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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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 <대리사회>

김민섭 저, 2016. 11.. 255쪽, 와이즈베리


저자의 전작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고, 기업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대학의 노동력 착취 실태를 고발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서 홀연 대학을 떠난 저자는 대리운전 기사로 변신했다.

대학을 박차고 나와서야 그는 대학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학은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괴물'이었고, 자신은 괴물 같은 대학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었다.


저자는 대학원생, 박사과정, 시간강사였던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저자는 1년간 대리기사로서 일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거리에서 때로는 책상에서 기록해 <대리사회>라는 책을 냈다.


저자가 전하는 대리운전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대리운전에 필요 없는 모든 행위는 계약에 의해 또는 무의식적으로 금지된다. 내 차가 아니기에 의자의 기울기를 조절할 수도 없고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 수도 없었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건네기 전까지 먼저 말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손님이 던지는 말에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만 할 뿐이다.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게 되니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된다. 사유의 통제다.

저자는 대리기사가 겪는 이런 주체성의 통제가 단지 대리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대리기사의 삶을 한국사회에 투영한다. 바로 이 사회가 거대한 대리사회라는 것이다.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의자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7쪽)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공인 것처럼 좌석에 앉아 도로를 질주하지만 이미 조수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이 타자의 욕망은 내비게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되고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들려주는 길 안내에 따라 운전한다.


‘대리운전’이라는 ‘주체성의 통제’,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를 사회 전분야로 확대적용하여 ‘대리사회’로 규정하는 저자의 논리에 일부 수긍한다. 그렇지만 수긍은 일부일 뿐이다.

‘주체성의 통제’나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사회’는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만 개인을 대상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특성이고, 언론에 의해 이미지화된 ‘주어진 정당과 후보’에게만 투표하는 것으로 ‘정치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가로막는 자유민주주의체제(대의민주주의체제)의 특성이지 않을까 싶다. 권력과 자본이 ‘통제’와 ‘상품의 판매’를 위해 시민과 소비자를 획일화시키고 세뇌시키고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체제의 문제가 본질적이다.


필자는 오히려 대리운전이 음주문화와 연관된 특수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로 유지되는 전세계 국가 중에서 대리운전이 얼마나 보편적일지 모르겠지만(언론에 따르면 중국 정도가 대리운전 사업이 폭발적 성장세임), 음주문화가 한국과 비슷한 국가에서 시장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전망이나 자본주의 상품화의 특성상 ‘욕망의 대리경험’과 관련한 기술이나 산업이 성장할 수는 있겠지만, 저자가 의미하는 ‘대리사회’의 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의 관계에서 학교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이런 '을의 공간'에 순응하는 법을 체화했기에 우리는 남의 운전석에 앉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공간에서 다른 대리인간에 의해 밀려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라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타자의 존재, 즉 자기 욕망을 대리시켜온 대리사회의 괴물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즐거움을 보며 대리로서 즐거워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나 우리는 지금 그만큼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이 만족스럽다면 남들이 먹고 노래 부르는 것에 지금처럼 필요 이상으로 열광할 이유 는 없다. 결국 많은 이들이 새벽에 연구실에 앉아서 기약 없는 논문을 써 내려가는것만큼이나 외롭거나, 아니면 절박한 심정이라는 이야기 가된다."(212쪽)


저자는 그때부터 '사유하는 주체'가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가르쳐준 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밀려나기는 쉽지만 스스로 물러서기는 어렵다. 그것은 공간의 주체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고 절대로 패배가 아니다. 그러고 나면 시스템의 균열이 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 균열의 확장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욕망을 대리시켜 온 대리사회의 괴물과 마주할 수 있다. 그때부터는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여전히 행동과 언어는 통제될지라도, 정의로움을 판단하고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 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252쪽)


‘사유하는 주체’, ‘거부할 수 있는 용기’라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대리사회’라는 개념보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없는 사회>나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와 <그림자 노동>, 그리고 <성장을 멈춰라>가 자본주의 체제나 근대사회체제를 비판하고 세계와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적합하다고 본다.


