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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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 제목의 첫 느낌은 우아함이었다. 꽃 이름을 의미하는 건가 짐작은 했지만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낯익은 개양귀비라는 꽃이었다. 내 고향집 문 앞에서도 보았던 그 꽃. 선명한 빨간색이 정말 예뻤던 꽃. 이 제목은 어떤 연유로 지어졌을까. 소세키의 많은 작품들의 제목은 내용과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기이한 발상으로 제목을 짓기로 유명한 그답게 그 후가 그랬고 이 그랬다. 다 읽고 나서는 강렬한 첫인상을 주었던 후지오의 캐릭터 이미지와 드높은 자존심이 꺾인 것을 스스로 용납을 못해 죽음을 택한 영혼의 애잔함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무네치카와 고노가 교토의 히에이잔 산을 오르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장 자체가 너무 시적이어서 그런지 꽤나 안 읽혔다. 작품풀베개가 생각났다. 산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게 별 의미 없는 대화가 계속된다. 배경이 되는 장면은 교토와 도쿄를 교차적으로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첫 신문소설이라는 것을 의식한 구성이라고 한다. 인물간의 갈등 구조를 심리 묘사에서 자세히 그려내는 장면은 역시 탁월한 소세키의 영역이 아닌가싶다. 연애소설처럼 읽히기도 하고 성장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무네치카와 고노를 중심으로 각각의 여동생과 오노와 얽히고설킨 남녀관계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외관이 네모나고 각진무네치카의 털털한 말투와 달리 고노는 철학적이다. 상대방의 말에서 꼬투리를 잡아서 철학적인 말을 기어이 뱉어 놓고야 만다.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적인 성격이 뚜렷함을 감지하게 되면서 흥미롭게 읽힌다.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면 인간의 변덕은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네.”(P32)

 

색을 보는 자는 형태를 보지 않고, 형태를 보는 자는 질을 보지 않는다.’(P75)

 

 특히 오노와 후지오가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은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선명한 자주 빛 기모노를 입은 후지오의 책을 읽는 모습, 후지오가 오노에게 작업을 거는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를 싫지 않은 듯 즐기는 모양새다. 시적인 오노는 후지오에게서 클레오파트라의 카리스마를 느낀다. 만남을 거듭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오노의 모습이 보인다.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오노는 어두운 과거를 털어버리고 싶다. 교토에서 도쿄로 이사오는 선생 부녀를 마중나간 오노의 너무 많이 변한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요코가 있다.

 

 어린 시절 거두어 키워준 고도 선생과 그의 딸 사요코는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어서 딸을 데려갔으면 하고 바라는 고도 선생의 마음과 달리 오노의 마음은 후지오를 향해 달려간다. 과거를 떼어버리고 싶은 오노와 어떻게든 과거를 연결시키려는 이들의 마음이 안타깝고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느낌이다. 재산이 있는 후지오와 결혼하여 그 경제력으로 고도 선생 부녀를 도와주겠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친구 아사이를 동원하여 거절의사를 밝히게 한다. 미안함을 갖고 있으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도덕적인 양심을 버리려 한다. 그것도 직접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비굴함으로 말이다.

 

개미는 단것에 모이고 사람은 새로운 것에 모인다. 문명인은 격렬한 생존 가운데서 무료함을 한탄한다. 서서 세 번의 식사를 하는 분주함을 견디고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병을 걱정한다. 삶을 마음대로 맡기고 죽음을 마음대로 탐하는 것이 문명인이다. …… 문명은 사람의 신경을 면도칼로 깎고 사람의 정신을 나무공이로 둔하게 한다. 자극에 마비되고, 게다가 자극에 굶주린 자는 빠짐없이 새로운 박람회에 모인다.”(P193)

 

  박람회에 모이는 사람들을 묘사한 문장이다. 삶의 지루함을 식히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있음을 느끼는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놀라기 위해모여드는 것일까. 오노와 선생 부녀 일행은 마침 박람회에 온 무네치카 등 일행이 한데 모이면서 들통이 난다. 모든 재산을 후지오에게 넘겨주고 집을 나가려던 고노, 그것을 알고 놀란 무네치카, 속으론 좋으면서도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 후지오의 엄마 등 갈등 구조가 역력히 드러나면서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지식인 오노를 구하기 위한무네치카의 진지한 도움으로 어둠의 유혹에서 빠져나온다. 사실 이건 예상치 못했다. 도덕적 양심을 찾은 오노에게 환영의 마음이 들면서도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한 상처받은 분노로 주검이 되었던 후지오. 한 사람의 죽음이 있고서야 인간은 자신들의 허물을 깨닫는 존재인가.

