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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더 갤러리 101 2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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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읽어왔던 미술 관련 책을 떠올려 보니 고흐, 뭉크, 모네, 알폰스 무하 등 한 사람의 화가를 주로 읽거나 미술관 기행 이야기 등을 띄엄띄엄 읽어왔는데, 유파와 함께 연대기적으로 읽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그 소감은 470여 쪽이나 되는 두꺼운 분량임에도 마치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풀어가는 화가들의 작품과 삶 이야기에 푹 빠졌고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특히 내가 읽고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자주 언급되고 있어서 반가웠다. 좀 더 속도를 내어 얼른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더 갤러리 101’(The Gallery 101) 시리즈는 르네상스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예술가 101명의 미술작품 속에 담긴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단다. 이 책은 두 번째 책으로 라파엘전파부터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추상미술까지 다루고 있다. 특정 사조의 대표작도 있지만 덜 알려졌더라도 인간이라는 주제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저자 이진숙은 이 책 외에도 러시아 미술사, 위대한 미술책, 시대를 훔친 미술등이 있으며 현재 예술의전당 등에서 활발히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한다. 리뷰는 유파에 상관없이 내게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던 화가를 중심으로 소개할까 한다.


 


미술 사조와 연대별로 중요한 사건들을 보여주며 특징이 되는 용어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본문에서 언급된 그림들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을 소개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나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나서 고흐에게 매료되었다. 그 후 프레데릭 파작의 나는 빈센트를 잊고 있었다를 읽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영화 <러빙 빈센트>를 만났다. 특히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 속에 나타난 그림에 대한 열정과 지독한 가난과 테오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는 고흐의 가슴 속에 시인이나 작가가 살아 있는 듯 감동적이었다. 역시 이 책에서 다시 접한 고흐는 4개 국어로 책을 읽었고 200여 권이 넘는 책을 언급하는 내용을 편지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19세기 문인들을 사랑했고 문학 작품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바람대로 그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우체부 룰랭을 화폭의 주인공으로 그려 넣었다. 소박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룰랭의 가족에게 감동했던 고흐의 소탈한 마음이 느껴진다. 흔히 광기를 운운하는 평가가 따라다니는데, 그러한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토록 고귀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을까. 암담하고도 외로운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우체부 조제프 룰랭의 초상화>(1888년)

 

 



수잔 발라동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살아가는 동안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던 수잔 발라동은 아들보다 어린 앙드레 우터와 사랑에 빠졌는데, 나이 많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유혹했다는 식의 수근거림이 계속되자 그에 대한 응대로 <아담과 이브>를 그렸다고 한다. 둘이 사랑했으면 둘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개는 비난의 화살이 여성에게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휘호 판데르 휘스의 작품 <아담의 타락>과 비교하고 있다. 한마디로 남자는 여자의 유혹 때문에 타락했다는 거다. 이에 비하면 수잔 발라동이 그린 <아담과 이브>는 사랑을 한 게 죄라면 모두의 죄이지 어느 한쪽의 죄가 아니라는 거다. ‘미술사 최초로 책임지는 아담이라는 해석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세탁부로 일하다가 열여섯 살 때 화가 퓌비 드 샤반의 모델로 일하다가 르누아르, 드가, 툴루즈로트레크 등 여러 화가의 모델을 하다가 화가로 성공하는 것도 드라마틱했다. 아들의 아버지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헤쳐나갔던 독립정신으로 꿋꿋이 살아가며,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1937년 파리 프티팔레에서 열린 독립예술의 대가들, 1898~1937’에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엄마로서 부족하고 숱한 남자들과 사랑을 했지만 결국 홀로 남았고, 성공한 화가로 남을 수 있었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삶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행복감으로 충만했으리라.