[2017년 4월 20일]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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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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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서평] 대학은 기업화된 ‘괴물’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저, 20153 10., 은행나무


2009년 현재 전국 405개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4년제 대학 157곳, 전문대학 129곳, 대학원대학 18곳 등 305곳에서 강의하고 있는 시간강사는 총 84,797명으로 조사됐다.(405개 전체로 환산하면 약 11만명) 이중 국·공립대가 14,290명, 사립대가 70,507명이다. 석사학위가 44,188명이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30,966명이며, 그중 전업강사가 35,477명이라 한다. 하지만 전업강사 중 법정 수업시간 수인 주당 9시간 이상을 강의하는 실제 시간강사는 16,536명에 불과하다.([교수신문] 시간강사, 6시간 미만 강의가 50% 넘어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9012)


인용처인 [교수신문]에 따르면 전국 대학교수는 2013년 현재 73,400명이라 하니 한국의 대학은 교수보다 시간강사가 더 많은 셈이다. 교수보다 시간강사에게 지불하는 임금과 복지비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와 시간강사의 실제 수업시간 등 내용은 다르겠지만, 대학의 핵심 역할(서비스)가 강의이므로 강의에 대해 시간 당 책정하는 비용이 다르다.

즉 대학, 학교법인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학생들에게 그것도 매년 등록금을 올려받았지만, 대학운영비의 절감을 목적으로 교수의 정원을 늘리지 않고 시간강사만 땜빵시키면서 ‘학위 장사’를 한 것이다.


그렇게 대학으로부터 착취당한 시간강사, 그중에서 가장 처우가 열악한 지방대학교 시간강사가 직접 시간강사들의 애환을 이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에 적나라하게 공개했다.


필자는, 대학이 시간강사의 노동과 열정을 착취하여 시간강사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대학교육을 망가뜨리며 대학을 기업화시킨다는 일반적인 내용을 이미 몇 년 전에 김동춘의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1999)>와 이정규의 <한국사회의 학력,학벌주의(2003)> 등 몇 개의 책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시간강사들의 구체적인 삶과 애환을 느낄 수는 없었다.

드디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통해 뒤늦게 그들의 고통과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늦게 책을 통해 체험한 ‘애환’은 막막하고 쓰릴 뿐이다. ‘지방시(지방대학교시간강사)’라는 단어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다.


저자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소설 쓰는 것을 좋아했고 지도교수가 말한 학문의 즐거움이 궁금해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그는 “대학이란 지성진리학문의 총체라고 생각했고, 강의실과 연구실은 내게 가장 가치있는 공간이었다. 대학의 합리성에 대해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괴물로서 대학의 맨얼굴을 보게 된 계기는 “본업인 연구와 강의로는 도저히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연구를 한다는 것은 논문을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글을 어딘가에 투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학회 가입비와 연회비, 그리고 심사에 대해 고맙다는 의미의 심사비 등 도리어 20만원 가까이를 학회에 내야 해요. 최근에는 6-8학점을 강의했는데, 그러면 1년에 1000만원 내외를 버는 수준이에요. 그리고 건강보험 등 4대보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기쁜 일인데도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아들과 아내를 산후조리원에 두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문득 맥도날드 앞에 붙은 구인공고를 봤다. 새벽에 나가 몸을 써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달에 60시간 이상 일하면 직장가입자로서 4대보험을 보장해준다는 말을 듣고, 덜 컥 일을 시작했다. 고된 일이었지만 최저시급 5580원은 생계에 쏠쏠한 도움이 됐고, 직장 가입자로 건강보험에 가입해 부모님까지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


“대학과 맥도날드를 비교해봤어요. 맥도날드는 신자유주의의 표상이지만, 그곳에는 일하는 사람을 위한 제도나 매뉴얼이 꼼꼼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합리성의 표상이라는 대학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시간강사부터 조교, 학부 아르바이트생까지 ‘학문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가혹한 착취를 하고 있는 '괴물'로 서 대학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나 사회인'이 아닌,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으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됐죠.”