 

비극은 희극보다 위대하다. 이를 일컬어 죽음은 모든 장애를 봉쇄하기에 위대하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나락에 떨어져 빠져나올 수 없기에 위대하다는 것은 흐르는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위대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운명은 단지 최후의 결말을 고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만은 아니다. 홀연히 삶이 변해 죽음이 되기에 위대한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잊고 있던 죽음이 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P432~433)

 

 다른 작품과 달리 소설의 작법을 밝히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를 배가시켰다. 심리묘사에 치중된 지루함을 달래주거나 긴장감을 유지시켜 독자의 참여와 몰입을 심화하는 느낌도 들었다. 짧고도 긴 여운을 주는 하이쿠의 삽입, 삶과 죽음을 적절히 조합하여 사색의 장을 마련해주는 소세키의 문학을 역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굴러가는 방향이 달라짐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오래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이나 살아가는 모습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이 옛 작품에서 들끓는 심연의 마음을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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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팔기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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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고부터 나쓰메 소세키의 팬이 되었다. 언젠가 도쿄에 가면 그의 발자취를 찾아가보리라 생각했던바 작년 도쿄 여행을 하면서 우리가 머문 숙소에서 도쿄대학이나 소세키의 산방기념관이 가깝다는 것을 알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찾아가 보았다. 그에 앞서 도쿄대학의 산시로의 연못을 둘러보며 발자국을 먼저 찍은 다음에. 산방기념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고 그 서재에서 우미인초』『산시로』『마음을 집필했다 한다. 건물 바로 앞 도로는 그 동네 주민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여서 대작가의 집이 멀리 동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니 놀랍고 신기했었다. 곳곳에서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족적을 남기고 떠났구나 싶어서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사설이 길었을까 생각해보니, 이 작품은 1915년 그의 사망 1년 반 전에 아사히 신문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며 대표적인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걸 알고 더욱 내밀한 소세키를 마주한 기분이 들어서다.

 

도쿄대학 안에 있는 '산시로의 연못'.

 

 주인공 겐조의 일거수일투족에 나쓰메 소세키를 이입하며 읽었다.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말투와 분위기가 외모에서 풍기는 약간 오만한 듯한 -그 느낌마저 멋지다.-소세키의 성격이 연상되었고 지식인이었지만 궁핍하고 신경쇠약으로 고생했던 짧은 삶, 고독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서도 감동의 여운에 취해서 책장을 뒤적이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대략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영국에 유학을 다녀온 겐조가 도쿄의 고마고메에 살림을 차리고 교편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린 시절 양부였던 시마다와 마주치게 되고 겐조의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현실로 툭 불거져 나온다. 첫 만남 이후 엿새째 되는 날, 다시 마주치게 되면서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다그것은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달라붙어 겐조를 괴롭힌다.

 

아무래도 이게 끝이 아닐 것 같다.’(p18)

 

 그렇다. 끝이 아니라 이것이 시작이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성격도 아니어서 얼마 되지 않는 친척들부터 괴짜 취급을 받는다. 고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사람을 피하고 머릿속에 활자를 채우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형제라고 해야 배다른 누나와 형이 다인데도 별로 친하지도 않아 왕래하지 않았지만 시마다를 떠올리며 누나를 찾아간다. 천식을 달고 사는 수다스런 누나는 물 만난 듯이 자기 얘기를 시작한다. 점점 나이를 먹어 몸도 약해지고, 마누라가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는 남편 이야기 등 이런 몸이라 오래 살 수도 없을 것이라는... 다달이 주는 용돈을 올려달라는 이야기로 겐조는 알아차린다. 평생 말단 관리로 살아가며 세 번이나 결혼한 형 조타로, 그렇게 아픈 누나를 외면하는 매형 히다 등 불편한 시선들이 겐조의 삶을 옥죄어오는 것 같다.

