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
다니엘라 마이어.클라우스 마이어 지음, 김희상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 참 재미있다. 리뷰 쓸 생각만 해도 즐거워진다(그 이유는 맨 밑에).

 

깊이 공부하려면, 학자들의 클래식 저서들을 읽는 것이 낫다. 잘 안다.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관점으로 서술된 대중 역사서를 읽는 것은 정말 포기할 수 없는 오락거리이다. 게다가 "털"이라잖은가! 도대체 이런 내용을 가지고도 역사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들을 만나면 사는 게 다 즐거워지는데 아니 읽고 어찌 견디겠는가!

 

이 책에서는 수염, 머리카락, 눈썹, 속눈썹, 다리털, 겨털 등 다양한 체모들과 대머리의 역사와 관련한 가벼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체모를 밀건 기르건 다듬건, 가발을 쓰든 말든, 그건 전적으로 그 시대 그 문화권의 권력이나 취향이나 종교, 성차별에 달린 문제라는 것.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메로빙거 왕조시절 긴 머리카락은 왕권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머리와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는 것은 좌파의 상징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 게바라. 늘 면도해야하고 지나치게 미끈하게 여성의 체모를 제거해야만 하는 미국의 경우, 늘 젊고 섹시하게 보여야하는 그들 문화와도 관련있다는 것. 여성의 긴 머리는 유혹의 상징이기에 머리를 가려야 하는 문화권의 이야기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늑대인간과 빨간머리 이야기도 있다.

 

<라푼쩰>의 긴 머리카락에 대해 참신한 해석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읽은 책인데, 여성의 긴 머리와 남성의 성욕 도발의 관련성 부분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의 정보가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뜻밖에 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1세 부활 전설의 구체적 내용을 건져서 기뻤다. 다른 책에서는 그냥 아더왕과 같이 민족이 위기에 처하면 다시 나타난다고 슬쩍 언급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읽은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독특한 문화사책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 이 짧은 리뷰를 쓰는 내내 즐거웠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고 책에 관심을 가질 친구분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 이제 진실을 밝혀야지. "이 책 절판이랍니다! 약오르시죠? 핫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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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 루터와 칼뱅, 프로테스탄트의 탄생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2
올리비에 크리스텡 지음, 채계병 옮김 / 시공사 / 199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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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사의 큰 흐름을 빨리 잡기에 적합한 책이다. 15세기말 에라스무스 등 인문주의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루터와 칼뱅을 주로 다룬다가 바르톨로뮤 대학살과 낭트 칙령, 네덜란드 독립으로 끝맺는다. 세계사 통사나 각국사에 조금씩 흩어져 있는 내용을 한 권에 몰아서 읽는 듯하지만 기존 통사류에서 당시 로만 카톨릭의 타락 위주로 간단히 종교개혁의 원인을 말하고 지나가는 것에 비해 독일, 프랑스 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점도 언급해 주고 있는 점이 좋았다. 신학적 논점보다 큰 역사적 과정 위주로 서술되어 있고 독일 위주가 아닌 점도 마음에 든다.

 

또 괜찮은 점은 이 책의 도판이다. 시공사의 이 시리즈는 다 도판이 호화찬란한 편이지만, 어느 정도 주제와 관련없는 그림들이 난삽하게 배치된 책도 있는데 이 책은 구교, 신교간의 입장과 각자 상대에 대한 공격, 선동(찌라시같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판화들이 많아서 흥미로왔다. 이런 시각으로도 종교 개혁사를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저자의 약력을 보니,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와 시각 예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내가 그때그때 리뷰를 써 놓지 않은 책들이 많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짧게, 20분만에 '쓰고 빠지는' 수법으로 리뷰 써 버릇하다보니 묵직한 클래식 역사서 리뷰를 안 써 놓아서 막상 내가 참고하려니 생각이 나지 않아서 고생했다. 하지만 덕분에 이 기회에 전에 한 번 읽고 던져 놓았던 책들을 다시 읽게 되었으니 뭐 인생만사 새옹지마인셈. 이 책도 전에 읽고 좀 무시했던 책인데, 이번에 다시 보니 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토마스 뮌처를 언급한 거라든가, '마지못해 루터는 종교개혁자가 된 셈이다'라고 루터에 대해 평한 부분 같은 거. 분명히 인쇄된 활자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전에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나는 그 부분을 못 봤다. 아니,  안 보였다. 얇은 입문서를 썼다고 저자의 지식이 얇은 것은 아닌데, 이전의 나는 내가 무식해서 몰랐기에 안 보고 지나갔으면서 이 책과 저자를 얕잡아 본 것이었다. 새삼, 나란 인간의 얇팍함을 깨닫게 된다.   

