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 타율적 관리를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엇그제만 해도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던 딸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받고 있고 요즘에는 종종 방과후 프로그램도 학교에서 받고 있다. 학교 담임선생이 정기적으로 지시하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지만 일주일에 2번 영어학원(작년에는 일주일에 3번이나 영어학원에 가야 했다.), 음악학원 1번을 간다. 이외에 아이 엄마는 별도로 아이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있고 가끔 수학이나 과학숙제도 시킨다. 걸스카우트까지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두번 관련행사에 참여한다.
아이가 아빠와 놀러 왔을 때에도 늘 숙제를 안고 왔고 컴퓨터 게임을 하던, 퍼즐놀이를 하던, 애니메이션을 보던 아이는 하루종일 숙제 노트를 끼고 있다.
아이가 낑낑대고 있는 숙제를 가끔 들여다 보면, 초등학교 4,5학년 수학과 영어, 기타 과목의 수준은 우리 세대가 중학교에서 배우던 정도에 해당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전반적인 초중고의 수업 난이도가 30년 전보다 높아졌다. 아이들의 성숙도나 지식, 지혜의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 엄마가 우리의 부모처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모두가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현실은 꽉 짜여진 구조 속에 놓여있다. 
30년 전에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때 그들은 거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배웠고 아이들끼리 동네에서 각종 놀이와 게임을 통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협의하고 규칙을 배우고 만들고 실행했다. 4계절 내내 계절과 조건에 맞는 놀이가 존재했다. 동네 골목과 인근 놀이터와 공터, 논과 밭, 들과 야산, 농수로와 하천은 언제든지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아이들에게 제공된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은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유치원 이전의 유아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정도이고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부터는 어울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런 공간은 유치원에서 별도 학습비를 받아 단체로 다녀야 하거나 부모들이 주말에 이동수단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움직여야 했다.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난 후에 아이들이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사교육이 장악했다. 1990년대에는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학부모들이 사립중학교와 사립고등학교, 또는 특목고나 8학군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단기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느정도 경제력이 되는 학부모들이 강남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교육은 삽시간에 수도권으로 전파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오후 시간과 저녁 시간에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부모의 경제력 수준이 아이의 학원 수준과 학원의 갯수를 결정한다. 방학 동안의 단기 해외체류나 장기 유학 역시 부모의 경제력이 결정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스스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은후 유학을 가거나 워킹 할리데이를 떠난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평균 학습수준은 평준화를 향해 달린다.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다. 학부모들에게도 학생에게도 다른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학원을 다니고 비슷하게 해외에 갔다 오면 전체적인 학생들의 수준은 비슷해진다. 모두가 특목고나 일류 대학이 목표다. 어차피 대학의 입학정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평가로 학생들은 걸러진다. 일류대학와 이류대학의 차이는 없다. 한국의 대학은 어차피 멕시코의 주요 대학, 중국의 주요 대학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대학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평가로 들어온 학생들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차이도 아니다. 수 십만명의 대학 입시생들 중 1만명 정도까지 끊어서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뒤에도 그렇게 입학정원에 따라 학생들이 서열이 매겨진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을 위한 무한 경쟁이 또 다시 시작된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저고용 구조다. 고용 역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와 기업은 아직 그런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이 한정된 취업을 위해서 도 다시 대학생들은 1학년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안정된 직장으로 분류되는 공무원과 공기업 채용에 수백, 수천대 일의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공무원이 될 바에야 무엇하러 4년 동안 수 천만원을 들여 대학에 입학하는가? 대학에는 학문도 진리도 없다. 비싼 등록금만이 있을 뿐... 

요즘 ’반값 등록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오늘 처음으로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착잡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등록금 액수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에 민주화를 이룩해 냈다는 486세대의 자부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 이외에 더 국민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제도적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 오히려 양극화와 교육문제의 경우는 486세대가 음으로 양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등록금 문제는 오로지 대통령 당선과 국회 장악을 위해 정치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선언한 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날아왔다. 당장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이야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면 가계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값’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왜 등록금이 그렇게 높아야 할까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취업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받아들인 대학과 사학재단에게 물어야 한다. 취업이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무차별하게 대학설립을 허용한 정부에게 따져야 한다. 실업과 가난을 책임지라고!!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놓친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1971년에 처음 발간된 이 책은 ’교육’을 둘러싼 전반적인 구조와 역사, 세계관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학교와 대학, 교육과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를 단순히 교육이나 배움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제도와 시스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작년 11월에 저자가 1973년에 처음 발간한 <성장을 멈춰라>를 읽었다. 저자는 그 책에서 근대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무한한 진보’와 ’무한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한한 성장은 결국 "권력을 양극화하고 좌절을 보편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양식 또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떠나 근대 산업사회 경제방식이 결국 인류와 생태계를 자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학교 없는 사회> 역시 근대적인 경제방식이 가져온 또 하나의 시스템이자 제도이자 문화이다. 
 
