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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작품은 <우리는 사랑일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일의 기쁨과 슬픔>, <여행의 기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 이어 이 챆이 여섯 번째다. 저자는 사랑이나 일, 여행 등 일상적인 소재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동시에 철학과 인문학적 해석을 덧붙여 나가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다. 지난번 공부모임에서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과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공중그네>를 통해 트라우마와 자살의 사회적 성격, 심리학 치료 등에 대해 읽고나서 그 연장선 상에서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지위로 인한 불안]으로 규정하고 그 개별적인 원인을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러면서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철학과 예술, 정치와 기독교(공동체), 보헤미아(초현실주의, 자유주의, 히피등)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늘 다른 사람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는, 현대인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불안'의 정체를 밝힌 작품이다. 우리는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감할까? 작가에 따르면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다.  
 
구체적으로, 불안은 불황, 실업, 승진, 퇴직, 업계 동료와의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와 같은 물질적인 자극과 더불어 사랑 결핍이나 애인과의 결별, 이혼과 같은 정식적인 것에서도 유발된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서 당신이 얼만큼 불안한지 파악할 증거는 흔치 않지만, 당신이 어디에 몰두한 듯한 표정을 짓거나, 부서질 것 같은 미소를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은 뒤 유난히 긴 침묵을 지킨다면 증세는 명백하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그리고 작가는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도 취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에고가 지닌 불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메르세데스 벤츠의 광고 사진, 1902년 열린 하인츠 케첩 영업자들의 회합 등 철학과 예술, 일상의 위대한 유산들 사이를 꺼내어 놓고 비교한다. 특히 18~19세기부터 서구에서 시작된 사회경제체제와 세계관의 급격하고 엄청난 변화가 사람들 사이에 물질적, 정신적 불안을 가져왔음을 이야기한다.(작가 자신이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불안이 급속히 확대된 시점을 19세기 중반부터 세계관이 변화된 것을 기본적인 이유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사람들의 지위는 "신의 자손들'로서 서로 공통되었고 부의 축적은 죄악시되었으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부와 지위와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 지위를 규정하게 되어버린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문화는 가난이 수치가 되게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불안은 욕망의 하녀'라고 규정한다.
 
이런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작가는 철학과 예술, 정치와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 철학 :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하여 비판적으로 현대사회와 문화를 해석하고 스스로 물질이나 지위, 부와 욕망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 예술 : 회화와 희극, 문학과 만화, 시와 영화 등 예술작품을 통해 물질과 지위를 누르고 세상을 더 진실하고 현명하게 해석할 수 있음을 말한다.
- 정치 : 적절한 정치적 감각을 갖추어 지배적인 부와 지위개념을 이데올로기(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전술)로 규정하고 사회의 이상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 : 기독교적 공동체를 통하여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하여 지배관념을 피하는 것을 말한다.
보헤미아 : 초현실주의, 자유주의, 히피 등 기존 관념과 문화를 비난, 거부하고 자유롭게 삶과 문화를 즐기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이 책 속에서 "돈과 권력이 우리가 원하는 사랑과 인정을 보장해주는가?", "많은 부를 소유한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바라던 성취의 모든 것인가 아니면 그 대체물일 뿐인가", "발전된 기술과 편리한 기기들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가 혹은 우리의 불안을 사육하는가" 등의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작가 특유의 간결함과 유머, 독창적인 해석들이 잘 어우러져 있어 읽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작가가 불안의 원인과 욕망의 근원, 그 해법을 제시하는 방법은 그럴 듯해 보였다. 하지만, 불안의 원인과 해법을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만 다루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본다. 우선,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불안과 같은 문제 역시 사회적, 역사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 자신도 불안의 원인을 찾는 중에 언듯 다루기도 했지만, 현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정신적 불안이 대폭 증가한 것은 사회경제체제와 세계관 및 문화가 변했기 때문이다.(그것이 지배자들의 지배관념이든 아니든 간에..)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전세계적으로 불어오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가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최악의 '불안'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따라서 그 해법도 역시 사회적으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에 사회적, 집단적으로 다가가지 않고서는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개인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제시한 여러 해법 요소들은 그것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풀어나간다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그들은 사회의 극빈층이 겪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궁핍을 기꺼이 견디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버텨낸다.(p.17)

-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인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총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함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p.137}

-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언제나 동포의 도움을 얻을 일이 있다. (그러나)동포의 자비로운 마음에만 기대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자기애를 자극하면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이나 빵가게 주인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p.138}

-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가 바라는 동정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랜 고통 끝에 이제 병든 아이처럼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순간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주듯 누가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울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턱수염이 허연 중요한 관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p.294)   
 
[ 3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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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법정 스님 전집 2
법정(法頂) 스님 지음 / 샘터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 <서있는 사람들>, <무소유>에 이어 여덟 번째 법정스님의 저서를 읽었다. 이 책은 1992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1992년은 스님이 홀연히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오두막에 기거하시기 시작한 때이다.
 