 

 누나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돈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백 년도 더 전의 이야기나 이렇게 세월이 흘렀어도 돈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다. 가족과 이렇다 할 유대관계도 없이 어른이 되어 가장이 되었지만 아내와 자녀들과의 유대감도 데면데면하다. 그 시절이니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감안하더라도. 유학을 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나름 출세했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내려한다. 하지만 겐조의 현실을 들여다봐도 풍족하다 느껴지는 구석은 없다. 없어서 절약할 수밖에 없는데 생활력이 강한 사람으로 비쳐지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친척 중에서 가장 출세했다고 여겨지는 것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시마다는 처음에 대리인을 겐조의 집에 보내더니 다음에는 직접 찾아오기 시작한다. 정중하게 경어를 쓰다가도 자식에게 말하듯이 말을 놓고 아주 적극적이고 뻔뻔스럽게 돈을 요구한다. 시마다 부부가 이혼하면서 다시 생가로 돌아오고 관계는 정리가 되었는데 왜 찾아와서 옛정을 운운하는 것일까. 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해도 되는 입장인데 겐조는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고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울분을 참으면서 마지못해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겐조가 답답하기도 하다. 독단적인 남편에게 말붙이기도 힘든 아내는 항상 불만이다. 오죽하면 도둑놈이나 사기꾼이라도 자신을 아껴주기만 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할까.

 

 그뿐이 아니다. 시마다에 이어 초라한 행색으로 양모 오쓰네가 겐조를 찾아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일어나면서 겐조에게 5엔을 받고는 이러려고 찾아온 건 아니라며 미안해한다. 두 번이나 그렇게 5엔을 건네고는 세 번째로 올 오쓰네에게 줄 5엔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며 겐조는 어이가 없어진다. 정말이지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이것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처음 받은 원고료에서 나온 돈으로 보인다. 또 한때 번영을 누리던 장인은 영락하여 겐조에게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누구 하나 마음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성격적으로 그렇기도 하지만.

 

 체면 생각하지 말고 확실하게 거절하라는 아내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식이 많던 겐조의 아버지는 장차 의지하지 않을 자식에겐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하여 양자로 보낸다. 아무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더라도 친부모에게 내쳐진 일은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 평판도 좋지 않은 양부모가 겐조에게는 애정을 많이 주었다. 비록 어린 겐조를 그들의 전유물로 각인시키려는 행동이 보여서 싫어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몇 년을 거두어준 양부모였기에 뿌리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체면보다는 측은지심이 앞섰는지도 모른다.

 

 양가에서 생가로 돌아와서도 확실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를 간직한 채 그대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그런 사랑을 나누는 법이 서툴렀을 것이고. 아내와의 긴장감 도는 분위기에서 그것이 읽혀졌다.

 

세상에 매듭지어지는 일은 거의 없어. 한번 일어난 일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 다만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니까 남들도 자신도 알 수 없을 뿐이야.”(P287)

 

 빚쟁이처럼 계속 찾아와서 마지막엔 삼백 엔을 요구하는 시마다에게 백 엔으로 합의하고 증서를 받으며 일단락된다. 안 주어도 될 돈을 깎아서 주는 것도 참 웃긴다. 이제 시달림은 끝난 것일까. 이제 매듭지어져서 다행이라는 아내의 말에 겐조는 이 말을 덧붙인다. 끝난 것 같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 일들이 되풀이되는 삶,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에 올리기를 반복해야 했던 시지프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명암이 미완의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사망 전 마지막 완결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고백하고 싶었을까. 양자로 입적되었던 마음의 상처, 원만한 성격이 아닌 고지식함이며 인생을 통해 느낀 고독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남은 삶을 자각하고 지식인의 위선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도 살갑지 못했던 겐조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기뻐하는 아름다운 위안거리(화초 화분)’를 무자비하게 파괴해 놓고, 이런 사람이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자각하면서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이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내 책임이 아니야. 이런 미치광이 같은 짓을 하게 하는 자가 누구냐?