 

1524-1525년 이러한 문제들이 극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는 에라스무스가 루터에 대항해 자유의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인문주의와의 결별이 이루어진 시기로, 루터는 주기적으로 독일을 뒤흔들고 있던 토지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기력함을 드러냈다. 강제 부역문제로 1524년 6월 슈바르트발트에서 시작된 농민반란은 슈바벤, 남부 독일, 알자스, 튀링겐, 그리고 작센 지방으로 확대되었고, 농민들은 사회적인 요구와 종교적인 요구가 담긴 12개 조항을 제시했다. (중략) 하지만 튀링겐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과격한 토마스 뮌처의 영향을 받고 이었으며, 도를 지나친 폭력에 대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결국 루터는 탄압자 편에 가담해 제후와 귀족들에게 '베고 참살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농민반란이 마침내 1525년에 이르러 유혈진압되도록 했다. 뮌처는 참수형에 처해졌다.  

- 본문 57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개혁'이라는 용어 때문인지 그가 모든 방면에서 개혁가이고 진보적인 자세를 보인 것으로 사람들은 착각한다. 아니, 기존 역사서에서 그렇게만 언급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하지만 농민봉기에 대한 루터의 대응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부분, 좋은 책을 통해 더 공부해보고 싶다. 당시 독일 농민 항쟁과 관련해서 말이다. 그런데 검색해보면 종교 전문 출판사의 책들만 보여서 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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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왕 아틸라 역사 명저 시리즈 10
패트릭 하워스 지음, 김훈 옮김 / 가람기획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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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이던가, <박물관은 살아 있다>란 영화를 조카들 데리고 가서 보았다.  전시되어 있던 밀랍 인형들이 살아 움직이며 주인공과 더불어 소동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유목민의 복장을 한 어떤 사람이 눈에 띄었다. 설정 상, 아틸라인 것이 확실했다. 게다가 야간 경비직에 있는 주인공이 무료한 밤에 읽는 책이 바로 이 책 <훈족의 왕 아틸라>였기도 했으니.

 

이 책의 주인공인 아틸라는 아마 징기스칸과 더불어 유럽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동양계 군주가 아닐까싶다. 그러나 아틸라는, 서양 신문에 의해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고국에서 신적 추앙을 받으며 제대로 업적이 자국 역사에 기록된 징기스칸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이 편견으로 가득찬 평가를 받고 타국 역사책에 실려 있는 인물이다. 저자인 패트릭 하워스 역시 그 점을 의식해서인지, 첫 장부터 "크게 중상당해온 민족"이라는 소제목 아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음에 든다.

 

지난 1500년 동안 서구 사람들은 편견에 가득 차 있고 아주 적대적인 자료들을 통해 훈 족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로 된 그 같은 자료를 남긴 최초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 그들은 야만인 훈 족을 경멸어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를 이은 기독교 계통의 연대기 저자들은 훈 족을 이교도 무리로, 아틸라를 하느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징벌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보낸 도구로 보았다. 최근 들어서는 아틸라와 훈 족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 주로 고고학적인 유물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 본문 10쪽에서

 

