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 제국의 거짓말, 위안부의 진실
손종업 외 지음 / 도서출판 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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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손종업 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를 읽고 / 2016. 5, 430쪽, 도서출판 말


2013년에 출간된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하여, 2014년 6월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9명이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한국 검찰에 고소했고, 2015년 11월 18일에 박유하 교수가 불구속 기소되었다.
또한 피해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법원에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2015년 2월 34곳의 문장의 삭제를 조건으로 출판물 간행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국내의 일부 학계와 언론계로부터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2015년 11월 26일에는 일본과 미국의 지식인 54명이 항의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원칙적으로 연구자의 저작에 대해 법정에서 형사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단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원칙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검찰 기소가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심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 의해 이 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기소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문과 언론의 자유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 취지와 전제가 '권력에 의한 탄압', '소수를 향한 다수에 의한 폭력과 마녀사냥', '공익과 진리를 위한 추구' 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70~80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힘도 없이 일본 제국의 반인륜적 범죄에 희생당해야 했고 한국의 친일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의해 모욕당하고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소송을 낸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학문과 언론의 자유'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것이다. '자유'란 적어도 다른 이들에게, 특히 약자와 피해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자 기본일테니까.

『제국의 위안부』는 과연 위안부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나? 『제국의 위안부』를 직접 읽거나 비판서 등 관련 서적을 읽지 않은 채 섣불리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책 한 권이 아니라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상황과 맥락, 저자인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한 전후에 보여온 학문적인 성과와 언행을 살펴야만이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이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의 부록에는 2015년 2월 출판물배포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문과 삭제된 34곳의 문장이 삽입되어 있다.(첨부 사진 참조) 저자들의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라 공개된 법원의 자료이다.
법원이 삭제를 명령한 34곳의 문장은 박유하의 책 제목처럼 일본군위안부를 '제국의 위안부', 즉 일본제국을 위해 '애국'을 한 식민지 여성이며, 일본군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고 그녀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온 게 아니라 다분히 '돈'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또는 업자에게 속아서 따라나섰다고 규정했다. 그 문장들은 위안부 피해자분들에게 또다시 커다라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에서 저자들은 몇 가지 방향에서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를 비판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 일련의 사태가 문제의 본질을 떠나 학문과 표현의 자유로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일본 국가기관의 관여 아래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된 여성들에게 '성노예'를 강요한 극히 반인도적이고 추악한 범죄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 그 범죄행위로 인해 참으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커다란 아픔을 견디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 범죄행위에 대해 일본은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와 배상을 하고 역사교육 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에는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1965년에 해결되었다고 강변하는 부조리를 고집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부조리에 맞서 1,200회 이상 매주 수요시위를 개최 있고 지친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돌며 경의로운 해결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필자는 이 엄중한 사실들을 도외시한 연구는 결코 학문적일수 없다고 믿는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사실 관계, 논점의 이해, 논거의 제시, 서술의 균형 논리의 일관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와 국제사회의 법적 상식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는 책임의 주체가 민간업자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법적인 쟁점들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매우 낮은 데 반해 주장의 수위는 지나치게 높다.
충분한 논거의 제시 없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제국에 대한 애국"을 위해 "군인과 동 지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규정하는 것은 '피해의 구제를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아픔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는 서술로 피해자들에게 아픔을 주는 책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일본의 지식사회가 '연구의 다양성'을 전면에 내세워 『제국의 위안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과연 그러한 평가가 엄밀한 학문적 검토를 거친 것인지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변호인>이라는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일본제국, 일본 정부, 일본군인을 변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는 형식적으로는 양측에 화해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늘상 일본정부, 일본제국의 편을 든다는 것이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로  이니치신문사에서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뒤 ‘(수상을)사퇴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망명을 『제국의 위안부』가 대신 해내고 있는 셈”이라고 소감을 밝혔는데, 『제국의 위안부』를 읽다보면 박유하가 정신적으로 과거 현재의 일본국과 동지적 관계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국의 변호인’인 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지 박유하 개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다. 이 책은 박유하 너머에서 『제국의 위안부』에 갈채를 보내는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과 우익에게 그리고 한국 내 지식인들에게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제국의 위안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성향을 보이는 지식인의 욕망, 요구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를 심도 깊게 비판해온 정영환 준교수(메이지가쿠인대학)는 “일본의 논단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예찬하는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지적 퇴락’의 종착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이런 판단에 근거해 볼 때 일본의 ‘제국의 위안부 현상’은 의도적이고 정략적으로 조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박유하라는 여류작가, 여성교수한 명의 독특한 해석에 지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와 맥을 같이 하기에 극찬해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의 우익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핵심 주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일본 우익의 ‘종군위안부’ 관련 핵심 슬로건은 “성노예는 거짓말이다”, “강제연행은 거짓말이다.”, “종군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다”라 할 수 있다.
최근 일본 각지에서 열리는 우익단체의 ‘종군위안부’ 관련 홍보전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에 아오는 말을 인용해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때 단골로 인용하는 말이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는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라 한다.