이렇듯 저자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동안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겪은 실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펼쳐내고 있다. 제도권의 삶이 비루하다고 불평하지도, “내가 이렇게 힘드니 좀 봐달라”고 징징대지도, “이러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저 한 청년이 이렇게 꿋꿋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고 보여줄 뿐이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는 “젊을 땐 좀 아파도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불평만 한다”는 식의 기성세대의 일갈에 대한 답으로서, 꿈을 가진 한 청년이 얼마나 ‘노오력’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꿈 때문에 현재를 얼마나 처절히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는 이때에 제도권에서 살아가는 저자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그래서 8090세대 청년들에 대한 세대성의 가슴 서늘한 기록이 된다. 그 세대들이 기성세대와 현 정치권, 기득권에 대해 불신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저자는 대학이라는, 제도권이라는 ‘괴물’(요즘 회자되는 ‘헬조선’의 대학)에서 혼자 벗어나 이제는 자신의 꿈을 찾아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처럼 ‘괴물’에서 벗어나는 시간강사는 전체 11만 명 중 얼마나 될까. 저자 혼자서, 저자처럼 깨닫고 용기를 내어 벗어나는 강사들이 얼마나 될까. 즉 저자의 용기와 탈출은 개인적인 결단일 것이다.

저자와 조금 다른 이유로, 조금 다른 처지로 인해 아직도 대학이라는 ‘괴물’ ‘헬조선’에 갇힌 사람들은 못나서, ‘노오력’이 부족한 것일까. ‘글쓰기’가 전공이 아닌 강사들은 어떻게 ‘괴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필자는 저자가 비슷한 처지의 강사들과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머리와 어깨를 맞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헬조선’에서는 ‘지방시’ 시간강사들이 혼자만의 노력과 용기로 탈출하여 안착할 만한 곳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 진리, 학문’을 대학이 만들어내지 못할 때, 비슷한 처지의 강사들(노동자들)이 대학으로부터 착취당하는 대학 내 노동자, 학생, 교직원 그리고 해고위협에 시달리는 교수들과 어깨 걸고 나서지 않는 한, 정부나 정치권이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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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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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두환이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5.18은 폭동”이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국의 헌정체제는 1988년 국회에서 실시된 광주청문회를 비롯하여 1995년~1997년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국가반란과 살인혐의를 확정했다. 이로 인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박탈당했다.(비록 확정 판결 후 1년 만에 정치적인 이유로 석방되었지만..)

문제는, 전두환 등이 국가반란 혐의 등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그들을 배출해낸 유신군사독재 체제와 그들이 한국사회에 강제한 5공화국 적폐구조는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공화국은 집권 7년 동안 한국사회 곳곳에 인적으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심어놓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무수히 많은 적폐들은 유신군사독재와 5공 군사독재의 적폐가 뿌리깊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전두환은, 자신이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국가반역자임이 명확하게 확정되어 있음에도 왜 한국인들에게 “5.18은 폭동”이라는 도발을 할까? 필자는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 대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의 법적 정치적 역사적 심판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이 작품의 등장은 독자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5월 광주민중항쟁의 사회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한다.

이 작품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중학생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그후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받는 내면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5월 항쟁 당시의 처절한 장면들도 현장감 있게 묘사했다. 소설은 주인공과 함께 상무관에서 일하던 형과 누나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작가는 광주에서 쓰러져간 무고한 영혼들의 말을 대신 전하는 듯한 진심 어린 문장들로 어느덧 그 시절을 잊고 무심하게 5.18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여전히 5.18의 트라우마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한다. 저자는 주인공들이 겪은 5.18 전후의 삶의 모습을 통해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단면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야기는 5월 광주항의 치열한 현장에서 곧바로 시작된다.

