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허공에는 누군가 끊임없이 걸었던 마음 발자국들로 가득합니다. 길이 없어 더 길다웠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기약도 없이 기다렸던 적이 있나요? 그 많은 그리움들이 소리도 없이 소복소복 쌓여갑니다. 하여, 하늘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허공의 어느 곳에 내 자신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심란했던 어느 날, 실체가 없는 허공에 무심한 눈길이 닿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주히 다녀갔던 누군가의 마음길을 묵묵히 걸어본 것일 테지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으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히말라야였을까? 전문 산악인도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환상종주(Annapurna Circuit)를 여행 초짜였던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시작한 것일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까닭을 누군가에게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잃고 헤매일 때 육신의 고통을 잊고 오롯이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곳은 히말라야가 유일하겠지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에서 육체의 고통은 다만 고양된 영혼의 승화로 이어져 선명한 마음길을 미끄러지듯 내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 사남매의 맏이였던 내겐 몇 가지 금기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무서워요, 못해요. 어머니는 내게 '강인함'을 요구했다. 상처를 받아도, 슬픈 일이 생겨도,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 없이 이겨내기를 바랐다. 죽는시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자존심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은 내 인생을 통제하는 정언명령이 됐다. 히말라야 산속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p.48 ~ p.49)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김혜나 작가와 함께 떠난 안나푸르나 환상종주 17일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회상하고 있습니다. 전문 이야기꾼답게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일정에 적절한 위트와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어느 여행기에서나 등장하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이나 애수, 기족이나 연인에 대한 그리움 등 끈적끈적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던 이야기, 일정 내내 변비에 시달렸던 이야기, 일정에 쫓겨 혹은 현지 사정에 의해 세수도 거른 채 일정을 소화했던 경험, 고산병으로 착각하여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일화 등 여행에 서툰 작가의 일상이 세세하게 드러납니다.

 

최대 난관이었던 해발 5416미터의 쏘롱라패스(Thorung La Pass)를 오르는 과정은 마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나는 '작가는 과연 오를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과 조바심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입담과 재치있는 유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그러나 이따금 등장하는 그녀의 가족사와 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쏘롱라패스에 올랐던 작가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혜나가 먼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몸을 돌리고 발아래 설산들을 바라보았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쿵 울고 있었다. 기적 같았다. 이 고갯마루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이. 새벽녘에 찾아든 사자의 손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승민이만큼 자유로웠다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게.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행복했다. 양팔에 설산들을 끌어안고 트위스트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p.186)

 

세상과 맞설 힘을 얻기 위해 안나푸르나를 택했다는 작가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자꾸 희미해져만 가는 자신의 마음길을 선명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극한의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잠시만이라도 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뚫고 내 온전한 마음이 하늘에 닿게 하는 것, 그 망망한 허공에 나만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이토록 후진 자질로, 극단적인 두 성질의 충돌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기나긴 어둠을 어찌 통과했는지 스스로 신통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울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노는 일마저 훈련해서 노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정전 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내 판단에는 그랬다." (p.132 ~ p.133)

 

나는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작가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마다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네 삶에서 인생은 때로 용량초과의 과도한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극복하라고 모진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요.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후기(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떠났던 '안나푸르나 환상 독서'가 끝난 셈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만의 마음길을 닦지 못한 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없이 방황하면서 말이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4-06-09 00:3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정말 멋진 곳이지요... 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가봤는데(랑탕계곡), 아쉽게도 안나푸르나는 포카라의 사랑곳 전망대에서 먼발치로 '마차푸차레(6,993m)'만 구경하고 내려왔답니다. 언제 또다시 히말라야를 가게 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되면 그땐 꼭 안나푸르나로 갈 생각입니다.(작년에 함께 히말라야에 갔던 몇몇 친구들과는 내후년에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년에 세 번째로 또 히말라야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요. 그 친구가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올랐던 코스가 바로 이 책의 작가가 다녀온 코스와 똑같네요. 그 친구는 그 길을 홀로 21일 동안 걸었다고 하더군요.)

꼼쥐 2014-06-10 18:0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제 주변에도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이 몇몇 있는데 다들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부러운 마음에 다녀오고는 싶지만 현실을 핑계로 포기하곤 했었죠. 이 책을 읽고나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드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2014-06-2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7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