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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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화합하려는 마음에서 모든 것은 비롯된다.‘
저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수많은 갈등과 충돌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만들어지고 문제점을 해결해 왔다. 여기서 새로운 생각은 갈등과 충돌을 화합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갈등을 화합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4차 산업혁명이란 모든 인간과 모든 기계가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는 시대를 말한다.˝

이처럼 하나의 소프트웨어 언어로 통합되면 모든 기계가 서로 소통하고 전 세계의 언어 장벽이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과 기계, 가상공간과 현실 공간의 경계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의 개념도 달라 진다. 점점 다양성이 사라지고 서로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는 지금의 획일화된 공간을 보면 머지않아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건축물은 그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그의 전작들이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로 차곡차곡 쌓여진 책이었다면, <공간이 만든 공간>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올라간 건물을 길게 자른 단면도 같은 책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따라 생각이나 문화가 어떻게 변하고 진화했는지, 문화와 사람의 생각이 담긴 공간을 여기저기 찔러 보며 탐구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제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 거리에 놓여진 징검다리처럼 생각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길 희망한다고..
작가의 여는 글이다.

책의 시작은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공간에서의 건축물과 문화를 이해하면서 펼쳐진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의 이야기 속에는 건축의 진화과정을 볼 수도 있다.
동서양 두 문화권은 건축 공간을 대하는 것에도 달랐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의 차이는 강수량에 의해 농사를 짓는 방식에서 생겨났으며, 이런 이유로 건축물도 서로 차이가 났다. 그리고 서서히 서양의 ‘벽 중심‘의 건축물이 동양의 ‘공간‘중심의 건축물과 만나 새로운 건축물로 재창조되는 이야기도 만난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만든 것은 각각의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이다. ‘절대성‘과 ‘수학‘은 서양 문화의 키워드다. 수학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철학과 기독교는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관을 낳았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이성과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반면에 동양의 키워드는 ‘관계‘, ‘비움‘이다.
그리고 동양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용>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동양의 상대적인 가치와 관계를 중시했음을 ‘선‘은 주변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서 유연성있는 선의 개념으로 절대적이지 않다. 공동체에서 튀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 사회는 뛰어나지만 튀는 것‘보다는 ‘무능하더라도 무난한 것‘을 좋게 보는 사회‘다.요즘에도 이 덕목은 최고로 내세운다. 하지만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튀는 것‘은 반대로 제거 대상이 되는 위험이 있다.
상대적 가치관 외에도 ‘비움‘의 덕목은 가능성의 상태로 해석될 수 있으며, 언제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생명의 원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의 비움은 부정적이기 보다 새로운 창조의 준비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한다.

개미 같은 동양, 벌 같은 서양

집단 서식으로 강한 사회성을 띠며 여왕을 중심으로 계층이 나누어져 있고 조직적인 사회성을 띠는 대표적인 곤충이 개미와 벌이다.
이들 곤충의 집를 살펴보면 인간 건축의 동서양 차이와 비슷한 특징을 보여 준다고 한다. 벌집은 서양의 공간처럼 기하학적인 형태, 벌집 모양이라고 불리는 6각형 모듈러구조를 띠고 있다. 6각형의 구조적 안정성과 벌이 살기에 공간 손실이 적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육각형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벌은 원초적으로 원형의 방을 만든다. 하지만 원형은 벌이 방을 만들어 합쳐질 때마다 밀리고 중력에 의해 눌리게 되면서 6각형의 모양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반면에 개미의 집은 복잡한 미로 같은 형태를 띤다. 마치 관계의 회로망을 보는 듯, 개미의 집은 외부 형태는 중요하지 않고 내부 방끼리의 관계가 더 중요한 건축이다.