----------------- * 이반 일리히는 누구인가? ---------------------------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열한 개의 언어를 익히고 신학과 역사학과 화학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떠돌이 학자를 고집한 그의 장기는 기존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주장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것이었다. 학교에, 의료체제에, 국가의 원조체제에, 종교계와 정치계에 관해 그가 던진 학설은 발표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격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의례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1951년 정치 망명객이자 신부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교회고위직의 승진코스를 추구하기보다는 푸에르토리코지역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며 빈민과 함께 사는 삶을 택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지만 점점 정치적이 되어가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를 알리게 된 계기는 아마 CIDOC이라고 알려진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하고 나서일 것이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어학기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여러 현실과 그 문제점을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평신도 종교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나누고 수많은 책과 소책자들을 출간해내는 싱크탱크이자 전진기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소위 선진국들의 개발원조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충돌하였다. 이 활동은 말 그대로 성공적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일리치는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등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중세사를 강의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이 후 그의 관심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한 과거를 기준삼아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는 일에 기울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낸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이다. 현실의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전통으로 돌아가 성찰해야 한다는 그의사유방식은 이후 아나키스트와 녹색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 사상가, 환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의학, 여성학, 종교학, 문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여행하는 그의 강의방식 역시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정작 일리치 자신은 행동을 촉구하는 소책자운동만을 펼쳤을 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소규모 청중을 위한 강연이 아닌 방송을 통한 인터뷰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그 후 15년이 넘도록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던 이반 일리치를 대담으로 끌어 낸 사람은 캐나다 CBC 방송의 데이비드 케일리이다. 집요한 설득 끝에 이뤄진 이 대담은 1988년에 시작됐고 이후 1992년까지 여러 차례 이어졌다.  ------------------------------ 

 1978년 처음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에 대한 한국판 번역이 <탈학교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뒤 1984년까지 3번이나 더 출간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4년이었다. 우연하게도 제3세계 여러나라에서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가 그 이후 사라졌다.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보수적인 어용학문에 대항하는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관심이 사라진 것이 배경이라고 추측한다.
박홍규교수가 2009년 새롭게 이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교수가 이반 일리히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고 한국의 사회문제와 교육문제에 대한 이반 일리히의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했고 나아가 사회 자체가 학교화된 것까지 부정했다. 

-------------- * 박홍규 교수는 누구인가? --------------------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로 스쿨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한다. 여러 예술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저자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간디자서전], [문화와 제국주의] 등의 책을 번역했다. --------------------

이반 일리히는 1958년 미국 교육학자인 에버릿 라이머(Everett Reimer)를 통해 처음 학교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일리히는 학교를 통해 보편적인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왜 학교를 비국가화해야 하는가]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고 주장한다.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로 인하여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하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되어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p.24) 가치는 사라지고 제도가 가치를 대신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일리히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고 보여준다. 이 세가지는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함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일리히가 ’가치의 제도화’를 주장한 지 정확하게 40년이 지났고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서 ’가치가 제도화되어버린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학교에 다녀야만 공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일리히의 지적처럼 실제로 우리는 그다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말과 글, 도덕과 규칙, 계산과 논리, 자연과 기술, 의사소통과 협조 등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즉 가족과 동네에서, 교사가 아니라 친구와 선배, 어른들로부터 배웠다. 요즘은 가정과 가족보다 TV와 인터넷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리히가 문제제기한 1960년대의 미국과 멕시코의 ’학교화’와 학교의 무능한 모습은 2011년 한국의 ’학교화’가 학교의 무능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학교화’는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역시 21세기의 진실이다. 