이처럼 일본 리버럴, 일본 우익이 제국의 위안부에 찬사를 보내고 상을 주는 현상에 대해서이 책에서는  「일본 리버럴 지식인은 왜 박유하를 지지할까」 (길윤형),「일본의 새로운 역사수정주의와 『제국의 위안부』 사태」 (김부자), 「위안부 문제와 학문의 폭력-식민주의와 헤이트 스피치」 (마에다 아키라) 등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저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와 이 책을 둘러싼 국내외 움직임에 민감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 국정교과서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입장과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흐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1919년) 법통성을 부정하고 새롭게 건국절(1948년)을 추진하는 세력과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꾀하는 세력은 이미 내용적인 ‘화해’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조만간 한일군사동맹을 위해 어깨동무를 나란히 할 ‘동지적 관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화해’의 담론으로 포장하고, 표현의 자유로 띠를 두르고, 사상 검열 당한 피해자 흉내를 내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제국의 위안부’의 결정적 문제는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식민지 피해자가 아니고 제국의 눈,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책의 부록에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입장 "을 담은 학자들처럼 뼈저리게 반성하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제국의 식민지강점과 친일파 정권의 한일협상, 그리고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대다수 한국 지식인들은 그동안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위안부』와 박유하에 대한 사법부의 대응(?)에 대해 김규항, 김철, 장정일, 유시민, 금태섭, 홍세화, 류근, 고종석 등 190명의 교수, 문화예술인, 언론인들은 '학문의 자유'를 옹호하며 반대했지만, 위안부피해자들이 수요집회를 1,200회나 진행하는 동안 정작 그들이 그동안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문제해결에 대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묻고 싶다. 소위 민주정부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동안에도 수요집회는 계속되었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지식인사회에서 무관심 영역이지 않았나?

"끝으로 우리는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와 고소라는 법적인 수단에까지 호소하시게 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깊이 되새기며,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거듭 상처를 주는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되기까지 우리의 고민과 노력이 과연 충분했는지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외교적·정치적·사회적 현실 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여신의 저울이 진정 수평을 이루게 하는 그런 방식 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다짐합 니다." 2015, 12.9.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 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일동(2차 성명) : 국내-김창록(경북대) 등 258명, 국외-마에다 아키라(도쿄조케이대학) 등 122명 [425쪽]

- 인상 깊은 문장 -

"박유하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편익을 추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녀의 책이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가가 문제일 따름이다. 학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진실’ 또는 ‘사실’을 통해 기존의 패러다임과 맞서야 한다."(손종업, 37쪽)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면서도 그 주장의 파편만을 임의로 가져오는 글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일본군의 동지인 위안부’, ‘위안부의 기억을 왜곡하는 우리’라는 파편으로 그 책을 말하지 말라. “제국의 일원인 위안부-매춘을 만드는 국가구조-제국의 합법”이란 논리의 흐름과 “한국의 위안부 인식을 왜곡한 배후권력인 정대협”이라는 (박유하의) 전체 주장을 가져와서 그에 대해 항변하라."(김요섭, 69쪽)

"아베 신조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는 역사의 사실을 부정하고 개찬(改竄)하며 책임도피를 도모해 왔다. 또한 아우슈비츠의 거짓말에 해당하는 위안부 거짓말이나 남경대학살 거짓말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도, 대중 매체에서 도 표현의 자유란 이름하에 역사의 사실을 부정·개찬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모욕하면서 존엄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 우익 정치가나 헤이트 단체뿐 아니라 일부 지식인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마에다 아키라, 89쪽)

"박노자 오슬로국립대학 교수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북한 혹은 암묵적으로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한국이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한일 화해론의 근거가 된다면 굉장히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론을 논의하기에 앞서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점까지 인식하고 발언하는 일본 내의 리버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데, 어쩌면 그 점이 일본 리버럴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길윤형, 125~126)

"즉 박유하 씨의 ‘위안부’상은 일본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 책이 조선인 ‘위안부’는 소녀도 성노예도 아니고, 일본인 병사와는 “‘같은 일본인’으로서 ‘동지적 관계’’를 가지는 ‘제국의 위안부’로, 지금까지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상을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새로움을 가장하면서, 내실은 하타 이쿠히코 씨의 ‘위안부’ 제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해석(=‘전지 공창시설론’)과 우에노 지즈코 씨의 피해자상의 해석(=‘모델 피해자론’)을 합체시켜, 일본군의 책임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위안부’ 담론이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김부자)

"이 책이 일본 언론계에서 이토록 폭넓게 예찬 받은 것은 박유하 씨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의 욕망을 민감하게 감지하여 전전의 대일본제국의 책임 부정과 전후사의 수정이라는 두 가지 역사수정주의에 호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라는 것은 일본의 지식인, 언론계의 문제인 것이다."(정영환, 243쪽)

"2015.12·28 한일 외교 합의는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20여 년 간의 국제공조 노력을 헛되이 만드는 일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한국만이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시아 전역의 피해자들과 그들을 위해 활동해온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베리 피셔 변호사, 172쪽)