동양의 공간을 닮아 가는 서양의 공간

동서양 공간의 이종 교배가 일어났으며 이는 세대를 건너면서
가상공간의 확장과 발전을 이루어냈다. 이는 현실 공간에 영향을 미쳐 공간의 의미도 바꾸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공간을 소유하는 대신 소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고 한다.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가상공간 안에 있는 내 SNS공간뿐이다.
이 공간은 내가 찍은 사진과 글만 있으면 구축할 수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든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것들로 채워진 사진들은 ‘디지털 벽돌‘이 된다. 그래서 이 벽을 넘기위해 색다른 경험과 인증샷을 남기려고 애쓴다. 사진이 중요해지다 보니 독특한 인테리어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은 계속해서 다른 공간을 만들어 왔다. 다음 단계로 진화할 때마다 많은 희생을 바탕으로 지혜와 노력으로 발전하여 왔다. 다가올 변화를 걱정하기보다는 새롭게 펼쳐질 세상을 기대하라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남기고 책은 마무리 된다.




책을 읽다가 웃픈 이야기 하나
을지로에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 입학자들만 아는 ‘런던 킹스크로스9와 4분의 3플랫폼‘처럼 비밀 공간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곳에 있지만 다른 차원에 존재하듯 자리하고 있어, 이곳은 간판도 없다. 인터넷 가상공간상에서 정보를 얻은 사람만이 찾아 갈 수 있는 공간이다. 하나 더 이런 가게들은 높은 층에 존재하는데 중요한 것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물관리 차원에서 튼튼한 무릎이 있는 사람만이 찾아 갈 수 있다.

숨은 현실 공간들 찾기
한 공간에 있어도 세대별 누리고 있는 공간의 차원이 달라지는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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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랜드 - 모든 것이 평평한 2차원 세상
에드윈 애벗 지음, 윤태일 옮김 / 늘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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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차원의 눈


책을 쓴다는 것은
‘차원을 넘어선‘ 기발하고 대담한 상상력의
산물인것이다.

빛도 그림자도 없는 모든 것이 평평한 2차원 세상
‘플랫랜드‘

2차원의 세상, 플랫랜드에는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상처럼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은 철저한 신분사회다.
이 책은 1884년에 쓰여진 책으로 무려 100년이 넘은 이야기다.
당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 하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은 이야기에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주인공 ‘정사각형‘의 모험이야기는 판다지에 버금가는 흥미로운 시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조금 어려운 공간의 여러 차원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하는데 있어선 작가가 전문 과학자가 아닌지 의심도 간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에드윈 A. 애보트는 신학자이며 언어학자인 교육자다.
빛바래 책장에 앉아 있는 이 책은 가끔씩 넘기는 책 중의 하나가 된 책이며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끼는 책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플랫랜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플랫랜드의 세상엔 모든 것이 평평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각기 다른 도형들을 서로 구별하기 힘들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직선‘뿐이며 다른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그들이 서로를 구별하는 방법으로는 ‘청각‘과 ‘느낌‘ 그리고 ‘시각‘이다.
플랫랜드에서는 여성의 처지가 가장 비참하다.
여성들은 직선이다.
군인들과 가장낮은 계층인 노동자들은 이등변삼각형이다.
중간계급은 정삼각형, 전문가들이나 신사들은 사각형 혹은 오각형으로 주인공 ‘사각형‘ 신분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 귀족 계급은 육각형부터 변의 개수가 증가하다가 다변형에 이르고 마침내 동그라미에 가까울수록 성직자에 속하게 되는 최고 계급을 말한다.

