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려면 어디로 가는지보다 

어디서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 차파예프와 공허 (영화 '6번칸')




나는 덜어내고 싶은 사람인데 잘 덜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불필요한 것들이 많은데 원하는 만큼 덜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편하고 못마땅하지만 결국 이런 걸 원하는 사람일지도. 바란다고 생각하는 혹은 착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나와 대조적인 캐릭터를 좋아한다. 소설 속 강민주는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산다. 하루키의 1Q84 속 아오마메도 잠시 떠올랐다.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강민주는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데다 지적이며 싱글이고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잠이 제시간에 찾아오지 않는 것조차 못 견딜 만큼 무질서를 혐오'하는 그녀가 굳이 매일같이 남의 하소연을 참아내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폭음, 만취 상태에서의 구타, 시집 식구들의 은밀한 종용, 운명이니 체념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무책임한 설득. 그리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구하러 오는이 하나 없는 으슥한 산길로 끌려가 죽을 만큼 맞으며 당했는데, 그랬는데도 강간당했다고 이혼까지 당해야 합니까? 내가 무슨 페스트 환자예요? 왜 나만 보면 모두들 슬슬 피하고 체념하라고 합니까?




법적인 조언으로 통화를 마치면 민주는 해당 사례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간략하게 의견을 남긴다. 그녀는 어떤 목적을 위해 하루하루 여성들의 불행을 채집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은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대부분 순간적인 분노로 그칠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상담을 통해 마음껏 답답함을 토로하고 작은 위로를 얻은 것으로 만족했다. 민주는 근본적으로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상징적인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여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백승하라는 배우를 납치하는 것이다. 우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남기는 민주의 일을 돕기 위해 조용히 맡은 일들을 처리해나간다. 




여자들은 당신을 통해 환상을 보게 되고, 현실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되지요. 그게 당신 죄입니다. 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정말 참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리고 이런 질문은 자신의 힘으로 해답을 얻어야 자신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 스스로 해답을 얻을 기회를 빼앗을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234





나는 어떤 일이든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그것으로 파국을 맞을망정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성격은 의외로 드물다. 모두 다음에 닥칠 기회를 행여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망설인다. 매사에 흐리터분하고, 간단한 일조차 결단을 못 내리고, 늘 주저주저하며 뒤를 돌아보는 소심한 기회주의자들이 나는 싫다. 그 우유부단함을 보고 있자면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50




그녀는 백승하를 납치하고 경찰에게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긴다. 심리학을 전공한데다 뛰어난 머리로 몇 수 앞을 내다볼 줄 알기에 언론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강민주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결말일까? 금지되었으나 그녀가 넘으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지 윈스턴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즐기던 것처럼 그 여정을 충분히 만끽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는 소설의 결말보다도 과정이 흥미로웠다. 양귀자의 글을 읽으며 정언명령, 아포리즘적 성격이 짙다고 느꼈다. 이런 큰언니가 내게 있었더라면 조금은 더 원하는 삶에 다가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언니라도 강민주는 동생에게 살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흐트러지고 안이한 감정에 빠져들 때 새벽의 찬 공기 같은 생기를 불어넣어 줬을 것 같다. 털고 일어나 날아야 하는 건 내 몫이지만 내가 날아야 하는 이유를 잊지 않도록 들려줬을 것 같다.









코너 앞에선 여성들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금지된 선을 넘을 것인지 그냥 그대로 머무를 것인지. 양귀자는 소설로 김지은은 현실에서 코너를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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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15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글이 너무 좋네요 미미 님. 저 이십년도 더 전에 그러니까 대학 시절에 이 책 읽었는데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읽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일 것 같아요.

미미 2024-01-15 20:5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은 이 소설을 이십년도 전에 읽어보셨군요!! 통쾌하기도 하고 혼나는 기분도 들었어요. 대체로 많이 웃었는데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도 다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김서형 배우를 주인공으로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4-01-15 21:24   좋아요 1 | URL
아놔 20년 전 대핫생 이런 말 하지 마! ㅋㅋㅋㅋㅋㅋㅋㅋ

미미 2024-01-15 21: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아 그러고 보니 세월 참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1-15 21:50   좋아요 1 | URL
맞네. 내가 그 말만 안했어도 남들이 다 이십대라 짐작할텐데.. 쩝…

새파랑 2024-01-15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너무너무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내용이었군요~!! 소설을 보는 이유중 하나가 현실에 만나기 힘든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인거 같아요~!!

미미 2024-01-15 20:5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따라서<모순>을 읽어보려다가 대출 초과라 이 책을 빌려 읽었어요! 양귀자 작가님 글을 너무 선명하고 재미나게 잘 쓰시더라고요. 맞아요! 만나기 힘든 캐릭터를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도 듣고요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1-15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서재에 다시 등장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미미님 글을 읽으며 완전 잊었던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려 봅니다.
제목이 넘 멋있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나 결코 실천하지 못하는 저 입니다.