저자는 훈족이 실제의 모습 이상으로 유럽사에서 유럽인의 시각에 의해 중상당해 왔음을 밝히며 훈족의 역사를 서술한다. 근래에 고고학적 발굴 작업의 성과로 이 시각이 많이 고쳐지고 있다고 한다. 훈족이 서진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게르만족이 이동하면서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중세가 끝난다, 라는 기본적 세계사의 서술만 보면 훈족이란 찬란한 고대 로마제국의 문명을 무너뜨린 야만족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발굴된 유골을 보면 실제 순수 몽골로이드의 유전자를 가진 훈족은 1/4밖에 되지 않으며 크게 묶어 로마인들이 훈족이라 칭했던 그들 무리의 민족 구성은 보다 복잡했다. 유럽인과 같은 외모를 가진 화이트 훈족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훈족은 지배지역의 농경민족들을 그대로 땅을 경작하게 하기도 했으며 그들 지배하의 기독교 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물론 그들이 피지배인들을 지배계급 무사로서 칼로 다스린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 중세의 다른 지배계급과 지배민족들에 비해 특별히 더 가혹한 지배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어서 저자는 아틸라의 탄생과 가족사, 그의 8년이란 짧은 치세 기간동안에 이룩한 정복 사업들에 대해 서술한다. 그의 콘스탄티노플 위협 부분에서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 짧게 서술되기도 한다. 호사가들이 좋아하는, 서로마제국의 공주 호노리아에게 청혼받은 일화가 그의 서로마제국 침략을 앞당겼던 이야기가, 452년 카탈루냐 전투 이후 롬바르디아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켜 (결과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탄생에 일조한 역사가 이어진다. 또 서구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교황과의 만남도 아틸라는 별 감흥없어 했다는 일화도 등장한다. 서구인들만 아틸라를 신의 채찍이니 뭐니 의미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니벨룽겐의 노래"를 비롯, 서구인들의 드라마나 오페라에 수없이 아틸라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그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게르만계 여성 일디코를 새 신부로 맞이한 첫날밤에 그는 급사하고, 이후 그의 아들들 대에 제국은 해체된다.

 

이후 아틸라는 긴 세월 동안 문학과 예술 작품들을 통해 그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게 된다. 아마, 그 정도로 그란 인간 자체와 훈족의 침략이 인상적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실제로 로마 측 지식인의 기록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구비 설화를 바탕으로 기록된 '에다'나 '니벨룽겐의 노래'를 보면 그의 모습은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등지의 드라마에서 그의 모습은 대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근대에 와서 아틸라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아틸라>에 등장, 당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위한 애국심 고취용으로 이용된다. 또한 기독교도의 승리를 상징하는 의도로 프란츠 리스트의 <훈 족의 전쟁>에도 이용된다. 게다가 보불전쟁시기나 1차대전 시기의 프랑스인들은 독일의 위협을 훈족의 침략에 빗대 선전 선동하는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무시무시한 정복자이기는 했지만 당시의 전쟁 관행에 비추어볼 때 전시의 약탈과 학살은 아틸라 만의 만행은 아니었다. 훈 족의 침략 역시 당시 민족 대이동 시기의 유럽사에 비추어 아주 특이한 그들만의 침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유럽사와 유럽인들의 심리에 아틸라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남게 된다. 천 오백여 년이나 전의 역사적 경험인데도 말이다. 유럽인들에게는 유전자에 그 때의 공포가 새겨져서 대대 손손 전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끝없이 그 때의 공포를 상기시켜 야만과 문명, 동양과 서양, 기독권과 비기독권을 대립시켜서 유럽인들 스스로 챙길 이익들이 많았던 것일까? 게다가 웃기는 것은, 동양의 작은 나라 몽골로이드 인종인 우리는, 왜 고대 로마제국의 입장에 서서 게르만족을, 훈족을 야만족이라고 덩달아 평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에 와 닿으면 엄청나게 혼자 달리게 된다. 나는 도대체 왜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냥 역사책을 읽어대는 것일까? 이 저자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대중 역사서의 시각과 서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등,,,  (게다가 나에게 여건이 허락된다면) 내가 역사 에세이 책을 쓴다면 과연 서술할 때에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인가?,,, 에까지 나의 생각이 나의 지능과 재능을 앞질러 달려가 버리는 거다. 맙, 소, 사!

