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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 타율적 관리를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엇그제만 해도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던 딸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받고 있고 요즘에는 종종 방과후 프로그램도 학교에서 받고 있다. 학교 담임선생이 정기적으로 지시하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지만 일주일에 2번 영어학원(작년에는 일주일에 3번이나 영어학원에 가야 했다.), 음악학원 1번을 간다. 이외에 아이 엄마는 별도로 아이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있고 가끔 수학이나 과학숙제도 시킨다. 걸스카우트까지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두번 관련행사에 참여한다.
아이가 아빠와 놀러 왔을 때에도 늘 숙제를 안고 왔고 컴퓨터 게임을 하던, 퍼즐놀이를 하던, 애니메이션을 보던 아이는 하루종일 숙제 노트를 끼고 있다.
아이가 낑낑대고 있는 숙제를 가끔 들여다 보면, 초등학교 4,5학년 수학과 영어, 기타 과목의 수준은 우리 세대가 중학교에서 배우던 정도에 해당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전반적인 초중고의 수업 난이도가 30년 전보다 높아졌다. 아이들의 성숙도나 지식, 지혜의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 엄마가 우리의 부모처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모두가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현실은 꽉 짜여진 구조 속에 놓여있다. 
30년 전에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때 그들은 거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배웠고 아이들끼리 동네에서 각종 놀이와 게임을 통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협의하고 규칙을 배우고 만들고 실행했다. 4계절 내내 계절과 조건에 맞는 놀이가 존재했다. 동네 골목과 인근 놀이터와 공터, 논과 밭, 들과 야산, 농수로와 하천은 언제든지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아이들에게 제공된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은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유치원 이전의 유아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정도이고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부터는 어울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런 공간은 유치원에서 별도 학습비를 받아 단체로 다녀야 하거나 부모들이 주말에 이동수단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움직여야 했다.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난 후에 아이들이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사교육이 장악했다. 1990년대에는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학부모들이 사립중학교와 사립고등학교, 또는 특목고나 8학군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단기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느정도 경제력이 되는 학부모들이 강남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교육은 삽시간에 수도권으로 전파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오후 시간과 저녁 시간에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부모의 경제력 수준이 아이의 학원 수준과 학원의 갯수를 결정한다. 방학 동안의 단기 해외체류나 장기 유학 역시 부모의 경제력이 결정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스스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은후 유학을 가거나 워킹 할리데이를 떠난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평균 학습수준은 평준화를 향해 달린다.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다. 학부모들에게도 학생에게도 다른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학원을 다니고 비슷하게 해외에 갔다 오면 전체적인 학생들의 수준은 비슷해진다. 모두가 특목고나 일류 대학이 목표다. 어차피 대학의 입학정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평가로 학생들은 걸러진다. 일류대학와 이류대학의 차이는 없다. 한국의 대학은 어차피 멕시코의 주요 대학, 중국의 주요 대학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대학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평가로 들어온 학생들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차이도 아니다. 수 십만명의 대학 입시생들 중 1만명 정도까지 끊어서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뒤에도 그렇게 입학정원에 따라 학생들이 서열이 매겨진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을 위한 무한 경쟁이 또 다시 시작된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저고용 구조다. 고용 역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와 기업은 아직 그런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이 한정된 취업을 위해서 도 다시 대학생들은 1학년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안정된 직장으로 분류되는 공무원과 공기업 채용에 수백, 수천대 일의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공무원이 될 바에야 무엇하러 4년 동안 수 천만원을 들여 대학에 입학하는가? 대학에는 학문도 진리도 없다. 비싼 등록금만이 있을 뿐... 

요즘 ’반값 등록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오늘 처음으로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착잡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등록금 액수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에 민주화를 이룩해 냈다는 486세대의 자부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 이외에 더 국민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제도적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 오히려 양극화와 교육문제의 경우는 486세대가 음으로 양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등록금 문제는 오로지 대통령 당선과 국회 장악을 위해 정치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선언한 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날아왔다. 당장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이야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면 가계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값’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왜 등록금이 그렇게 높아야 할까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취업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받아들인 대학과 사학재단에게 물어야 한다. 취업이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무차별하게 대학설립을 허용한 정부에게 따져야 한다. 실업과 가난을 책임지라고!!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놓친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1971년에 처음 발간된 이 책은 ’교육’을 둘러싼 전반적인 구조와 역사, 세계관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학교와 대학, 교육과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를 단순히 교육이나 배움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제도와 시스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작년 11월에 저자가 1973년에 처음 발간한 <성장을 멈춰라>를 읽었다. 저자는 그 책에서 근대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무한한 진보’와 ’무한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한한 성장은 결국 "권력을 양극화하고 좌절을 보편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양식 또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떠나 근대 산업사회 경제방식이 결국 인류와 생태계를 자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학교 없는 사회> 역시 근대적인 경제방식이 가져온 또 하나의 시스템이자 제도이자 문화이다. 
 
