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서평]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 과거와 미래>
마이클 해링턴 저, 김경락 역, 1989, 579쪽, 메디치미디어

이 책은 미국에서‘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며, 사회 운동가, 작가, 교수였던 마이클 해링턴이 암으로 투병 중이던 기간에 쓴 마지막 노작이다.

저자는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30대의 나이에 미국 진보운동에서 최고로 명석한 지식인이자 뛰어난 조직 운동가로 자리매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소수자의 고독을 오랫동안 겪기도 했다. 보수주의자에게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기존의 교조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단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마이클 해링턴은 제1장에서 보수주의자와 기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3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그간의 사회주의 운동은 여러 오류를 드러냈고,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도 많이 식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움직여 온 힘은 앞으로도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주요한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이다. 사회주의는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논리적 대응이다."

둘째, 자유와 정의가 사회 경제적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 17세기 전후의 자본주의로 인한 사회 경제적 변화가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만들어 낸 것처럼,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셋째, 사회 경제 구조가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못한다면, 지금 누리는 정도의 자유와 정의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 가설 아래 헤링턴은 20세기의 사회주의가 왜 비틀거렸는지 원인을 찾아간다. 그는 사회주의가 비틀거린 이유를 마르크스부터 시작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모호한 정의(특히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한 모호한 정의), 단일한 노동 계급의 부재, 소련의 일당 독재 등’“가짜 사회주의’의 난립, 사회주의로의 이행 모델 부재,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자본의 국제화 등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제2장에서 해링턴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유형의 사회주의와 운동들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먼저 푸리에와 생시몽 그리고 오언주의로 대표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소개한다. 유토피아주의는 실패했다.

두번째는 ‘마르크스주의 속의 유토피아주의’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정의할 때에는 유토피아주의자 같은 면모를 지녔지만 목적을 달성할 정치적 수단에 있어서는 유토피아주의자와 다른 길”을 선택하는 ‘모순’을 저질렀다고 평가한다. 그는 “오늘날 유토피아주의적인 목표는 어느 곳에서든지 민주적이고 의회적인 수단에 의해서 달성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 카우츠키의 독일형 사회주의 운동을 소개하며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에게 남아 있던 유토피아주의뿐만 아니라 투쟁 과정에서 강조된 인간의 창조성까지도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3장에서는 레닌의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를 시작으로 하여 중국, 쿠바 등 제3세계로 확산된 사회주의 체제는 ‘가짜 사회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들은 ‘권위주의적 집산주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주의 개념에 대한 혼란만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해링턴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의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으며, 공화정의 전통과 철학이 함께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주의는 시민사회의 주체적 성장보다는 국가주의와 기득권 정치에만 기대는 문제를 낳게 된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는 4장에서 스웨덴의 노사가 서로의 실존 권력을 인정하고 타협해간 경험을 지적한다. 그는 사회민주적 대타협이 대번영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런 체제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독자들도 알고 있다시피 ‘대번영’은 아주 짧았다. 복지국가는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저자는 포드주의 등이 복지국가를 가져왔지만 복지국가와 경제의 세계화 속에 스스로 위기를 가져올 요인들을 잉태한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본의 반격이 시작되고 신자유주의 물결이 넘치기 시작했다.


 

해링턴은 5장에서 경제의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늘날 단일한 계급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관심사도 경제 영역을 넘어서 성, 인권, 환경, 문화 등으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기술과 작업의 조직은 훈련된 계층을 만들어 내고 있고, 공장과 사무실에서 이뤄지는 주요한 의사 결정 과정에 진정한 참여라는 사회주의적 가능성이 열려 있다.”(326쪽)


 

6장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는 경제의 사회화에 대응하여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UN과 다른 국제기구를 설립하자는 등 1970년대 브란트의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심화시키자는 것이다.

“이 작업에는 중요한 두 개의 원리가 있다. 먼저, 부와 자원을 북에 서 남으로 이전하는 것이 북과 남 모두에게 부와 자원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이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제 정치적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원리다. 그래서 브레턴우즈 체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세계 경제를 통합하는 제도가 필요하다.”(401쪽)


 

해링턴은 7장에서 생산구조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화가 사회적 소유권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사회 축적 구조도 바꿀 수 있다.

“앞으로의 사회화는 민주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421쪽)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


 

8장에서 저자는 오히려 21세기에는 구성원들 간에 타협을 통해서 점진적인 개선을 해나가는 유토피아주의를 실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가능성을 스웨덴에서 찾는다.

