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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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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꽁꽁 숨겨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아껴가며 누리고 싶은 계절이요 시간들이다.  청명한 하늘과 막 단풍이 드는 나뭇잎들과 더없이 적당한 기온과 따사로운 햇볕...  그야말로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치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의 한허리를 베어내어 다락방 한 귀퉁이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동짓달 어느 추운 날에 구비구비 펴고 싶은 심정이다.  황진이의 싯구처럼 말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집 <모든 게 노래>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해 약간의 사전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내가 왜 처음부터 구구절절이 계절 얘기를 했는지, 그 계절이 어쨌다는 건지 조금은 알(것이라고 믿지만)지 않을까?  감잡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음악을 (심하게)좋아하는 작가가 계절을 나누어 봄에서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감상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서는 다양한 뮤지션이 소개되고 있고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등장하지만 나는 그 중에 절반도 알지 못했다.  그런 탓에 책을 읽은 시간보다는 책에 소개된 노래를 찾아 듣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것도 일이라고 나중에는 지쳐 쓰러질 정도로 피곤했다.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p.185~p.186)

 

누구에게나 어느 시절, 어떤 계기로 인해 물리도록 듣던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런 노래일수록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쉽게 잊으려 해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듣게 된 그 노래에 기억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퇴행을 한다.  마치 정지했던 화면이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마자 재생되는 것처럼 노래를 듣던 그 순간이 노랫말과 함께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피아노 선율에 맞춰 공원 길을 달렸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램프가 어두운 길을 비추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와 윤상의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 내 숨소리도 들렸다.  머리 위로 키 큰 나무들이 휙휙 지나갔고, 저녁 공기가 모두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이런 순간들, 짧은 순간들, 바람 같은 순간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p.28~p.29)

 

언젠가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이 음악을 듣고 있기에 어떤 노래를 듣고 있느냐고 물었었다.  그룹 아바(ABBA)의 맘마미아를 듣고 있었다는 아들의 대답에 순간 움찔했다.  아, 아바라니!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듣던 아바의 노래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투명한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비틀스와 카펜터스의 노래를 즐겨 듣던 아들은 이제 아바의 노래를 듣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아들과 나는 그때의 순간을 추억처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온다.

 

"공부하듯 음악을 듣는 바람에 얻게 된 게 또 하나 있다.  나는 기타를 산 덕분에 음악을 열심히 들었고, 음악을 열심히 들었던 덕분에 소설가가 되었다.  기타를 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됐고, 내게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음악적 재능을 흠모하게 됐고, 그러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됐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됐고,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됐다."    (p.69)  

 

내 손에 들어온 책들은 대개 쉽게 읽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며칠 동안 끙끙대며 읽어도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책으로 나뉘게 마련이다.  이 책은 전자에 속하는 책이다.  책에 대한 이런 분류는 단지 책의 쉽고 어려움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책이 독자의 경험과 정서에 얼마나 가까우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김중혁 작가처럼 학창시절을 노래만 들으며 날라리(?)로 보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그야말로 모범생 중에 상 모범생으로 살았다.(쓰고 나니 내 자랑 같다. 자랑 맞다.)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면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p.229)

 

내가 견딘 시간을 고스란히 추억으로 보상받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치열했던 시간보다 뭔가 빈 듯한, 빡빡하지 않고 느슨했던, 다소 성긴 듯하면서도 헐거웠던 그 시간들이 내 지난 삶에서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치스러운 계절에 맘에 드는 노래 한 곳을 반복해서 들으며 하루하루의 숨가뿐 일정표를 잊고 싶다.  어쩌면 우리가 추억이라는 부르는 것들이 반쯤은 뇌에, 그리고 또 반쯤은 음악으로 세포 속에 녹아드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내 몸 어느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음악의 기포가 '펑'하고 터지는 순간 나는 반사신경보다 빠르게 그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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