----------------- * 이반 일리히는 누구인가? ---------------------------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열한 개의 언어를 익히고 신학과 역사학과 화학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떠돌이 학자를 고집한 그의 장기는 기존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주장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것이었다. 학교에, 의료체제에, 국가의 원조체제에, 종교계와 정치계에 관해 그가 던진 학설은 발표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격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의례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1951년 정치 망명객이자 신부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교회고위직의 승진코스를 추구하기보다는 푸에르토리코지역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며 빈민과 함께 사는 삶을 택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지만 점점 정치적이 되어가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를 알리게 된 계기는 아마 CIDOC이라고 알려진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하고 나서일 것이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어학기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여러 현실과 그 문제점을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평신도 종교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나누고 수많은 책과 소책자들을 출간해내는 싱크탱크이자 전진기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소위 선진국들의 개발원조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충돌하였다. 이 활동은 말 그대로 성공적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일리치는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등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중세사를 강의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이 후 그의 관심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한 과거를 기준삼아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는 일에 기울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낸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이다. 현실의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전통으로 돌아가 성찰해야 한다는 그의사유방식은 이후 아나키스트와 녹색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 사상가, 환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의학, 여성학, 종교학, 문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여행하는 그의 강의방식 역시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정작 일리치 자신은 행동을 촉구하는 소책자운동만을 펼쳤을 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소규모 청중을 위한 강연이 아닌 방송을 통한 인터뷰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그 후 15년이 넘도록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던 이반 일리치를 대담으로 끌어 낸 사람은 캐나다 CBC 방송의 데이비드 케일리이다. 집요한 설득 끝에 이뤄진 이 대담은 1988년에 시작됐고 이후 1992년까지 여러 차례 이어졌다.  ------------------------------ 

 1978년 처음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에 대한 한국판 번역이 <탈학교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뒤 1984년까지 3번이나 더 출간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4년이었다. 우연하게도 제3세계 여러나라에서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가 그 이후 사라졌다.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보수적인 어용학문에 대항하는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관심이 사라진 것이 배경이라고 추측한다.
박홍규교수가 2009년 새롭게 이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교수가 이반 일리히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고 한국의 사회문제와 교육문제에 대한 이반 일리히의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했고 나아가 사회 자체가 학교화된 것까지 부정했다. 

-------------- * 박홍규 교수는 누구인가? --------------------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로 스쿨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한다. 여러 예술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저자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간디자서전], [문화와 제국주의] 등의 책을 번역했다. --------------------

이반 일리히는 1958년 미국 교육학자인 에버릿 라이머(Everett Reimer)를 통해 처음 학교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일리히는 학교를 통해 보편적인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왜 학교를 비국가화해야 하는가]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고 주장한다.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로 인하여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하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되어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p.24) 가치는 사라지고 제도가 가치를 대신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일리히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고 보여준다. 이 세가지는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함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일리히가 ’가치의 제도화’를 주장한 지 정확하게 40년이 지났고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서 ’가치가 제도화되어버린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학교에 다녀야만 공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일리히의 지적처럼 실제로 우리는 그다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말과 글, 도덕과 규칙, 계산과 논리, 자연과 기술, 의사소통과 협조 등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즉 가족과 동네에서, 교사가 아니라 친구와 선배, 어른들로부터 배웠다. 요즘은 가정과 가족보다 TV와 인터넷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리히가 문제제기한 1960년대의 미국과 멕시코의 ’학교화’와 학교의 무능한 모습은 2011년 한국의 ’학교화’가 학교의 무능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학교화’는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역시 21세기의 진실이다. 

2. [학교의 현상학]에서 일리히는 ’학교’를 특정 연령층에게 의무적 교육과정의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학교는 겨우 20세기 들어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고 동양에는 20세기 중반에서야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3. [진보의 의례화]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가치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이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확신한다. 우리가 학교가 필요하다고 배우고 동의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각각 전문화된 여러 제도에 소비자가 의존하는 모습을 갖게된다. 그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양식, 소비사회에 필요한 수요자를 양성시키고 꿈과 미래를 정형화시킨다.(p.91)
사람들이 학교화돼 가치가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수긍하게 된다. 즉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척도, 아기의 지능을 재는 척도, 심지어 평화를 향한 과정을 전사자의 수로 계산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학을 가거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면 학사 졸업자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가?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는가? 더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4. [제도 스펙트럼]에서 일리히는 사회의 모든 제도가 제조와 파괴, 생산가 소비만을 반복하는 생활방식인 조작적 제도와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관련된 생활방식인 공생적 제도라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산업적 관료사회 이후를 향해 가는 현재로부터, 산업화 이후의 자율 공생사회라는 미래 즉 행동의 강도가 생산을 능가하는 미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제도 양식의 개혁,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교육 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4)

5. [부조리한 일관성]에서 일리히는 학교에서의 수업과 졸업장이 ’공부’를 정의하는 ’제도의 가치화’를 근본적으로 제고하지 않는 어떠한 교육개혁이나 새로운 수업방식은 모두 ’학교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6. [공부망]에서 일리히는 ’학교화’를 거부하고 진정한 ’공부’의 가치를 이룩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부망’을 제시한다. ’공부망’을 위해서는 교육적 목적을 위한 참고서비스, 기능 교환, 동료 연결, 넓은 의미의 교육자를 위한 참고 서비스가 접근법으로 필요하다. 