 

그래도 말하고 싶다. 이 책, 참 재미있다고. 거칠게 읽고 거칠게 말한다. 고대 훈족과 게르만족, 로마 제국의 부족명칭이나 전투 장소 지명 같은 것은 읽고 나서 다 잊어도 좋다. 단 하나, 우리가 그동안 훈족을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남의 시각으로 봐 왔는지, 그 점만 기억하면 된다고. 비단 훈족의 역사만 그렇게 봐 왔으랴. 그러므로 대중 역사서를 읽으면서 얻는 소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관의 재정립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계속 말하고 싶다. 연도 암기나 사건 순서, 위인 인명 외우기에 시달려 역사서를 멀리한 당신, 역사는 순 암기 투성이고 지루하다는 거, 그거 역사를 보는 시각을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게 만들어 우리에게 강요하는 강자들의 음모론 같은 것이니 속지 말라고. 이 책을 읽으며 고대 종족의 역사가 지금 현실에 뭐가 대수냐, 하지도 말라. 머나먼 옛적 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굳어진 세계관은 현재 당신의 세계관도 지배한다. 결국, 제대로 알지 못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은 당신을 강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익 편에 서서 사고하게 만들고, 지금 당신 옆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조심, 또 조심.

 

아마도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그런 시각으로 서술된 책을 쓰고 싶다! 맙, 소, 사! 그만 써 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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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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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애틋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고, 참으로 감동 받으며 읽은 책에는 리뷰를 선뜻 못 쓰겠다. 내 맘 속에 아껴둔 존재에 대해 내 부족한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표현하는 순간 나의 진지한 감정이 남들에게 유치한 감상으로 보여져 버릴까봐 겁나기도 해서이다. 그래도 이따금은 세상에 대해 크게 외치고 싶다. 나 이 사람을 읽고 사랑하고 있노라고. 내 친구인 당신들도 이 사람의 매력을 인정하라고. 

 

나는 역사 관련 서적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자신의 앞 시대를 냉철히 고찰하며 자신의 당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간 역사 저술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예를 들자면 사마 천. 그는 궁형의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 <사기>를 썼다. 또, 프랑스 아날 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며<봉건 사회>의 저자인 마르크 블로흐. 그는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자원하여 활동하다가 독일군에게 총살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하던 도중 시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이런 저자들이 쓴 역사서를 읽으면 배경으로 나온 시대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말해주는 저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행간에서 들린다. 소름이 돋아 미칠 것만 같다.

 

나의 슈테판. 독자들은 그를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트와네트>의 전기 작가라든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대중적 역사 에세이 작가라든가, <모르는 여인의 편지>의 문학가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안타깝다. 내가 보기에 그의 진면모를 읽을 수 있는 책은 이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나 <에라스무스>, <아메리고>인데 말이다. 물론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섬세한 심리 파악 문체라든가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 등 그의 매력은 충분히 넘쳐 난다. 하지만 과거 한 시대의 폭력에 외롭게 저항하거나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주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폭력까지 고발해 버리는 그의 양심과 지성을,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분노로 거세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의 박동을 느끼기에는 위의 3종의 책이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시대는 서양의 16세기이다. 루터와 칼뱅이 활약하던 종교개혁의 시기이자 헨리8세와 프랑수아1세와 카를5세, 슐레이만 대제란 걸출한 군주들이 등장했던 유럽 격동의 시기이다. 게다가 지네 말로는 대항해시대인 서구 세력의 침략이 한창 진행되던 시대. 정말 작가들이 쓸 거리도 독자들이 읽을 거리도 많은 시대이다. 더불어 아직 미숙한 내가 보기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시기가 바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세계사와 세계관의 주요 기틀이 거의 다 짜인 시기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종교개혁만 해도 그렇다. 나는 신학적으로는 모른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근대적 정신을 지닌 개인의 탄생과 기존 권위의 부정이라는 면에서 본다. 그런데, 신교도들의 이후 역사를 보면 이상한 점이 보인다. 자신들이 카톨릭에 의해 박해받던 시절에 내세우던 주장과 달리, 자신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자신들과 다른 종교적 해석을 하거나 신앙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면에서 신의 이름을 내걸고 반대자들을 박해하는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다른 해석을 할 권리를 들고 기존 교회에 저항했기에 그들의 명칭이 프로테스탄트인 것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는 이단이란 개념조차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이단에 대한 공개 화형식이 일어났다.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구현한 칼뱅에 의해서, 역시나 신의 이름을 내걸고.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신학과 인문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종교 개혁적 입장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다. 그 곳에서 그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종교 개혁의 대표적 신학자로 인정받는다. 이후 옛 동료 파렐의 강요로 제네바의 종교 개혁에 참여하게 된 칼뱅은 설교자 자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종교 제도들을 도입하여 시의회와 갈등을 빚고 파면당하나 카톨릭 세력의 위협을 느낀 제네바 측이 다시 삼고초려하여 그를 모셔간 이후로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고자 엄격한 신정정치를 펼친다. 문제는, 칼뱅은 자신과 다른 종교적 해석이나, 신앙과 상관없는 부분에 대한 다른 의견을 못 받아들이는, 지나치게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점. 곧 엄격한 법 집행으로 제네바의 거리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오직 종교경찰의 감시의 눈초리만 번득이게 된다. 심지어 어린이에게도 사형이 집행된다.