“기업에 기반한 성장이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사회 민주주의적 가정은 폐기되어야 한다. 목표는 사회 정의와 민주적 참여를 바탕으로 한 질적인 경제 성장이다.”(439쪽)

 

마지막 9장에서 해링턴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방향을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로 정의한다. 그는 지난 백 년간의 투쟁을 통해 급진적으로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점진적으로는 변화시켜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펼쳐질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또한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그가 ‘점진주의’를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계급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노동 계급의 주도로 각 계급계층의 동맹을 구성하고 “공동의 목적을 내세워 복잡 다양한 힘을 결합해야” 한다. 또한 동맹은 “경제 사회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문화에서도 낡은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도덕적, 지적 개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이 ‘점진주의’의 근거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마르크스를 포함해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훠씬 더 오래 걸리고 근본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528쪽)

“(교훈을 얻는다면)사회주의는 자유와 연대,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체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를 향한 노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느린 종말의 시대’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577쪽)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를 읽고 필자가 해링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내린 결론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현실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가 지배한 지구는 빈부격차와 생태계 파괴, 전쟁 등 점점 지옥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주의 개념이 경제적일 뿐 아니라 비경제적인 내용을 포함해야 하며, 자유와 정의 그리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문화와, 심리 분야 등 사회 전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소련 및 제3세계의 사회주의 체제가 ‘가짜 사회주의’라는 규정과 “왜 여전히 사회주의가 희망인가?”라는 이유에 대한 해링턴의 분석과 추론 과정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저자가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을 잘못 분석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잘못 찾았기 때문에 6장 이후 그가 제시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방향’ 역시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첫번째 원인으로 마르크스의 ‘사회화’가 정치경제적인 특면에서 모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사회가 경제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루소가 주장한 ‘일반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단일한 형태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마르크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사회는 대의 정부일 수도 있고 노동자 평의회의 연대 형태, 즉 코뮌일 수도 있으며, 그런 것들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상은 59쪽)

하지만 해링턴은 “사회가 경제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가 도출해낸 이후 21세기 정치경제학자들과 사회주의자들 대다수가 인정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저자 자신도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가 압도적으로 지배해버린 20세기 지구촌 현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회는 그 어떤 것일 수 있다”라는 ‘불가지론’ 비슷한 주장을 해버린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사회가 특정한 경제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 것을 이야기했지, 특정한 경제관계가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거나 동일하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외면한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지배하는 대다수 국가는 ‘대의 정부’ 형태이고,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지배하는 대다수 국가는 ‘당 주도의 자치국가’ 형태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소련은 소련공산당 주도의 소비에트(꼬뮌) 연방공화국이었고, 중국 역시 중국공산당 주도의 자치국가이다.

또한 저자가 마르크스의 ‘사회화’에 대한 이론적 검토를 하는 중에 왜 ‘사회’의 형태에 문제를 삼았는지 어리둥절하다. 그는 ‘팽창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사회화’로 이해하기도 한다. 아마 해링턴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마르크스의 ‘사회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해링턴은 마르크스주의 ‘사회화’ 즉,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의 대안으로 7장에서 ‘사회화’를 “일상 경제에서 내려지는 각종 결정 과정을 민주화하는 것”(422쪽)이라고 정의한다.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고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생산수단의 소유권이라는 경제적 관계에서 제기한 ‘사회화’를 ‘정치적 의사결정권’이라는 정치적 관계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해링턴이 사회주의가 실패한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 것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는 올바르지만 자신들의 감정과 신화, 기대를 제거하지 못해서 근본적인 오류를 끌고 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수일 수밖에 없고, 그런 다수가 하나로 뭉쳐지고 균일한데다 한가지 목적으로 결합한 것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었다”(61쪽)는 점을 문제제기 한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실상을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행동하는 단일화되고 혁명적인 노동 계급은 이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20세기 전반부 사회주의 운동이 실패하게 된 핵심 원인이다.”(64쪽)

하지만 해링턴은 마르크스가 규정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에 대해 교조적으로 또는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 계급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며,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방식이 지배한 20세기 초까지 프롤레타리아트는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의 존재나 규모, 혁명성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자 계급이 ‘대중’ 수준의 인식이나 각오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혁명적 계급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정당의 의식화와 지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제대로된 노동자 정당(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끌게 될 경우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저자가 경험했거나 전해들은 유럽 대다수 국가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볼셰비키당 수준의 지도력과 조직성, 대중장악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이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원인 중 가장 복잡한 세 번째로 제시한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역사적 ‘공간’은 도대체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봉건주의 내에서 발전했듯이 사회주의도 자본주의 내에서 발전”할 수 있고, “부르주아들은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갑작스러운 봉기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한 것은 ‘분명한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노동자는 권력을 쥘 수 있지만 복잡한 경제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이상 65쪽) 그리고 “어떤 경우에서든 대중은 갑작스러운 권력의 교체를 원하지 않는다. 단번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한다는 이론과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서로 충돌했다.”(66쪽)