‘공간‘을 내포한 3차원의 사람들,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2차원의 ‘플랫랜드‘ 사회도 스페이스랜드인 3차원 세계와 다를게 없다.
소수의 ‘동그라미‘들은 수 세대에 걸쳐 플랫랜드의 다수의 사람을 지배해 왔다. 그들의 ‘지적능력‘은 교묘하게 낮은 계급들을 교란시키고 선동하면서 자신들의 계급에서 서로간 싸움을 촉발시켰다.
불평등하게 나눠진 신분 사회와 그것을 지키려는 독재는 지금의 사회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당시 여성의 낮은 인권은 현대에 와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채로 인권 그 중심에 놓여있다.
플랫랜드의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서 ‘시각‘은 상류층의 인식법으로 사는 지역 또한 따뜻한 지역이다. 따뜻한 지역의 안개는 그들의 시각을 더 강화시켜주고, 훈련을 통해서 시각인식법을 발달시킨다. ‘느낌‘은 여성과 낮은 계급의 인식법으로 상류층에서는 지극히 제한하거나 금지시킨다.

불규칙 도형에 관해서 주인공‘ 사각형‘은 규칙성과 동일함에 기초한 사회 체제에서 혼란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도형의 불규칙성에 대해서 충분히 조사하거나 느끼기엔 삶이 너무나 짧아서 형태의 규칙성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형의 불규칙성은 여기서 비행이나 범죄와 같은 뜻으로 그에 따라 다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사각형‘은 중용의 입장에서 어떠한 고착된 절대적인 구획선을 긋지 않겠다고 한다. 이는 책을 쓴 이의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플랫랜드의 삶은 단조롭고 따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미학적,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따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플랫랜드도 과거 조상들의 삶에 다채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던 시기가 있었다.
가장 권위있는 이름 크로마티스테스(Chromatistes, 색체환각)
보수적인 오각형을 제외한 크로마티스테스를 모방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최상류의 귀족계급에까지 퍼져 크로마티스테스의 지역을 다른 지역과 구별되게 하였다. 이는 두 세대가 지나자 플랫랜드에선 여자와 종교인을 빼고는 색깔 없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색채혁명은 플랫랜드의 찬란한 유아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감각적으로 화려함의 극치는 당시 시민들의 가장 평범한 말씨까지도 사상과 언어의 다채로운 풍미로 풍만했다.

˝그 당시 산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었습니다.˝ (p75)

반면에 지적인 예술은 급격히 쇠퇴했다. 그들의 인식법인 ‘시각인식법‘은 더이상 행해지지 않았고 ‘느낌인식법‘도 무시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독점적이고 귀족적인 기술의 금지‘를 외치며 ‘평등‘을 외치기 시작했다. 귀족적인 인식법이 필요없어진 이상 모든 개인과 계급들간의 절대적 평등권을 요구하며 나선것이다. 그리고 여성과 성직자도 색칠을 할 수 있는 색채법에 따라 그 위상이 올라가게 되었다.

사회를 풍미했던 시각인식법이 색채혁명에 의해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든 계층간 평등을 외칠수 있게 만든 색채의 등장과 우두머리 동그라미의 주장 그리고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치뤄진 학살 등
동그라미들은 승리하였고 그 뒤로 색채의 사용이 폐지되었고 그것을 보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단, 동그라미들과 자격을 갖춘 몇몇 과학교사들은 제외되었다.
플랫랜드를 떠받드는 중심축인 동그라미 바로 성직자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관여하는 관리자이며 감독관이다. 그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플랫랜드 모든 일들의 근본 원인이 된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로 접어든다. 이야기의 재미는 여기서 더 흥미롭다. 그 신나는 시간을 뻬앗을 권리는 없는 듯 하여 간략하게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플랫랜드의 지식인 ‘사각형‘의 모험은 걸리버 여행기처럼 이제 시작이다.
그는 다른 세상들을 우연히 여행하게 된다. 포인트랜드, 라인랜드와 스페이스랜드를 여행하면서 그가 깨달은 비밀들을 훗날 손자에게 가르치려했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다.
다른 세상을 아는 ‘사각형‘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
그의 고뇌와 그의 행동은 플랫랜드에서는 미친짓이다. 그리고 감옥행을 부른다.

