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하이쿠
마쓰오 바쇼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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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이쿠 선집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하여 하이쿠의 대가인 마쓰오 바쇼와 이름만 들어도 설렐 만한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16명의 하이쿠 444구가 실려 있다. 하이쿠(俳句)5, 7, 5의 열일곱 자로 이루어진 일본 고유의 정형시이다. 에도 시대에 하이카이(俳諧)라고 하는 연가(連歌) 형식이 유행하였는데 한 사람이 5, 7, 5음으로 첫 구를 지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7, 7음으로 구를 짓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가는 시가 형식이었다. 그때 첫 5, 7, 5음의 구를 홋쿠(発句)’라고 하는데 에도 시대 하이쿠의 성인으로 불리는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는 바로 이 홋쿠를 가리킨다고 한다.(역자 후기 참조)

 



하이쿠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자연계, 또한 그에 따른 인간계의 현상을 읊은 것이다.’-다카하마 교시(책 뒤표지)

 



이처럼 선집에 실려 있는 하이쿠도 사계절로 나뉘어 있다. 보통 하이쿠 선집에는 해설이 달려 있는데, 이 책에서는 해설을 싣지 않았다 한다. 독자 저마다의 방식과 느낌으로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번역은 원문에 맞춰 열일곱 자로 옮기려고 했지만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에 중점을 두었고 원문과 함께 음독을 병기 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본문의 작자명은 성씨를 빼고 표기하였다고 일러두기에서 언급한다. 많은 하이쿠 중에서 여운을 남겼던 몇 편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불을 덮고

편지를 쓰는구나

봄날의 감기

-시키(p18)

 


목련나무의

꽃으로만 가득한

하늘을 본다

-소세키(p22)

 


봄비로구나

몸을 바싹 붙이고

우산은 하나

-소세키(p23)

 


목련꽃과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동일시하여 묘사한 소세키의 하이쿠가 절묘하다.

봄비가 내리는 우산 속에 두 사람. 연인일까, 친구일까, 아이와 엄마일까.

아무튼,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에 젖지 않으려면 바싹 붙어서 갈 수밖에.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기를 권한다. 짧은 하이쿠에서 계절의 흐름과 리듬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짧은 하이쿠처럼 경제적이고 심플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여름

 


병이 나아서

내 손으로 장미를

꺾었다네

-시키(p51)

 



마사오카 시키는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학자 중 하나로 근대 하이쿠를 정립했다 한다.

20대부터 악화된 결핵으로 7년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서른넷에 세상을 떠났다. 한 송이 장미를 꺾는 일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건만,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니 참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아프고 난 뒤 건강을 찾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던지. 많이 아파본 적 있는 이라면 모두 공감할 만한 하이쿠다.

 



양귀비꽃

그런 식으로 지니

버릇이 없네

-소세키(p56)

 



양귀비꽃이 어떤 모습으로 지는지 모르겠다.

소세키는 양귀비꽃을 아주 좋아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예쁘게 지는 꽃이 있을까. 피어있을 때는 아름다워도 떨어진 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버릇없이 진 양귀비꽃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재치있게 쓴 하이쿠에 미소가 지어진다.

 



짧은 밤이여

얕은 여울에 남은

한 조각의 달

-부손(p63)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 비비고

발도 비빈다

-잇사(p70)

 



한여름에 귀찮게 달라붙는 파리들. 쫓아도 쫓아도 계속 날아든다.

쫓다가 지쳤나. 왠지 측은지심이 발동했나 보다. 손과 발을 비비며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듯한 파리의 모습이 애처로운지 때리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옛 문인들은 유머를 즐길 줄 알았다.

 



가을

 


뾰로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도라지꽃이네

-소세키(p98)

 



새하얗고 신비로운 보라색으로 활짝 핀 도라지꽃을 처음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뜨거운 어느 여름날 바람에 하늘거리던 도라지꽃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봉오리 맺은 도라지꽃을 입을 다문 듯 뾰로통하다고 표현한 소세키 님은 나를 더욱 감탄하게 했다.

 

가을의 비가

멎고 나면 눈물이

마르려나

-도요죠(p109)

 



가을밤이여

장지문의 구멍이

피리를 분다

-잇사(p115)

 



가을을 노래한 하이쿠도 재치가 느껴진다. 무슨 마음 아픈 일이 있었나. 가을비를 보면 더욱 눈물이 나는 걸까. 어서 빨리 가을비가 멈추면 좋겠다. 화자가 눈물을 멈출 수 있게.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시원한 바람에 안도하지만, 어느새 살갗에 소름이 돋는 서늘함이 찾아온다. 장지문 구멍으로 들어온 바람. 장지문도 피리를 부는구나. 이렇게 일상에서 계절이 바뀌고 변화하는 것을 시인은 놓치는 법이 없다. 하이쿠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주변의 사물을 바라보며 한번 말을 걸어보라고 일러주는 듯하다.