그놈이 나쁜 거다.’(P163)

 

 여기서 그놈은 겐조의 상처받은 과거겠지. 변명처럼 내뱉는 말이지만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랑을 받고 자랐어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뭐든 억지로는 안 되는 법이지.

 

너는 결국 뭘 하러 세상에 태어난 거냐?’(P271)

 

  ‘사람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돈을 빼앗긴다며 화가 나서 찬바람 부는 거리를 쏘다니다가 또 다시 자조 섞인 말을 내뱉는다. 어릴 때는 친부모의 사랑도 빼앗기더니 어른이 되어서는 과거의 삶이 불쑥 튀어나와 돈도 빼앗아간다. 대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궁핍과 고독한 삶이 절절하게 느껴져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옆에 있다면 이렇게 위로해 주고 싶다. 뭘 하러 태어나다니요. 당신의 훌륭한 작품으로 독자에게 위안을 주려고 태어난거죠.

 

 

 몰래 찍느라고 흔들렸다.

산방기념관. 나쓰메 소세키의 서재.

 


 

  산방기념관 뜰에 있는 소세키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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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더디 세계문학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이은정 옮김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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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읽은 마음이다. 이번 읽기는 더욱 의미가 깊었던 것이 지난 6월의 도쿄 여행에서 그의 산방 기념관이나 산시로의 연못을 보고 온 여운으로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여행의 감흥이 되살아나 더욱 재미있는 책읽기가 되었다. 사오년 전인가 읽었을 때는 하나도 기억에 없었는데 내가 걸어보고 거쳐 온 곳의 지명이 많이 나와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내가 다녀온 곳의 어디쯤일까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역시 문학 읽기는 여행과 함께 해야 좀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독서가 되겠구나 싶다.


도쿄 여행기(산시로의 연못, 산방 기념관)

http://blog.yes24.com/document/10491588


 사람의 마음처럼 알 수 없고 복잡한 것이 또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상대방의 속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겉으로 드러난 마음과 달리 저 안의 심연에 꼭꼭 숨기고 있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그리고 선생님과 유서다. 선생님의 유서는 편지로 되어있는데 마치 이 소설속의 또 하나의 소설 같은 느낌이다. 부모의 마음, 젊은 학생의 마음, 남녀의 마음이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그려져 있다.


 화자인 는 여름방학에 자산가의 아들인 친구 덕에 가마쿠라에 갔다가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만나는 과정도 어찌 보면 우연 같지만 의 호기심과 집요함으로 자주 마주치게 되면서 친해져서 댁을 방문하게 되고 아름다운 사모님과도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 이상하게도 왜 선생님에게만 마음이 동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도쿄에 돌아온 어느 날 두 번째로 선생님 댁에 갔다가 조시가야의 묘지에 있다는 사모님의 말을 듣고 드디어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그 곳으로 향한다. ‘의 반가움과는 달리 강한 경계심과 어둠의 그림자가 보이는 선생님이다. 게다가 나의 호기심이 충족되는 대답은 들을 수 없고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선생님.


나는 세상에서 여자라고는 단 한 사람밖에 모른다네. 아내 이외의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 않아. 아내도 나를 천하에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남자로 생각해주고 있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가장 행복한 한 쌍이어야 마땅하지.”(P35)

나는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자격이 없는 남자이니 어쩔 수 없네(P38)


 왜 이런 고백 같은 걸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 아닌가. 경의를 표할만한 학문과 사상을 가진 선생님이 왜 세상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는 걸까 궁금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고결한 사상을 논하는 선생님의 입으로 집안의 재산을 묻질 않나 미리 분배받는 것이 좋다는 말까지 듣게 되고 는 또 놀란다. 더 깊이 알고 싶은데 뭔가 숨기는 것 같은 선생님에게 궁금증은 더욱 부채질한다. 선생님의 마음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어서 그토록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꺼리는 것일까.