"징용소송, ‘위안부’ 소송을 추진하던 당시 “우리는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있다.” 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21세기 시점에서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를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지만, 한국의 피해자들은 배리 피셔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에 큰 위로를 받으실 것입니다."(정연진, 173쪽)

"영화 「귀향」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장면은 ‘위안부’ 소녀들 중 한 명이 「가시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는 평양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다른 소녀들보다 나이가 많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나 일본 극우들이 말하는 “‘위안부’는 매춘부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장면일까. 그렇지 않다. ‘위안부’들 중에는 강제나 겁박 등에 의해 끌려온 십대 소녀들도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 나섰지만 취업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성매매라는 것을 알고 온 권번 출신의 창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황진미, 191쪽)

"그런데 박유하는 ‘위안부’ 개인들의 일상을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같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알려진 대로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암울하고 고통스러웠던 것만은 아니고 나름 살만한 세월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 근대화가 되었으니 식민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논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그러므로 박유하의 주장에 ‘식민지근대화론 위안부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수지, 206쪽)

"결국, 제국의 위안부라는 말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로 만들어 일본군의 범죄를 면죄해주는데 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부(성노예) 문제는 단지 일본만의 책임이 아니며 일본 보다 일찍 제국주의 확장을 한 서양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초점을 흐리게 한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제목은 일본의 전쟁범죄, 식민지 지배 책임을 희석화, 추상화하고, 축소하는 데 활용된다."(최진섭, 244쪽)

박유하가 “취사선택”해서 발췌한 ‘위안부’들의 ‘좋은 기억’들은 정대협 활동가와 연구소 연구자들이 여러 번 찾아가며 오랜 시간을 들여 끌어낸 증언들이다. 그 증언집에 있는 이야기를 생존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안 했다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당사자들이 “버렸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김복동 할머니도 그러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 그냥 사람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몇 번이고 강조하면서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왜냐, 그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을 당사자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양징자, 271쪽)

"학자의 양심은 때론 국적을 초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유하의 이러한 우편향 인식은 최근 일본의 집단 자위권을 통한 무력사용 선언과 평화 헌법 개정과 맞물려 설득력이 오히려 더 떨어져 보인다. 이 부분에 와서는 ‘일본 우익 학자 누군가가 쓴 글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갈 정도이다."(조의행, 296쪽)

"『제국의 위안부』를 쓴 목적이 이해, 화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토록 일관되게 가해자 입장은 두루뭉수리 넘어가고, 불행은 피해자 동족인 이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이 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고은광순, 300쪽)

"‘4개의 터부’(천황제, 야스쿠니신사, 난징학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외에도 헤이트 스피치 등을 통해 중국, 한국, 동남아에 대해 철두철미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점과 일본은 문명국가이고 그 이외의 아시아 국가는 야만국가라는 서구적 가치관을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 평화주의의 본질은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오히려 일본인 납치문제를 들어 일본이 피해자인 양 하는 일본의 민족관, 인간관에 대해 평화 운동가들이 제대로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하고 있다."(서승, 323쪽)

"일본의 소녀상 철거 요구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시야를 갖게 됐습니다. 소녀상은 단지 일본군 ‘위안부’의 위로와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긴장, 대결, 군국주의를 추구하고, 거짓 화해와 평화를 말하는 세력이 소녀상 철거를 원한다면, 소녀상을 지키는 일이 곧 진정한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김운성, 336쪽)

"박 교수는 위안부 동원이 일본이나 일본군의 ‘국가 범죄’가 아니며, 설혹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로 ‘업자의 범죄’라고 한다. 동시에 박 교수는 업자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정부의 책임도 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천황이나 일본정부가 성노예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책임에 관한 이러한 식의 복화술은 책임을 실제로 허구화한다."(이재승, 341쪽)

"저자는 “법적 책임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면서 자신은 끝없이 ‘뒤틀린 법 도그마’에 빠져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조약을 내세워 ‘성노예’ 피해자에게 “협력자” “가해자” “무의식적인 제국주의자”라는 지위를 강요한다. 일제가 식민지‘법’에 따라 한 일이니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식민 지배, 국가주의, 남성 중심주의, 근대자본주의, 가부장제가 문제라는, 이미 많은 학자가 제시한, 그 자체로서는 타당한 주장은 법적 책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업자의 책임’으로 왜소화되어 버린다. 그렇게 잎사귀를 강조하느라 줄기를 부정하다 보니 잎사귀만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괴이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김창록, 382쪽)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은)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의 경험을 가시화함으로 가부장제, 식민주의, 민족주의의 공모 체제에 균열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거대 역사에 질문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연대는 여성에 대한 전시 폭력이라는 거대한 부정의의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자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확대, 유지되고 있는 초국적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근거한다. 이는 젠더, 민족,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축이 교차하는 접점에서의 수많은 차이와 경계를 넘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실천의 의지로 연결된 연대다."(이나영, 401쪽)

[ 2016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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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 - 반성과 성찰의 기록
신석진 외 지음 / 생각비행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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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를 읽고 / 2015. 12, 신석진 외, 생각비행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강제해산 결정을 내렸다. 진보를 표방하던 한 정당이 통째로 사라진 순간이다. 사법살인이라는 논란도 있었지만 사회적 시선은 냉담했다.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가져온 결과다. 