이책은 SF장르다. 그리고 수학적 논리를 쉽게 풀어놓은 과학 소설이다.
공간의 여러 차원과 그 상대성에 대해서도 정교하다.
재미있는 공상과학소설이며 사회에 대한 비판적 풍자소설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숨어있는 철학 소설이다.
이 모든걸 다 담아놓은 인문서적 같은 책이다. 2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이지만 절대 가벼운 책은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가 더해지는 책이다. 내가 애정을 쏟아붓는 이유다.

옮긴이의 말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속한 세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누구나 자기가 익숙한 세계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라고 말하고 있다.‘‘

플랫랜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 우린,
이렇게 길들여진 세상과 내가 길들인 사람들에 익숙하게 살고 있다.
나와 다른 세상의 인식 없는 삶,
‘가능성‘의 여부를 열어 놓지 않은채 내가 속한 세상이 전부라 믿는 착각 속에 빠진 삶이 얼마나 분별력 없는 삶인지 다시 생각하는 책이다.
현실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고정된 틀은 항상 깨지고 부서졌다. 차원을 넘는 기발한 아이디어,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준 용기있는 자들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늘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차원을 넘어선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여진 ‘플랫랜드‘를 접하게 된 시간은, 이 책의 주인공 ‘사각형‘이 여러 차원을 여행하면서 얻게 되는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진정한 나의 영원한 고전이다. 책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예전에 적어 놓은 독서노트를 꺼집어 내고 다시 읽게 된 책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조금더 다양한 관점으로 다가가야겠다는 예전의 다짐은 아직까지도 부족하다.

‘어디든 항상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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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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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거래 만능 사회‘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제 저비용 고효율의 가성비를 따지며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 또한 시장 논리로 설명하려 든다.
물질 재화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시장논리는 도덕적 가치를 묻지 않고 심지어 우리의 선한 행동을 오염시킬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삶과 시민생활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을 어떤 가치로 지배해야 하는지 판단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문제를 사색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하고 있다.

지불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선착순‘의 개념이 무의미 해지고 차례대로 줄 서서 기다리는 평범한 미덕은 사회적 괴리감을 낳고 있다.

경제적 효율성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경제적 행복을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 재화를 분배하는 것‘‘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면 재화는 그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소비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어떤 재화에 기꺼이 가격을 지불하려는 것이 꼭 해당 재화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장가격에는 자발적으로 지불 하려는 마음만큼이나 지불할 수 있는 능력도 반영된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가격을 지불할 마음이 자발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나은 가치 평가 기준이라고 추정할 근거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력과 능력위주에 따른 시장 논리가
강조되면서 자본주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시장논리에 따른 지금의 합리적인 보상제도로 느껴지는 ‘인센티브‘ 제도에서 센델은 사회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재화에 대한 잘못된 가치부여 방식을 심어주는 것에 걱정한다.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단순히 돈으로 지불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으로 발생한 처벌에 대한 책임과 도덕적 가치가 변질되고 심지어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책에 나온 이스라엘의 어린이집의 벌금제도는 늦게 아이를 데리러 오는 부모님에게 벌금제도를 시행한 뒤 오히려 그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발적 비용을 지불하고 누릴 수 있는 서비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사례라 지극히 공감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때 벌금과 요금의 차이에서 또 한번 헷갈린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은 급속한 과학의 발전과 함께 수많은 차별과 불평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시장이 적용되는 대상은 그 경계가 어느새 불분명한 상황에 놓여 있다.
건강, 교육, 공공의 안전, 국가보안, 사법체계, 환경보호,
스포츠와 여가, 임신과 출산, 그 밖의 사회적 재화에서 시장논리의 개입은 현재 당연한 논리로 받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점점 도덕은 사치가 되어 버리고 만다. 양심이라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지만 인위적으로 무시한채 건너뛴다.