 


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1909년)

 

 



오귀스트 로댕


 시인 릴케와 로댕의 인연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접했는데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여기서는 프랑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인, 발자크의 조각상을 만들었던 배경 이야기까지 나와서 더욱 재미있었다. 실제 모델을 보지 않고 조각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모험이었을 것이고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몇 년 전 여행에서 우에노 공원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칼레의 시민들>을 보고 온 적이 있다. 특히 <칼레의 시민들>은 전 세계에 있는 10개의 진품 중 하나라고 해서 뿌듯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아상블라주: 카미유 클로델의 두상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의 손의 주인공이 <칼레의 시민들>중 한 인물의 손이라고 해서 반가웠다. 발자크는 단테의 신곡에 도전하는 의미로 인간 희극’(Human Comedy)에 격변기의 프랑스 사회를 총정리하기도 했다. 하루에 커피를 40잔씩 마시고 16시간씩 앉아 글을 쓰는, 그야말로 일을 쾌락으로 알았다니 그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일에 대해서는 로댕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마 좋아하는 일이어서 그렇게 몰입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너무 혹사한 나머지 발자크는 51세에 세상을 떠났단다. 위대한 천재들의 짧은 생은 항상 안타깝다. 전부터 고리오 영감을 읽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조만간 실천에 옮겨야겠다

 


 

오귀스트 로댕, <아상블라주: 카미유 클로델의 두상과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1895년)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그림은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이 눈부실 만큼 아름답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 1813~1863)이 쓴 희곡 유디트의 배경 이야기를 따라 읽다 보니 이해되지 않던 수수께끼 같던 여인의 표정이 환해진다. 특히 클림트의 <키스>는 한 번도 해외로 반출된 적이 없고 값으로 매겨진 적이 없어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19년 동유럽 여행을 갔다가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1907~1908년)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궁전 전시관에서 내가 찍어온 사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 사진도 겨우 찍었다.(아참, 그때 내가 한 손에 깁스를 하고 있었지) 

 



변하지 않는 황금처럼 변치 않는 사랑의 약속이었다. 아마도 그림 속의 여인은 사촌 여동생으로 추정되며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벼랑 끝에 선 모습으로 표현했을 거라는 가이드의 흥미진진한 해설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파울라 모더존베커

 


 이 화가는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알게 모르게 양성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파울라가 1906년 친구인 릴케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다는 이 말에 시선이 멈췄다.

 


나는 나입니다.(Ich bin ich) 날마다 조금씩 다른 내가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여성이 사회 참여 활동이 쉽지 않았던 배경을 생각하면 스스로 저 안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세상을 떠나기 전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꽃을 들고 기꺼이 세상을 떠나겠다던 파울라는 딸아이를 낳고 18일 만에 산후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거의 무명인 상태로 세상을 떠났지만 남긴 글이 먼저 출판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고 자기 이름이 붙은 미술관을 가진 최초의 여성 화가가 되었단다. ‘나로 살고 싶었던열정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글로 남긴 열정, 그런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열정과 정신을 귀하게 여기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



 

 파울라 모더존베커,<동백나무 가지를 든 자화상>(1906~1907년)

 



 

바실리 칸딘스키

 


 음악은 말 그대로 소리를 듣고 이해하는 장르이다. 그런데 칸딘스키의 작품에 대해 알고 나서 정말 놀랐다. 음악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던 칸딘스키가 미술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이력도 정말 특이했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건초더미>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칸딘스키는 19111월 뮌헨에서 쇤베르크의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고 <인상 (음악회)>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쇤베르크나 칸딘스키 모두 관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무조음악과 순수미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는데, 분야는 달라도 서로 공명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음악회)>(1911년)

 

 



 화가들의 작품 속에 담긴 인간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성차별, 인종차별, 시대의 아픔인 전쟁, 생노병사, 희로애락의 모습 말이다. 텍스트로 된 문학은 우리가 읽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이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은 작품과 화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미술에 조금씩 관심이 생겨서 여행의 기회만 있으면 미술관을 가는 내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러시아를 여행하던 중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들어섰고 문학과 역사까지도 아우르는 미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열정을 쏟았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구나 살다 보면 가끔 공허함에 빠지기도 하고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힘듦에 위로받고 싶은 시간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 그리고 살아갈 힘을 얻는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더구나 이런 코로나 시국이라면 더욱 훌륭한 미술관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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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27 0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름은 익숙한 화가들인데 클림트 그림 빼고는 처음 보네요 ㅜㅜ 그림 좋아하실 만한 분에게 딱인 책인거 같아요 ~!!
(오스트리아 가보셨다니 완전 부럽네요 👍)