한때는 200만표가 넘는 유권자 지지를 받기도 했고, 통합진보당 전신인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따지면 15년 세월을 지켜왔지만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셈이다. 


그런데 바로 1개월 후인 2015년 1월 통진당 해산 결정의 핵심근거가 됐던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죄(내란선동은 유죄)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헌재의 결정이 지나치게 정치적 의도를 가졌던 것 아니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물론 그렇다고 사라진 정당이 다시 부활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겪었던 통합진보당 당직자들의 담담한 자기반성과 진보정치에 대한 성찰의 글이다. 사법적 판단에 대한 반론이나 당시 냉담했던 진보진영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한결 덜하다.


"어떤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 밝혀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진보정치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진보정치 실패에 대한 지지자들의 원망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한때 200만 명이 넘는 유권자가 보내준 표를 받은 정당이 공중분해 됐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것이지만, 진보정치는 그 전에 이미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보 정치의 진지한 성찰과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사람 들이 이 책을 읽기 원한다."(서문)

많은 사람이 통합진보당의 해산에는 수구세력의 전례 없는 공안탄압이라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 측면에서는 타당한 의견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갈릴레오, 서구의 혁명세력과 사회주의 정당, 조광조와 허균, 동학농민항쟁과 학생운동 등 한국사회를 비롯한 전세계 모든 지역과 국가에서 당시의 체제와 이념에 반하거나 권력자들의 전횡에 저항하는 개인과 세력은 유례 없이 탄압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제와 권력자들이 새로운 사상이나 세력을 탄압한다고 하여 새로운 사상이나 세력이 항상 패배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과학은 신앙을 극복했으며,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그리고 서구의 좌파 정당은 오랜 탄압과 공격을 뚫고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진보정치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우호적 여론이나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입각해 통합진보당을 지원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실패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고로 이 책은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치가 실패한 책임이 당사자들에게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해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보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외부의 탄압에게만 책임을 돌리거나 외부적인 조건만을 탓해서는 스스로 변하여 상대방과 조건을 극복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을 뒤져보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이라는 진보정당 14년을 거치면서 정당의 주류정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비주류측 관점의 출판물을 많지만, 주류의 입장이나 관점에서 진보정당사를 기술하거나 입장/관점/태도를 밝히는 출판물은 거의 없다.

그런 측면에서도 이 책은 진보정당 14~5년의 흐름과 평가를 균형감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들은 현실정치에서 적지 않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왜 통합진보당이 스스로를 긍정적이고 진취적 사고의 담지자로 진보적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는가 하는 뼈저린 후회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이 책에 담아냈다.


4명의 공동저자가 명망가가 아니라 실무당직자라는 점도 선입견을 줄이는데 일조했다. 

저자들은 통진당 해산결정 이후 독서모임을 만들어 6개월 동안 토론을 하면서 얻은 고민의 결과를 담담하게 책으로 엮었다. 이들은 진보정치의 실패와 통진당이 보여줬던 아마추어리즘과 국민과의 괴리 등을 비교적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또 예민한 주제라 할 수 있는 종북논란에 대한 진보진영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에둘러 가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이들은 "종북 이념으로 한국에서 정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의사를 가진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정치는 신앙이 아니며,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장과 논리는 도태되기 마련"이라고 잘라 말한다. 


또 경제민주화, 무상급식 등 복지확대, 재벌해체 등 진보진영이 앞장서 제기했던 이슈가 보수정당까지 채택하고 수용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진보정치의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지고 세련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저자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듯이 반성과 성찰이 주를 이루다보니 대안모색에 대한 비중이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체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면,

1장은 ‘다수파의 원죄, 패권주의’를 다루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소명 의식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일해왔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평가는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패권주의자’란 비난이었다. 이 글에서는 왜 그런 평가를 받게 됐는지부터 밝힌다. 고단한 진보운동에 헌신하게 한 원동력은 강한 신념과 확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으로 나타났고 문제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란 가치를 스스로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하고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질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제도적 해법보다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타협과 절충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장 ‘진보의 멍에, 종북주의’는 통합진보당에게 가장 난감하고 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부딪히는 종북주의에 대한 글이다. 통합진보당은 그동안 북한 관련 쟁점에 대해 뚜렷한 자기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런 태도가 원칙적으로는 일리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검증받아야 하는 정치인과 정당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을 추종하고 있지 않으냐는 의구심에 대한 해명과 반론도 있다. 없는 것을 없다고 증명해야 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반북, 비북, 친북, 종북으로 나누고, 종북과 반북은 배제하되 친북은 물론 북한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비북을 진보가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북핵 문제와 3대 세습,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진보가 취해야 할 입장을 제안한다.