1980년 5월 광주, 열다섯 살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 합동분향소가 세워진 도청 상무관에 갔다가 그곳에 먼저 와있던 수피아여고 3학년 김은숙, 미싱사 임선주의 부탁을 받고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매일같이 합동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면서 열다섯 어린 소년은 '어린 새' 한 마리가 빠져나간 것 같은 주검들의 말 없는 혼을 위로하기 위해 초를 밝히고, ‘시취를 뿜어내는 것으로 또 다른 시위를 하는 것 같은’ 시신들 사이에서 친구 정대의 처참한 죽음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정대는 동호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고,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공장에 들어와 자신의 꿈을 미루고 동생을 뒷바라지하던 정대의 누나 정미 역시 그 봄에 행방불명되면서 남매는 비극을 맞는다.

얼마 후 도청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지고, 이들은 시신을 두고 밖으로 나갈지 아니면 안에서 계엄군을 맞을지 고민한다.
계엄군의 총소리가 도청을 중심으로 온 도시에 울려퍼진 그 날이 지난 후, 은숙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게 되지만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피멍이 들도록 뺨을 맞는 폭행을 당한다. 선주와 진수는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극렬분자', '빨갱이'로 분류되어 성기 고문, ‘모나미 볼펜’ 고문 등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사실 한국의 사회과학 등 학계와는 달리 문학계나 예술계에서 5월 광주항쟁은 잘 보이지 않았다. 5월은 현대사의 한 단락으로 역사서에 기록되거나 정치나 사회분야에서 분석의 매개로만 적용된 듯하다. 물론 정치나 사회과학에서도 빈도수는 낮다.

문학이나 예술, 영화 등에서 5월 광주의 모습이 적은 이유는 아픈 기억에 대한 ‘회피’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한국사회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5공의 부역자와 기득권자들이 5월 광주를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삼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또는 문학과 예술을 한다는 이들이 5월 광주의 문학적, 예술적 형상화를 해낼 수준과 능력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5월 광주를 회피하는 동안, 5월 광주는 여전히 당사자들과 한국인 모두의 무의식과 유전자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잠복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이 작품 <소년이 노래한다>의 출간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5월 광주에서 시민들, 젊은이들, 학생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동족의 군인들이었다. 공수부대와 군인들에게 대검과 몽둥이와 군화발로 살상을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들을 유린한 군인들은 과연 어떤 낯짝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군인들이 한 해 전 부마항쟁을 잔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던 이들, 베트남전에서 몇백만 명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이들이 아닐까 암시한다. 그리고 이들의 핏줄이 2009년 1월 용산에서, 2014년 세월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라고 적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p.212)

작가는 인간의 잔인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잔인성을 강요하는 권위 앞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인간도 있다는 믿음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1980년 5월의 광주를 작가가 재조명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1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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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가격 - 청춘이 사라진 시대, 2017 대한민국 청년의 자화상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외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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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017 대한민국 청년의 자화상 <청춘의 가격 : 청춘이 사라진 시대, 2017 대한민국 청년의 자화상>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저, 2017. 3., 243쪽, 사계절


한국사회는 19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 사태를 계기로 대량해고 사태를 겪기 시작했다. 동시에 성장률과 더불어 고용안정성과 소득상승률이 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IMF 사태의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고, 10년 뒤 미국발 금융위기로 또 한번의 고비를 맞이했다.

