개인의 능력이나 정당의 도덕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반공'이라는 종교를, '안보'라는 신을 숭배해 온 우리에게 지금의 현실은 뼈아픈 자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대통령 한 명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참회여야 한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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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손쉽게 어두워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혹시 비가 올지도 모르겠는걸' 생각했었다. 일기예보에는 분명 비가 온다는 내용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일기예보에서는. 그러나 기상청 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내린다 한들 사람들은 대개 그러려니 이해하거나 "웬 비람" 한마디 내뱉고는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 갈 게 틀림없었다. 일상에서 그런 일쯤이야 밥 먹듯 흔한 일이고 주변에는 우리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세상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간 간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세상은 개인의 욕심을 동력으로 쉼 없이 굴러가는 것이기에. 다만 허공에는 보이지 않는 전파가 무수히 많은 것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개인의 욕심이 복잡하게 얽혀있을 뿐이다. 개개인의 욕심이 향하는 과녁은 각자 다르고 그 강도 또한 천차만별이겠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일순간 제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동력을 잃은 세상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몰라.

 

요즘 대한민국 전체를 떠들석하게 만드는 핫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최모 여인과 그녀의 딸 정모 양,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주변의 인물들일 것이다. 연일 새로운 뉴스들이 쏟아지는 통에 그들의 재력과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도 없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현 정권의 실세와 손을 잡지 않고는 그런 일들을 감히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건 아마도 세 살배기 어린애도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인데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최근에 만났던 사람들 중 대화의 중간에 그 뉴스를 꺼내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지 못했으니 그들이 과연 '난 놈'이거나 '난 X'이 아닐 수 없다. 그 바람에 콘크리트 지지율이라고 하던 대통령의 지지율도 허무하게 깨져 25%까지 곤두박질 친 걸 보면 집권 여당의 미래도 암울하다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여러 권력층들, 예컨대 검찰이나 언론 등이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현 정권의 다음을 기약하지 못한다면 권력에 동조하거나 그에 기대어 갖은 짓을 일삼았던 그들 또한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송모 씨의 회고록을 크게 부풀려서 연일 떠드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검찰이 야당 국회의원들을 무더기로 기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모든 별들도 소멸하기 직전에 밝게 빛나는 것처럼 정부 여당과 그 추종자들도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결국 그들의 욕심이 향하는 곳은 명계의 어느 곳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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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 평범한 사람들의 기이한 심리 상담집
타냐 바이런 지음, 황금진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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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내 기준에 의해 누군가를 재단하거나,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적대시하거나,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반응에 당황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게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결국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사실을 아프게 인정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관계로부터 배우는 이러한 사실을 도외시한 채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를 나 스스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허튼 기대로 인해 짧은 만남과 그로 인한 상실의 고통만 경험하는 건 아닌지 조용히 뒤돌아보게 됩니다.

 

새벽까지 달이 밝았습니다. 푸르게 쏟아지는 달빛에 의지하여 산길을 오르노라면 달빛에 비친 어룽어룽한 나무 그림자와 고즈넉한 새벽 숲의 고요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합니다. 내가 즐겨 찾는 이 자연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숱하디숱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겸허히 수용하기는커녕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고 미워하고 내 속을 박박 긁는, 그야말로 아수라의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무척이나 운이 좋았던 셈이지요.

 

"요컨대 온전한 정신의 끝은 어디며, 정신이상의 시작은 어디인가? 우리 중에서는 운 좋게도 스스로 혹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망 내에서 인생의 난관을 용케 잘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이들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규정한다. 반면 우리 중에는 계속 부인하거나 자신의 불운을 투사할 대상을 찾아냄으로써 문제에 대응하는 이들도 있다." (p.429)

 

타냐 바이런이 쓴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우리는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심리 상담 사례집입니다. 영국의 임상 심리학자이자 아동 심리학자로 25년간의 임상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저자는 실습생 시절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나는 정신분석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정신 분석가들이 그렇게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않았다면 나도 정신분석 이론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신분석가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잘난 줄 알고 있었고 오로지 자신들만이 정신 건강의 바이블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삶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쥐고 있지만 정작 그 근거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 이론은 언제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느낌이었다." (p.85)

 