3장에서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비판 중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를 제외한 문제들을 살펴봤다. 우리는 진보정당에서 이념과 철학이 갖는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만 그간의 진보진영 내 이념 논쟁이 실제로는 알맹이가 빠진 세력 간 갈등에 불과하며(‘이념논쟁’, 관행을 극복하자), 정통과 이단 논쟁 같은 소모적 양상을 띠고 있음을 꼬집는다(‘정통’과 ‘이단’의 이분법). 정당은 일사불란한 질서가 필요하지만, ‘오더’가 아닌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강조한다(일사불란함의 전제, 자유롭고 개방적 인 토론의 힘). 전민항쟁을 꿈꾸던 시절의 언어 습관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전민항쟁의 향수), 의회주의, 합법주의와 같은 어법이 나온 배경을 짚는다(의회주의, 합법주의 비판의 두 측면). 아울러 애국가 논란을 통해 진보가 가져야 할 ‘국가관’은 어떠 해야 하는지 짚고 있다(진보는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 

4장 ‘진보 혁신의 고정관념’은 진보정치의 혁신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진보의 거친 행태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수긍하면서도, 진보정치의 근원적 동력일 수 있는 진보운동의 가치나 급진적 지향을 버리지는 말자고 주장한다. 다만 진보가 추구해야 할 급진성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 책의 한계다. 정권심판론과 같은 정치적 의제의 과잉이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두 차례의 보수정부 등장 이란 현실에서 진보정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뿐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낡은 진보’의 근거로 제시되는 민족 문제도 진보가 버려야 할 영역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대하는 진보당의 관성적 태도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4장은 또 진보정치의 근간처럼 여겨지는 ‘노동 중심성’이 눈앞의 시급한 과제를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제기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혁신 요구에 대해서도 진보가 현장에서의 실천을 떠나 관성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은지 문제를 제기한다.

5장 ‘경제정책, 이념에서 현실로’는 진보정치에 대한 정치적 사고의 변화나 혁신이 정책 영역에서 어떻게 투영돼야 하는지 보여준 다. 우리 경제 현실에서 전통적인 진보/보수의 구분이 설명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며 그 원인을 밝히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재벌 해체’를 고수해야 했던 이유가 이념이 아니라 우리 경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야권도 경제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현 단계에서 진보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유용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진보진영에서 나오지 않았던 참신한 주장들이 있다. ‘부유세 논쟁’을 통해 진보정치의 성찰적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짚어가는 한편 ‘증세 논쟁’을 통해 진보진영도 세부적인 방법론에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회비용이나 상충관계가 없는 정책은 없다며 정답을 찾기보다는 대응방안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어찌됐든 격동의 현장을 보냈던 진보정당 당직자들이 스스로의 실패와 좌절을 인정하며 기울였을 술잔들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일까 작가 장정일은 "정치에 관한 책이 이토록 마음을 아프게 할 줄 몰랐다"면서 "참혹하고 아름다운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좌우명을 누군가 독차지해야 한다면 그것은 진정 이들의 것"이라고 추천사로 대신했다.(‘정치에 관한 책’이 이토록 슬플 줄이야 (장정일 독후감)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75)


친일과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 그리고 그 오랜 과정에서 형성된 기득권 구조와 분단이데올로기가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결과, 한국사회는 21세 들어서도 겉만 화려한 채 그 내면을 썩어들어가고 있다. 1%, 5%의 최상층은 온갖 불법과 편법, 부당한 방식으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있고, 95~99% 대다수 사람들은 허리가 휜 채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고 있다.
'헬조선', 'OECD 최악의 50관왕', '초고속 고령화와 저출산', '5포세대와 N포세대' 등이 바로 지난 100년의 한국현대사가 가져온 결과로서 21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표현들이다.

소위 '진보'는 그런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상이나 흐름, 정책이나 세력을 의미한다. '헬조선'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변화를 시도하는 주체들부터 스스로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 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이 최근 몇 년 동안 격동적으로 전개된 한국사회의 진보진영/진보정치권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갔다"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우리의 토론이 진보정치 실패 원인 분석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다. 토론을 통해 우리가 얻은 첫 명제는 “진보정치의 한 시대가 갔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 책 전반에 스며든 전제가 됐다. 안타깝게도 어떤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글쓴이들의 부족한 탓이 크고 무엇보다 지나온 시대에 대한 해석이 명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토론 결과를 요약 해보면 다음과 같다."

"글쓴이들이 진보정당 15년의 역사를 모두 감당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시기를 남들과는 다소 다른 위치에서 지켜봤다. 합당과 분당, 그리고 정당 해산에 이르는 역사적 과 정에 필요한 실무를 처리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당의 지도부나 전문적인 연구자는 아니지만, 남길 수 있는 기록과 공유할 수 있는 평가가 있으리라 판단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런 대표성이 부여되진 않았지만, 치열한 현장의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으리라 믿었다."