시 골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는 병세가 있는 아버지를 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다. 여기서는 부모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대립한다. 아버지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이 취직을 하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식을 가르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부모와의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노부모의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이 이중적인 모순, 짠하고도 재미있다. 하지만 는 그리 일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는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선생님도 . 그 선생님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하는 편지를 쓰라는 어머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이며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형의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흔히 일을 안 하고 노는 사람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그런데 어느 정도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일을 안 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랄 것이다. 사람의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똑같은지. 백 년이 넘은 작품임에도 사람의 마음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상태가 더 심해진 상황에서 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두툼하고 묵직한 선생님의 편지. 편지에서는 소설 같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숙부에게 배신당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자신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는데 사랑을 하게 되면서 그것이 여지없이 무너져버린 것.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세상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발목을 잡았다는 것 등 처음에 궁금해 했던 모든 것의 의문이 풀린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다리를 올려놓게 한다네. 나는 미래에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것이네. 지금보다 한층 더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 지금의 외로움을 견디려고 하는 것이지. 자유와 독립과 자기 본위로 넘치는 현대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그 대가로 외로움을 맛봐야만 하는 거겠지.”(P47)


 고통과 번민으로 지금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 어떤 암시처럼 알 수 없는 말만 자꾸 되풀이할 뿐이다. 스스로 세상을 차단하고 과거의 시간에 갇혀 살던 선생님은 좀 편안해졌을까. 외로운 삶 가운데 다가오는 를 두려워하면서도 싫어하지 않았다.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으면. 진실하다고 믿었던 단 한 사람 에게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 놓는다. 작품 해설에서 어떤 이는 탐정 소설의 기법이 가미된 심리 소설로 보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은 편지를 매개로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형식을 빌려 내면을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꼭 붙잡고 있던 과거를 놓아버림으로 마음의 자유를 찾는 것.


나는 내 과거를 선과 악 모두 다른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한 셈이네. 그러나 아내만은 단 한 사람의 예외로 해주게. 나는 아내에게는 아무것도 알리고 싶지 않다네. 아내가 내 과거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억을 가능한 순백으로 남겨두고 싶네.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람일세.’(P312)


 사랑한 죄가 참으로 크다. 사랑을 얻은 승리감에 잠시 행복하기도 했지만 마음에 진 무거운 짐은 그 사랑과 끝까지 함께 가지 못한다. 더구나 배운 지식을 써먹지도 못하고 은둔하는 삶이라니. 좀 더 친구에게 솔직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왕 그렇게 사랑에 엮였지만 숨기지만 말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한다. 행복도 불행도 사랑도 영원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선악의 뒷일까지 일일이 헤아려보고 나서 실행하는 완벽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인들의 삶과 문학작품에서 그런 해답을 만나기도 한다.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은 힘들겠지만, 삶의 태도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문학의 향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머물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질문을 던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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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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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작품은 1910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작   <그 후>의 연재가 끝난 후 신문사가 예고를 위해서 다음 작품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재촉하자, 제자에게 아무거나 좋으니 제목을 붙여달라고 했고 고미야 도요다카의 책상위에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었고, 아무데나 펼쳐보니, ‘문’이란 단어가 눈에 띄어 그것으로 정해 신문사에 알렸다고 한다. 이렇게 남이 붙여준 제목으로 이 작품은 탄생되었다.

 


 ‘그 문을 열면 처마에 닿을 듯 깎아지른 절벽이 툇마루 끝에 버티고 있어서 아침나절은 비쳐도 좋을 한 줄기 햇살마저 쉽게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한다. 잡초가 무성했다. 밑에서 돌로 쌓아 올린 게 아니므로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험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여태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한다.’(p10)

 


 소스케와 오요네가 살고 있는 집의 모습이다. 소세키의 작품 중 부부 중심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림자 드리워진 삶, 불안에 휩싸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간다. ‘물처럼 옅고 담담한’(p188) 그저 친밀감을 표시하는 간략한 말을 주고받다가 가까워진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되돌릴 수없는 상황임을 알았다. 소세키의 작품 중 유일하게 금슬 좋은 부부상을 그렸다. 금슬이 좋아보이기는 하나 그 둘 사이에는 체념과 인내 같은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미래나 희망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금슬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좋지만 자식에 관해서는 보통 사람보다도 불행했다.’(p161) 아이를 가졌으나, 세 번이나 잃었다. 달을 못 채우거나, 채우고 낳았어도 울음소리 없는 차디찬 ‘살덩이’뿐이었다. 연거푸 아이를 갖는데 실패하자 점쟁이를 찾았는데, 폐부를 찌르는 듯한 말을 듣게 된다.