 



겨울

 


못 다 쓴 원고에

틀어박힌 겨울의

해가 짧구나

-소세키(p135)

 



글 쓰는 작가에게 있어 원고 마감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책상 앞에 마냥 앉아있다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은 아닐 테니.

금세 해가 저무는 겨울의 짧은 하루가 못내 아쉽다.



오므려 붙인

추운 밤의 무릎이여

책상 아래

-히사죠(p159)

 



왠지 나도 쓸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쉬운 하이쿠다.

책상 앞에 앉아 곱은 손을 호호 불며 글을 쓰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사람 가고

두 사람 다가오는

모닥불인가

-만타로(p162)

 



추운 겨울의 모닥불. 한 사람 한 사람 모닥불 앞에 빙 둘러앉는다.

여럿이 모여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이 정겹다. 모닥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이웃들의

다정한 이야기도 솔솔 피어오르겠지.

 



이 선집에는 나쓰메 소세키와 시키의 하이쿠가 특히 많이 실려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대학 시절 친구인 마사오 시키에게 하이쿠를 배웠으며 2,600구의 하이쿠를 남겼다 한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보냈던 시키는 병든 자신의 상황을 묘사한 하이쿠가 많았다. 아픈 몸이지만 붓을 놓지 않았던 문학에 대한 열정에 뭉클해졌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요즘 공원을 걷다 보면 너무나 기분이 좋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살아가는 이끼는 이끼대로 연두색 새잎이 계속 자라나는 나뭇잎들은 나뭇잎대로 그 자체로 아름답다.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한다. 바쁜 일상이지만 자신을 위해 짧은 시간이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하이쿠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마음의 여유를 찾는 멋진 휴식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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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치열하고도 즐거운 번역 라이프, 개정판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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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뜻이 있어 번역가들이 쓴 책을 읽어나가는 중이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막연한 꿈을 꾸게 된 건 2016년 여름이었고 벌써 몇 해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한 권의 책을 썼고 올해는 4개월 과정의 번역 수업 클래스를 졸업했다. 나이 들어도 정년이 없고 혼자 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최적의 직업이라는 점 등 번역가의 장점에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부풀곤 했다. 그런데 번역가들이 쓴 책을 읽으면 상상한 것처럼 멋지기만 한 직업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 살짝 두려운 마음 까지 생긴다. 일반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며 휴일도 없이 여행도 거의 포기하며 살아야 하는 삶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우선은 실력을 쌓는 게 먼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벌써 빠져나가려는 핑계를 앞세우는 것 같다.

 



3년 전에 권남희 님의 에세이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도 정말 재미있다. 번역가 인생 20년을 돌아보며 정리하여 2011년에 출간한 것을 다시 엮은 책이다. 좀 더 상세한 작가의 삶을 알게 되었다. 싱글맘이 되어 딸을 키우며 얼마나 치열하게 번역을 하며 살아왔는지. 하지만 자신은 번역을 취미처럼 즐긴다고 했다. 맞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특히 번역일은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힘든 일일 것 같다. 번역 수업에서 강사님은 번역가의 수입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에 절실하게 공감하였다. 첫 번역을 하고 재번역을 하고 교정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외국어 실력도 중요 하지만 국어 실력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설이 길었다.

 



자신의 번역 인생의 8할은 운발에 있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무라카미 류가 슬슬 독자들에게 알려지며 젊은 일본 문학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침투하기 시작할 무렵에 번역을 시작했다 한다. 친구의 상사의 지인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출판사를 소개받고 번역 인생이 시작된다. 열심히 번역한 책이 처음엔 다른 역자 이름으로 실리거나 악덕 출판사에 번역료를 떼이는 등의 베테랑 번역가라면 누구나 겪었을 난감했던 에피소드도 들어있다. 9년 만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딸을 키우며 번역일을 해서 집도 사고 베테랑 번역가로 자리매김하는 찡하고도 뭉클한 스토리를 얼마나 담담하고 재미있게 풀어냈는지. 얼마나 번역에 진심인지, 그 치열한 삶의 이야기에 금세 몰입하며 읽었다.