모나리자 2021-07-27 17:03   좋아요 1 | URL
네.. 아주 책도 두껍고 이야기도 풍성해서 글미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매력적인 책이에요. 얼떨결에 동유럽 여행을 갔지만 정말 좋았어요. 그렇게 관광객들로 넘치던 유럽 거리가 코로나로 잠식되어 안타까운 마음이에요.
오늘도 엄청나게 덥더군요.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새파랑님.^^

그레이스 2021-07-27 0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권 <인간다움의 순간들>보다 종이가 좋아보이네요^^

모나리자 2021-07-27 17:04   좋아요 1 | URL
1권을 읽으셨군요. 내용이 풍성해서 좋았어요. 문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입담이 대단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그런 건가 봅니다.
그레이스님도 편안한 오후 보내세요.^_^

그레이스 2021-07-27 20:50   좋아요 1 | URL
이진숙 작가 책은 읽다보면 소개된 책들을 또 사게 돼요 ㅠ
사람을 설득시키는 필력이 있어요!
 
모네 - 빛과 색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 클래식 클라우드 14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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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도쿄 여행을 갔다가 우에노 공원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보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일정 중에 시작하는 모네와 르느와르의 전시회 예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림에 거의 문외한이던 내가 조금씩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미술 관련 책에서 말로만 듣던 명화 등을 접하고는 학창시절의 미술 시간이 떠올랐다. 화가들이 어느 유파에 속하는지 달달 외워서 시험을 보았던 일 등. 화가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화가 모네의 전시회 소식을 보고 반가웠지만, 아쉬움 가득 안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11<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를 만났다. 이번엔 모네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겠지 했는데, 모네 외에도 많은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모네의 작품 수련이 각인되어서인지 다른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런던의 국회의사당을 그린 그림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당황스러움이었다. 안개의 나라인 영국을 떠올릴 때 충분히 그림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어떤 의도로 그려진 걸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과 함께 모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대별로 다른 <런던 국회의사당> 연작이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는 선명하고 보기에도 예쁜 그림이 좋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모네는 을 쫓는 사냥꾼이라고도 했다. 모네가 자신의 그림에 빛의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스승 부댕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다. 당시만 해도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서 대략의 스케치를 한 다음 화실로 들어가서 완성했다는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모네의 그림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파스텔톤으로 불리는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감 때문이란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예쁜 그림으로만 생각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당시 고전적인 미술을 추구하던 파리 미술계의 회화에 대한 통념과 선입견을 깨고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모네의 그림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모네는 대상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예를 들면 루앙대성당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루앙대성당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 등의 요소들을 그리고자 했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요소를 주목하고 그것을 덮개(enveloppe)’라고 불렀다. 의식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되는 여러 요소들을 그림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건초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연작까지 하나의 대상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물감의 색으로 구현하면서 모네는 점차 자신이 추구했던 회화의 이상에 가까워져 간다. 모네가 추구했던 신념을 알고 나서 들여다보니 그림이 이해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살아있는 그림으로 보였다.

 

 저자 허나영을 따라가는 여정은 모네의 생애와 예술적 공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 활동 무대였던 파리부터 카미유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르장퇴유, 가난과 상실의 장소 베퇴유, 예술적 이상을 완성한 지베르니, <루앙대성당>을 그린 루앙, 유년의 기억이 있는 센강 하구, 예술적 영감의 장소,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을 피해서 갔던 런던 템즈강까지의 여정이 들어있다. 특히 런던에서는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터너의 작품을 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고, 평생의 후원자인 뒤랑뤼엘을 만나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올랐다. 생전에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던 가난한 열정의 화가 고흐. 대개의 부모가 그렇듯이 그의 아버지도 모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열일 곱 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 학교를 감옥 같이 여겼다는 모네가 맞닥뜨린 이런 암담한 상황에 르카드르 고모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유했던 그의 고모는 모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이후,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며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불태웠지만 짧은 생을 마감하고 사후가 되어서야 열광적인 찬사를 받게 되는 고흐와 너무 대비되는 이야기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캔버스에 유채. 1867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국