우리나라 ‘의료 양극화‘는 사회 경제적, 소득 계층간 사망률도 차이가 난다는 결과가 있다. 그리고 병원도 영리를 취하기 위해 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병원비에서 비급여 비용을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헝도 병원의 비도덕적 운영방식으로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대해 정부는 급격히 한국 의료가 상품화하는 것에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거래 만능 사회‘에서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너무 많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장기매매만 생각해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암묵적으로 강요 받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은 자본주의 시장논리에서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린,
나의 삶이 단순히 내 능력과 노력 여하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구조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그리고 책에서 말한 사회구조가 변화지 않음 자신의 삶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마이클 센델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장논리가 지배된 사회에서 분명 돈으로 ‘살 수 없는것‘이 있다.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지만 불평등한 조건이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를 하지는 않는지 공정성과 형평성에 있어 얼마나 타당한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를 사는 시민의 문제를 금전 문제로 인식하면 시민의 의무 의식을 밀어 낸다고 한다.
공감, 배려, 관용의 도덕적 가치가 시장가치로 바뀌고 공감대와 연대는 사라져 간다. 미덕에 관한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시민의식은 사용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결국은 공공의 선을 향해가는 시민의식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과연 무엇이 중요하고 소중한지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사회현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도덕적 가치를 생각하는 시민으로서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은 세상을 변화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사람‘사는 세상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과 정의가 자리잡고 더불어 잘 사는 사회는 국가가 그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당연함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 살아 갈 줄 아는 깨어있는 시민이 다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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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빨강 머리 앤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나를 감싼다.
그 뭔지 모를 감정들에 대해 표현하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저는 더 많은 단어들을 알고 싶어요.
그럼, 제 기분에 딱 맞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
(P95)

어느새 꽉 차기 시작한 나이지만, 아직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과 내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은 단어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누군가는 가르쳐 주겠지‘하고 기다린 시간은
아무도 나에게 그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찾아나선 여행이 책장을 넘기는거였다.
학창시절을 지나 사회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답은 나를 위한게 아니었다. 그래서 답을 찾는게 숙제였고 고역이었다.
남일 대신하는 억지스런 불편함은 이미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늘 억울함을 담고 살았던 건 아닌지 싶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감정을 털어버리는게 쉬운건 아니다. 나만 부당하고 나만 억울하고 나만 힘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정은 쉽게 비워지지 않는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빨강 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 머리 앤, 우리의 친구~
영원히 귓가에 남아 있을 노래와 함께
앤을 사랑한 모든이의 사랑스런 친구 앤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해지고
살면서 난간에 부딪혀 멍하니 앉았을 때
마침, 나에게 반가운 친구가 찾아 왔다.

백영옥작가의 에세이집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은 ‘밀리 오리지널 에디션‘으로 두 달에 한 번씩 나에게 찾아오는 책 선물이다.
곳곳에 흩어진 책장과 서재는 온,오프라인 상관없이 만들어 놓은지가 오래다. 그래서 예상하지 못한 반가움도 찾아 올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 될 것 같다.

언제나 낙천적인 앤의 밝은 얼굴에는 앤이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앤의 ‘상상의 힘‘은 그녀가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런 앤의 긍정적인 힘은 어른이 된 나를 찾아와 다시 따뜻함을 안겨 준다.
요즘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샘솟게 하는 많은 것들이 나의 지나간 시간을 자꾸만 소환하게 만든다. <작은 아씨들>의 씩씩한 조와 <피너츠> 스누피를 거치고 이제는 <빨강 머리의 앤>이다.