'집안의 치부 혹은 비밀'이라는 의미의 '해골 찬장'(The Skeleton Cupboard)'이 원제인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야말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았던, 그렇지만 내가 아닌 '너'로서 현실에 존재하는 호모 속의 호모 사피엔스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타냐의 목에 흉기를 들이댔던 소시오패스, 어린 시절 계부로부터의 성추행을 경험했던 소녀가 연못에 빠진 동생을 구하지 않게 된 사연, 결혼을 앞두고 성적으로 무관심해진 커플, 좋은 집안과 개인의 재능을 모두 갖추었지만 거식증에 걸린 소녀,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던 중 자신조차 치매 증상을 보이는 할아버지, 인생의 말년에 알게 된 친딸의 생존 소식과 만남을 거부한 모녀, 약물중독과 HIV 환자 등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웃의 사연을 저자는 전문가의 입장에서 자세히 들려줍니다.

 

"자, 이제부턴 솔직해지자. 어떤 아이의 인생을 180도 좋은 방향으로 바꿔놓아 이제 그 아이가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아이를 죽고 싶게 만든 이 거지 같은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야 한다면그게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이 되는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내 보호 본능을 재단하기 전에 당신들의 보호 본능부터 들여다보길 바란다." (p.114)

 

어렸을 적에 계부로부터의 지속적인 성추행을 경험했던 이모젠은 자신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연못에 빠진 여동생을 일부러 구하지 않았습니다. 계부와 친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동생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모젠에게는 계부이자 여동생에게는 친아버지인 그 사람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이모젠이 상담을 통하여 좋아졌으므로 다시 사회로 네보내진다고 할 때 저자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합니다.

 

"해럴드 할아버지는 너무나 신사다운 분이기 때문에 나에게 그 점을 대놓고 지적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침묵은 내게 정신적 고뇌를 겪고 있는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절대로 잊지 않는 교훈을 한 가지 깨우쳐주었다. 인간인 우리는 대개 중대한 일에 진땀을 빼지만 가장 큰 의미를 지니며 가장 큰 절망을 초래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사건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해럴드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할머니한테 책임지고 감을 사다줄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그랬다." (p.225)

 

해럴드 할아버지의 사연은 이모젠보다 더 기구합니다.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해럴드 할아버지와 그의 아내는 자식도 없이 온전히 두 부부만 서로를 의지한 채 살다가 아내가 치매에 걸려 요양소 생활을 하게 되자 해럴드 할아버지는 아내를 살뜰히 돌봅니다. 그러다 자신마저 정신이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큰 절망을 초래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사건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해럴드 할아버지에게는 아내가 좋아하는 감을 사다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체육공원 트랙을 몇 바퀴 돌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을 헐떡인다든가, 가볍게 지면에 닿을 줄 알고 높지도 않은 곳에서 뛰어내렸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정수리까지 찌르르 전해오는 울림을 감지할 때 그 절망감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행복이란 아주 사소한 일을 오늘이고 내일이고 끝없이 반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큰 일을 성취했을 때의 일시적인 행복만 쳐다볼 뿐 정작 사소한 일을 반복할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은 눈에 띄지 않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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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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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뭐가 그리 바쁜지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기억들조차 되는 대로 마구 구겨넣게 된다.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바쁠 때는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처럼 여유가 있는 어느 날 그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반듯하게 펴고 온전히 기억할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마저도 단지 호사로만 여겨질 뿐 그때그때 떠오르는 어떤 것들은 그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바라보게 된다. 소리도 없이 비가 내렸고, 비가 그쳤던 간간이 바람이 불었고, 약간의 우울을 선사하듯 하늘은 종일 흐려 있었다. 오늘과 같은 날씨는 계절이 깊어가는 가벼운 떨림일 수도 있고, 과거로의 퇴행과 앞으로의 전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실랑이일 수도 있었다. 가을비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내어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사람들 모두가 나날이 정이 깊어가는 걸 보면 가을도 따라서 깊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가을은 정이 깊어지는 계절이니까.

 

나는 오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읽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안온한 풍경 속에서 1953년 당시의 미국 시대상을 상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소설에서 챈들러가 묘사하는 동네 곳곳의 분위기는 그의 매력적인 문체와 적절한 사색이 결부되어 시종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챈들러의 소설은 추리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주인공 필립 말로의 인생사를 조망한 감동적인 소설로 읽혔다.