 

<아르장퇴유의 양귀비밭> 캔버스에 유채, 1873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왼쪽 <디에프 절벽> 캔버스에 유채, 1882년. 취리히미술관, 스위스

오른쪽 <푸르빌 절벽 위 산책> 캔버스에 유채, 1882년, 시카고미술관, 미국

카미유와 아들 장이나 알리스의 딸 등 가족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이 많았다.

 

  주변에 항상 도움을 주는 이가 끊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모네는 행운아였던 것 같다. 초기에 고모의 지원으로 화실에 들어가서 만난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바지유가 죽고 나자 카유보트가 나타나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며 컬렉터가 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모네가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기까지는 런던에서 만난 화상 폴 뒤랑뒤엘의 활약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뒤랑뒤엘은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여 전시회를 계약하는 등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정작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은 그러한 뒤랑뤼엘의 행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세계 미술과 문화의 중심이 파리였고 미국의 새로운 중산층과 상류층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뒤랑뒤엘은 1886년 미국미술가협회 뉴욕지부에 전시를 개최해줄 것을 제안했고 결과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의 성공이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만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댄디기질이 있던 모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생활은 어렵더라도 하녀를 고용했으며 겉모습은 우아하게, 기차를 타고 나가 도시 풍경을 즐기는 파리지앵을 말한다. 양복은 반드시 파리에 가서 맞춰 입고 나중에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예술가인 자신이 입어주는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뻔뻔하게 설득했을 정도란다. 아무튼 화가로서의 자긍심은 꽤 상당했던 듯하다. 유행에 민감했던 그런 모네에 의해 <생라자르역>이라는 작품을 보게 된다.

<생라자르역> 캔버스에 유채. 1877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생라자르역은 프랑스에 증기기관차가 들어오면서 1837년에 최초로 생긴 기차역이다.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나 노르망디 지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아르장퇴유와 지베르니 등에 터를 두고 파리를 오갈 때에도 항상 생라자르역을 거쳐야 했는데 그로 인해 그 곳은 자연히 모네 삶의 일부이자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된다. 생라자르 역사와 증기기관차가 그림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지만 역시 모네는 다른 관점으로 그렸다.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서 탄생한 그림이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에 주목한 모네는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그려낸다. 허락해 준 것은 물론 플랫폼에서 사람들을 내보내고 역사 안에 있는 기차들이 일제히 증기를 뿜어 올리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니 모네의 열정에 끌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게 된다.

 

  혹자는 모네를 두고 굉장히 수완이 좋고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하며 세잔은 돈을 밝히는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인들이 경제관념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적인 관계망에 취약한 사례가 많아서 모네가 특히 눈에 띌 수도 있다. 영감을 주었던 뮤즈 카미유가 병을 얻어 죽어갈 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오슈데 부부가 파산 지경에 이르러 알리스가 여섯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데리고 모네의 집으로 들어온다. 세간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껄끄러운 동거는 결국 부부가 되고 가족이 되어 화목하게 지낸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던 화가들이 많았던 것을 볼 때 여덟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보살피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게 된 것은 어쩌면 처세를 알았고 강한 삶의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이라고 확신한다. 나도 그 작품(모네의 <인상, 해돋이>) 앞에서 인상을 받았으니까. 이 얼마나 자유롭고 쉬운 작업인가! 이 바다 풍경보다는 벽지 패턴을 위한 기초적인 드로잉이 더 완성도가 있겠다’(P110)

 