"지난 몇 년간 함께 시련을 경험한 동료 중에 혹시나 이 책을 읽고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일일이 대면하여 양해를 구할 일이었으나 용기도 없고 부끄러워 그러지 못했다. 글쓴이 모두는 진보정치가 생존하기 힘든 척박한 한국 정치판에서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 수권 가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부족하지만 이 책이 진보정치의 재기와 도약을 바라는 모든 이의 희망 가운데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의 소재로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 2016년 5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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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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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덕일 교수 최신작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2015 만권당)

“(한국 주류)역사학계가 중국 지도를 표절했다! ‘동북공정’ 지도를 통째로 베낀 <동북아역사지도>에 묻는다!”

2015년 4월 17일 여의도 국회 회의실에서 국회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위원장 대리 김세연 의원)에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 관련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국민 세금 47억원을 받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 ~2008년/ 정재정 2012년/ 김학준 ~현재)의 주관 아래 동북아역사지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2008년부터 진행된 국책사업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9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다른 동북아시아 지역 나라들 사이의 역사분쟁에 대처하기 위한 상설기구 설립에 대한 법률에 의거 기존의 '고구려연구재단'과 통합되어 만들어진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47억여 원의 세금을 쏟아붓고 60여 명의 학자들이 8년 여에 걸쳐 작업한 동북아역사지도 프로젝트 결과물 일부가 국민 앞에 공개되었다.
동북아특위 회의에 처음 공개된 동북아역사지도는 충격적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저자와 특위 위원들은 편찬위원회(참석자 서울교대 임기환)가 제출한 '동북아역사지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지도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고대사와 독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와 한나라 국경선이 세로로 무 자르듯 뚝 잘려 있다. 편찬의원회의 ‘실수(?)’로 독도가 증발했다. 또한 4세기를 나타낸 지도에 신라와 백제가 쏙 빠져 있다.
저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지도들의 놀라운 비밀을 폭로한다.

이 책은 저자가 <동북아역사지도>가 왜 엉뚱하게 제작되었는지 지도의 제작 배경과 편찬위 참석자들의 전후 행적 등을 분석하였다. 국회 동북아특위 속기록도 담았다.
그는 제작 과정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대단히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지도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일본 극우파의 침략사관을 그대로 따르는 지도”임을 현장감 있게 조목조목 설명한다. 지도 속에 배어 있는 식민사학의 관점들을 지적하며 고조선과 한사군, 위만조선, 임나일본부, 그리고 독도 문제까지 1차 사료를 근거로 총괄적으로 짚어감으로써 논란만 있고 논쟁이 없는 국내 사학계에 또다시 경종을 울린다.
그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위나라 조조가 경기도 일대까지 점령했다고 그려놓았으며, 일제 식민사학이 발명한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4세기까지도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도 신라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지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에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현주소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이런 지도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13년까지 이 지도의 제작을 담당했던 사람은 ‘실제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와 논리가 아주 허술하고, 간도 영유권 주장이 허술하다’고 주장하던 학자였다.
단군을 신화의 영역으로 보내버리는 등 고조선사 죽이기에 앞장서온 교수(), 독도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와 자료가 허술하다고 주장하는 교수()들. 한민족사를 부정하는 논문과 주장을 펼치는 학자를 감싸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김학준).
이런 사람들이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든 실무자들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긴 격이다. 동북아역사지도가 그런 꼴로 나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시대 한민족사를 왜곳 조작했던 조선사편수회의 후예들이었다. 친일파 사학자와 일제 극우사학자의 제자들로 똘똘뭉친 '식민사학자'인 것이다.

저자는 식민사학자들이 ‘실수’ 따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늘 같이 떠받들어온 조선사편수회발 ‘한사군 한반도설’, ‘임나일본부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치밀하게 입각한 지도를 만든 것이다.
한민족사의 시간과 공간, 사람들을 축소, 폄훼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선총독부 사관에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식민사학자들은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일본이 역사왜곡을 강행하는 데에는 믿을만한 한국내 동조자가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한국일보 : [이덕일의 천고사설] 독도 도발, 일본이 믿는 구석 http://www.hankookilbo.com/v/597abde549c34412b9ebdf7c9e576ffa)

