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보는 악과 악마
이경덕 / 동연출판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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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일부러 찾아 읽은 게 아니라 내가 관심가는 분야를 읽었을 뿐인데도 계속 만나게 되는 저자, 역자분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이신 이경덕씨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강상중 선생님 책들의 역자로만 알았다. 그런데 신화, 종교, 일본 역사 쪽으로 읽어나갈수록 자꾸 이분을 만나게 되지 뭔가. 아무래도 내가 독자로서 스토킹에 나서야 할 저자분이신 것 같다.

 

책은 전반부에서는 '악이란 무엇인가'하는 철학적인 문제를 놓고 신화, 철학, 고대 종교에서의 악의 개념을 다룬다. 후반부에서는 일반인들이 갖는 악의 이미지를 생활속에서 살핀다. 민담이나 풍습, 문학작품을 통해서. 내겐 후반부의 여러 사례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책이 두껍지는 않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요약 소개가 불가능한 책이다. 그래도 인상깊은 부분을 잠깐 적어 보겠다. 신화 쪽에서 악의 탄생을 서술한 부분이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즉 고대의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면서 자연과 신을 객관적으로 상정하고 사고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신화가 탄생했다는 말이다. 천둥벼락이 치면 천둥의 신을 만들고 하는 식으로. 이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가 악신으로 인격화된다. 그런데 이 인간과 자연의 분리과정 때 일어나는 긴장이 신화에서는 선과 악을 각각 대표하는 쌍둥이의 싸움으로 표현된다는 것! 수많은 종교 경전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쌍둥이의 갈등이 바로 그런 거였다니, 정말 흥미롭다. 또 고대사에서 전쟁에 패배한 종족의 신이 악마의 지위로 전락하여 승리한 종족의 신화나 민담 체계에 편입되어 악마가 탄생하기도 했다라는 설명도 재미있었다. 악은 선에 대응해서 그려지므로 다신교에서의 악마들보다 유일신교에서의 악마들이 더 강력하다는 것도 역시 재미있다. 물론 내게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몽마(인쿠부스, 스쿠부스), 늑대인간, 마녀, 흡혈귀 같은 서양 중세 민담 속의 소악마들 이야기였다.

 

이 책 자체는 좀 산만하다. 논문 같은 느낌이다. 중언부언하는 내용도 조금 있다. 자신이 아는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담아낼지몰라 저자 스스로 글쓰면서 곤란해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은 저자분이 30대 후반에 쓰신 책이다. (한 저자분을 스토킹해 읽으면서 이 분이 어느 연령대에 이 책을 쓰셨는지, 그 앞뒤로 비슷한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쓰신 다른 책의 수준은 어떤지 비교하면서 읽는 버릇이 있음) 이 저자분은 40세 이후로 대중적 문장 전달력을 갖게 되신 듯 하다. 저자분이 40대 초반에 쓰신 <우리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와 비교하면 이 책은 (죄송하지만) 이 책은 난삽해 보일 정도로 전달력이 아쉬운 편이다.

 

그렇지만 동서양 신화와 종교, 문학을 넘나들면서, 기성 종교와 민중 신앙까지 넘나들면서 (가톨릭과 오컬티즘 쪽  같은) 버라이어티한 예를 들어 어려운 주제를 패기있게 다뤄 주신 점은 정말 감탄스럽다. 나는 이 책에서 여러 방면으로 두고두고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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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에서 본 중세 - 책, 안경, 단추, 그 밖의 중세 발명품들, 역사도서관 003 역사도서관 3
키아라 푸르고니 지음, 곽차섭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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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재미있다, 재미있다! 어떻게 역사서인데, 강단 사학자인데 이런 서술이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즐거워하고 샘나서 아토피 돋은 피부가 마구 가려웠다. 아, 이렇게 위의 두 문장을 쓰고 나니 더 쓸 말이 없다. 약간 또라이 같지만, 책에다 대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당신,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죠? 왜? 왜? 왜? 남자라면 넥타이 잡고 목이라도 조르고 싶다.

 

(계속 이렇게 쓰다가는 친구분들이 걱정하실 것 같군. 워워, 진정하고 계속)

 