  초기에 저널리스트 루이 르루아의 이런 혹평을 받았던 모네의 그림은 1895<루앙대성당> 연작 전시를 본 클레망소에게 모네의 삶도 그 석조 건물만큼 오래 보존되어야 하며 그만큼 훌륭한 모네의 그림은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만들어준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급변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했던 모네에게 역사는 그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동료들은 떠나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결국은 인상주의의 대표 주자가 된다. 말년에는 시력이 나빠져서 힘들었지만 86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고, 항상 곁에서 보필하던 사랑스런 딸이자 며느리인 블랑슈와 모네 예술의 가치를 잘 알고 보존하기 위해 애써준 클레망소가 마지막을 함께 했으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행복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수련> 캔버스에 유채. 1908년. 알퐁스조르주풀랭미술관, 프랑스

 

모네는 자연이 빛을 반영한 색의 효과로 만들어내는 온갖 다양한 모티프들을 연구해온 끝에, 그의 긴 생애의 마지막에서 가장 부드럽고도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는 요소인 을 다뤘다. 물은 투명한 동시에,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며, 다른 사물을 비춘다. 물 덕분에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빛이 반사하여 흩어지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표면을 드러낸다. () 모네는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장인처럼 색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물의 밑바닥으로부터 몽상에 잠겨 소용돌이치며 색이 떠오른다.(P250)-당시 기자인 폴 클로델의 묘사-(‘물의 풍경)

 

 명상의 공간, 오랑주리 미술관 '수련방'

모네가 처음 대장식화 <수련> 연작을 구상했을 때, 그는 수련이 떠 있는 물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강박과 긴장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 꿈이 실현된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방'의 모습.

 

  모네의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어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알게 되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모네의 그림 앞에 서서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파리에 가서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도쿄의 어느 미술관에서 모네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이 책으로 완벽하게 공부했으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미술관의 분위기 속에 취해 있는 내 모습...

 

<모네의 정원>

자연 그 자체를 화실로 삼았던 모네에게 있어 지베르니의 정원은 평생 꿈꿔온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수많은 <수련> 연작이 탄생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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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와 떠나는 미술관 여행
컬쳐앤아이리더스 기획팀 지음 / 컬쳐앤아이리더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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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스 무하의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작년엔가 여러 블로그에서 보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책 탐방을 하다가 눈에 띄어 읽게 되었다. 표지부터 눈을 사로잡는 책이었다. 꽃 화관을 쓴 아름다운 여인. 무하의 그림의 공통점은 보통의 그림과 달리 화려하고 꽃을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물결치는 듯한 긴 머리에서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고 정열적인 인생을 그림에 모두 쏟아 부었구나 싶었다.

 

 이 책은 지난 2013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와 유토피아 >을 찾은 관람객들의 뜨거웠던 사랑에 힘입어 2016년 겨울에 새롭게 기획된 <알폰스 무하, 모던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을 기념하며 출판되었다고 한다. 아르누보를 표하는 체코의 국보급 화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알폰스 무하의 일생과 예술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책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 성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했단다.

 

 ‘아르누보새로운 예술을 뜻하며 19세기 말 유럽에서 등장한 예술 사조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독일 출신의 딜러인 지그프리트 빙(Siegfried Bing 1838-1905)1895년 문을 연 파리의 화랑 메종 드 아르누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아르누보 양식은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성행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조금씩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아르누보, 영국과 미국에서는 모던 스타일,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리베르티로 각 나라의 문화와 특성에 따라 발전했다. 나무의 줄기, 꽃과 같은 자연의 소재를 모티브로 활용한 유연한 장식성이 특징이며, 회화는 물론 건축, 가구 디자인, 생활용품 등으로 확대되었다.

 

 기존의 예술을 거부한 세기말의 새로운 양식이던 아르누보를 독특하게 표현해낸 예술가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예는 빅토르 오르타의 카셀저택, 엑토르 기마르의 파리 지하철 입구, 안토니오 가우디의 카사 바트로를 들 수 있다.