IMF 사태가 기성세대의 삶에 충격을 주었다면, 미국발 금융위기는 누적된 정책 실패와 겹치면서 청년들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취업 준비를 위한 휴학이 청년기에 거쳐 야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안정된 직장 중 최고라는 공무원 시험과 교사 임용시험의 경쟁률은 매년 치솟고 있다. 청년들은 ‘생활’과 ‘생존’ 사이 어디에선가 쫒기고 있으며,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에서 청년들의 처지와 조건에 대해 신간을 내놓았다. 새사연은 청년들이 청춘의 시기를 보내는 데 필요한 요소들과 그것을 획득하기까지 필요한 비용 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책 안에는 청년 노동자의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는 4명의 청년들과 자세하게 인터뷰를 한 결과를 담았고, 그들의 인터뷰 내용을 뒷받침하는 통계수치를 모으고 분석했다. 4명은 연애 및 결혼, 주거, 여가, 노동 시장과 노동 환경을 주제로 인터뷰를 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투자된 사회적 개인적 자본의 총량을 유추해보고, 이후 청년들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임금과 소득으로 돌려 받는 비용을 계산하여 청년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드러낼 것이다”(17쪽)


<청춘의 가격>에는 여러 가지 통계수치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5년 연령별 시간당 정액 급여(도표1)는 청년세대(19~29세)의 급여가 65세 이상 노인세대보다 낮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회 임금 구조의 가장 아래 쪽을 받치고 있는 집단은 나이 어린 청년임을 알 수 있다.


청년들의 일자리는 서비스직, 특히 숙박음식점업에 집중되어 있는데(도표4), 한국에서는 단순노무직과 더불어 숙박음식적업 등 서비스직의 임금 수준이 가장 열악하다(도표5).


한국사회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1인 가구와 1세대 가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데, 1인 가구는 2015년 기준으로 벌써 전체 가구 중 27.1%(도표15)에 해당한다.

그리고 청년 노동자들의 소비지출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은 ‘주거 및 수도광열비’로, 전체 연령의 17%와 비교할 때 현저히 높은 28% 수준이다. 자산(보증금)이 부족하기 때문에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열악한 주거에서 거주할 수밖에 없다.


대학생들은 졸업장을 따기 위해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다가 결국 빚만 짊어지게 된다. 신용카드 돌려막기는 기본이고 사채와 다름 없는 고이율의 대출에 의존하는 대학생도 있다.

대학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의 수용 규모는 크지 않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통학거리가 먼 학생들이나 지방에서 유학온 학생들의 주거지는 자취나 하숙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고시원이든 다가구든 월룸이든 유형을 가리지 않고 보증금과 월세가 해가 다르게 치솟는데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제공하는 임대주택 규모는 ‘생색내기’ 수준일 뿐이다.

학자금 대출과 월세 내고 핸드폰값을 지출하기 위해 저임금의 아르바이트나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어떻게 시간을 할애하여 취업 공부하고 스펙을 쌓을 것이며, 전공분야를 연마하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을까.


요즘 청년들이 직업의 안정성에 매달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비정규직 및 불안정한 일자리의 임금은 수도권에서의 생활비를 겨우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빚을 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부모세대가 자신들에게 해준 경제적인 지원을 내 아이에게 똑같이 해줄 자신이 없다. 1~2년 혹은 한 달이나 일주일에 불과한 계약기간을 감내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근시안적 태도를 버리고 멀리 보라고 독촉하는 것은 폭력에 가깝다.

청년은 당연히 힘든시기이니 더 힘든 이들을 보면서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 안에서 너의 길을 찾으라는 위로는, 현재와 미래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새사연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급 6,470원(2017년)짜리 아르바이트에 꿈을 팔라고, 무급 인턴십과 저임금 단기계약직에 만족할 줄 알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대학 졸업 후 취업’은 오늘날 청년들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선택지이다. 그래서 성실한 청년일수록 높다란 취업의 벽 앞에서 ‘내 노력이 부족해서 사회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자기 탓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내달리다 결국 ‘포기’하고 ‘달관’하고 스스로를 ‘흙수저’로 규정해버린다. 이 과정에서 청춘은 제 빛깔을 잃고 스스로 목소리를 꺼버리고 만다.”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는 것도, 한국사회의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주체도 청년세대다. 청년들도 동등한 주권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존엄성’과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향휴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바로 청년세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청년들이 현재에 고통받고 미래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으니 결혼율과 출산율이 줄어들고 사회에 활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삼포세대’와 ‘오포세대’는 기성사회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는 결과다. 그런데 청년들에게 가장 막중한 임무와 역할을 떠넘긴 권력자들과 기성세대들은 이들 청년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나라에서는 첨년들의 눈이 높아졌다고 얘기하는데, 사실 눈이 높아진 것은 부모 세대입니다. 제 부모님도 그러셨어요. 제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공사장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셨죠. 대기업-정규직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은 부모 세대에 더 많아요." (30세 대학원생)