키아라 프루고니의 이 책은 서양 중세의 발명품들의 역사를 가볍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안경의 발명자를 추적하는가 하면 중세 성화 속에 등장하는 안경을 놓고 안경의 변천사를 들려준다. 곧이어 대학, 마취약, 대학 교과서와 관련한 책 제작술,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이야기는 거침없이 뻗어간다. 마취약과 아라비아 숫자와 영(0)의 사용과 전파 과정,  카드, 타로 카드, 체스 등의 중세에 발명된 오락과 잡기들의 역사, 카니발과 사순절의 관계, 연옥의 탄생과 도시의 시간, 시계의 발명,  도레미파솔라시 음계의 이름이 붙게된 경위, 단추와 탈착식 소매의 발명, 사치품인 팬티와 바지, 스타킹 착용의 얼마 안 되는 역사까지 중세 발명품들의 소소한 역사가 당시 민중들의 삶과 함께 펼쳐진다. 저자는 마치 구연 동화 들려주시는 할머니처럼 구수하게 대상을 넘나들며 서술하시는 능력자이시다. 포크의 사용사를 말하다가 포크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한 마카로니의 역사로 넘어가고, 다시 마카로니의 재료인 밀가루 이야기로 넘어갔다가는 밀가루를 만드는 방앗간과 중세의 수력 풍력 사용을 논한다. 재미있어서 미칠 지경이다! 그리고 읽다보면 어느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중세를 암흑기로만 보고 중세의 가치를 간과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내가 그동안 조금이나마 읽었던 유럽사의 저자들은 대부분 영, 프, 독 국적이었는데 이렇게 이따금 이탈리아 사학자의 책을 읽어보면 서술방법이나 접근방법에서 같은 미시사, 생활사라 해도 매우 개성적인 스타일을 지닌다는 느낌이 든다. 이 부분은 내 공부가 부족해서 아직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자분이 이탈리아 중심의 중세 역사를 말하고 있는 점은 좀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하겠다. 내가 보기에는 나침반이나 국수, 화약의 발명 등에서 동양의 영향을 언급하지 않는 점은 좀 아쉽다.

도서출판 길의 '역사 도서관'시리즈에 속한 책들은 정말 매혹적이다.현재까지 나온 9권 중 이 책 <코 앞에서 본 중세>와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 <중국의 서진> 이렇게 3권을 읽었는데 읽는 동안 눈 깜빡이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읽고 또 읽고 싶었다. 마지막 장을 읽고 덮고나니 저자분과 역자분 모두에게 샘이 나서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멋진 독서 경험이었다. 아, 이런 헛소리 쓸 시간에 계속해서 더 읽어야지! (혹 오해 있을까봐 밝힘. 3권 모두 나 스스로 구입해 읽은 책임. 심지어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는 품절되었기에 중고서점에서 정가보다 더 비싸게 주고 어렵게 구해 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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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 한길 히스토리아 3
조르주 뒤비 지음, 정숙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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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날 학파의 제3세대, 조르주 뒤비의 책이다. 12-13세기에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활약한 기사인 윌리엄 마셜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데, 저자의 명성에 지레 겁먹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대중적 서술 수준이어서 읽기 편했다.

 

1145년 경, 궁정 기마 관리 장교였던 존 마셜과 솔즈베리 백작의 여동생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은 1159년경 노르망디의 친척 기욤 드 탕카르빌에게 맡겨진다. 기사 수업을 마친 윌리엄은 1167년 기사로 서임된다. 장자가 아닌 그는 상속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또 원래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었다. 그는 마상시합을 통해 부를 획득하며 불패의 기사로 유명해진다. 물론 실제 전투에도 참전한다. 이 과정을 거쳐 그는 신분상승을 이룬다. 헨리, 헨리2세, 사자왕 리차드, 존 왕, 헨리 3세에 이르기까지 플랜태저넷(앙주, 앤저빈) 왕조의 다섯 왕을 섬기고 나중에는 어린 헨리 3세의 섭정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물론 이 승승장구 과정에는 부유한 상속녀인 아내와의 결혼이 결정적이었다. 여튼 그는 성공한 기사로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생애를 음유시인의 노래를 통해 후대에 전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윌리엄의 생애를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찬가를 분석하고 기사 수업과 결혼 과정, 세 나라에 걸친 서약 과정(그의 영지가 분산된 관계로, 윌리엄은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왕과 삼중의 서약을 한 봉신이었다)의 서술을 통해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나 내게 재미있는 것은 윌리엄의 생애를 통해본 당시 중세 기사도의 실상과 결혼 제도이다. 이 부분은 히스 레저가 출연한 영화 <기사 윌리엄>을 통해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중세의 돌아다니는 편력기사들은 마상시합을 통해 금전적 이득을, 상속녀 귀부인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과 영지획득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외 기사도란 미명 아래 행해지는 약탈과 증여 경제 부분도 재미있었다. 학문적으로는 잘 몰라도, 그냥 아날학파의 책들은 읽기에 다 재미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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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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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두 개 정도 더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어 아쉬운 책.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친구분들께 절판되기 전에 얼른 주문해서 소장하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이 시리즈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총서는 유럽 10개국 유명 역사가들의 최근 연구 경향을 반영하여 나 같은 독학자에게 가이드 용으로 딱인 책인데, 아쉽게도 금방 절판되기 때문이다. (내가 <유럽의 음식 문화>를 구해 읽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가 구하자마자 재판 찍어 다시 예스에 들어왔다! )