 



권남희 님이 번역한 몇 권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츠바키 문구점, 달팽이 식당등 몇 권 안 되지만 공통점은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일본 소설 하면 권남희 님이 떠오를 정도다. 번역가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도움받을 이야기가 가득하다. 처음부터 번역가가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지만 번역을 하게 되면서는 그 일을 즐겼다. 8할이 운발이라는 얘기가 여러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마치 이 운발이 열정적인 태도가 끌어당긴 시크릿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일이 끊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때도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면서는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고 인지도도 높아지면서 수입이 늘어났다고 한다. 30년 넘도록 번역한 작품에 대한 애정, 편집자와의 관계, 번역 노하우 깨알 팁, 번역료 수입은 얼마인지 등 번역가 지망생들이 궁금해할 내용을 자세하게 알려준다. 베테랑 번역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건 아니었다. 번역하면서 자신이 실수했던 에피소드를 반성하며 들려주는 조언은 번역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꿀팁과 삶의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끈기도 없고 싫증을 잘 내서 무슨 일이든 작심삼일을 되풀이했지만, 번역은 연애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하고 있단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즐겼고 소설가를 꿈꿀 만큼 문학을 좋아한 덕분이 아닐까. 번역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삶에 대한 절실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읽는 내내 부러운 마음과 함께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싶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이제 시작이고 언제 이룰지 모르니까. 그럼에도 한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좀 더 즐겨 보기로 했다. 번역가의 꿈을 이룰지 어떨지 모르지만, 시험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일 테니. 내게 커다란 격려와 응원이 되었던 말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서 리뷰를 마치려고 한다.

 



내게 이란 거의 취미생활에 가깝다. 일에 쫓기며 일의 노예처럼 사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일하는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기 때문에 다른 짓을 하고 놀다가도 바로 노트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이어도 종종 슬럼프는 찾아온다. 사춘기 되돌이 현상인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뭐 하나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인 것이, 그러다가도 새로운 작업이 들어오면 언제 슬럼프였느냐는 듯 밤샘도 불사하는 열정이 팡팡 솟는다.’(P115)

 


번역하기 쉽고 재미있는 책만 선호하다 보면, 달콤한 초콜릿과 사탕만 좋아하다 치과 가는 아이 꼴이 날지도 모른다. 이건 내 힘으로 절대 무리일세, 싶은 작품만 아니라면 다양한 작품을 매끈하게 소화해내는 것이 능력이다.’(P151)

 


몇 번 성의 없이 교정보고 넘겼더니 일 끊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동안 쌓아온 인지도고 경력이고 다 소용없었다. 번역의 세계는 실력, 이름, 학벌, 그중에 제일은 실력인 곳이다.’(P159)

 


일이 없을 때는 무조건 읽고, 쓰고, 공부하기,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책들, 긁적거린 글들이 쌓여서 분명 다음 번역을 반짝거리게 할 것이다. 안다. 조급함과 초조함에 여유롭게 활자를 음미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걸. 그렇지만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드문드문 들어오던 일마저 떨어질지 모른다.’(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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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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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물론 악취가 가장 심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도시였기 때문이다. 파리 안에서도 특히 악취가 지옥의 냄새처럼 배어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 거리와 페론리 거리사이에 위치한 이노상 묘지였다. 8백 년 동안 시립병원과 주변의 교구에서 죽은 시체들이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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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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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 때 두 차례 진보초 고서점가를 다녀온 후, 언젠가 그 책방 거리를 누비면서 나날의 기억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번역 수업 시간에 야기사와 사토시의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을 알게 되고 꼭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두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시점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히데아키와 1년 동안이나 사귀고 있던 다카코는 어느 날 그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다카코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10년 동안 만난 적 없던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가 운영하는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내면서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는 이야기다.

 


허리 아픈 외삼촌이 병원에 다녀올 동안 서점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아직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카코가 곰팡내 나는 중고책 서점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잠에 빠져사는 다카코를 보며 외삼촌은 걱정한다. 어느 날 아침 다녀올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외삼촌의 말에 다카코는 시큰둥한다. 앞으로 몇 시간을 자든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자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50년도 넘었다는 외삼촌의 단골 가게라는 카페 스보루는 다카코의 기분 좋게 하였고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스보루에 다녀오고 나서 다카코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반전처럼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될 만큼 그곳을 좋아하게 된다. 데면데면하기 그지없던 외삼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숙맥이라고 여겼던 외삼촌이 다르게 보였다.