"전체 주택에서 장년층의 자가 소유율이 준다는 것은 그 자녀세대는 더 가난할 것이라는 말과 같아요.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서 내 집 마련에 대한 미신을 걷어내고 빌려 쓰든 사든 간에 집에 애정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주택 문화와 제도를 사는 사람 중심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9세 시민단체 활동가)


“노동 시장 진입이란 건 취업이잖아요. 그런데 모든 청년들이 정규직 취업을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레슨이나 퀵배달을 하거나 학원에서 파트타임 근무를 하면서 자기만의 꿈을 찾아가고 있는 청년들도 있어요."(30세 싱어송라이터)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건 우리가 잘사는 모습이에요. 또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교육이 될 수 있어요. 잘산다는 것이 경제적인 게 아니라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정서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죠."(27세 시민단체 활동가)


[2017년 4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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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사기다
스메들리 버틀러 지음, 권민 옮김 / 공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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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메들리 버틀러 저 <전쟁은 사기다 War is a Racket>, 1935/2013, 144쪽, 공존


 

이 책은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래, 자본주의 국가가 각종 ‘전쟁’을 수행하는 가장 큰 목적을 고발했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최첨단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온 미국의 장군이 고발한 것이다.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의 첫 대목은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래왔다. 전쟁은 아마도 가장 오래됐고, 손쉽게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며, 그리고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업이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이다. 또한 이윤은 돈으로 계산되지만 손실은 인간의 목숨으로 지불되는 유일한 사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사기'야말로 전쟁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믿는다. 전쟁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것은 '(권력) 내부'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알 뿐이다. 전쟁은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가 희생하는 사업이다. 전쟁을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다."(12쪽, 70쪽)


 

이 책은 ‘미국(자본주의사회)이 말하는 전쟁’의 속성과 의도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고 맹목적인 한국인들에게는 필독서라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과 아프리카 내전,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카니스탄 전쟁도 ‘테러와의 전쟁’도 기본 속성은 자본가들과 금융자산가들과 군산복합체들이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고 사기임을 알아야 한다. 전쟁뿐 아니라 ‘전쟁’ 또는 ‘전쟁위협’을 내세우며 군사무기를 만들고 사고 들여오고 수출하는 것 또한 겉으로는 ‘인권’ ‘민주주의’ ‘안전’ ‘안보’를 내세우지만 본질적으로는 자본가들의 사업이자 사기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온갖 무기와 미군과 벌이는 군사훈련 또한 자본가들과 군산복합체를 위한 사업이며, 앞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 역시 자본가들과 군산복합체들의 사업(사기)가 가장 중요한 본질이며 이유가 될 것이다.


 

스메들리 버틀러(1881∼1940년) 장군은 미국 해병 역사상 가장 용감한 군인이며, 병사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군인 중 한 명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1898년에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분위기에 휘말려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신병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해 쿠바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34년 동안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에서 미국의 군사 작전을 이끌었다. 무려 121회의 전투에 참여했고 목숨이 위태로운 큰 부상을 두 차례나 입었다. 그러면서 미국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퇴역하기 전까지 모두 16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5개는 무공 훈장이다. 미국 군 역사상 해병대 최고 훈장인 ‘브레빗 훈장’과 두 개의 의회 ‘명예 훈장’을 수훈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120회 전투 끝에 내린 결론"이 바로 “전쟁은 사기”라고 선언한 것이다.