7.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의 부활]에서 일리히는 프로메테우스를 욕망과 가치의 제도화에 대한 신화속의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를 통해 균형, 조화, 가치 중심의 인간형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박홍규교수가 선택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도 이반 일리히의 본 뜻을 100% 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일리히가 이야기하는 ’Schooling’은 ’학교화’라는 의미로 일리히가 만든 단어라 할 수 있다. ’학교화’라 함은 ’학교’를 제도화함으로서 ’공부’와 ’배움’을 독점하고 그에 따라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치 공부를 잘하게 되고 배움이 커지는 것 처럼 인식된다는 의미다.
즉 ’가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일리히에게는 ’학교화’는 배움-학교 뿐 아니라 건강-병원, 안전-경찰, 안보-군대, 부자-GDP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이라 함은 ’학교화’의 반대이고 ’학교화’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거기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 Society’는 ’비학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학교화’하여 ’제도가 가치를 독점’하는 현상을 극복하여 가치 그 자체를 스스로, 공생적으로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없는 사회(2009)>의 1/3은 박홍규 교수의 해설에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일리히의 번역본 원문은 꽤 난해하다. 박교수의 해설 부분이 없었다면 책의 내용 중 상당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요 핵심을 얻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박홍규 교수는 친절하고 알기 쉽게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일리히의 주장의 요점은 일률적인 기계식 의무교육 및 고급교육이 결국 계급을 정당화하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만이 아니라 권력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교육에 대한 물신적 존경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학교교육을 믿고 있는 한, 학교교육이란 돈과 같은 기초적인 인간상품의일종으로서 인간이란 지식자본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는 단순한 학교 해체가 아니라, 제도화되지 않은, 따라서 계급화되지 않고 자율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사회 경제방식에 철저하게 지배되어온 한국에서 일리히의 사상이 퍼지고 대안이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제도화된 가치의 불합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제도화된 가치’를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남는 것은 양극화의 심화, 좌절의 보편화, 공동체의 해체, 물질과 의식의 오염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지옥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리히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구조와 시스템, 의식과 문화를 기초로 하여 현실을 재해석하고 실정에 맞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사들은 교사들 나름대로,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학부모들은 학부모 나름대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한국에서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적인 방법들은 지금 여러 단체와 집단에서 모색하고 있고 먼저 시도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지녀야 하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일리히가 가르쳐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 책 속의 문장
-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能辯)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은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나는 빗물질적 요구가 물질적인 상품의 수요로 변화할 때, 즉 건강, 교육, 수송, 복지, 심리치료가 서비스나 ‘보호’의 결과로 정의될 때, 지구의 붕괴 과정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 책 속의 책 : 플라톤 <국가>,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 2011년 6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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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가장 정직한 정치 교과서 서해클래식 5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재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너무나도 유명한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이다.
너도 나도 많은 글과 말에서 ’군주론’을 들어온터라 여러번 읽어볼 생각을 했었고 실제 이 책을 구입한지도 1~2년 지났으나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군주론’의 내용도 궁금했고 마키아밸리라는 사람의 인생역정도 궁금했다.
마키아밸리는 서기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5세기 중엽이면 역사가들이 이탈리아를 중시으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가 꽃피기 시작한 해라고 한다.
그런 그는 불행하게도 벌률가였던 아버지가 파산하고 나서 자질구레한 소송만 처리하여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주로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27세에는 어머니도 여의였다.
 
마키아밸리는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집안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부와 처신에 집중했고 권력을 직접 잡기보다는 권력자의 충실한 신하가 되기를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특히 과거와 당시 정치관계에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는 <군주론> 뿐 아니라 <독일에 관한 보고서>, <만드라골라(희곡)>, <전술론>, <피렌체사>, <로마사 논고> 등을 출간했다.
이 책 <군주론>의 최종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마키아밸리는 로마사와 독일, 프랑스 등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사 논고>에는 로마 뿐 아니라 당시에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군주론>에는 투르크 제국의 황제를 예시한 바 없어 왜 그런지 궁금증이 인다.

 
하지만, 그는 21세기까지 후세에 이름을 떨친 불후의 역작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살아 생전에는 권력자들에게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1498년부터 14년간 외교관으로 공직생활을 하였으나, 1512년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에 의하여 군주정이 실현되자 실각하여 체포,투옥되기도 했다.
1526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잠시 정치에 복귀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 <군주론>은 공화정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군주정’이 당시 시대에 더 적합하다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발간했다.
그런 그의 과거와 처세 때문인지 실제 마키아밸리는 그가 이 책을 바쳤던 로렌체 데 메디치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 책을 읽고나니 마키아밸리의 다급함과 간절함이 조금은 느껴졌고
<군주론>의 유명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살짝 엿보았다는 생각도 든다. 
 