 


돌연 집을 나가 5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외숙모 모모코, 잔소리꾼 같았던 단골손님 사부 씨, 카페 스보루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점점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다카코의 인생 대반전을 기대했는데 약간 밋밋한 결말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참 따뜻한 소설이다. 다카코를 천사라고 여기며 응원해 주는 외삼촌을 보며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뉘우친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는 외삼촌의 마음을 이제야 알다니. 갑자기 떠났던 외숙모는 왜 돌아왔을까. 외삼촌은 모모코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다카코에게 부탁을 하지만 모모코는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모모코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채 따라나선 다카코는 지난날의 외숙모의 아픔을 알게 된다. 다카코가 쓰라린 실연을 겪은 후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낸 날들은 다카코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어쩌면 모리사키 서점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품어주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외삼촌은 다카코에게 오랫동안 방황했던 경험을 들려주면서 모리사키 서점이야말로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야.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내 인생의 전반부가 지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항구로 돌아와 거기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나에게 이곳은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야.”(79P)

 


다카코는 어느새 히데아키를 원망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늘 적당히수동적으로 살았던 태도를 반성한다. 헌책들의 곰팡내가 떠도는 모리사키 서점 2층 작은 방이 그렇게 소중한 공간이 될 줄이야. 책을 좋아하고 진보초 책방 거리를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따뜻한 이야기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자신이 좋아하는 소중한 공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닐까. 모모코가 다카코에게 여행을 권유한 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이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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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p.79에 나오는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라는 말이 굉장히 공감이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쵸. 이 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네요. 4월에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4-01 10:44   좋아요 1 | URL
예 감사합니다. 모나리자 님도 보람찬 4월 되시길 바랍니다!

모나리자 2024-04-01 1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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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너무나도 가슴 뭉클해지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묘미는 독자들을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는 반전이 아닐까. 그런데 이 소설은 끝까지 반전을 보여주지 않고 주인공 스토너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그대로 조망한다. 마치 그에게 주어진 총체적인 삶의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 구경이나 하자는 듯 작가는 아무런 미사여구도 보태지 않는다. 1월 중순에 읽기 시작했는데 우선순위 일에 밀려 멈추었다가 최근 다시 붙잡고 몰입하여 읽었다. 읽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애잔한 여운이 남아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1965년에 쓴 이 작품은 50년이 지나서야 유럽 독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단다. 아마도 그 시대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뒤늦게 알려진 게 아닐까, 작가에게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업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좋겠다는 부모의 말씀에 따라 미주리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영문학도의 길을 걷고 교수가 되어 4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한다. 놀랍지 않은가. 농업기술을 배워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려고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났는데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강의를 듣다가 스토너의 삶은 혁명적으로 변화된다. 슬론 교수는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를 가르치는 중에 느닷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그 질문을 스토너에게도 들이대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무렵부터 토양화학 등 농업 과목이 낯설게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농과대 커리큘럼은 모두 빼버리고 철학과 고대역사 기초강의와 영문학 강의를 듣기 시작한다. 도서관의 서가를 누비며 신세계라도 발견한 듯 빠져들며, 그의 문학을 향한 관심은 점점 깊어만 간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참전하는 분위기 속에서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의 도움으로 강의를 시작하고 나중에는 종신교수가 되기에 이른다. 문리대 학장인 조시아 클레어몬트의 사촌뻘인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거기까지만 보면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설렜던 스토너는 결혼하자마자 곧 실패한 결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어머니의 집요한 교육관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안고 성장한 이디스는 스토너가 가까이 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한 것일까. 딸 그레이스를 낳았지만 이디스는 아프다며 늘 누워 지냈기에 육아도 살림도 스토너 몫이었다. 그레이스의 기저귀를 갈고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이디스에게 줄 수 없는 사랑을 딸에게 줄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해했다. 멋대로 스토너의 서재를 뒤집어놓고 구석방으로 내몰렸어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순한 양처럼 참고 견디는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레이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시샘하며 떼어 놓는 등 약한 척 꾀병을 부리던 이디스는 본색을 드러내며 스토너를 괴롭힌다. 놀랄 법도 한데 스토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나마 누릴 수 있는 작은 일에 감사하며 체념한다. 인내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는 주인공 스토너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았다는 점에서 그가 진짜 영웅이며, 그의 삶이 결코 슬프고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했단다. 역시 그 부분은 공감할 수 있다. 완벽한 삶은 없다고 했던가. 열변을 토해 가며 영문학을 가르치고 그를 시기하는 로맥스나 워커, 이디스 등 악의 무리에게 당하면서도 한마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헤쳐가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에게 학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캐서린과 잘 되었다면 가난하고 불행한 그의 삶이 조금은 보상이 되었을 텐데. 어쩌면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했기에 고독과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다가 병으로 몸져누워 지난날을 돌아보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병든 몸으로 죽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한없이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은 스토너는 이디스를 부르려다 말고 자꾸만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갈까. 훗날 언젠가 행복이 올 거라 믿으며 지금을 대충 살기도 하지 않나. 죽어가는 스토너의 독백은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지금 함께 하는 가족, 지인,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친절한 말 한마디와 미소를 나눌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나중은 없다. 지금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삶이 되지 않을까. 스토너의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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