 

한편 그는 스페인-미국 전쟁 때부터 시작된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와 간섭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가이면서 평화주의자였다.

퇴역할 때쯤 그는 자신의 과거, 조국과 세계의 변화를 회고하고 통찰하며 열정적인 반전 연설과 평화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현역으로 있으면서 더 이상 “자본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맞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창한 헌법상의 기본 원칙을 널리 전파하는 연설가로 변신했다. 즉 자유민주주의와 평화 수호하기 위한 고립주의, 비간섭주의, 평등 외교를 호소했다.

그는 1930년대에 미국 700여 개 도시를 돌며 1,200여 회의 연설을 했다. 기업들의 전시 부당이득 취득, 미국의 군사적 모험주의, 미국에서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한 파시즘에 반대하는 거리낌없는 연설로 전국적인 명성과 지지를 얻었다. 이후 해외 참전군인들의 권익 신장, 미국의 군비 확장 반대, 국외 전쟁 개입 반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반대를 주장하며 활발한 반전 평화운동을 펼치다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계대전 때 우리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해 젊은이들이 징병을 받아들이게 했다. 군에 입대하지 않을 경우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전쟁 프로파간다는 너무나 악랄해서, 하느님까지 끌어들였다. 그러지 않은 이가 더러 있긴 했지만, 우리의 성직자들까지 함께 나서서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라고 부르짖었다. 독일인들을 죽이라고 했던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편이고 독일인들을 죽이는 것은 그분의 뜻이었다.”(104쪽)


 

버틀러가 1935년 출간한 이 책은, 미국의 대표적 반전 도서로 꼽힌다. 하지만 버틀러 장군은 모든 전쟁을 부정하는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미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은 필요하지만, 미국 자본 및 대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한 침략 전쟁에는 반대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 문학으로 손꼽히는 이 짧은 에세이는 지금도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교양서이자 교육서로 널리 읽히고 있으며,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사실상 비간섭주의를 포기한 미국의 군사적 침략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비판하는 중요한 준거 자료로 거론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다. ‘군산복합체’라는 용어는 1961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퇴임 연설에서 비롯됐지만 버틀러는 이미 한 세대 전에 선구적으로 군산복합체의 적나라한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책에서 그는 미국의 “군사 조직”이 부유한 미국 기업들의 이득을 위해 어떤 식으로 이용됐는지 실명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자세히 설명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현대인들조차도 그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설명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또 그는 전쟁 지지자들이 대중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신’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밝힌다. 그들은 참전 행위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사역으로 미화하면서 군사적 모험에 따르는 경제적 이득 편취는 함구한다.


 

“그가 한쪽 눈 아니면 한쪽 다리를 잃고 돌아왔을 때, 또는 정신이 파괴된 채 돌아왔을 때, 그들 또한 그만큼이 나, 때로는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그렇다, 그들 또한 군 수품 제조업체와 은행, 조선업체와 각종 제조업체, 그리고 투자업체의 이득을 위해 자신의 달러를 바쳤다. 그들 또한 자유 공채를 매입했다가 종전 후 공채 가격을 조작한 속임수에 넘어가 은행의 이득에 기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신체적, 정신적 부상자들과 스스로 자신을 되돌릴 수 없는 참전군인들은 계속 고통 받고 있고, 또 계속 빚을 갚고 있다.”(108쪽)


 

버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쓴 이 책에서 새로운 전쟁의 임박,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위험성 증가, 미래의 가공할 무기들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또 군사력을 자국 방어용으로만 제한할 것을 주장하면서 일본 군함이 미국 서부 연안에 출몰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 나중에 정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사람들은 버틀러의 이런 언급에 전율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일본의 공격
때문에 고립주의를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전쟁에 내재된 경제적 의미와 제국주의에 관한 버틀러의 관점은 지금도 그대로 유효하다.

 

잘나가던 미국 장군의 고백 "전쟁은 사기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ref=twit


[2017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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