 

 알폰스 무하는 186072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던 슬라브 지역의 하나인 모라비아 남쪽의 작은 도시 이반치체에서 평범한 가정의 여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감각이 남달라서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도 잘 불러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모라비아의 브르노에 위치한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성당 건축과 회화, 조각, 장신구를 가까이 보고 자란 것이 무하에게 지속적인 예술적 영감이 되어 여러 작품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하루의 시간: 깨어나는 아침, 낮의 밝음, 저녁 사색, 밤의 휴식. 1899. 채색 석판화.

하루의 시간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 참으로 탁월한 상상력의 대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꽃 장식과 긴 머리카락의 역동적인 표현은 여러 작품에도 나타나는 주된 특징이다.

 

연극 포스터들이다.

왼쪽부터 <카멜리아(동백꽃 부인)>, <로렌차초>, <햄릿>, <메데>, <라 토스카>

 포스터는 당대 연극계의 여왕으로 불리던 사라 베르나르는 르메르시에 인쇄소에 연극 <지스몽다>역을 위한 포스터를 주문했는데 모든 직원이 연말 휴가를 떠나 무하만 남아 있었는데

우연히 포스터 디자인을 맡게 된 무하의 손끝에서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는 결과물이 탄생한다.

1895년 새해 첫날 <지스몽다>가 엄청난 성공을 이루면서 사라 베르나르는 무하에게 6년간의 전속계약을 의뢰하였고 위의 연극 포스터 제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식 패널: 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1896. 채색 석판화.

 텍스트 없이 순수한 예술적 감상과 벽장식을 위해 제작되었다. 무하는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통해서 삶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대량생산으로 대중들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했다. 특히 무하의 작품은 일반 대중이 대상이어서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고 한다.

 

백일몽. 1897. 채색 석판화.

 

"예술가의 임무는 대중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사랑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각종 포장 디자인.

무하의 예술적 영감은 대중 문화 속에 파고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 행사, 각종 서비스뿐만 아니라 소비 물품인 향수와 담배 종이, 맥주, 샴페인 초콜릿, 비스킷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

 

 

무하가 디자인한 스테인드 글라스.

 체코의 프라하성 안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프라하를 대표하는 신 고딕 건축물이자

무하가 디자인한 대형 스테인드 글라스 원작을 살펴볼 수 있는 건물로 유명하단다.

습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도 싣고 있어서 실제 모습의 그림과 비교하면서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밖에도 무대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뉴욕의 독일극장에서 작업하던 중에 의뢰받은 셰익스피어 연극의 의상 디자인을 위한 연필과 수채화 스케치들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는 무하가 빈과 파리에서의 경험으로 무대 의상 디자인에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슬라브서사시 20편 대작의 일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면서 무하의 조국은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새로 건국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 했던 무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우표와 지폐를 디자인해 달라는 제안을 수락한다. 또 국가의 휘장이나 경찰의 단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가의 상징물이 무하의 손길을 거쳐 나온다.

 

 그리고 1912년에 시작되어 25년에 걸쳐 완성된 작품 슬라브서사시는 무하가 그리던 꿈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을 기념으로 <슬라브서사시> 전시가 열렸고 그후 작품들은 프라하 시에 공식적으로 기증되었다.

 

 독립을 이룬 지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8년 뮌헨협정이 체결되면서 독일 나치의 통제를 받게 된다. 게슈타포가 첫 번째로 체포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무하였고 심문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열정적인 예술혼으로 살았던 무하는  1939년 여름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잠든다.

 

 아르누보의 별은 그렇게 졌지만 무하 재단에 의해 1998년 체코 프라하에 설립된 무하 미술관은 세계 유일의 박물관으로 무하 생애 전반에 걸친 수많은 작품이 전시 및 보존되고 있단다.

한 해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무하 미술관은 체코공화국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미술관 중 하나이고 체코를 방문한다면 꼭 들러야 하는 프라의 명소가 되었다.

 

무하 미술관 내부.

미술에 조금씩 다가가는 중이다.

예전 같으면 도서관에 가더라도 미술쪽은 들여다 본 적이 없는데 요즘 신기하게도 자주 기웃거리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하듯이 누가 아는가. 미술이 나에게 어떤 영감을 줄 지.