이 책에는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다가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비롯해 명예와 편안함을 버리고 혼자서 살아가는 구도자의 청빈한 삶이 잘 드러나 있다. 시종일관 욕심을 버리고 떠나라는 가르침과 사람은 혼자일 때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진실되게 만날 수 있다는 스님의 참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강원도 오두막에서 나무, 새, 바람, 달, 들짐승을 벗삼아 사는 구도자의 속깊은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스님의 생애는 책의 제목처럼 몇 차례의 [버리고 떠나기]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출가()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청년은 1954년 싸락눈이 내리던 날 홀연히 집을 나서 머리를 깎았다. 평소 흠모했던 등대지기의 꿈을 접고 ‘진리의 빛’을 찾아 나선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세속적 욕망을 버리는 대신 그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1975년 10월 1일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 불일암()으로 들어간 일이다. 글 잘 쓰고 의식 있는 40대 초반의 촉망받는 중진 스님이었던 그는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다가는 중노릇 제대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 칸 암자에서 혼자 밥 짓고 밭을 매며 17년을 지내면서 <무소유>, <산방한담()>, <텅 빈 충만> 등 10여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승속()의 명예를 과감히 떨쳐 버린 덕분에 사색의 자유와 자연과의 교감을 얻게 된 것이다.

세 번째는 1992년 4월 19일 강원도 산골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오두막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산중 암자에 방문객이 늘어나고 글 빚도 지게 되면서 수행에 지장을 받게 되자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지인들은 물론 몇 안 되는 상좌조차 아직 스님의 거처를 몰랐다. 스님이 “누군가 내 거처를 알게 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큰스님’으로 불리며 절 집의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자신만의 수행 공간과 절대 고독의 희열을 얻게 된 것이다.

네 번째는 2003년 12월 21일 한 여신도가 오랜 간청 끝에 스님에게 시주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 6주년 기념 법회에서 회주(·절의 원로 스님) 자리를 미련 없이 내놓은 일이다. 주지 한 번 맡지 않았던 스님이 떠밀리다시피 맡았던 자리였다. 하지만 차츰 틀이 잡혀 가자 “수행에는 정년이 없으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을 주저 없이 실천한 것이다. 많은 이가 아쉬워했지만 스님은 큰 짐을 벗어던진 듯 편안한 모습이었다. 스님은 이날 법회 후 차 한 잔을 따라 주며 “때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싶다”고 지나치듯 말했다. 법정 스님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이후 봄가을 두 차례만 길상사에서 공식 법회를 열 뿐이었다.
 
이 책 속에는 중생들의 삶과 애환을 달래지 못하는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이 몇 가지 들어있다.
[화전민의 오두막에서]는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병'에 걸리지 않은 부드럽고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나의 휴식 시간]에서는 어려서부터 책벌레였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휴식 시간은 좋은 책을 읽는 시간임을 이야기한다. 그 중에는 다이호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 <닥터 노먼 베쑨>,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 리처드 바크의 <소울 메이트>,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등을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주인공 메피스토텔레스의 말을 통해 책의 함정을 경계한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생명의 나무는 푸르다."
 
그리고, [개울가에서]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가 창조적인 노력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오고가며 만나는 친구관계에 대해 충고한다. 무가치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쓰레기더미에 내던져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입시에 낙방당한 부모님들에게]는 교육히 참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직업을 얻도록 준비싴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 무엇인 진리이고 삶의 진실인지 스스로 찾아내도록 거드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전쟁을 일으키는가]에서는 1991년 걸프전쟁을 바라보면서 종교간의 갈등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들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이다. (중략) 종교가 생기고 나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있고 나서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통일을 생각하며]에서는 조금 의외의 이야기도 나와 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한 전대협 임수경씨가 평양에서 개최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김일성 1인 독재의 우상화와 남조선 해방의 허구적 논리를 위대한 주체사상이라고 떠받"들었다는 것. 생소한 이야기라 인터넷을 한참 뒤져보았는데도 평양에서 진행된 2차례의 기자회견 관련 기사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정부측 인사나 보수 언론 등에서 확대 포장한 내용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련 내용을 못찾은 것인지...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에서는 1975년 인혁당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은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은 선고한 다음 날에 죽여버린 사건이 반정부 인사들이 인혁당 사건을 정치적인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인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자책하셨다고... 스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출가 수행자가 마음 속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 것에 대해 되돌아보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출가하였는지 다시 헤아리기 위해 불일암에 들어가셨다.
 
