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히가시노 게이고는 '치밀한 트릭'과 '인간의 따뜻함'을 병렬 배치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선량한 마음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어서, 읽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그러한 작가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소설이다. '환광원'이라는 소재로 서로 무관해 보이는 네 인물을 연결하려는 노력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탁월한 인물 묘사는 그것을 무색하게 만든다. 네 명의 인물이 모두 가공의 인물임을 알면서도, 그들의 사연에 공감하거나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순전한 작가의 역량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신비한 잡화점에 머물다 보면, 각 인물 간의 느슨한 연결 고리도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 소설은 일본 근현대사의 단면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일본의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시즈코), 전쟁 이후의 분위기나 가업에 대한 인식(가쓰로), 비틀스 열풍과 도쿄 만국박람회(고스케), 일본의 경제 호황과 불황(하루미)이 자연스럽게 각 주인공의 이야기에 녹아 있다. 그들의 고민과 사연은 시대적인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시대의 변화와 무관한 나미야 잡화점의 모습이 그들을 더욱 그곳으로 이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험난한 세월을 보냈어도, 환광원만큼이나 잡화점과의 인연은 끈질기다. 과거의 인물들이 미래에서 받은 조언은 그들을 그 조언이 쓰인 현재로 인도한다. 그 지점에 모두가 함께 도착하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고민을 털어놓을 때, 마음속에 답을 정해 놓는다. 단지 자신의 결정이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고민 상담을 한다. 나미야 잡화점의 삼인방이 상대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랬다. 가쓰로는 바람과 같은 인생을 살았고, 하루미는 삼인방으로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시즈코와 코스케는 그들의 조언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대신, 전자는 마음속의 준비를 마쳤고, 후자는 아버지의 행동으로부터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쇼타, 야쓰야, 고헤이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익명의 제보자들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거나 의심을 더해서 최선의 결정을 하도록 만들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즈코와 가쓰로, 고스케와 하루미의 선택들은 이지선다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때 이런 선택을 했다면, 이들의 운명이 달라졌을까?"라고 쉽게 질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정적 선택보다 중요했던 것은 살아가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그들 모두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죽어가는 연인, 좌절된 재능, 집안의 몰락, 그리고 책임져야 할 가족....... 어느 하나 중대하지 않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 중압감은 젊은 시절의 그들에게는 충분히 무거웠다. 하지만 네 사람 모두 기어이 삶을 택했다. 아니, 다섯 명이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한때 자신의 삶을 저주했으나 세리의 충고로 깨달음을 얻은 가와베 미도리의 아이까지. 또한, 세대를 건너뛰어 기적을 전하려 했던 나미야, 다카유키, 그리고 슌고의 헌신은 정말 사소해 보이지만, 누군가의 삶을 살린 값진 행동이었다.


 모든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선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작은 결정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선택들의 기저에는 선량한 마음과 삶을 향한 의지가 깔려 있다. 나의 안위와 행복을 위한 선택도 필요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선택을 했다면 이 세상에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선택, 접했던 모든 지식, 깨달은 모든 지혜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순간 역시 앞으로 있게 될 더 큰 기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기적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나와 당신의 사소한 선행과 진심 어린 충고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래로 건너갈 것이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만큼 소중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7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선 역자의 번역을 칭찬하고 싶다. 도스토옙스키의 가장 위대한 점이자, 그를 번역하기 어려운 작가로 만드는 점은 예측할 수 없이 튀는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점이다. 『백야』에 수록된 작품들의 번역이 대체로 이러한 심리 묘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러시아어 전공자가 아니라서 원문이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겐 꽤 깔끔하게 읽혔다.


 이 책에 실린 중·단편은 인간의 불완전한 심리와 그로 인한 비극적 또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싣는 데에 집중한다. 물론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품들도 있지만, 현대의 독자들에게 조금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풍자 소설이나 표제작인 「백야」에 담긴 정신 추적극이리라. 이 작품들에 나타난 치열한 고뇌들이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에 반영되는 것을 보면, 도스토옙스키 입문서로 적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단연코 「악어」였다.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고전 소설답지 않게 예측할 수 없는 줄거리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반 마트베이치는 아내인 옐레나 이바노브나와 함께 파사주에서 악어를 구경하다가 산 채로 잡아먹히고 만다. 이로 인해 악어의 배를 갈라 남편을 구해야 한다는 옐레나와 귀하디귀한 악어를 지켜야 하는 악어 주인과의 말다툼이 일어난다. 이 때만 해도, 인간의 생명이 고작 악어보다 못하는 씁쓸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이반이 그 안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가는 그가 악어 안에서 생존해 있으며, 오히려 그 상황을 이용하려 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그때부터 「악어」의 전개는 일반적인 소설과 달라진다.