근대 정치학의 시초가 되었다는 <군주론>...
이 책은 지난 500년 동안 숱한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한다.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공포하고 불태웠으며, 프랑스 인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맹비난했다.
이 책이 왜 이토록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 책이 정치와 군주에 대한 진실, 그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너무나 솔직하게, 또 너무나 현실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 아주 ’정직’한 정치 교과서이다. 




이 책 <군주론>은 권모술수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여 오랫동안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은 마키아밸리의 공직에 대한 ’간절함’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조금은 ’애국심’ -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에서 나왔다.
그가 살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 국가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가 친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그가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인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나면서,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것을 염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쉽고 간결하고 나름(?) 재미있다.
그가 직접 ’헌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책 속에는 어려운 용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다.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1532년에 출간된 고전(저자 사후에 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20~21세기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일정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역설하는 군주의 자질은 "21세기의 리더를 위한 텍스트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출판사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그의 군주에 대한 특징이 21세기 독재자와 안하무인격의 정치인에게도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알아둘 가치는 있을 것 같다.  
 
[마키아밸리즘(machiavellism)]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인 정치 이념을 뜻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국가의 운영이나 일반적인 행위에서 속임수와 표리 부동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윤리의 규범으로부터 현실정치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으로, 이 사상은 근대적인 국가관이나 정치학의 출발점이 된다.
절대왕정시대에 군주나 정치가가 목적달성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다하는 것을 ’마키아밸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어서 그와 같은 정치이념, 체계, 방법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 마키아밸리의 어록...

- 행운이나 타인의 호의가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군주가 된 인물로는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이 있다. (마키아밸리는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지는 인물들을 실존했던 군주인 것처럼 인정하고 다룬다.) p.51

- 잔혹행위는 단번에 행하고 은혜는 조금씩 행한다. p.77

- 권력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악덕으로 인해 악명을 떨치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신중히 생각해 볼 때, 고결해 보이는 행동은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반면, 사악해 보이는 행동은 지위를 강화하고 반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p.119

-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p.130

- 군주의 총명함은 우선 군주 주변의 인물들의 자질로 알 수 있다. p.164

-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 운명이란 우리 행동 절반에 대해서만 중재자이며, 나머지 절반은 대체로 우리 인간이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p.175   

[ 2010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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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드혼 농장 이야기
핀드혼 공동체 지음, 조하선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 부제 :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 참여자 : 피터 캐디(Peter Caddy), 아일린 캐디(Eileen Caddy), 도로시 매클린(Dorothy Maclean), 오길비 크롬비(R. Ogilvie Crombie), 데이비드 스팽글러(David Spangler)
 
이 책은 법정스님이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한 도서 중에서 류시화씨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 이어 12번째로 읽은 것이다.
 
영국은 여러가지로 참 특이한 나라이고 독특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은 18세기 들어 지구 상에서 가장 빠르게 산업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그 힘을 기반으로 대영제국의 깃발을 앞세워 옆 나라 아일랜드부터 저 멀리 중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체제를 구축하여 200여년 이상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와 민중들을 착취하고 학살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제국주의가 쇠퇴함에 따라 미국 제국주의에 밀려났음에도 아직도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있다.
영국은 정치적으로 표적인 입헌군주제 체제이고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의회민주주의와 대중투표제를 도입했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빨랐기 때문에 그 만큼 영국 민중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2008년 봄 한국의 광장을 환하게 밝혔던 ’촛불’의 원인이 된 ’광우병’ 역시 영국에서 처음 발견, 전파되었다. 지난 5월 12일 [나눔문화]에서 진행된 [평화나눔아카데미] 7번째 강연 ’잃어버린 마을, 살고 싶은 도시를 찾아서(김성균 )’에서 소개되었던 ’토트니스(Totnes)’는 ’광우병’ 사태로 철저하게 파괴되고 버림받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자본주의가 심화되었던 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과 대안을 위한 노력도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폭력적이고 자멸적인 폐해에 대항한 환경운동과 생태주의, 반문명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은 1960년대 중반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지방에서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농업, 새로운 경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다. 
 
10여년 만에 스코틀랜드 북부 지방의 바람이 거세고 메마른 모래 언덕에 놀랍도록 경이로운 식물과 꽃, 나무,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토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죽어 있었고 무용지물인데다, 어떤 화학비료도 일체 사용하지 않고 그 모든 생명체는 자랐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었고 선언했던 자연조건에서 이룩한 결과라는 점은 그 자체로 ’기적’에 가까웠다.
이 책은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피터 캐디와 그의 동료들이 자연의 영(nature sprit)과 데바(deva 선한 영)들과 어떻게 접촉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 * [핀드혼 공동체]란? -----------------------
핀드혼 공동체는 1962년, 전인(全人)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찾으려는 시도로 출발하였으며 이 시도가 일구어낸 성과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스코틀랜드 북동쪽에 있는 한 이동식 주택 마을에서 피터 캐디, 에일린 캐디, 도로시 매클린이 함께 시작한 이 공동체는 지금은 커다란 교육 센터가 되었으며, 매년 세계 각국에서 1만 4천 명이 넘는 방문자들이 찾아와 일정 기간 거주하며 인성 및 영적 수련을 받는다.
지금은 공동체가 확장되어서 재단으로까지 발전했지만 공동체의 설립 초기에는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만에 있는 척박한 모래땅 위에 세운 아름다운 농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1980년대부터는 자연과의 협력이라는 연속선상에서 에코빌리지 프로젝트(Ecovillage Project)의 개발에 참여해 왔다. 에코빌리지란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자연과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일해 나가는 동시에 인간과 사회의 요구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www.findhorn.org) ----------------------
 