 


“당신은 자식을 못 가져.”

“왜죠?”

“당신 어떤 사람한테 몹쓸 짓을 했군. 그 귀신에 씌어 죽어도 자식을 못 가져”(p169)

 


 사회활동에서 접할 수 있는 경험과 기회를 스스로 차단했다. 삶은 점점 단조로워졌다. 그럴수록 둘의 존재는 절대적이 되어 갔다.

 


 ‘외부를 향해서 성장할 여지를 찾지 못한 두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의 생활은 폭이 좁아질수록 더 깊어져갔다. 그들은 육 년 동안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하지 않은 대신 육 년의 세월에 걸쳐서 서로의 가슴을 파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에까지 파고들었다.’(p172)

 


 현재 상황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하나 펼쳐 보이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지만, 그는 한 때 상당한 재산이 있는 부모를 두었고, 쾌활한 성격에 복장이며 얼굴에서 빛이 났었다. 친구라면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소스케에게 모여들곤 했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벼랑 위의 주인집 남자 사카이와 점점 친해졌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섣달 그믐날 자꾸 놀러오라고 청한다. 세상 사는 이야기며, 골동품 이야기도 하고.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던 소스케는 그의 세상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동생 고로쿠를 자신의 서생으로 삼고 중단했던 공부를 시키는 건 어떠냐는 사카이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한다. 거기까지 듣고 인사를 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천천히 더 놀다가라는 만류로 앉아 있다가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던 그 이름을 듣고야 말았다. 대학 친구 야스이.

 


 추측은 맞아 떨어졌다. 속 썩이던 동생이 조만간 몽골에서 야스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오기로 했고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꼭 오라고. 소스케는 사색이 되어서 주인집을 나와야 했다. 친구 야스이를 배신했던 소스케. 학교도 중단하고, 친구도, 부모도 친척도 모두 버렸다. 아니 버림을 받았다. 세상도 등져야 했다. 그 어두운 과거 때문에 다시 벼랑 위에 선 심정이 된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산문(山門)을 찾는다. 마음의 구원을 받고자 찾은 절에서조차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고 ‘초상집 개’ 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p264)

 


 소스케는 야스이와의 만남을 피했다가 돌아왔지만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주인집 사카이를 찾았다가 이런 말을 듣는다. 초봄만 되면 개구리 부부가 장난꾸러기들의 돌에 맞아 죽은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서, “그런 걸 생각하면 당신이나 나는 실로 행복한 거예요. 적어도 부부가 되어 있는 게 밉살스럽다고 돌로 머리를 얻어맞는 공포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쌍방이 모두 이십 년이고 삼십 년이고 안전하다면 그거야말로 경사스러운 일이 틀림없지요.”(p272~273) 사교에 익숙한 사카이의 농담 섞인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마음속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애와 끔찍함이 떠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을 수 없다. 어찌하다보니 그런 지경에 이르렀고, 죄책감이 똘똘 뭉친 마음으로 체념하고 인내하며 오로지 자연의 혜택인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믿고 삭이면서 살아간다. 통속소설처럼 화끈하고 행복하게 살지도 못하고 어두운 과거로 인해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봄이 왔다고 좋아하는 오요네에게 다시 겨울이 올 거라는 소스케의 대응에서 끝없이 순환되는 자연과 삶의 희로애락이 겹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아 <태엽 감는 새>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뿐인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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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 일본 메이지시대 말기 도쿄의 대학생을 그린 청춘 교양소설 문학사상 세계문학
나쓰메 소세키 지음, 허호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일본 메이지 시대 말기 도쿄의 대학생을 그린 청춘 교양소설이라고 불리운다. 앞서 읽은 <풀베개>와 달리 초반부터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재미에 쏙 빠져 들어갔다. 순박한 청년 산시로(三四郞)는 구마모토에서 올라온 시골 청년으로 대학 진학을 위하여 도쿄에 상경한다.  지적 탐구 등 대학 생활에 대한 희망을 가득 안고 말이다. 도쿄행 열차 안에서 만난 여자와 나고야에서 내리게 된다. 여자가 혼자서는 불안하다며, 숙소를 안내해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산시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용기는 더욱 없어서 대충 대꾸했다. 허름한 여관에 들어갔는데, 이 여자와 자신은 일행이 아니라는 해명도 못 한다. 산시로가 먼저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여자는 “등을 좀 밀어드릴까요?” 한다. 괜찮다고 해도 나가지 않고 오히려 들어온다. 당황한 산시로는 욕조에서 뛰쳐나온다.



