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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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가 트인 생각이 수로를 따라 외길로 흐를 때가 있다. 논에 물을 대는 모든 봇도랑이 그렇듯 외길로 흐르는 생각은 다른 생각이 끼어들거나 또 다른 생각과 합쳐지지도 않는다. 하나의 결과 혹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생각은 대개가 부정적이다. 긍정적이거나 합리적인 생각은 그렇게 조금의 여유도 없이 외길로만 흐르지 않는다. 이따금 본류를 벗어나 겉돌기도 하고 다른 생각과 자연스레 합쳐지기도 한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처한 고민이나 상실의 고통 등은 오직 외길의 수로를 따라 같은 길을 반복적으로 헤맬 뿐이다.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시간을 통해 선명했던 그 길을 차츰 지우는 방법뿐이다. 시간이 지운 그 길은 옅은 흔적만 남긴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든 잊었던 그 길의 흔적이 선명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된다면...


"도박에 빠져든 뒤로 남편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걸핏하면 불끈해서 험한 욕설을 퍼붓고 주먹까지 휘두르는 가정 폭력을 저지르곤 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아야나를 데리고 남편에게서 도망치듯이 집을 뛰쳐나왔다."  (p.33)


시가 아키라의 미스터리 소설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꽤나 흡입력이 있는 책이다. 시대상을 그린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는 게 대개 흡입력이 있고 마니아층을 형성한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평을 받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마구잡이로 출간되는 미스터리 소설로 인한 폐해는 많은 독자들의 이탈을 부추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미스터리 소설의 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력 있고 참신한 신예 작가의 유입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017년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로 데뷔한 시가 아키라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최근 발표한 <너는 속고 있다>는 지금 일본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SNS 불법 사채업'을 소재로 재구성한 미스터리 소설이다.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앉고 아야나마저 잃어버린 뒤로 사채업의 트러블을 해결하기에 급급해서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은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동안에도 벚꽃은 몇 번이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이렇게 아낌없이 떨어져 흩어졌을 것이다."  (p.307~p.308)


사업 실패 후 폭력적으로 변한 남편을 피해 일곱 살 딸아이를 데리고 도쿄로 도망쳐 나온 싱글맘 누마지리 다카요는 콜센터 일을 했던 경력을 살려 클레임 처리팀의 상담사로 일했으나 산경에 이상이 생겨 결국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자 3개월째 연체된 임대료를 열흘 안에 납부하지 못하면 강제 퇴거를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그녀에게 돈을 융통해 주겠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녀는 결국 SNS로 고객을 모집하는 불법 사채업자에게 매달리게 되는데...


"사채업자라고 하면 살벌하다 못해 끔찍한 폭력과 피 튀기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사채업자들은 '소프트 사채'라는 신조어처럼 겉으로는 말랑하게 예의를 차리는 보통 사람입니다. 이웃처럼 선량한 얼굴의 사채업자라니, 더더욱 피부에 스며드는 오싹함이 있습니다."  (P.325 '옮긴이의 말' 중에서)


생각의 외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같은 길을 헤매는 이는 오히려 사채의 늪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한 달 이자 9%라는 살인적인 금리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데 급급할 뿐이다. 미래의 일은 그다음의 문제일 뿐이다. 당장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사채의 늪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렇게 더욱 깊숙한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사채업자들 역시 이런 심리를 십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시가 아키라의 소설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를 읽는 독자라면 채무자의 딱한 사정과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탄식하며 안타까움에 몇 번이고 손에서 책을 놓게 될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마련한 마지막의 반전에 혀를 내두르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터리 소설의 묘미는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비가 그친 바깥 풍경은 마치 물때를 제거한 유리창처럼 맑고 신선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우울하지만 덥다 싶었던 기온이 제자리를 찾아서인지 산책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선 사람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 경제가 어렵다는데 불법 사채업의 수렁에 빠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질지 걱정이 되지만 오늘은 일단 선선한 날씨의 일요일 오후. 산책에 나선 저 사람들의 여유로운 표정이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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