1962년 11월 피터 캐디와 아일린 캐디를 포함한 6인은 스코틀랜드 북부 핀드혼 만에 있는 황량한 캐러밴 파크에 도착했다. 아일린의 내면의 안내자로부터 인도되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고자 한 것이다. 캐러밴 파크는 모래와 자갈만이 잡초와 뒤섞여 있는 척박한 토양이었다. 그들은 적은 면적의 밭에 씨앗을 뿌리고 화학비료 없이 자연 속에서 퇴비를 만들고 나무재를 만들어 밭을 갈았다. 처음 그들이 척박한 토양에 도전할 때 여러가지로 많은 운이 따랐다.
그들은 매일매일 일하는 가운데서도 틈틈히 명상을 하고 아일린과 도로시는 내면의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적었다. 메시지는 그들의 내적인 발전에 대한 조언 뿐 아니라 섭취해야 할 음식이나 농사활동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었다. 도로시는 농장일을 시작한 2개월 만에 명상 중에 직접 식물계의 데바, 스위트피 데바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렇게  완전히 전통적인 방식과 영적인 힘들의 도움을 받아 농장일을 해나갔다.
 
농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2년 후 농장은 생명으로 흘러넘쳤다. 데바와 자연령들의 도움으로 작물들은 놀라운 생명력으로 양과 질에서 풍성환 결과를 나타냈다. 양배추의 무게가 기존 보다 10배 이상 나가기도 했다.
이런 수확을 거두어들인 것은 유기농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관점부터가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 이들은 자연을 협력자로 생각한다. 자연을 대상화하거나 도구로써 함부로 이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연을, 지구에 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주체로 보는 것이다.
1966년 핀드혼 농장에 합류한 R. 오길비 크롬비는 오컬트적인 지식에 심취해 있었다. 과거에 자연신 판(Pan)과 수 차례 접촉하 그는 핀드혼 농장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자신이 함께해야 함을 즉시 느꼈다.
10년도 더 지난 1975년 핀드혼은 170개의 강력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지금은 핀드혼 재단으로 성장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데바와 모든 생명을 느끼고 이해하며 소통하는 친환경적이자 영적인 교육 센터로 자리매김했다.
 
핀드혼 공동체의 주역인 저자들은 이 책에서 핀드혼 농장의 성공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협력을 통한 실험의 성공’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유기농법을 따르고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식물과 그 안에 내재한 신성과의 의식적인 교감을 발전시키는데 주력한다. 그들은 씨았을 뿌리고 퇴비와 영향을 공급하고 가지치기를 하는 등 농장일의 전과정에서 식물을 영혼을 가진 생명체로 대한다. 항상 식물들과 대화를 하고 농장일을 해나가는 단계에서 항상 식물들에게 먼저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들은 잡초와 해충이 생명체로서 존재를 인정하고 농장일에 필요한 조치를 해나가는데 있어 과학기술이나 물리력이 아닌 상대와의 대화와 여건을 조성함을 우선 생각한다.
 
이 책은 핀드혼 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데바, 엘리멘탈(자연령), 인간 모두가 동일한 우주적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구는 생명과 영으로 충만해 있다. 인간은 지구를 살아가는 하나의 유기체이고 데바, 자연령과 형제들이다. 인간은 데바, 자연령들과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드러나게 하고 생명체를 탄생시키고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핀드혼 공동체의 성공과 발전은 그러한 새로운 관점과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다. 그 과정을 통해 핀드혼이 탄생했고 진화해가고 있다.
 
20세기 서구 문명의 질주하는 성장은 끝없는 자연의 위기, 토양 침식의 위기, 화학비료의 남용, 유전자 식물의 위험, 환경과 생태계 파괴를 가져왔다. 그 뿐만 아니다. 질주하고 있는 서구 문명은 전세계에서 인류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고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적대적으로 대립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황폐해졌다. 핀드혼 공동체의 모습은 21세기 인류가 비참한 미래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 * [나눔문화 평화아카데미]의 강연 중에서...------------------- 

잃어버린 마을, 살고싶은 도시를 찾아서

글쓴이 | 김성균 조회수 466 2011.05.16 22:52 (http://www.nanum.com/site/161425 )

“도시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답답한 도시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답게, 좀 더 자연을 덜 해치며 사는 방법은 없을까요? 
많은 도시인들이 고민하는 문제인데요. 
평화나눔아카데미 일곱 번째 강의에서는 
도시 속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온 김성균 박사를 만났습니다.  
우리가 마을을 잃어 버린 이유, 살고 싶은 도시들이 사라진 이유. 
김성균 박사의 강의로 만나 보시겠습니다