 

게다가 이 책은 친절한 통사식 설명이 아니라 독자들이 기본 역사 사항은 다 안다는 전제하에 저자분이 종횡무진 역사 논평을 하는 책이므로 일종의 "키재기 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오늘 이 책의 한 챕터를 읽어보고 이해가 안 되었으면 조용히 덮어둔다. =>그러다 몇 달 후, 각국사와 다른 역사서를 읽어 본 후에 다시 이 책의 같은 부분을 읽어보면 갑자기 책에서 다룬 주제의 배경 전후 사항이 술술 이해되고 저자의 논평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가 된다. => 아, 그동안 내가 성장했구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또 읽다 보면 마치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벽에 빗금 그어 1인용으로 만들어주신 키재기자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런 책은 꼭 소장하고 1년에 한 번씩 읽어 주어야 한다. (내 경우엔 2013년 현재 중세 독일 유럽사 부분은 잘 이해되지만 스페인사 부분은 아직도 헤매고 있다. )

 

이 책의 저자인 조셉 폰타나는 스페인의 마르크스 주의 역사학자의 대표격이다. 저자분은 유럽의 형성과정을 9개의 거울을 통해 보여준다. 유럽의 지배 엘리트들은 자신들을 규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남과 구별하기 위해 비춰 보는 거울로서 '야만''기독교''봉건제''악마''촌뜨기''궁정''미개''진보''대중'의 거울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럽의 지배 엘리트들은 기독교도, 도시민, 지식인,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각각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반사하여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위협할만한 세력들을 희생시키는 문화와 제도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심의 사관은 유럽을 지배하며 놀랍게도 비유럽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정설'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중세의 이단에 대한 공격은 신앙이나 교리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기성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식.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란 거울에다 자신을 비춰봄으로써 자신을 정의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남들과 구별한다. 이것은 같은 언어를 말하고 생활 방식과 습관을 공유하는 사회에서는 간단한 문제이지만 유럽인들에게는, 특히 종교적 일체감이 깨지고 여러 속어들의 문학적 사용이 증가 추세에 있던 16세기 이후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1714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은 유럽에서 '기독교 공화국'이란 용어로 작성된 최후의 문서였다. 이 복수의 (유럽) 민족들은 이제부터는 자체의 다양함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는 표식을 확인하고, 다시 이 자신을 다른 나머지와 구별시켜주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좀더 복잡한 일련의 거울들 속에서 자신을 비춰보아야 했다. 이제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은 더이상 종교와는 상관없으며 대신 도덕적, 지적 우월성에 대한 확신에 기반을 둔 자각으로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다시 비유럽인은 열등한 본성을 갖고 있다는 전제 위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기 위해 바라다본 거울은 이중의 면을 갖고 있었다. 인종적 차이가 보이는 한쪽 면에서는 '미개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또다른 면에서는 유럽 중심적 역사관에 기반해 '원시인'의 얼굴이 보인다. 전자로부터는 인종 대학살과 노예 무역이, 후자로부터는 제국주의가 각각 나타났다.

- 본문 211쪽, '7. 미개의 거울'에서 인용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는 지난 5세기간의 유럽사를 흑백논리로만 보지는 않는다. 서구 제국주의는 다 악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서구의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들을 다 선의의 희생자로 그리지도 않는다. 지금 보편적으로 말하는 유럽의 진보라는 것 역시 같은 유럽인들 대부분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피식민지배 국가의 지배계층의 문제점 역시 밝혀 준다. 무엇보다 저자는 한 역사적 현상을 단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 서술해 주신다.

 

이런 수정주의적 관점은 사실 별로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 교양인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유럽사 혹은 유럽 위주의 세계사에 대한 이해 수준에 비춰 보았을 때, 이런 관점은 현재까지도 매우 신선하며, 비단 역사해석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해 나가고 타인을 접할 때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더군다나 일본을 거쳐 온 유럽과 미국의 역사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옛날옛적 역사 교과서와 대중 역사서만 읽어온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제시했다가 종종 삐딱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본 나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 책을 널리 알리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은 유럽인의 거울에 대한 책이자, 편향된 역사관을 갖고 있는 우리들의 거울이기도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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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우리가 알지 못한 유럽의 속살
원종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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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은 세계사 통사류의 책은 아니다. 목차를 보면 로마제국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시기의 일본과 히틀러 독일 이야기까지 흘러가지만, 그 사이 유럽사의 흐름을 따라 모든 사실을 나열하지 않는다. 저자분은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5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서술하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정신'이다. 즉, 어떻게 지금의 세계가 유럽 중심의 세계로 형성되었나, 하는 점을 추적하다보니 만나게된 유럽 문명의 원동력으로서의 '근대성'이다. 저자는 로마 문명과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각 유럽국가의 중세에서 근대 이행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주목한다. 프랑스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등의 명암을 논한다. 그리고 중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근대는 달성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이념을 포함한 모든 근대적 가치가 아직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강제개항과 식민침략으로 서구의 근대 개념을 받아들인 비서구권만 아니라 서구권 내에서도 말이다.