반갑게 찾아온 앤은 어른이 된 지금 나에게 많은 어록을 남기고 있다.
어른이 되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어느 정도 내공이 쌓여가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상처입고 상처를 준다. 그런 어른들에게 앤은 여전히 솔직하다.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고 이 에세이를 쓴 작가 또한 어른이 되어 앤을 다시 만났다. 이제는 앤의 순수하고 낙천적인 밝음이 아픔이란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앤이 이해하지 못했던 어른의 말, 어릴 때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린드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앤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에서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안녕, 나의 빨강머리 앤>
어른이 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실수 많은 어린 앤의 순수함과 솔직함은 아직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나에겐
어린 앤의 모습이 그대로 기억되면 좋으련만 아니다.
린드 아주머니의 무덤덤함을 이해하는 순간, 앤의 사랑스런 말에 마냥 빠져 들수는 없는 현실을 앞에 두고 있다.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 이 생각난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이 불에 옮겨 붙었다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지는 것
쓸쓸히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ㅡ‘연탄 한 장‘ 중에서


살면서 뭔가에 뜨겁게 열정을
쏟아 부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약간 딜레마에
놓여 있다.

갈팡질팡 하던 찰나에 찾아 든 이 책이
뜻하지 않던 반가운 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제는 앤이 아니라,
앤을 알고 있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만난 작가의 말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 어떤 일을 좋아하는 데 필요한 게 꼭 ‘열정‘만은 아니다.
탁월한 능숙함이 그 일을 좋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열정이 폭발적이며 뜨겁다는 건 일종의 편견일 수 있다.
내가 아는 열정은 오히려 들뜨지 않고 차분한 것이다.
열정은 컨디션이 가장 좋지 않을 때도,
도무지 그 일을 할 마음이 나지 않을 때 역시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냉정한 에너지에 가깝다.˝

(삶에 힘을 주는 적당한 온도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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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이 책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2년 전에 주문한 책을 받아 읽고 지인에게 넘겨주고 받지 못한 책이 되버렸다.
이렇게 빌려 주고 받지 못한 책이 많아서 아쉬운 건 없다.
그냥 선물했다 생각하고 넘긴다.

책에 대한 기억을 오늘 sns에서 알려주었다.
내가 지난 날 무엇을 했는지 ..
공포 영화 앞에서 소름돋는 경험을 느끼는 하루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시 <경애의 마음>을 들쳐보는 시간이 생겼다.

경애와 상수의 마음

이 책은 마음이라는 감정을 자극해
‘ 존중‘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학창시절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잃게 된 한 친구에 대한  공통된 기억은 상수와 경애의 마음에 항상 슬픔의 여지를 두었다.
상수와 경애의 마음은 이러한 깊은 아픔을 간직한 채  현실 삶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드의 삶을 산다.
각자의 아픔을 견디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지만, 사회는 늘 그들을 불편해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차분해지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일까 급하지 않는 나의 속도에 경애와 상수의 마음의 속도가 그대로 중첩됐다.

그들이 각자의  아픈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며 살아 왔는지 그리고  서로의 봉인된 마음이 해체되어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 올지 몰라 고심하는 마음들이 읽혔다.
 상수는 경애에게 둘 사이에 놓인 ‘공통된 친구에 대한 기억‘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상수의 그  마음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갔다.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페이드아웃되는 일이 다른 이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들여다 보는 것도 말하는것도 위험할지 모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 조심스런 일이다.
‘위로‘라고 했던 것들이 어찌보면 또 다른 상처를 줄 때가 많다.
하지만 이는 괜한 오지랖이 될지도 모른다.
그동안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고 무심코 한 행동들이 있지는 않았나 반성도 하게 된다.

천천히 누군가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는 시간이 되어주는 시간이였다.

 ˝누군가에 진심으로 마음을 다한다.˝

그 의미를 다시 새겼다.

 스스로가 다시 각자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더이상 아웃사이드가 아닌 자신의 삶에서 점점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경애와 상수를 보며 마음이 놓였다. 
스스로 각자의 마음과 감정에 책임을 지면서 조금씩 나아갔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상처입어 아파하는 마음
버리고 싶어 애써 노력하고 더 힘들어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마음조차 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결국엔 이 모든게 나를 지탱하는 마음이기에 상처입어 부서졌지만 부서진 마음을 다시 다져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애와 상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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