미미 2024-01-15 23:00   좋아요 1 | URL
그러셨나요? >.< 제목이 강렬해서 궁금했었어요. 오랫동안 읽고 싶었던 소설인데 이제야 만났네요. 페페님도 읽어보셨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 읽는 동안 대리만족, 통쾌함이 컸던 것 같습니다.

물감 2024-01-17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슴미다. 이건 본문과 상관없는 얘긴데요,
제 서재의 하얀 배경과 미미 님의 검은 배경이 확 대조됨을 느껴서요.
어쩌면 미미 님도 저랑 같은 상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아오마메를 얘기하셔서 더 잘 알것같은...

미미 2024-01-17 10:00   좋아요 1 | URL
그럴지도요. 하얀 배경으로 바꾸려다가 이걸로 골랐어요. 요즘 블랙이 마음에 끌리고 편안하네요. 서재에서 제 이미지와는 달리 저는 아오마메처럼 살고 싶어요. 물감님, 본문과 상관없는 얘기 좋은데요? ^^

자목련 2024-01-1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귀자 소설, 최진실이 주연한 영화도 생각나네요.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미미 2024-01-17 10:41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고 찾아봤었는데 최진실은 너무 순둥이 같은 이미지라고 느꼈어요.ㅎㅎ 영화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김서형 배우가 강민주 역을 잘 소화할것 같아요.

Yeagene 2024-01-18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엄청 재밌게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습니다.미미님 독후감은 저랑 비교도 안되게 고급지네요 ㅎㅎ

미미 2024-01-18 14:01   좋아요 1 | URL
발췌문들 때문에 착시현상일거예요ㅎㅎ
예진님도 재밌게 읽으셨군요. 대출해서 읽다가 반해버려서 다른 책이랑 구매했어요.
예진님, 요즘 왜 이리 뜸하신 거예요? 다시 서재에서 함께 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5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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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을 드디어 봤다. 틈날때 읽으려고 크리스테바의 책을 가져왔는데 영화를 본 후 라 느낌이 새롭다. 모든 것은 결국 해석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해석의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아도르노 이후 책들은 그런점을 우려해서 어렵게 쓰여지고 있는건가...


&고인이된 유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집에 오면서 검색해보니 관람객 평도 좋아서 공유합니다. 한번 더 보고싶은 영화, 이런저런 이유로 겸손해지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부성적인 법의 붕괴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성적이고 도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아브젝시옹을 묘사하였다. 그렇다면《악령》의 세계는, 사나운 물신이 지배하는 인공적이며 죽어버려서 부인된 아버지의 세계가 아니라, 다분히 환상적이고 현기증나는 힘을 지닌 어머니들의 세계가 아닐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브젝트를 상징화하는 동안, 아브젝트를 말하는 희열을 광범하게 펼쳐 보이면서 이 가차없는 어머니의 무게를 보여 준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게서 아브젝시옹은 보다 즉각적인 에로틱함,
성적인 욕망의 원동력으로 발견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조이스에게서 이 여성의 육체, 물질화된 육체를 찾을 것이다. 이 실체는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상실에 대한 환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욕망의 대상을 명명할 수 없는 까닭에 내가 그 속에 삼켜지고 취해 버리는 상징화할 수 없는 어떤 것 말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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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4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봉준호의 괴물을...ㅋ
말 시리즈를 갖고 계시는군요.
책이 가지런하네요. 몇년 전 폭격 맞은 것 같은 책상이 떠오르면서
그때랑 넘 대조적이라고 느낌.ㅎㅎ 암튼 보기 좋습니다.^^

미미 2024-01-14 20:44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이 영화 소개에 송강호 배우의 추천영상이 바로 뜨더군요ㅋㅋㅋ스텔라님 이곳은 서점을 겸한 영화관이에요. 저의 책장은 뒤죽박죽 난리입니다ㅋㅋㅋ말 시리즈 다 모으고싶긴 해요^^

stella.K 2024-01-14 20:46   좋아요 1 | URL
큭. 이런...그런 줄도 모르고.>.<;; ㅎㅎ

미미 2024-01-14 20:48   좋아요 1 | URL
그럴수도 있죠 뭐ㅋㅋㅋ저도 저기 다 제꺼면 좋겠어요>.<

다락방 2024-01-14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극장은 이제 미미 님의 아지트가 되었네요!! >.<

미미 2024-01-15 08:02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ㅋㅋㅋ갈때마다 다른 영화,다른 책, 다른자리에 앉아보고 있습니다. 3번째 방문이에요. 언젠가 다락방님과!! >.<
 

1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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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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