 

저자는 서구에서 태동한 근대 정신의 달성을 논하면서 다행히도, 서구 찬양 일변으로 가지 않는다. 실제로 영국과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서구인들의 편견이나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갖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처음 책을 보고 두께에 놀라 뒤편의 참고 문헌 목록 먼저 살펴 보았는데, 놀랍게도 20편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자분이 겨우 20권도 안 되는 역사책만 읽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철저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갖고 집필했다는 의미.)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역사 사실 자체보다 자신의 논평 위주로 간다.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얻기를 위하는 독자보다, 이미 큰 흐름은 알고 있으면서 그 해석에 관심이 있는 독자, 지금 이 세계의 문제의 원인을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교과서나 서구인들이 쓴 역사책을 통해 그들 역사의 의의만을 배우고 읽어온 순진한 독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책이다. 서구인들이 내건 멋진 슬로건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인류 보편의 가치(자유 평등 박애)가 서구의 일부 지배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저자는 적나라하게 밝혀 주기 때문이다.

 

한 문명의 수준은 부,과학기술, 법 제도 같은 표면적인 것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문명이 증오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부의 재분배라든가 사회적 기회의 확보와 함께, 증오를 현명하게 통제하는 문명에서는 일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구성원 간의 미움이 만연된 사회는 제 아무리 국내 총생산량이 높다 한들 타의 모범이 될 수 없다.

중세는 과연 끝났는가. 십자군과 마녀사냥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나의 증오가 이데올로기, 신념으로 포장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발휘되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던져줄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 슬로건이나 명분이 아닌 삶 자체가 말이다.

- 본문140-141쪽에서 인용

 

르네상스와 근대의 노력은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성과 과학으로 얻어낸 능력을 통해 인간 자신이 신을 대체하는 존재로 진화해가는, 또 신이 차지하고있던 존엄성을 스스로 획득하려는 시도였다.

인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기적처럼 근대를 이끌어냈고, 비록 두 차례의 세게대전 등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근대는 완결되었거나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중세의 잔재가 매일의 삶에 넘쳐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의 자각은 인간 자신을 독립체로서 객관화하면서 모든 다른 생명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지성적인 연마와 성찰이 요구되고 이런 노력이 현실의 삶에서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꿈꾸는 근대는 결코 달성될수 없다.

- 본문 216쪽에서 인용

 

전문 역사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많은 역사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분도 아닌 이 저자,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 시대 세계와 한국 사회의 문제의 근원을 파헤쳐 보려는 이 저자. 흥미롭다. 이런 저자분의 사고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뒤편에 부록처럼 실려 있는 프리메이슨 부분을 읽어보니 조금 느낌이 온다. 이 분은 이른바 주류라고 하는 측의 해석과 시선보다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믿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시스템 & 개인의 각성과 의지란 양 측에서 다 접근하고 있는 점(위의 인용문단 밑줄 쳐 두었음)도 개인적으로 호감이 간다. 난 체제의 문제만 비판하며 개인적 도덕적으로는 덜된 반쪽짜리 지식인도 싫고, 본인의 노력과 긍정적 마음가짐, 삶의 자세만 강조하는 힐링 멘토들도 싫기 때문이다.

 

여튼,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근대 정신'. 그러다보니 '중세'가 너무 편협하게 다뤄진 약점도 있다. 서구의 인문주의자들이 전시대인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중세'라는 관념을,  이렇게 흑백논리식으로 사용하는 거, 그 자체도 저자분이 말하는 '중세적'인 거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을 길게 써야하나 말아야 하는 문제로 살짝 고민하다 리뷰가 늦어졌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계속 나오는 점, 좀 지루하다. 덜어내면 2/3 분량이면 충분할 듯 하다. 물론 이러한 친절한 설명 덕분에 책이 '삐딱한' 느낌을 주지 않고 '충분히 맞는' 말씀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성격을 갖게 되기는 한 것 같다.

 

책날개에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의 아시아편, 아메리카편이 '근간'이라고 나와 있다. 기대된다. 그러나 더 기대되는 것은 이 저자분이 이 비판정신을 갖고 앞으로 어떤 현실 발언을, 어떤 활동을 할까, 하는 점이다. 그게 대중 역사서를 읽고 그 저자에게 걸 수 있는 독자의 진정한 기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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