’도시’국가의 역설

도시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기능과 시설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해 처음 출발했지만 
언젠가부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풍요보다 병과 불안이 짙어지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전 국토가 도시화 되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도시를 늘려가려는 계획들이 진행되고 있는데요,
 
"’높은 빌딩’, ’꽉 찬 자동차’, ’넓은 도로’. 이렇게 세 단어만으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모두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네 골목골목마다 마트가 들어서면서 지역 상권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고,
숨이 막힐 듯한 고층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여기저기 늘어서 있죠.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차를 이용해서 갈 수 밖에 없고,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지글거리는 열기, 무기력하고 답답한 일상이 뒤섞이면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2008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도시화율은 90.5 %입니다. 
전국 240개의 기초자치단체가 거의 다 도시화가 되어 버린 형편인데요,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온통 수도권 중심으로 편재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지방 행정가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수도권과의 접근성을 좋게 만들까’ 뿐입니다.
과거엔 춘천을 가려고 청량리 역 앞에서 마음을 설레고 그랬지만 이젠 쾌속열차로 한 방이면 도착하지요.
지금 한국은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도시’국가의 모습으로 가고 있습니다." 
 
땅과 공간을 바라보는 그릇된 철학

옳은 방향이 아닌데도 여전히 그 방향으로 계속 갈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지금 우리의 도시는 땅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김성균 박사는 단호히 꼬집습니다.
고유한 전통의 마을을 잃어버린 것도, 살고 싶은 도시를 잃어버린 것도 모두 
’개발’과 ’부동산’의 관점에서만 땅과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요.
 
"본디 마을 동 ’洞’자에는 ’함께 한 우물의 물을 나눠 마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동사무소’, ’삼청동’ 할 때 쓰는 이 글자 안엔 이미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요즘 ’풍수지리’라고 하면 ’수맥’, ’조상 묏자리’ 등을 떠올리면서 느낌상 좀 좋지 않게 다가오지만
사실 그것은 ’바람과 물과 땅과 마을, 그리고 그 이치에 관한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전하는 개념입니다.
사람이 한 장소에 살아가면서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변의 관계를 모두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길’에 대한 관점도 그렇습니다. ’4차선, 8차선 도로’ ’몇 미터 구간’ 등은 좀 삭막하지 않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어귀길, 아귀, 안길, 샛길, 골목’등 굉장히 공간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표현했지요."

"도시계획으로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당시부터 참 의문이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를 설계한다는 분들이 끝까지 ’사람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에요. 
도로 8차선 기법이 어떻고, 빌딩의 측량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들만 하고 마는 것이 무척 답답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학과가 한술 더 떠 ’부동산 도시 및 지역개발학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더라고요. (웃음)
우리는 지금까지 토건의 꿈을 과감히 떨친 역대 어느 정부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민주정부 시절 조차 혁신도시, 기업도시를 대거 양성하면서 부동산 신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요.
지금 이 정부는 땅 가지고 하는 것도 모자라니까 결국 물에 까지 손을 대는 형국인 겁니다.
’삶이 진행되는 공간’, ’역사가 축적되는 장’으로서의 땅에 대한 개념은 철저하게 상실되는 가운데
성장형 도시로서의 가치만 우선시하는 토건 문화가 무서운 속도로 작은 마을 단위까지 번져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삶터의 모습을 실현하는 공동체 모델, 토트네스(Totnes)

10년 넘게 국내 외 생태마을 곳곳을 누비며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연구해 온 
김성균 박사는 ’행복 실험실’이라고까지 불리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을 바람직하게 실천해나가고 있는 
영국의 공동체 마을, 토트네스(Totnes)의 사례를 전합니다. 
 
"토트네스(Totnes)가 위치한 영국 서남부 지역은 원래 산업화의 중심지이자 거점이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최악의 광우병 사태를 경험하고 나서 이 지역은 활력을 모두 잃어버렸죠.
주민들은 ’지금까지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장소로만 마을과 지역이 살아왔는데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마을 교회에서 다 같이 모여 본 영화 한편
(<The End of Surburbia>)이 이 마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주민들과 학생, 교수들이 모여 ’지속성’, ’지역화’, ’건전한 풍요’ 이 세가지 컨셉을 가지고 
지역에 관한 전혀 새로운 로드맵을 짜나가게 됩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토트네스 파운드’입니다. 마을에서 직접 발행을 해서 쓰는 지역화폐인데요,
지역 경제가 건강해지려면 최소한 72시간 정도는 자본이 지역 안에서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프렌차이즈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면 그게 불가능해 집니다.
정확히 48시간 안에 맥도날드 사장님 주머니 안에 로열티가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지요.
토트네스 사람들은 모든 거대 기업들이 지역을 그런 방식으로 작동시킨다는 속성을 알아챘고, 
최대한 지역 내에서 자본을 순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던 것입니다."