한국의 주류사학계에 도전장을 던진 이덕일의 정체성만큼 이 책 역시 역사학 분야의 인사가 아니라면 도발적이인 내용이다. 물론 한국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에 아베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역사전쟁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21세기까지 국내에 일종의 ‘적군’ 또는 ‘스파이’ 같은 자들이 암약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안타까운 점은 국내외에서 각종 사고를 치며 식민사학 연구기관으로 비난받는 고구려역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참여정부 임기 중에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교육부와 국회, 그리고 교육관계 공무원들이 선발을 하고 연구용역을 발주했는데, 어째서 저런 친일식민매국 사학자들이 사업을 장악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근현대사 왜곡에 앞장서는 뉴라이트도 참여정부 기간에 탄생하기 시작했다. 설마 당시 정부여당도 한통속이었나?
이처럼 식민사학의 뿌리는 강고해 보인다.  그런 식민사학과 뉴라이트가 친일과 독재 후예들이 장악한 이명박 정부 이래 교학사 교과서 파동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퇴행을 일으키고 있다. 역사의식이 남아 있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7~80년대로 퇴행하는 한국사회의 내면을 공부하고픈 욕심에 근현대 이전의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역사를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로 퇴행시키려는 범죄적 행위는 청와대나 국회뿐 아니라 이미 역사학계에 암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이주한 교수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2015 역사의아침)을 시작으로, 이덕일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1999 푸른역사)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 김영사)까지 읽었다. 덕분에 3년 전에 읽었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도 다시 훑어보았고,
이 책 다음에 읽으려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2009 역사의아침)과 <조선 왕을 말하다 1,2>(2010 역사의아침)도 준비해 놓았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2014 만권당)은 그 다음에..

[ 2015년 1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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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90년대 초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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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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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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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기간은 예속과 굴종, 부정과 부패, 압제와 착취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는 두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커다란 획을 가르는 과정은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종속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파 출신의 범죄자들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미국과 친일파 권력집단에게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의 육성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몇 가지 특징과 교훈을 재발견하였다.

특징은 첫째, 한국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패권전략을 위해 끊임없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시도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일본, 특히 1970년대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는 점. 셋째, 한국의 자본은 그 속성상 매판자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넷째, 그 과정에서 친일/친미파 집단의 대리인이자 권력중심인 이승만과 박정희 일당은 미국의 사전 승인, 동의 하에 집권하거나 집권을 연장하였다는 점. 다섯째, 집권세력은 단 한번도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정치자금과 뇌물이 구조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한국 내 정치경제 상황은 미국의 세계 정치경제군사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일곱째, 친일 군사 독재의 압제권력의 무기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에 의한 뇌물이라는 점. 여덟째, 한국의 민중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함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국가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다.