저자는 거의 대다수 좌우파 경제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르주아 혁명’을 영국 등 일부 국가의 사례만을 인용해 부정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아주 특이하고 고집스럽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봉기’와 ‘노동자들의 경영 능력 부정’ 그리고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에 대한 대중의 거부’와 같이 학문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는 자신만의 ‘주장’이나 ‘주관적 판단’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 무리수를 둔다. ‘봉기’와 ‘전쟁’ 등 무력에 의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전한 경우가 없기 때문에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을 ‘가짜 사회주의 시대’라고 폄하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이후 1918년부터 몇 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이 러시아 반동세력의 반혁명을 지원한 사실과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 등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속속 들어서자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무력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공격한 사실에 대해 해링턴은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만약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해링턴이 ‘갑작스러운 봉기’와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라는 개념을 새로이 고안한 이유는 9장 ‘비전을 가진 점진주의’라는 자신의 주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링턴은 사회주의가 실패한 네 번째 이유로, 사회주의 운동이 세계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국가의 세계화를 과소평가”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은 자연스럽게 세계화될 수 있다고 과대평가”한 것이 “마르크스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개별 국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세기 동안 세계화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73-74쪽)

하지만 마르크스가 과소평가한 것은 ‘국가의 세계화’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화’였으며,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연스럽게’ 세계화될 수 있다고 밝히지 않았다.(그리고 해링턴 본인이 밝혔듯이 ‘기업의 세계화’는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정당과 운동가들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화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자본주의자들과 시장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개혁가도, 정치가도, 경제학자도 해결하지 못한채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링턴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대응으로 참고한 사람이 이미 실패한 사민주의 정치가인 빌리 브란트와 오토 바우어이다. 저자는 6장에서 브란트와 바우어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순수한 도덕적인 연대와 더불어 자기 이익 확대라는 가치에 기반”을 둔 ‘국제 정치경제 기구’를 설립하자고 제안한다.(401쪽) 자본가들이 정치와 사회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정부관료나 정치인이 ‘순수한 도덕적인 연대’라는 가치에 따라 국제협력에 나선다는 발상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지탱하고 있고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정당이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라는 것을 잊었나?


 

해링턴은 기존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자신만의 ‘사회주의’, ‘사회화’의 개념을 새로 제시한다. 여러 가지 개념이 제시되는데,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재해석하거나 독자적인 해석을 내린다.

사회주의는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이다. 사회주의는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한 논리적 대응이다."(49쪽)

“새로운 사회주의의 근본적 구상은 모든 경제적 결정 과정에 노동자 대표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426쪽)

“사람들이 경제적 압박에 종속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의 계획과 욕망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 시간을 늘리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의 핵심목표이다.“(453쪽)

“자유롭고 공동체주의적인 직접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사회주의의 두 번째 비전”(476쪽)

“사회화는 경제 문제를 넘어서 모든 사회 부문으로 확장되는 사안이다. 사회화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이며 개인들의 자아실현이란 의미까지 포괄한다.”(554쪽)


 

그런데 해링턴이 제시하는 ‘사회주의’ 개념과 ‘사회화’ 개념은, 과거와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 있고 다분히 추상적이다.

그가 제시한 ‘자유’와 ‘정의’라는 개념은 다분히 낭만주의적 요소와 근대적 요소가 섞여 있다. 철학적으로 보면 ‘자유’는 근대적 자유이면서 사회경제적 관계가 배제된 ‘정치적’ ‘개인적’ 자유에 그칠 수 있으며, ‘정의’라는 개념 또한 사회경제적, 계급계층적 입장에 따라 상대적인 의미에 그칠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현대 사회가 다양한 계급계층으로 분화되었고 이에 따라 앞으로의 사회주의가 경제적인 요소뿐 아니라 문화,심리적인 다양한 요소까지 감안해야 한다면서도 “노동자 대표가 경제적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사회화’로 재규정하는 부분에서는 차라리 저자가 ‘사회화’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주의의 핵심 이념을 위해 새로운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회화’를 생산수단의 소유관계 등 사회경제적 관계를 뛰어넘어 ‘자아실현’으로까지 확장한 것도 사회주의의 ‘목표’ 내지 ‘목적’과 ‘사회화’라는 ‘수단’을 혼동한 결과일 것이다.

여러 장에 걸쳐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개념도 등장하는데,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거의 사용되지 않듯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와 경제처럼 영역이 다른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주권’과 같은 개념으로 ‘인민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고 결정의 주체’라는 뜻이다. 대규모 주권자로 구성된 국가에서 엄밀한 의미의 민주주의, 특히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한 국가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다당제와 삼권분립 체제도 있고 직접정치체제도 있으며, 꼬뮌연합 자치체제도 있고 일당독재와 자치가 결합된 체제 등이 존재할 것이다. 
 

[2017년 8월 26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