"토트네스 사람들의 원칙은 ’지역 생산물의 18% 이상은 외부로 유통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역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 있는 자산과 가치를 최대한 축적하려고 하는 것이죠.
다양한 동아리 모임과 스터디 그룹도 활발한데요, 그 중 ’헬스&소울’이라는 모임이 인상 깊었습니다.
시를 쓰고 음악을 들으며 잘 먹고 잘 노는 모임인데요^^ 휴식을 통해 영혼의 깊은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죠.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삶터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깝고 작은 것으로 시작하는, 도시의 ’가능한 변화들’

이쯤이면 궁금함은 더해집니다. 
당장에 도시를 벗어나 시골생활을 시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답답하기만 한 이 도시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해야 할지. 
그래서 우리들의 질문은 ‘도시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없을까?’로 이어졌는데요. 
김성균 박사는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가능한 작지만 큰 변화의 시작을 제안합니다.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산다는 게 정말 어렵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가능한 것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집에서는 숙박시설에 가면 있는 조그만 크기의 냉장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차도 여러 명이서 한 대를 구입해서 키를 여러 개 만들어 돌아가며 이용하고 있구요, 
인스턴트 음식은 사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봉지 식품이 필요하지 않으니 대형마트를 보다 가급적 동네 재래시장을 이용하게 되더라고요."

"요즘처럼 거대한 아파트에 사는 환경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요,
동네 주민 분들과 한 분씩 관계 맺기를 시작하면 그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느끼시게 됩니다.
11층 아주머니하고는 제 아내보다 제가 더 먼저 친해졌어요. (좌중 웃음) 
경비원 아저씨,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와 걸터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요,
가끔 날씨 좋은 날에 모여서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답사나 MT를 떠나기도 합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은, 너무 큰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이 무엇인가 생각하시면 
이런 도시에서도 대안적인 방향의 실천들을 조금씩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2011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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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
인터파크 북피니언에서 ‘친구’ 블로거가 이 책의 서평을 써 놓은 것을 읽자마자 묘하게 끌렸다.
인간의 호기심과 초상화라는 사실적이면서 예술적인 창조행위…
주인공 화가가 어떻게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으로 묘사할 지 궁금하기도 했고
어떤 미스터리가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에 등장할 지…
 
19세기말 미국 뉴욕에서 초상화의 대가로 인정받는 화가 피암보.
그에게 들어온 거액의 비밀스러운 제안.
절대 자신을 보지 말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샤르부크 부인.
언제나 신비한 병풍 뒤에 앉은 샤르부크 부인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로 피암보를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게 하고,
스케치 하나 그리지 못한 채 약속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간다.
또한, 죽었다고 애기 들었던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 그를 위협하자 피암보는 더 큰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약속 시한에 임박하여 환영에 휩싸인 채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지만…
 
작가는 후기에서 책에 언급된 장소와 인물, 여러 현상과 사건들이 실제 1893년에 존재했었고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물론, 작가 자신은 역사가가 아니라 소설가이므로 사실을 나열한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당시 뉴욕의 모습과 빅토리아 시대 회화의 모습, 19세기 아편 복용에 대한 현상, 타부현상등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서적을 참고하였고 했다.
 
이 책에 대한 미국 언론의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인간의 집착과 영감,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살인사건까지 드라마틱한 스토리에서 독특한 감흥을 자아내는 소설!’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한 캐릭터들이 나누는 섬세하고 소름끼치는 유머감각. 이 책은 두 말할 필요 없이 탁월한 스릴러 문학이다.’
‘1893년 뉴욕의 실제 모습을 담아낸 미스터리 소설인 동시에 판타지 소설이며, 공포 소설이자 당대의 예술적 풍미를 되살려 면밀하게 재구성한 역사소설’…
 
반 고흐의 편지를 소재로 신성림 엮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는 고흐 자신의 편지를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객관적인 일상에 대한 묘사가 조금 부족했지만, 이 책은 소설로서의 장점을 살려 화가의 일상과 심리묘사가 적절해 보였다.
소설로써 매끈한 은유적 표현과 단어 선택은 글 쓰기의 문학적 기법을 알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전차들마저 낮 동안 사람들이 뱉어낸 회한들로 침침해진 어둠 속을 헤엄치는 거대한 구렁이처럼 노곤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19세기 말 미국 화가들의 일상과 밥벌이, 작품 구상과 그리는 과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다.
또한, 피암보가 스승을 부정하면서 보여주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 19세기 아마추어 과학자의 모습, 서구식 파티문화의 속성, 미술계의 분위기 등은 재미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소설책을 덮은 다음 난 석연치 않은 결말과 앞뒤가 모호한 스토리라는 느낌을받았다.
샤르부크 부인의 집사인 왓킨은 샤르부크 부인과 자신이 남편 행세를 했다고 했고 샤르부크 부인이 직접 죽인 ‘피눈물을 흘리면 죽는 여자’는 한 명이라고 했지만, 실제 그렇게 살해당한 나머지 사람들의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혹시 왓킨이…??)
그리고 샤르부크 부인이 왜 피암보를 죽이려고 시도했는지에 대한 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미국 뉴욕의 사회문화 구조에 ‘무녀’라는 표현이 적절한 지 의문이 들었다.
역자의 번역을 위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신도 때론 실수를 해요.’ (P.100)
‘대중은 교묘하고 깔끔한 모순을 좋아한다.’ (P.221)