체코의 프라하는 내가 좋아하는 유럽 작가 프란츠 카프카와도 밀접한 도시인데 언제 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그때는 무하 미술관에도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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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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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만난 뭉크의 <절규>는 아름다운 그림도 아닌 오싹한 해골이 느겨지는 섬뜩함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그림이 탄생했을까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예전의 미술 시간은 화가들의 유파와 작품을 달달 외우며 재미없는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전부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 고흐를 만나고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 간간히 미술 관련 책들을 만나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전에 읽었던 미술관으로 간 심리학에서 뭉크를 만났다. 거기서 미처 몰랐던 뭉크에 대한 삶의 배경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뭉크의 그림과 삶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닿아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P13)

 

 뭉크가 남긴 수많은 글 중 그의 예술관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말이다.

작품 <절규>를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문장이 아닐까 싶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풍경이나 사물을 그린 반면, 뭉크는 자신이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는데,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예술 작품이 된 <절규>는 많은 매체를 통해 패러디될 정도로 자주 접할 수 있다. 뭉크의 <절규>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11,992만 달러라는 당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뭉크의 자취가 어린 여러 장소, 그림과 그에 얽힌 배경 이야기는 마치 저자와 그 여정을 함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1,2,3장에서는 뭉크가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곳곳을 소개한다. 4,5장에서는 뭉크가 사랑했던 여인들과 그들과의 추억이 있는 오스고쉬트란드를 소개한다. 6,7장은 각각 베를린과 파리의 행적을 더듬는다. 베를린은 뭉크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준 곳으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세계 화단의 중심지이자 뭉크가 유학했던 파리는 그가 진보적인 세계 미술의 흐름을 습득하고 예술적 자극을 받은 곳이다. 8,9,10장에서는 뭉크가 노르웨이의 국내외를 떠돌며 보낸 세월을 따라 그 시기에 제작한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11장은 노르웨이로 돌아온 뭉크가 마지막 30년을 보낸 오슬로 외곽의 에켈리를 돌아보고, 12장에서는 뭉크의 죽음 이후 이야기를 뭉크 미술관을 중심으로 풀어보는 이야기다.

 

 불안의 아이콘이라는 대명사가 된 뭉크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을까.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 때는 엄마 대신이자 놀이동무였던 누이 소피에가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또 파리 유학중에 뇌졸중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멀어졌던 관계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힘든 현실을 종교에 매달리며 뭉크에게 엄격하게 대했던 아버지, 병약했던 자신은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으면서 더욱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간다. 다행히 우울했던 청소년기를 보내고 20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며 새로운 환경과 자극에 몰입하며 화가로서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다. 난관과 이별을 겪으며 흔들리고 비관하며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로 거리를 방황하다가 졸도를 하기도 한다. 스물여덟 살의 뭉크가 그린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은 그 당시 뭉크의 심리와 태도를 잘 드러낸 그림이다.

<칼 요한 거리의 저녁>

 

뭉크는 같은 주제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캔버스에 유채, 크레용 외에 판화로도 많은 그림을 남겼다.

               왼쪽 작품이 <절망>              오른쪽 작품은 <절규>

 1893년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나오기 전 그 토대가 된 작품이다그림에서 여러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점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림에 세 사람은 동일 인물이며 이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놓은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단다. ‘뭉크의 노트에 묘사한 것처럼, 길을 가다가 피오르를 바라보고, 죽을 듯 피곤하여 난간에 기대고, 그다음 비명을 듣는다는 것이다. 비명자연을 관통하여 들려오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에서 그림의 영감을 받았다는데 그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림을 보니 신비스런 느낌과 함께 노르웨이의 대자연의 역동성이 느껴졌다. 제목이 절규보다는 비명이 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해석이 흥미롭다.