2. [학교의 현상학]에서 일리히는 ’학교’를 특정 연령층에게 의무적 교육과정의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학교는 겨우 20세기 들어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고 동양에는 20세기 중반에서야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3. [진보의 의례화]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가치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이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확신한다. 우리가 학교가 필요하다고 배우고 동의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각각 전문화된 여러 제도에 소비자가 의존하는 모습을 갖게된다. 그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양식, 소비사회에 필요한 수요자를 양성시키고 꿈과 미래를 정형화시킨다.(p.91)
사람들이 학교화돼 가치가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수긍하게 된다. 즉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척도, 아기의 지능을 재는 척도, 심지어 평화를 향한 과정을 전사자의 수로 계산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학을 가거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면 학사 졸업자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가?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는가? 더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4. [제도 스펙트럼]에서 일리히는 사회의 모든 제도가 제조와 파괴, 생산가 소비만을 반복하는 생활방식인 조작적 제도와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관련된 생활방식인 공생적 제도라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산업적 관료사회 이후를 향해 가는 현재로부터, 산업화 이후의 자율 공생사회라는 미래 즉 행동의 강도가 생산을 능가하는 미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제도 양식의 개혁,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교육 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4)

5. [부조리한 일관성]에서 일리히는 학교에서의 수업과 졸업장이 ’공부’를 정의하는 ’제도의 가치화’를 근본적으로 제고하지 않는 어떠한 교육개혁이나 새로운 수업방식은 모두 ’학교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6. [공부망]에서 일리히는 ’학교화’를 거부하고 진정한 ’공부’의 가치를 이룩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부망’을 제시한다. ’공부망’을 위해서는 교육적 목적을 위한 참고서비스, 기능 교환, 동료 연결, 넓은 의미의 교육자를 위한 참고 서비스가 접근법으로 필요하다. 

7.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의 부활]에서 일리히는 프로메테우스를 욕망과 가치의 제도화에 대한 신화속의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를 통해 균형, 조화, 가치 중심의 인간형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박홍규교수가 선택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도 이반 일리히의 본 뜻을 100% 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일리히가 이야기하는 ’Schooling’은 ’학교화’라는 의미로 일리히가 만든 단어라 할 수 있다. ’학교화’라 함은 ’학교’를 제도화함으로서 ’공부’와 ’배움’을 독점하고 그에 따라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치 공부를 잘하게 되고 배움이 커지는 것 처럼 인식된다는 의미다.
즉 ’가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일리히에게는 ’학교화’는 배움-학교 뿐 아니라 건강-병원, 안전-경찰, 안보-군대, 부자-GDP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이라 함은 ’학교화’의 반대이고 ’학교화’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거기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 Society’는 ’비학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학교화’하여 ’제도가 가치를 독점’하는 현상을 극복하여 가치 그 자체를 스스로, 공생적으로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없는 사회(2009)>의 1/3은 박홍규 교수의 해설에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일리히의 번역본 원문은 꽤 난해하다. 박교수의 해설 부분이 없었다면 책의 내용 중 상당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요 핵심을 얻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박홍규 교수는 친절하고 알기 쉽게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일리히의 주장의 요점은 일률적인 기계식 의무교육 및 고급교육이 결국 계급을 정당화하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만이 아니라 권력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교육에 대한 물신적 존경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학교교육을 믿고 있는 한, 학교교육이란 돈과 같은 기초적인 인간상품의일종으로서 인간이란 지식자본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는 단순한 학교 해체가 아니라, 제도화되지 않은, 따라서 계급화되지 않고 자율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사회 경제방식에 철저하게 지배되어온 한국에서 일리히의 사상이 퍼지고 대안이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제도화된 가치의 불합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제도화된 가치’를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남는 것은 양극화의 심화, 좌절의 보편화, 공동체의 해체, 물질과 의식의 오염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지옥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리히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구조와 시스템, 의식과 문화를 기초로 하여 현실을 재해석하고 실정에 맞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사들은 교사들 나름대로,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학부모들은 학부모 나름대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한국에서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적인 방법들은 지금 여러 단체와 집단에서 모색하고 있고 먼저 시도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지녀야 하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일리히가 가르쳐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 책 속의 문장
-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能辯)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은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나는 빗물질적 요구가 물질적인 상품의 수요로 변화할 때, 즉 건강, 교육, 수송, 복지, 심리치료가 서비스나 ‘보호’의 결과로 정의될 때, 지구의 붕괴 과정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 책 속의 책 : 플라톤 <국가>,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 2011년 6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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