[ 2010년 10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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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노무현재단]에서 펴낸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특별히 재단에서 1주기 기념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이 다른 책, 즉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나 <성공과 좌절>과 다른 점은 출생에서 서거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 전체를 기록한 '자서전'이라고 재단측은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점은 아마 외부적으로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와 노무현 전대통령이 스스로 초안으로 정리했던 자서전을 위한 기록들,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유가족, 옛 참모들 등)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재단측은 특히 2009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를 맞이하여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아와 애도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간했다고 서문에 기록했다. 재단의 상임이사인 문재인 변호사는 서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노력하는 사람', '당당하게 살고자 분투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 * [노무현재단]이란?..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 업적을 유지·계승·발전시켜 그 뜻이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와 활동,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록물 보존 및 기념관 건립, 묘역 조성 지원을 비롯해 사상과 정책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저술하는 교육 및 학술·출판, 국제협력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사료편찬특별위원회, 기록관리위원회,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문화예술위원회, 출판위원회, 홈페이지 편집위원회, 묘역조성지원위원회, 해외온라인위원회, 기금모금위원회 등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다양한 추모기념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
 
1부. [출세]에는 출생에서 부림사건 변론을 맡기 전까지, 변호사 노무현의 성장과정을 기록하였다. 유년의 기억, 은인 김지태 선생, 부산상고, 막노동판, 부인 권양숙여사, 사법고시, 변호사에 이르는 기록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전의 저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와 <성장과 좌절>과 대동소이하다.
 
2부. [꿈]에는 부림사건 변론을 맡은 때부터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마칠 때까지,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의 도전과 시련을 기술하였다. 부림사건 변호로 시작된 운동 전문의 인권변호사,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분열과 좌절, 국회의원 당선, 청문회 스타와 의원직 사퇴파동, 3당 합당과 김영삼과의 결별, 조선일보와의 투쟁, 첫번째 낙선과 야권통합,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 두번째 낙선, 세번째 낙선과 정권교체의 감격, 종로에서 국회의원 당선과 포기, 네번째 낙선과 [노사모]의 탄생, 해양수산부 장관에 이르는 기록이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이야기, [노사모] 탄생 비화,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행정 업무에 대한 기록, 문재인, 안희정, 이광재, 천호선, 정윤재, 윤태영 등 참모들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들어있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에 출마한 시점부터 대통령직을 마치고 청와대를 떠난 때까지, 주로 국정운영과 관련한 대통령의 노무현의 고뇌를 담고 있다. 조선일보의 인터뷰 거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의 광주의 기적,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와 단일화 파기, 대통령 당선과 대북송금특검의 우여곡절, 양극화와 부동산 정책, 방폐장과 세종시, 탄핵과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 남북 정상회담, 국정원장 독대보고, 검찰 개혁의 실패,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대연정 제안 등에 대한 이야기다.
 
기존의 인터뷰나 발간도서의 내용과 다른 내용은 거의 없으나,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과 정몽준과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주요 정책에 대한 입장과 평가, 부문 개혁에 대한 평가 등이 들어있다.
 
4부. [작별]에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온 후부터 서거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희망과 좌절을 기록하였다. 귀향 후 봉하오리쌀을 추진하던 이야기, 화포천과 둠벙, 무논 등 생태 농법에 대한 연구, 장군차, 국가기록물 사건에 대한 소회, '노무현의 실패'에 대한 심경 등을 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평소 스타일을 고려해보면, '노무현의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담지 못한,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아무도 그 분이(노무현 전대통령 자신마저도...) 그렇게 서거하시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시시콜콜하고 자세하게 인터뷰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재단측이 여러가지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은 들지만, '자서전'이라 하기에는 노 전대통령의 생애를 비교하면 이 책은 너무 초라하고 부족하다.
 
실제 자서전일 경우, 1981년 부림사건 변호 이후 인권변호사 시절의 여러 가지 경험과 자의식을 다져가는 이야기부터 소중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의정기간에 대한 깊은 이야기와 낙선 이야기, 대통령 후보 경선부터 당선까지의 엄청난 숨은 이야기들,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의 수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김대중 전대통령의 자서전과 더불어 '대통령학'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적, 학문적, 대중적 논의의 토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대통령 곁을 오랫동안 지켜오고 보좌해온 과거의 참모들과 주변 동지들에게 그 숙제가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제부터라도 국가적인 중요 비밀이 아닌 내용들은 모두 공개하고 정리하여 후배들과 후손들이 국가권력과 통치, 행정업무와 행정부 관리, 주요 기관에 대한 평가와 대안, 정책과 정치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해야 한다. 노 전대통령이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추진했을 일이다. 노 전대통령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대통령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다. 별도로 강의할 생각까지 하셨으니...
 
[ 2011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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