 

 불행한 가족사의 환경, 자신의 병약함으로 인한 불안 등으로 점철된 삶에서 어떻게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게 되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청년 뭉크의 멘토였던 한스 예게르와의 만남이 뭉크의 인생의 지표와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고 기독교와 부르주아계급의 인습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던 예게르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이라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예술가들과 젊은 학생들이 모여 패기 넘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예게르의 주장은 혁신적이고 그만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뭉크는 이 그룹에서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훗날 화단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혁신적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라든가 뮤즈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스럽다. 뭉크는 평생을 홀로 살았지만 사랑했던 여인들이 있었다. 짧고 강렬한 사랑을 했던 밀리, 약혼자였던 툴라 등과 결국은 헤어지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실로 대단했다

<이별>

밀리와의 이별에 대한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가슴에서 흘린 피가 떨어진 자리에 붉은 나무가 솟아난다. 등을 돌리며 유유히 떠나가는 여인의 모습.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림에 대한 느낌. 자세한 배경 이야기가 쉽게 그림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사랑의 아픔, 이별 등으로 인한 외로운 마음의 상처가 <키스>, <두사람, 외로운 이들>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밀리나 툴라는 이후로도 영감을 주는 뮤즈로 작용한다. 반면 뭉크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장소는 오스고쉬트란드였다고 한다.

 “오스고쉬트란드를 걷는 것은 내 그림들 사이로 걷는 것과 같다. 오스고쉬트란드에 있을 때 나는 그렇게 그림이 그리고 싶다”(P146)

라고 말했을 만큼 이곳의 풍경을 사랑했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불안한 삶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약간의 희망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림들 사이로 걷는 것과 같고 그림이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뭉크에게 있어 편안함을 주는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달빛>

1890년대 초반, 뭉크는 신비로운 느낌의 여름밤 바다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미술사가 애귬은 이것을 오스고쉬트란드 라인이라고 불렀다.

<달빛>은 오스고쉬트란드 라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경화다.

 

 주로 불안, 사랑의 상처, 죽음 등을 주제로 그렸던 뭉크는 1902년 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생의 프리즈>를 연작의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다. ‘사랑의 씨앗’, ‘꽃피고 사라지는 사랑’, ‘삶의 불안’, ‘죽음’,이라는 4개의 그룹으로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인간의 일생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뭉크는 나는 예술로 삶과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내 그림들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P220)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과 디자인에서도 앞서갔던 예술가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에 집중했던 뭉크의 인생 2막은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작업을 하면서 인류와 민족, 지식과 역사 그리고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아울라 벽화는 공모 결과 당선자가 없었지만 오슬로 시는 작품대금의 반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뭉크가 오슬로 대학에 작품을 기증하는 형식으로 뭉크의 작품을 강당에 걸기로 결정한다. 강당의 정면에 <태양>이 있고, 오른쪽에 <알마 마테르>, 왼쪽에 <역사>가 있다. 3개의 큰 그림과 작은 그림 6개로 구성되어 있다. 오슬로 시민들에게 뭉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절규><마돈나>도 많은 수를 차지하지만,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한다. 아울라 벽화의 완성은 오랜 해외 생활로 국내에 입지가 약했던 뭉크에게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성공의 가도를 달리면서도 뭉크는 여전히 불안의 지옥을 살아간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해외와 노르웨이의 작은 해변 마을들을 떠돌다가 1916년 쉰두 살의 나이에 크리스티아니아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는데, 에켈리를 구입하고 1944년 사망할 때까지 기나긴 은둔과 고독은 여전하다. <잠들지 못하는 밤, 심적 혼란의 자화상>(아래 그림 왼쪽), <밤의 방랑자>(아래 그림 오른쪽)에는 노년이 된 뭉크의 죽음을 앞둔 불안과 외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불행했던 가족사, 화단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 화가로 낙인이 찍히는 등 난관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뭉크의 삶과 그림에 대한 열정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뭉크의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충만한 시간이었고 삶의 굴곡을 잘 극복한 한 사람의 생애는 드라마틱했다. 언젠가 뭉크의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미술의 세계에 조금은 눈을 뜬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편리한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제각각 다양한 이유로 여전히 불안하고 아프다고 한다. 뭉크의 말처럼 자신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바라는 이들에게 거대한 세상의 한 가운데를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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