 

"아무 느낌도 없다는 말은 정확히 맞았다. 나는 별들 사이의 공간처럼 텅 비었고 공허했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독한 술을 섞어서는 거실의 열린 창가에 서서 한 모금씩 마시며 로렐캐년 대로 위에서 차들이 흘러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로가 끝나 있는 곳에서 이어지는 언덕 너머에 걸려 있는 성난 대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p.452)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챈들러는 빠른 전개와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단순히 이야기 중심의 추리소설을 쓰는 일본의 추리소설업계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한 사람의 영웅을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주인공의 천재적인 추리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는 유럽의 추리소설업계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문학적 매력과 추리소설의 긴박함을 한 권의 소설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던 셈이다.

 

"알코올은 사랑과 같은 거야.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번째는 친밀감을 주지만 세번째는 지겨워지거든. 그 다음에는 그저 여자의 옷을 벗기는 거지." "사랑이 그렇게 형편없는 건가?" 나는 물었다. '격조 높은 흥분을 자아내긴 하지만 불순한 감정이지. 미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거야. 나는 섹스를 비웃는 것은 아니네. 필수적이기도 하고, 추하게 볼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렇지만 항상 잘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섹스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유지하기란 십억 달러짜리 산업에서 일 센트까지 맞아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p.41)

 

<기나긴 이별>의 구성은 사실 단순하다 못해 다소 지루한 느낌마저 들게 하지만 필립 말로를 비롯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내뱉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느 인문학 서적의 경구 못지 않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만들고 그런 대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독자는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결국 600페이지가 넘는 그의 소설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어내는 것이다.

 

"하워드,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죠." (p.545 자살을 한 아일린 웨이드가 유서에 남긴 말)

 

"법은 정의가 아니오. 아주 불완전한 메커니즘이지. 정확히 맞는 단추를 누르거나 운이 좋다면 대답으로 정의가 나타날 수도 있소. 하지만 모든 법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목적에 이르는 절차일 뿐이지." (p.96 변호사 엔디코트의 말)

 

필립 말로는 40대의 늙고 가난한 사설탐정이다.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우연히 만난 테리 레녹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고,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기 많은 대부호의 딸 실비아 레녹스가 잔인하게 살해되고, 그녀의 남편이었던 테리는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다. 멕시코로의 탈출을 계획했던 테리는 말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테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말로는 그가 절대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테리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돌아온 말로는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는다. 사건이 크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던 할란 포터(실비아의 아버지이자 테리의 장인)에 의해 말로는 무사히 석방되었고 멕시코로 탈출했던 테리는 자신이 실비아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오래 냉정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흔한 재능은 아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적이 없는 위엄을 지키기 위해 일생 동안 가진 에너지의 반을 소진하면서 살아갑니다." (p.314 말로가 아일린 웨이드에게 한 말)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테리는 자살하기 직전에 말로에게 편지를 썼고 봉투 속에 50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동봉했다. 그가 대가로 원했던 것은 다만 자신이 말로와 함께 자주 들렀던 술집에서 김릿 한 잔을 마셔주는 것뿐이었다. 죽은 자신을 대신해서 말이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설가 로저 웨이드를 지켜달라는 출판업자 하워드의 사건 의뢰를 거절하지 못함으로써 말로는 다시 테리가 살았던 그 마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테리를 둘러싼 복잡한 일들을 하나하나 밝혀냄으로써 독자는 다시 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돈이란 몸집이 불어나면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양심까지 얻게 되지. 돈의 힘이라는 것은 매우 통제하기가 어려워. 인간은 언제나 돈에 좌지우지되는 동물이오. 인구가 성장하고, 전쟁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고, 세금징수율이 높아지면 끊임없이 압박이 들어오고. 이런 일들 때문에 인간은 점점 더 돈에 좌지우지되는 거요.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지치고, 두려워하게 되고, 지치고 두려움에 빠진 인간은 이상을 지탱할 여유를 잃게 되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우리 시대에는 공적, 사적인 도덕률이 충격적인 속도로 바닥에 떨어지고 있소. 자기 인생의 품질이 결핍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좋은 품질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거요. 대량생산에서는 품질을 따질 수가 없지." (p.388 할란 포터가 말로에게 한 말)

 

사실 내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대강의 줄거리만 겨우 알아챌 정도의 거칠고 투박한 독서였다. 그것을 독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나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집중하며 읽었다. 인용문에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기록한 까닭도 그래서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사보다는 묘사 부문에 끼워넣는 경향이 있는 반면 챈들러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하여, 말하자면 각 인물의 대사에 작가 자신의 주장을 슬몃 찔러넣곤 한다. 두 작가는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어쩌면 좋은 소설가가 된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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