* 책 속의 문장 : 
- 세상에 거저 되는 일도 없지만 공것 또한 절대로 없다. 그만한 보상을 치르지 않고는 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 안이한 직업적인 중 노릇이 편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곰팡이균처럼 부패와 타락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니 편하고 한가함을 즐길 게 아니라 독사를 피하듯 멀리 해야 한다. 특히 수행자를 병들게 하는 것은 이 편하고 한가한 안일임을 명심하고 명심할 일이다.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열리는 통로다
  
[ 2011년 2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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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고양이를 복제했어? - 생활 속의 생명공학 이야기
라인하르트 레네베르크 지음, 이광일 옮김, 만프레트 보핑어 그림 / 들녘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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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생명공학 분야에 깊숙하게 접근하기 위해 개론서로서 선택한 책이었다. 저자는 생명공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이 생명공학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조금씩 맛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하였다.
 
책의 목차에서도 나와 있듯이 이 책에는 술과 발효식품, 여러가지 약품제조와 미생물 기술, 유전공학과 박테리아, 곰팡이와 항암제, 농업과 환경을 위한 생명공학 분야, 여러가지 테스트 기술과 유전자 복제, 마지막으로 생명공학에 대한 윤리문제까지 모든 생명공학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1. 맛있는 생명공학
2. 가정의 생명공학
3. 생명공학과 건강
4. 생명을 구하는 생명공학
5. 들판과 정원의 생명공학
6. 생명공학과 환경
7. 생명공학 - 놀라운 리트머스 시험지
8. 돌리에서 인간 복제까지
9. 생명윤리(엔스라이치)
 
우리도 모르게 21세기 생명공학은 우리의 곁으로, 우리의 밥상과 식당으로, 병원과 음식물에 스며들어 있다. 돼지와 소, 옥수수, 쌀, 토마토 등 거의 모든 음식물들이 유전자 조작으로 재탄생됐으며, 인류는 생명공학의 도움으로 천연두에서 혈액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질병들을 퇴치해 왔다. 이렇듯 인류의 삶을 측면 지원하던 생명공학은 지금은 거의 모든 생명체를 복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해 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의 복제가 지금은 일상적으로 행해져, 미국에서는 죽은 고양이를 복제해주는 사업이 성행하고 있을 정도다.
 
생명공학은 우리의 관심 대상이지만, 상당한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그리고 물리학이나 화학과는 달리 우리가 학창시절 거의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이해하긴 힘든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황우석박사의 '줄기세포' 논쟁 과저에서 드러나듯이 생명 복제를 포함한 생명공학의 다양한 결과들이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만 제시한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저자는 기술적으로도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어쩌면 영원히 100% 동일한 인간복제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원 전에도 미생물의 작용을 일상에서 활용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술...
술은 발효음식으로, 썩지 않고 오랫동안 마실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아 왔다. 아프리카인들은 기장으로 폼베(맥주)를 만들었고, 아시아의 스텝 민족들은 가죽부대에 말젖을 넣고 발효시켜 마유주를 제조했고, 일본인들은 쌀로 만든 알코올성 음료인 사케를 만들었다.(왜 일본보다 역사가 수 천년이나 앞서있는 한반도의 막걸리나 발효주에 대해서 서구인들이 아무 것도 모를까?? 이 책을 읽어보면서 점점 더 정부와 대학, 학계에 짜증이 났다...ㅠ.ㅠ;;)
 
생명공학자들은 현대에 들어와 DNA에서 원하는 유전자를 떼어내 증식시키고 이를 다른 DNA에 붙이는 유전자 재조합 방법을 개발했다. 유전자 재조합 방법을 사용해 이전에는 천연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었던 인슐린과 같은 효소가 만들어졌고,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바이오 산업은 차세대 산업의 선두주자로 격상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생명공학은 이전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유전자조작 식물은 물론 장기 이식을 위해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동물도 만들었다. 여기에 지난 세기 말에는 급기야 줄기세포의 복제를 통해 불치병 치료는 물론 인간 복제까지 꿈꾸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생명공학은 실험실 밖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그에 따라 생명공학자들은 순수한 과학자의 입장을 넘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안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환경주의자들, 종교인들이 유전자 조작과 줄기세포, 동물복제와 인간복제에 대해 처절한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고 선진국이라면 어디라도 학문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저자의 주장은 생명공학은 말 그대로 자연과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단순하게 '생명공학적'인 입장에서 과학과 기술발전을 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은 생물학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사고해야 하며, "모든 인간이 똑같은 권리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형이상학적 자유, 즉 세계의 인과율을 존중하면서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자유(자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이런 자율에 외부적인 장애가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다.
 
과학이나 생명공학의 발전을 인류적, 인간적,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기술민족주의'나 '이념적,사상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일부 무식한, 삐꾸같은 자들이 가슴깊이 새겨 넣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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