 

 작품의 논쟁은 이런 것들이다. 이반을 살리기 위해 악어의 배를 가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악어의 뱃속에 머무는 것이 공직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급휴가를 주어야 하느냐 마느냐로 논쟁하며 이반의 오랜 친구인 서술자는 이반이 악어 뱃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바꾼다는 헛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와중에 서술자는 이반의 아내인 옐레나를 흠모하고 있어서 친구의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찾아간다. 이러한 대혼란의 한복판에서 소설은 종료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후의 내용을 상상해야 한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뭐, 이반이 악어 뱃속에서 빠져나온다면 그의 모든 망상과 '나'의 헛된 희망도 사라지겠지만, 정말로 그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수천 번도 넘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으니까.


 도스토옙스키의 무릎을 탁 치는 심리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심이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마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은 백야와 같아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도 맞는다. 밝은 밤이나 어두운 낮처럼, 극단의 모순 속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실제로 불완전한 인간의 심리를 추적하다 보면, 서로 모순된 상태가 공존하며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밝은 면이 승리하지만, 어두운 면이 승리하면 인생이 진행된다. 인생이 고통이고 사랑이 매임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그는 알았던 탓인가? 사상이나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은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어둠을 조명하는 그의 작품들은 늘 잠들었던 정신을 깨우는 힘을 가진다. 나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자기'라는 우상을 파괴할 때, 그의 소설은 꽤 도움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기분 좋은 익숙함이 나를 반겼다. 문장 부호의 최소화를 이용한 긴 호흡의 서사,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 독특한 기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의 장편소설에서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문장 부호 전체를 배제하는 주제 사라마구와 달리, 『아침 그리고 저녁』은 적절한 장소에 마침표를 찍는데, 이 문장부호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찾아내는 것도 큰 재미 있다. 사실 나는 속독으로 읽은 편이라, 마침표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역자의 친절한 해설이 있어서 짧지만 어려운 이 소설을 조금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하면, 요한네스라는 노인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요한네스의 영혼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수용하여,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사(또는 삶)를 죽음 이후까지 연장한다. 이러한 시도 역시 욘 포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죽어서 눈을 감은 이후의 순간까지 삶이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고, 죽은 자에게도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기회를 준다. 삶과 죽음을 단절과 이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마침표마저 생략하여 영혼의 마지막 장면을 포착하는 이 작품의 시도는 가히 새로운 충격을 준다. 


 삶과 죽음은 분명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일생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면, 그 사람의 일생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타인의 삶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상, 어떠한 작가도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다만, 이 대담한 작가는 삶과 죽음의 원형 또는 순환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침묵 속에 언어를 담는다. 실로 그것이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언제나 침묵보다 적은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한편으로, 『아침 그리고 저녁』의 배경이 되는 피오르의 느긋한 자연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된다. 한평생을 어부로 살아온 요한네스가 수영을 배우지 않는 것에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한 노인의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언제나 무엇인가를 정복하고 개발해야 그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한가로운 삶이 반복되는 피오르의 생활은 달가운 일일까, 따분한 일일까? 우리는 심심풀이가 없는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어는 진리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언어를 통해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은 두 차례의 전쟁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질문과 방황하는 생존자들이다.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의 데뷔작인 『브이.』(V.)를 보면서 나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를 떠올렸다. 고도(Godot)가 무엇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듯이, '브이.'의 실체도 언어로 한정되지 않는다. 두 작품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베케트의 희곡 속의 등장인물들이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데에 반해, 핀천의 소설 속에서는 '브이.'를 찾으려는 일말의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브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품의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브이.'는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단 또는 추상적인 개념을 대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암호를 해독하는 자들이 정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브이.'의 대상을 한정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브이.'의 실체를 발견하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소설에 언급되는 암호문을 예로 들자. 그들이 해독해야 하는 내용의 정체는 암호문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암호문이 적힌 종이 전체이다. 다시 말해, 숲 속에 있는 사람들이 숲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정답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숲 전체를 파악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그 정답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두는 각자의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 각자에 걸린 제약은 끝내 이해를 가로막으며, '브이.'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민족성, 성적 취향, 성별, 성격, 그러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을 구속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핀천은 그러한 상황을 일방적으로 전쟁 탓으로 돌리지는 않는다. 전쟁을 겪고 난 이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고, 세계 대전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통째로 뒤흔들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서로를 잘 이해했는가? 인간은 어떻게든 타인에게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넓혀가기에 바쁘다. 사람마다 '브이.'를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핀천은 그 무수히 갈라지는 '브이.'(브이를 문자 그대로 보면 두 갈래로 나뉘는 길처럼 보인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의되지 않는 사랑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그것의 힘을 축소하기보다, 우리 안의 편견과 제약을 능히 해소하는 것이 곧 사랑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비록 작가는 세상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조차 질색하는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작품인 『브이.』에서 드러내는 지식의 집약성과 방대함은 그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그는 "꼭 그렇게 사람 간의 사이를 구분하고, '브이.'가 무엇인지 찾아야만 속이 후련하냐?"고 묻는다. 언제나 그렇게 편하게, 자기 중심대로 살아가야만 하느냐고 따진다. 사랑은 분명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기준으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만든다. 만약 그 말에 동의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언어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사랑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페이지에 적힌 언어 너머로 내가 발견한 핀천의 마음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특히 몰타 섬에서의 에피소드들)이나 암호들이 있었지만, 지금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브이.』의 마지막 구절이다. 