교훈은 특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속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적, 민중적 수탈이 지속된다는 것. 둘째, 특히 군 작전지휘권 환수와 미군 일변도의 무기, 군사전략,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국방은 요원하며 항상 미군의 군사패권전략에 좌우되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셋째, 기술자립과 금융독립성을 유지해야만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내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넷째, 정치 군사 경제 언론 학계에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청산해야만이 자주국방도 자립경제도 가능하다는 것. 다섯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근본이라는 것. 여섯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기 위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민중들의 불굴의 의지와 본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과정을 구조적으로 규정했던 기본 요소는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남한에 끼친 최악의 결과 중 한 가지는 저자의 주장처럼 '저항세력의 괴멸과 권력에 대한 굴종'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친일파는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 존재하는 일체의 항일독립세력과 저항운동의 씨앗을 말려 버리고자 했다. 그 결과 이땅의 항일세력과 민중운동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국은 휴전과 동시에 남한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개조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p.13)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남한에 대한 외세의 지배가 고정화된 가장 중요한 징표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일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이 땅에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953년 10월 한미 양국간에 체결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가장 중요한 조항인 제4조에 따라 미국은 우리 민중의 의사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시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p.14)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원조경제와 잉여농산물, 부실한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 일당은 미국의 원조와 잉여농산물, 권력기구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무수히 수령하여 악용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남한 땅에 쏟아부은 원조액은 31억 달러를 넘었지만 사실 이 액수는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파괴한 남한 재산의 총액을 간신히 넘어서는 것이었다.[한국경제의관점, 이내영] 물론 이러한 원조조차 대부분이 국방비에 충당되었다."(p.22)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한 이승만 일당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반민중성 어느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물리력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집권연장을 꾀했던 이승만은 불과 2년 뒤인 1954년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한 후 폭력을 동원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요했다. 이윽고 1955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 후에 진보당과 조봉암씨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부터 1952년, 1954년, 1956년, 1960년까지 모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은 커녕 정당성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보역량과 민중역량이 궤멸되어 산발적인 저항과 반발 수준에 머무르던 민중들은 단 7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 짓밟으려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4.19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살인마이자 범죄자 이승만은 미국의 품으로 도망갔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친일파 군부, 정치인, 관료, 매판재벌은 아무도 처벌, 청산되지 않았으며(폭력경찰 일부만 처벌), 각종 악법과 제도도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존 친일파들이 잔존하는 가운데 의원내각제와 장면 내각이 출벌하였다. 장면 내각은 혁명도,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승만 정권과 똑같이 부정부패했고 미국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직접 좌우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 압제와 탄압이 약해진 틈을 뚫고 민중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각성되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친미와 반공을 사슬을 끊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끌어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핵과 유엔, 그리고 달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미국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뚜렷한 쇠퇴의 기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군사력이 강력해졌고, 동아시아(중국, 한반도)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중동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흔들리면서 붕괴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친미 독재정권이 속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 등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이라크처럼 반제국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깊숙히 개입하여 허약한 정권은 갈아치우고 반미 정권은 허물어뜨리는 방법을 통해 보다 강력한 친미 정권을 세우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해당 나라 민중의 자주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혀졌다. 이같은 조치는 대부분 반동적인 군부를 매수하여 쿠테타를 종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61년 박정희 친일파 정치군부의 5.16 군사쿠테타는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과 미국의 군사패권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등장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이 미국이 주도 하에 하나의 군사적 목표를 위해 동시에 추진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군대를 남한에 진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반혁명적인 역할의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중국 포위 및 공격을 위해 저렴한 비용과 자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박정희 일당은 민족적, 국익적 관심은 전혀 없이 굴욕적, 망국적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폭력적으로 강행했고, 그에 따른 군인 월급과 군수물자산업 그리고 일본 원조와 차관에서 개인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조성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방대한 억압기구를 통해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하거나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박 정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함으로써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3선 개헌을 강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비상계엄 발동과 주한미군의 사전 허락 하의 군대투입을 남발하면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는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한국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위기는 장면 시대를 거쳐 박 정권에 이르러서도 수습되지 않은 채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1960년대 초까지 한반도의 남북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은 명백히 남쪽이 열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날로 악화되는 위기를 수습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무기를 치켜 들었다. 물론 미국은 남한에서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 수탈이라는 더욱 큰 이익을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결국 1960년대 경제개발은 남한의 경제가 원조로부터 탈피하여 자립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인 수탈의 길을 여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개발은 한국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남한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차관과 금융지원에 의한 '매판자본'의 육성과 불평등무역과 직접투자에 의한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때에 밀려들어 온 일본 자본은 미국과는 또 다르게 한국경제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이 나라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서 실패를 맛본 미국은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함과 동시에 도덕적 위신마저 실추되는 결정타를 얻어맞게 되었고,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9년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고 군사원조도 중단했다. 물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 추가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발맞추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시작으로 학생,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민주역량이 높아졌다. 광범위한 폭력 부정선거로 인해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국은 중국 전복을 포기하고 소련 봉쇄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반소진영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대결상태를 일시적인나마 은폐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박정희 일당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사주했다. 이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이었다.
남북의 민중이 흥분과 열광으로 공동성명을 맞이한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동성명 문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 후 곧바로 유신체제라는 더 광폭한 독재로 치달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등 박정희 일당의 반공 소동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 패배하고 철수한 1975년 4월에 한층 노골적인 모습을 취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을 전면적으로 핵기지하고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 수 있는 한국군 지사병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며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한국군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미군의 휘하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치감치 시도하였다. 1971년 7월 주한 미 제1군단과 한국군 일부를 포함한 한미합동 제1군단이 창설되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1970년대 한국일지, 청사 편집부] 부분적으로 시도되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이후 전면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정책에 편승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자랑했던 남한 경제는 몇 걸음 못가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실업자 증대로부터 벗어나고자 1971년 10월 한미섬유협정의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섬유수출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협정 체결 이후 5년간에 걸쳐 약 8억4천만 달러의 수출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종전을 향해 치닫던 베트남전쟁 역시 전쟁물자 공급에 크게 의존하던 남한의 수출시장에 먹구름을 드리우는데 일조했다. 또한 1971년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차관기업이 일제히 파산하는 등 차관에 의존한 경제는 밑바탕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와 함께 급격한 유가인상 역시 원유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다주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 정권은 1972년 8월 이른바 '8.3 조치'라고 불려지는 긴급명령을 기습적으로 발표하였는데, 파산 직전에 놓여진 차관기업들은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이들 기업에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강탈당해야만 했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박 정권은 외국인투자와 차관도입에 의존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계, 부품, 소재 등은 제쳐놓고 값싼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최종 조립단계에만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부품, 소재 등은 계속해서 일본 등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따라서 전체 수입액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애초부터 경제성과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설비판매를 노린 외국자본의 박 정권에 대한 뇌물공세, 박 정권의 정치자금 획득을 겨냥한 차관도입 욕망, 그리고 기업을 담보로 금융특혜를 기대하는 국내 매판자본의 요구 등이 뒤엉키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시장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과잉, 중복투자가 행해졌다.

1970년대 내내 유신독재는 어느모로 보나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1973년 8월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벌이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박정희 일당은 민청학련 사건 날조로 맞섰다. 이에 대해 다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박 정권은 동아일보사 탄압,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 피고인 8명 사형, 4대 전시입법을 제정하여 탄압에 나섰다.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의 저항을 계기로 민주진영 전체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몹시 다급해진 박 정권은 5월 13일 기어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켰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가장 처절한 투쟁은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 노동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청계 노동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1978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보다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 해에도 투쟁의 도화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즉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 농민투쟁으로 학생들의 유신철폐투쟁 또한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 해직기자, 해직교수들까지 저항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서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농민들의 감자 피해보상 투쟁과 오원춘씨 납치 사건 규탄,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으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급기야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지가했다. 박정희 일당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강력한 저항을 비상계엄과 군대 동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민중들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거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유신정권의 괴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26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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