 

1553년, 칼뱅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칼뱅의 권위에 도전했던 스페인 출신의 세르베투스를 부당하게 대하여 이단으로 단정, 화형에 처해 버린다. 이에 칼뱅은 전 유럽 지성들의 비판을 받는다. 칼뱅이 무서워 각자의 서재 안에서 문을 닫아 걸고 한 비판을. 이에 맞서 공개적으로 칼뱅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카스텔리오이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글에 반대함>에서 말한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인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라고. 그후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스파이들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 감시당한다. 치사하고 비열한 허위 고발과 중상모략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자기 의사를 표현하여 반박할 권리조차 빼앗긴다. 뛰어난 전략가인 칼뱅은 자신이 다스리는 제네바 시와 카스텔리오가 있는 바젤 시의 외교 문제로 이 문제를 이끌어가서 문인에게서 글을 쓸 권리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카스텔리오의 책이 인쇄되어 출간되기까지 이후 백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칼뱅 측의 지속적이고 야비한 공격에 카스텔리오는 온화하게 "기독교도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하자.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도 자신들의 의견을 그렇게 생각한다. "라고 기독교적인 관용 정신으로 맞선다. 점점 궁지에 몰려 가던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그의 친구의 말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들의 발톱에서 빠져 나간" 것이다. 아마,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르베투스처럼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카스텔리오의 관용정신은 17세기 로크가 <관용에 대한 서한>을 쓰기 이전에, 18세기 볼테르가 <관용론>을 집필하기 이전에, 19세기 말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으로 드레퓌스를 옹호하기 이전에 몇 세기나 앞서서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극도의 대립과 증오로 혼란스러웠던 16세기 종교개혁의 와중에 말이다. 그러나 카스텔리오의 투쟁과 원고는 잊혀졌다. 그의 책은 사상의 자유를 가장 신성한 기본법으로 요구한 유럽 최초의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칼뱅의 승리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도덕적인 노력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원한 이상을 위해 너무 일찍 나타났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한 사람들도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를 실현했다. (중략)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념비만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수백만의 존재를 망가뜨리고 그 무덤 위에 자신들의 허망한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인류의 진짜 영웅이 아니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 본문 23쪽 

 

바로 위와 같은 대목에서, 나는 본다. 칼뱅의 독재와 독선에 맞선 카스텔리오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펜을. 또한 나는 본다. 나치 독일의 폭력에 맞서는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시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펜을.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폭력의 시대에 저항하는 두 명의 사랑스런 인문주의자 남자들이 그려져서 심장이 마구 뛴다. 갈비뼈가 아플 정도이다. 뿐만이랴, 내가 무식해서 미처 모르는 그 어떤 카스텔리오가, 그 어떤 슈테판이 더 있었을지,,,,  아, 이런 감상적 문장이 나올까봐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오랫동안 못 썼던 것이다!