 프로페인은 어제 처음 만난 브렌다와 손에 손을 잡고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히 그리고 침묵 속에 발레타의 모든 조명(주택들의 전등, 가로등 등)이 꺼졌다.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갑자기 완전한 밤으로 변한 거리를 계속 달렸다. 지금 몰타의 변두리를 그들로 하여금 달리게 하고 있는 건 타성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들을 저 너머 지중해까지도 끌고 갈 것이었다. (734쪽)

 단 하루 만에, 프로페인과 브렌다의 운명은 변했다. 필연적으로 두 갈래 길(V)로 갈라질 프로페인과 브렌다는 이제 하나된 몸(I)으로 길을 내려간다. 소설 곳곳에 배치되었던 두 인물의 하나되는 모습은 그저 상상으로 여겨졌으나, 이 장면에서 나는 가능성을 엿본다. '브이'(V)가 '아이'(I),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나'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로페인과 브렌다(V)가 만나 아이(I)가 되는 그 지점에 질문(Y.)이 있다. 그렇기에 이 방대한 서사시가 단순한 질문으로 끝나는 것은 놀랍지 않다: "산책할까?"


 혹시 당신 마음 속의 '브이.'를 찾지 못해 낙심해 있는가? 자신이 걷는 길의 끝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책은 무수히 많은 실패자들의 기록이며,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인물들의 여정 끝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물체니까. 소설 속에서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과 같다. 정답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질문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브이.'를 헛되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물어야 한다. "다시 떠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림형제 동화전집』과 『안데르센 동화전집』을 한 번에 사서 각각 비교하며 읽는 체험은 분명 특별했다. 전자가 동화치고 훨씬 잔인하고, 후자가 따뜻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나, 넓게 보면 독일의 동화와 덴마크의 동화는 그 대담함이나 상상력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림형제와 안데르센은 당대의 통념을 깬 이야기를 제시했으며, 그 방식이 다양했을 뿐이다. 가상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자신에게 인상을 남긴 이야기를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에 이어서 성냥팔이 소녀와 인어공주의 사연을 들은 이들은 동화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안데르센의 따뜻한 마음을 발견한다. 


 당연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동화들은 이미 익히 알려진 우화들은 아니다. 얼마 전에 안데르센의 생애에 대한 연극을 관람하기도 해서, 그가 쓴 이야기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찾아내는 대신, 그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조금 더 주목하고 싶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장다리 클라우스와 꺼꾸리 클라우스」가 거짓말쟁이와 어리석은 인물에 대한 웃픈 동화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또 유명한 「눈의 여왕」이 여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악마의 거울 파편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저 바깥 세상에는 아직도 작은 거울 파편들이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거울 파편들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들릴 것이다"(267쪽)이라는 구절은 세상에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 많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안데르센의 동화들 중에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들도 있지만, 상상의 파편들을 엮어놓은 동화들이 적잖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160번째 이야기인 「ABC 책」이다. 여기에는 언어의 힘에 대한 안데르센의 생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알파벳이 갖는 힘은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모든 것이 알파벳이 나열되는 순서에 의존한다. 알파벳은 생명을 주거나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으며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줄 수 있는 힘도 있다"(1153쪽)는 구절에 이어서 A부터 Z까지 각 철자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나열하는 장면은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롭다. 확실히 그의 이야기들에는 당대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풍자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 동화에 대한 나의 감상은 여전히 "따뜻하다"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모욕, 외로움과 오해 속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동화 속에는 좌절과 절망을 담지 않았다. 혹자는 인어공주와 성냥팔이 소녀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이 슬픈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어른들의 생각이야말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안데르센은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도피처 같은 환상의 세계나 하품부터 나오는 교훈 대신, 냉철하고 아름다운 시선으로 눈앞의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기에,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상의 조각도 기꺼이 수용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