  여자는 떠나면서 “당신은 어지간히 배짱이 없는 분이군요.”한다.(p13) 산시로는 그 여자와 헤어진 후 곰곰이 생각하는데, ‘23년간 숨겨왔던 약점을 단번에 들켜버린 심정이었다.’(p14)


또 다른 짙은 수염의 사내는 “후지산은 일본 최고의 명물이야. 그것 외에 자랑거리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후지산은 옛날부터 있던 자연경관이니까 뽐낼 것도 못 되지. 우리가 만든 게 아니거든.” 산시로는 러일전쟁 이후에 이런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p21)



 도쿄에 온 산시로는 온통 놀랄 일 뿐이었다. 전차의 땡땡 울리는 소리에 놀라고 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람을 보고 놀란다. 도시의 파괴와 건설의 격렬한 활동에 놀란다. 여태까지 배운 것으로는 놀라움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멍해지고, 두렵고,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뭐가 뭔지 모를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는 노노미야를 만나게 되고, 학교에서는 요지로와 친구가 된다. 요지로는 ‘살아있는 머리를 죽은 강의로 가득 채워봤자 희망이 없다’며 일단 전차를 타는 게 가장 초보 단계이며 제일 쉽다고 한다. 강의는 쓸모없지만, 도서관은 중요하다고 한다. 대단히 수완이 좋은 요지로는 히로타 선생의 식객이다. 대학에서 서양인 교수를 들이려고 하자, 그들은 융통성이 없다며, ‘신시대의 청년들을 만족시켜줄 만한 사람을 끌어와야'(p154) 한다고 말한다. 요지로는 히로타 선생을 대학 교수로 만들겠다며, <위대한 어둠> 이라는 논문을 쓰고, 학생들 모임을 주최하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의견을 내놓고 활약하지만, 끝에 가서는 일을 망친다.



 ‘광선의 압력’을 연구하는 노노미야, ‘철학의 연기’를 뿜어대는 히로타 선생, 노노미야의 여동생 요시코, 노노미야를 존경하는 미네코, 미네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하라구치(原口), 산시로는 이들과 전시회, 연극 등을 구경하며 어울린다. 노노미야, 산시로, 미네코가 삼각구도인가 생각 했는데, 의미를 알 수 없는 Stray sheep(길 잃은 양, 미아)을 중얼거리며 산시로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해 놓고, 미네코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산시로는 그렇게 요지로에게 휘둘리고 빌려준 돈을 떼이기도 하고, 마음에 두었던 미네코와 어긋났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방황하지 않는다. 충동적이지 않고 절제하는 자아상을 보여준다. 교양소설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오히려 요지로가 이끄는 대로 어울리며 도쿄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간다. 아직까지 ‘절실하게 생사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p240) 산시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세 가지의 세계 사이를 넘나든다. 그 중 세 번째 세계 찬란한 봄날처럼 빛나는 웃음과 환성, 아름다운 여성상이 있는 심오한 세계는 산시로가 접근하기 어렵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이 세계는 결국 어긋났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좌충우돌했던 도쿄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 후로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100년이 넘은 작품임에도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언제나 청춘의 시기에 고민하고 마음 쓰는 대상은 거의 비슷하니까. 도쿄 대학에 있는 ‘산시로의 연못’에 가면 나쓰메 소세키의 고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을까. 흔적이야 송두리째 사라졌겠지만, 언제 다시 도쿄에 간다면 작품속의 배경이 된 그 자리를 돌아보면서 내리쬐는 햇살과 공기를 한 번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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