 

나의 슈테판이 쓴 책들을 읽다보면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 인물의 전기적 정보와 관련된 부분에 줄을 치며 읽는다. 그런데 갈수록 주요 내용과 상관없이 슈테판의 멋진 논평이 드러난 문장에 감탄하며 줄을 치게 된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 리뷰를 쓰고자 다시 책을 후루룩 넘겨 줄친 부분만 읽으면,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지만 너무도 반짝이는 문장들을 눈부시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리뷰를 마무리짓기 위해 도대체 어떤 문장을 인용해야 할 지 난감하다. 그래도, 이 책의 주제와 이 저자의 매력을 한 칼에 보여주는 문장을 고른다면, 아래와 같다.

 

일시적으로 이 이념이 말을 못하게 막으면, 그것은 모든 억압이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양심의 공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자유정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양심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는 인류와 인간성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한 싸움을 떠맡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의무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모든 칼뱅에 맞서 어떤 카스텔리오가 다시 나타나서 폭력의 모든 폭행에 맞서 사상의 독자성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 본문 288쪽에서  

 

그러나 결코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카스텔리오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자 칼뱅을 근거없이 비방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하고자 자료를 찾던 1935년에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지금 나는 카스텔리오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에 칼뱅에 대해서 공정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카스텔리오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부당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 책 본문 280쪽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칼뱅이 요구했던 것과 역사의 발전 속에서 칼뱅주의가 이룬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큰 잘못일 것이다. " 바로 이 점이 내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나의 슈테판"이라고 부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들은 나치 독일 시절에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2차대전 종전 후 재간행된 이 책은 기독교 칼뱅파 쪽으로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카스텔리오가 겪은 일과 비슷한 일이 그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이에 카스텔리오와 슈테판 츠바이크를 다 지켜본, 두 남자를 다 사랑하는 나는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쓴다. 어느 시대든, 이념이나 종교 자체보다 광신의 자세가 더 문제인 것이다, 라는 문장을.

 

*** 사족 : 혹시 이 글이 불편하실 분들을 위해 이미 칼뱅의 추종자들은 1903년에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한 제네바의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칼뱅의 오류를 인정한 바가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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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7
안드레아 아로마티코 지음 / 시공사 / 1998년 6월
평점 :
품절


연금술과 현자의 돌에 대한 보다 전문적이고 깊은 자료가 필요해서 찾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 시공사 디스커버리 시리즈밖에 없다. 그럼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연금술 관련 배경 지식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읽었던 것일까? 블로그 하기 전의 독서 다이어리를 뒤져보니 단행본이 아니라 일반적 오컬티즘과 역사서에서 여기저기 주워 읽었던 흔적들이 나온다. <마법사의 책>이나 <대중의 미망과 광기>, <신비주의>, <지식의 증류>등등,,, 역시, 짧게라도 읽고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시공사 시리즈답게 도판이 훌륭하다. 이 말은 시공사 디스커버리 시리즈를 쓸 때마다 늘 하던 말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특히나 의미심장한 평이다. 왜냐하면 연금술의 실험 과정은 상당히 우의적인 단어와 삽화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용은 일반적인 상식 수준의 서술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실험과정을 기독교 교리에 빗대 설명한 부분이 없는 부분도 아쉽다. 결정적으로, 부제에 '현자의 돌'이 적혀있지만 현자의 돌에 대한 부분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좀 낚인 기분도 든다. 하지만 저자가 신비주의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은 점도 괜찮다. 

 

그동안 나는 여기저기에서 연금술 관련한 이야기들을 주워 읽으면서, '연금술은 황금 만들기 자체보다 대우주와 소우주간의 연관성 등 자연의 비밀을 밝히고, 보다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서술이 있어서 반가웠다. 써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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